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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윳따니까야

형색 경(S25:2)

작성자해맑은|작성시간21.08.17|조회수245 목록 댓글 2

형색 경(S25:2)

Rūpa-sutta

 

3. “비구들이여,

형색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소리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냄새는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맛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감촉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마노의 대상인] 법은 무상하고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간다.”

 

4. “비구들이여, [226] 이러한 법들에 대해서 이와 같이 믿고

이와 같이 확신을 가지는 자를 일러

믿음을 따르는 자(*1)라고 한다.

 

그는 올바른 정해진 행로에 들어가고,(*2)

참된 사람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넘어섰다.

그가 지옥이나 축생계나 아귀의 영역(*3)에 태어나게 되는

그러한 업을 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예류과를 실현하지 못한 채로 임종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4)

 

5. “비구들이여, 통찰지로 충분히 사색하여(*5)

이러한 법들을 인정하는 자를 일러

법을 따르는 자라 한다.

 

그는 올바른 정해진 행로에 들어가고,

참된 사람의 경지에 들어가고, 범부의 경지를 넘어섰다.

그가 지옥이나 축생계나 아귀의 영역에 태어나게 되는

그러한 업을 짓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예류과를 실현하지 못한 채로 임종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6. “비구들이여,

이러한 법들을 이와 같이 알고 보는 자를 

흐름에 든 자[預流者]라 하나니,

그는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 법을 가졌고

[해탈이] 확실하며 완전한 깨달음으로 나아간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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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경에 나타나는 '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i)'와

다음 문단(§5)에 나타나는 '법을 따르는 자(dhamma-anusāri)'는

예류과(sotāpatti-phala)를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두 부류의 사람이다.

『앙굿따라 니까야』 「사람 경」(A7:14)과 「밧달리 경」(M65/i.477 ~ 479) 등에는 성자를 양면으로 해탈[兩面解脫]한 자,

통찰지로 해탈[慧解脫]한 자, 몸으로 체험한 자, 견해를 얻은 자, 믿음으로 해탈한 자, 법을 따르는 자, 믿음을 따르는 자의

일곱 부류로 나누고 있다.

『인시설론 주석서』에 나타나는 이들에 대한 설명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그가 예류도에 머무는 순간에는 ① '법을 따르는 자(dhammānusāri)'라 하고,

예류과에서부터 아라한도까지 여섯 단계에 머물 때에는 ④ '견해를 얻은 자(diṭṭhippatta)'라 하고,

마지막 아라한과에 이를 때에는 ⑤ '통찰지로 해탈한 자(paññāvimutta)'라 한다.

 

여덟 종류의 증득을 얻은 자가 신심을 중히 여기고 사마타로 명상하면서

어떤 특정한 무색계의 증득을 기초로 하여 위빳사나를 확립하여 도와 과를 얻는 경우가 있다.

그가 예류도에 머무는 순간에는 ⑥ '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i)'라 하고,

예류과에서부터 아라한도까지 여섯 단계에 머물 때에는 ② '몸으로 체험한 자(kāyasakhi)'라 하고,

마지막 아라한과에 이를 때에는 ③ '양면으로 해탈한 자(ubhatobhāgavimutti)'라 한다.

 

여덟 종류의 증득을 얻지 못했거나 혹은 색계 4禪만을 얻은 자가

오직 신심을 중히 여기고 위빳사나로 명상하면서 상카라들만을 명상하거나

혹은 네 가지 색계 禪 가운데 어떤 하나를 명상하여 도와 과를 얻는 경우가 있다.

그가 예류도에 머무는 순간에는 ⑥ '믿음을 따르는 자(saddh-ānusāri)'라 하고,

예류과에서부터 아라한도까지 여섯 단계에 머물 때에는 ⑦ '믿음으로 해탈한 자 (saddhāvimutti)'라 하고,

마지막 아라한과에 이를 때에는 ⑤ '통찰지로 해탈한 자(paññāvimutti)'라 한다.” (Pugh.194~195)

 

여기서 보듯이 '믿음을 따르는 자'와 '법을 따르는 자'는 이 가운데서 제일 낮은 두 단계에 해당한다.

『청정도론』 XXI.74에는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본서 제6권 「사라까니 경」1(S55:24) §§10~11(S55:25 §§9~10)에서도 이 둘은 다른 술어로 나타나지만 서로 구분되고 있다. 그리고 본서 제5권 「간략하게 경」1/2/3(S48:12~14)과 「상세하게 경」1/2/3(S48:15~17)도 참조할 것.

 

본서에 나타나는 이러한 경들을 요약해서 말하면

믿음을 따르는 자와 법을 따르는 자는 기능[根, indriya], 즉 오근 가운데 어떤 기능이 더 강한가에 따라서 구분된다.

전자는 믿음의 기능[信根, saddh-indriya]이 더 강하고

후자는 통찰지의 기능[慧根, paññ-indriya]이 더 강하다.

이들이 예류과를 증득하면 전자는 믿음으로 해탈한 자(saddhā-vimutta)가 되고

후자는 견해를 얻은 자(diṭṭhi-patta)가 된다.

(여기에 대해서는 『맛지마 니까야』 「밧달리 경」 (M65) §11을 참조할 것)

 

한편 『청정도론』 XXI.75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확신(결심, adhimokkha)이 큰 자는 무상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믿음의 기능[信根]을 얻는다.

그는 예류도의 순간에 믿음을 따르는 자가 된다. …

명지(明知)가 큰 자는 무아라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통찰지의 기능[慧根]을 얻는다.

그는 예류도의 순간에 법을 따르는 자가 된다.”(Vis.XXI.75)

아비담마 문헌들과 주석서들에 의하면 출세간도는 오직 한 심찰나 동안만 존재한다. 한 심찰나 다음에는 바로 출세간과를 증득하게 된다. 즉 예류도는 한 심찰나에만 존재하고 바로 다음 심찰나에 예류과를 증득하게 된다는 말이고 일래도, 불환도, 아라한도도 마찬가지이다.(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제4장 §22와 제1장 §27의 해설 참조을 참조할 것.) 그러나 이런 설명은 니까야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여기에 대해서는 Gethin, The Buddhist Path to Awakening, pp. 129~133을 참조할 것.

 

(*2) “'올바른 정해진 행로에 들어가고(okkanto sammatta-niyāmaṃ)'란

성스러운 도(ariya-magga)에 들어간다는 뜻이다.”(SA.ii.346)

'정해진 행로(niyāma)'와 '올바른 정해진 행로(sammatta-niyāma)'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 「왕기사 경」(S8:12) {755}의 주해를 참조할 것.

 

(*3)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육도는 지옥 · 아귀 · 축생 · 아수라 · 인간 · 천상의 순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니까야에서는 모두 지옥 · 축생 · 아귀의 순서로 나타나고 있다.(S25:1 §5, D16 §2.8, M12 §35, A3:75 등등)

한역 『아함경』에서도 대부분 지옥 · 축생 · 아귀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화엄경』이나 대승 『대반열반경』등의 대승경전들에서는

지옥 · 아귀 · 축생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지옥 · 축생 · 아귀로 나타나는 경우보다 훨씬 많다.

이런 영향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지옥 · 아귀 · 축생의 순으로 언급을 하는 듯하다.

 

(*4) “'예류과를 실현하지 못한 채로 임종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이렇게 해서 도를 얻으면 과가 바로 즉시에 따라온다는 것(anantarāyatā)을 설명하는 것이다.

도를 얻게 되면 과를 장애하는 것(antarāya-karaṇa)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이 사람이 예류과(sotāpatti-phala)를 실현하기 위해서 도를 닦고 있으면

겁이 파괴될 시기(uḍḍayhana-velā)가 되었더라도 그 사람이 예류과를 실현하지 못했으면

그 겁은 파괴되지 못한다.'(Pp.13 §20)라고 한 것이다.”(SA.ii.346)

경의 이러한 말씀이 이 주석서의 설명에서도 보듯이

아비담마에서는 도를 얻으면 반드시 그 다음 찰나에 과를 얻게 된다는 이론으로 정착된 것이라 여겨진다.

 

(*5) “'충분히 사색하여(mattaso nijjhānaṃ khamanti)'란

적합하게 관찰하면서 사색한다(pamāṇato olokanaṁ khamanti)는 말이다.”(SA.ii.346)

여기서 충분히로 옮긴 mattaso와 적합하게로 옮긴 pamāṇato는 제한된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특히 pamāṇa는 무량으로 옮기는 appamāṇa의 반대가 되는 단어이다.

(본서 제4권 「소라고둥 불기 경」(S42:8) §17의 주해참조)

그러므로 어느 '정도로만 사색하여'로 옮길 수 있다. 역자는 보디 스님의 'a sufficient degree'라는 번역을 존중하여 이렇게 옮겼다.

“관찰(olokana)이란 사성제의 관통(sacca-abhisamaya)이라 불리는 봄[見, dassana]을 뜻한다.”(SAȚ.ii.245)

사성제의 관통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XXII.92~103을 참조할 것.

관통에 대해서는 본서 제2권 「사꺄무니 고따마 경」 (S12:10) §4의 주해를 참조할 것.

 

(*6) 본경을 통해서 살펴보면 예류자는 분명히 예류자가 되는 길(도)에 있는 자들,

즉 믿음을 따르는 자와 법을 따르는 자와 구분된다.

믿음을 따르는 자는 [제한된 이해를 가지고] 법을 믿고 확신하여(saddahati, adhimuccati) 법을 받아들이는 자요,

법을 따르는 자는 통찰지로 법을 정려하는(nijjhānaṃ khamati) 자이다.

그러나 예류자는 법을 직접 알고 보는(jānāti, passati)자이다.

 

 

각묵스님 옮김 『상윳따니까야』 제3권 548~5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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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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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변희자 | 작성시간 21.08.17 고맙습니다
  • 작성자솔향이 | 작성시간 21.08.18 고맙습니다
    사두ㅡ사두ㅡ사두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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