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 없앰 경(M8)
(Sallekha-sutta)
대림스님 옮김 『맛지마니까야』 제1권 269-288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사왓티에서 제따 숲의 아나타삔디까 원림(급고독원) 머무셨다.
2. 그때 마하쭌다 존자(*1)는 해거름에 [낮 동안의] 홀로 앉음(*2)에서 일어나(*3)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리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마하쭌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3. "세존이시여, 여러 가지 견해들이 세상에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은 자아에 대한 이론과 연관되어 있거나 세상에 대한 이론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제 막 마음에 잡도리(*4)하는 비구에게도
이런 견해들이 제거되고 이런 견해들이 완전히 버려집니까?"
"쭌다여, 참으로 여러 가지 견해들이 세상에 일어난다.
그런 것들은 자아에 대한 주장과 연결되어 있거나 세상에 대한 주장과 연결되어 있다.(*5)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이 어디서 일어나고(*6)
어디서 잠재해 있고 어디서 움직이더라도(*7)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8)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9) 자에게
이러한 견해들이 제거되고 이러한 견해들이 완전히 버려진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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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하쭌다 존자(āyasmā Mahā-Cunda)는 쭌다 존자로도 불리고,
쭌다까 존자로고 불리고, 쭌다사미로도 불린다.
그는 사리뿟따 존자의 동생이었으며, 구족계를 받은 후에도
이 사미라는 호칭이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DA.ⅲ.907)
한때 그는 세존의 시자소임을 맡기도 했다.)(ThagA.ⅱ.124)
사리뿟따 존자에게는 세명의 남동생과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는데, 쭌다 장로는 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들은 모두 출가하여 세존의 제자가 되었다.(DhpA.ⅱ.188)
(*2) ‘홀로 앉음’은 paṭisallāna의 역어이다.
경에서는 주로 부처님이나 비구들이 공양을 마치고
낮 동안 나무 아래나 승원에서 홀로 앉아 지내는 것을 나타낸다.
(*3) “‘홀로 앉음에서 일어남’이란
과의 증득(phala-samāpatti)에서 출정한 것을 말한다.”(MA.ⅰ.181)
(*4) “‘이제 막 마음에 잡도리 한다(ādimeva manasikaroto)’는 것은
처음으로 마음에 잡도리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유신견은 예류도를 통해서만 버릴 수 있다.
하지만 쭌다 장로는 세존께 예류도를 아직 얻지 못한, 위빳사 명상수행을 처음으로 하는 자도
이러한 견해를 버릴 수 있느냐고 질문 드린다. 사실 이 쭌다 장로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지만,
자신들을 과대평가하는 자들(adhimānikā)의 과대망상(adhimāna)을 버리게 하기 위해
본인이 그런 사람인 것처럼 하면서 이렇게 질문을 드렸다.(MA.ⅰ.182)
‘물질을 자아라고 본다.’라는 방법으로 일어난 자아에 대한 이론과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 대한 이론(lokavāda)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라는 방법으로 일어난 세상에 대한 이론과 연관되어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여덟 가지이다. 즉 자아와 세상은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기도 하고 영원하지 않기도 하다.
영원한 것도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자아와 세상은 유한하다. 무한하다.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하다. 유한한 것도 무한한 것도 아니다.”(MA.ⅰ.182)
여기서 ‘자아에 대한 이론(atta-vāda)’은 스무 가지 유신견을 말한다.
(*6) “이러한 견해들은 다섯 가지 무더기[五蘊]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오온과 관련하여 설하셨다.”(MA.ⅰ.182)
(*7) “‘일어나고(uppajjati), 잠재해 있고(anuseti), 움직인다(samudācarati).’는 것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이러한 견해가 이전에 없었는데 지금 생겨나는 것이고,
‘잠재해 있다.’는 것은 반복해서 행하여 굳건해지고 내재해 있는 것이고,
‘움직인다.’는 것은 몸의 문과 말의 문을 통하여 표출되는 것이다.”(MA.ⅰ.182)
(*8) “‘이것은 내 것이다(etaṃ mama).’라고 거머쥐면
백팔번뇌로 분류되는 갈애에 의한 사량 분별(taṇhā-papañca)을 취하게 되고,
‘이것이 나다(esohamasmi).’라고 거머쥐면
아홉 가지로 분류되는 자만에 의한 사량 분별(māna-papañca)을 취하게 되고,
‘이것이 나의 자아다(eso me atta).’라고 거머쥐면
62가지 사견으로 분류되는 사견에 의한 사량 분별(diṭṭhi-papañca)을 취한다.
그러므로 세존께서는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
(netaṃ mama nesohamasmi na meso atta).’라고 말씀하시면서
갈애 등의 세 가지 사량 분별을 내치신다.”(MA.ⅰ.183)
(*9) “‘바른 통찰지로 본다(sammappañāya passato).’는 것은
예류도의 통찰지로 귀결되는(pariyosānā), 위빳사나 통찰지로 본다는 말이다.”(MA.ⅰ.183)
(*10) “‘제거되고 완전히 버려진다(pahānaṃ hoti, paṭinissaggo hoti).’는 것은
둘 모두 근절에 의한 버림(samuccheda-ppahāna)을 두고 한 말이다.”(MA.ⅰ.183)
여덟 가지 증득[팔등지] (*11)
4. "쭌다여, 이런 경우가 생길 것이다.(*12)
여기 어떤 비구가 감각적 욕망들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떨쳐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긴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初禪)을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나는 [오염원들을] 지워 없애면서 머문다.'라고.
쭌다여, 그러나 성자의 율에서는 이런 것을 [오염원들을] 지워 없앰(*13)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의 율에서 '지금‧여기에서의 행복한 머묾'이라고 부른다."(*14)
5. "쭌다여, 이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
여기 어떤 비구가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 고찰[伺]을 가라앉혔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자기 내면의 것이고, 확신이 있으며, 마음의 단일한 상태이고,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 고찰은 없고, 삼매에서 생긴 희열과 행복이 있는
제2선(二禪)을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나는 [오염원들을] 지워 없애면서 머문다.'라고.
쭌다여, 그러나 성자의 율에서는 이런 것을 [오염원들을] 지워 없앰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의 율에서 '지금‧여기에서의 행복한 머묾'이라고 부른다."
6. "쭌다여, 이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
여기 어떤 비구가 희열이 빛바랬기 때문에 평온하게 머물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며[正念‧正知] 몸으로 행복을 경험한다.
[이 禪 때문에] 성자들이 그를 두고 '평온하고 마음챙기며 행복하게 머문다.'고 묘사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나는 [오염원들을] 지워 없애면서 머문다.'라고.
쭌다여, 그러나 성자의 율에서는 이런 것을 [오염원들을] 지워 없앰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의 율에서 '지금‧여기에서의 행복한 머묾'이라고 부른다."
7. "쭌다여, 이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
여기 어떤 비구가 행복도 버리고 괴로움도 버리고,
아울러 그 이전에 이미 기쁨과 슬픔을 소멸하였으므로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으며,
평온으로 인해 마음챙김이 청정한[捨念淸淨]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나는 [오염원들을] 지워 없애면서 머문다.'라고.
쭌다여, 그러나 성자의 율에서는 이런 것을 [오염원들을] 지워 없앰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의 율에서 '지금‧여기에서의 행복한 머묾'이라고 부른다."
8. "쭌다여, 이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
여기 어떤 비구가 물질[色]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paṭigha)의 인식(saññā)을 소멸하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허공'이라고 하면서
공무변처(空無邊處)(*15)를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나는 [오염원들을] 지워 없애면서 머문다.'라고.
쭌다여, 그러나 성자의 율에서는 이런 것을 [오염원들을] 지워 없앰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의 율에서 '지금‧여기에서의 행복한 머묾'이라고 부른다."
9. "쭌다여, 이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
여기 어떤 비구가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무한한 알음알이[識]'라고 하면서
식무변처(識無邊處)(*16)를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나는 [오염원들을] 지워 없애면서 머문다.'라고.
쭌다여, 그러나 성자의 율에서는 이런 것을 [오염원들을] 지워 없앰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의 율에서 '지금‧여기에서의 행복한 머묾'이라고 부른다."
10. "쭌다여, 이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
여기 어떤 비구가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면서
무소유처(無所有處)(*17)를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나는 [오염원들을] 지워 없애면서 머문다.'라고.
쭌다여, 그러나 성자의 율에서는 이런 것을 [오염원들을] 지워 없앰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의 율에서 '지금‧여기에서의 행복한 머묾'이라고 부른다."
11. "쭌다여, 이런 경우가 있을 것이다.
여기 어떤 비구가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하여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18)를 구족하여 머물 것이다.
그러면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나는 [오염원들을] 지워 없애면서 머문다.'라고.
쭌다여, 그러나 성자의 율에서는 이런 것을 [오염원들을] 지워 없앰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것은 성자의 율에서 '지금‧여기에서의 행복한 머묾'이라고 부른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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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증득으로 옮긴 사마빳띠(samāpatti)는 ‘함께 도달함’이며, ‘증득, 얻음, 획득’의 뜻이다.
특히 여덟 가지 증득[팔등지, attha samāpatti, 초선부터 비비상처까지의 삼매]은 본서 여러 군데에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상좌부뿐만 아니라 대승불교에서도 사마빳띠는 구차제멸(九次第滅,anupubba-nirodha)로 표현되는
4선-4처-상수멸의 경지 가운데 하나를 증득한 것을 뜻하는 전문술어다.
그리고 도와 과의 성취도 증득으로 부르고 있다.
(*12) “쭌다 장로의 질문에 세존께서는 수행이 초보 단계인 자는 이런 견해를 버리지 못하고,
오직 예류도로써만이 버릴 수 있다고 대답하신 다음, 이제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자들(adhimānika)의 禪은
오염원들을 지워 없애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이런 경우가 생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과대평가하는 자들이란 이런 도를 얻지 못했지만 얻었다는 인식으로 인해 과대평가를 일으키는 자 들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윤회를 따르는 어리석은 범부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수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스러운 제자들에게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류자들에게는 ‘나는 일래자이다.’라는 과대평가가 일어나지 않는다.
일래자에게도 ‘나는 불환자이다.’라는 과대평가가 일어나지 않고, 불환자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과대평가는 사마타를 하거나 위빳사나를 하여
오염원들을 억압하고서 적절하게 수행을 시작한 자에게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가 사마타로 오염원들을 억압하거나 혹은 위빳사나로 억압하여 오염원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지 못할 때
‘나는 예류자이다., 혹은 일래자이다, 불환자이다, 혹은 아라한이다.’라고 이러한 과대평가가 일어나기 때문이다.”(MA.ⅰ.183~184)
(*13) ‘지워 없앰’은 sallekha를 옮긴 것이다.
아래 주석서와 복주서들을 참조하여 본서에서 ‘[오염원들의] 지워 없앰’이라고 옮기고 있음을 밝힌다.
“‘지워 없어짐(sallekhatā)’이란
모든 오염원들(sabba-kilesa)이 지워 없어진 상태(sallikhita-bhāva)를 말한다.”(DA.ⅲ.904)
(*14) 주석서의 설명을 정리하면 이러하다.
‘나는 [오염원들을] 지워 없애면서 머문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본경에서 언급하고 있는] 스스로 과대평가를 하는 비구의 여덟가지 증득은 [오염원들을] 지워 없앤 것이 아니고
혹은 지워 없애기 위한 도닦음이 아니다. 무슨 이유인가?
그 禪을 위빳사나의 기초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여덟 가지 증득이 「미끼 경」(M25) §§12~19이나 「성스러운 구함 경」(M26) §§34~41에서처럼
불교의 수행법으로 잘 나타나 있기도 하지만, 본경에서 그는 禪을 증득한 뒤 그것에서 출정하여
형성된 것들을 명상하지 않는다. 그의 禪은 오직 마음이 한 끝에 집중됨[心一境性]만을 이루어
지금‧여기에서의 행복한 머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뜻을 보이시면서 세존께서는
‘이것은 성자의 율에서 지워 없앰이라고 부르지 않고 지금‧여기에서의 행복한 머묾'이라고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MA.ⅰ.186) 복주서는 여기에 부연 설명한다.
“거기서 바르게(sammā) 모든(sabbaso) 오염원들(kilesā)을 지워 없애기(likhati) 때문에 지워 없앰(sallekha)이다.
바로 성스러운 도를 말한다. 그것을 이루는 위빳사나는 지워 없앰을 위한 도닦음(sallekha-paṭpadā)이라 한다.”(MAT.ⅰ.288)
(*15) ‘공무변처(空無邊處)’는 ākāsānañcāyatana를 옮긴 것인데,
이 술어는 ākāsā(허공) + ānañca(끝없음) + āyatana(장소, 處)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며
중국에서는 공무변처로 직역하여 정착되었다.
이 공무변처의 정형구에 “‘무한한 허공’이라하는 공무변처를 구족하여 머문다.”라고 나타나듯이
이 경지에서는 ‘무한한 허공(ananto ākāso)’이라는 산냐가 현전하므로 이것을 공무변처라고 부른 것이다.
(*16) ‘식무변처(識無邊處)’는 viññāṇancāyayatana를 옮긴 것인데
이 술어도 viññāṇa(알음알이) + ānañca + āyatana로 분석된다.
본 정형구에서 무한하다고 하는 것은 첫 번째 무색계禪(공무변처)을 뜻한다.
첫 번째 무색계선은 허공이라는 개념(paññatti)을 대상으로 가지기 때문에
허공을 대상으로 가지는 알음알이도 그 무한함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수행자는 공무변처의 알음알이를 그 대상으로 삼아
그것이 무한한 알음알이라는 두 번째 무색계의 본삼매가 일어날 때까지 수행한다.
(*17) ‘무소유처(無所有處)’는 ākiñcaññāyatana를 옮긴 것인데, ākiñcañña + āyatana로 분석된다.
ākiñcañña는 kiñcañña(그 무엇)의 부정어인 akiñcana(아무 것도 아닌)의 곡용형으로서
‘아무 것도 없음’을 나타내는 명사이다.
무소유처는 공무변처의 알음알이가 지금 존재하지 않음(natthi-bhāva)이 그 대상이 된다.
그 알음알이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마음을 잡도리함으로써
무소유처는 첫 번째 무색계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념(natthibhāva-paññatti)’을 대상으로 삼아서 일어나는 것이다.
(*18)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는 nevasaññāṇasaññāyatana를 옮긴 것이다.
이것은 na(아니다) + eva(결코) + saññā(인식) + na(아니다) + asaññā(인식 아님도)로 분석되는데 여기서 보듯이
이 경지는 인식이 극도로 미세해져서 인식 등의 마음부수들이 있는지 없는지 분간하기 어려운 심리상태라 하겠다.
비상비비상처의 증득은 인식을 포함했다고도 제외했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이런 유형의 마음에는 인식(saññā)의 마음부수가 너무 미세하기 때문에
그것이 더 이상 인식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 경지는 인식을 가졌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인식이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고 설명할 수 없는 형태로 남아 있다.
비록 인식 하나만이 언급되었지만 이 마음에 존재하는 다른 모든 마음부수법들도 그런 극히 미세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도 존재한다거나 하지 않는다고 설명할 수 없다.
이 네 번째 무색계 선은 세 번째 무색계 선인 무소유처의 마음을 그 대상으로 가진다.
(*19) 이러한 색계 네 가지 선과 무색계 네 가지 선으로 정리되는
본삼매의 경지로는 오염원들을 말살하거나 다 지워내지 못한다.
이러한 삼매에 들었을 때는 오염원들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이러한 선이나 본삼매의 경지를 다른 경들에서는 ‘일시적 해탈(samaya-vimutti)’이라 부른다.
지워 없앰의 실천
12. "쭌다여, 그러나 그대들은 여기서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20)
① '다른 사람들은 상해(傷害)을 입힐지라도 우리는 상해하지 않으리라.'라고
그대들은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21)
②'다른 사람들은 생명을 죽일지라도 우리는 생명을 죽이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③ '다른 사람들은 주지 않은 것을 가질지라도 우리는 주지 않은 것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그대들은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④ '다른 청정범행을 지키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청정범행을 지키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⑤ '다른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지라도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⑥ '다른 사람들은 중상모략을 할지라도 우리는 중상모략을 하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⑦ '다른 사람들은 욕설을 할지라도 우리는 욕설을 하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⑧ '다른 사람들은 잡담을 할지라도 우리는 잡담을 하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⑨ '다른 사람들은 욕심을 부리더라도 우리는 욕심을 부리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⑩ '다른 사람들은 악의를 품을지라도 우리는 악의를 품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⑪ '다른 사람들은 그릇된 견해(*22)를 지닐지라도 우리는 바른 견해를 지니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⑫ '다른 사람들은 그릇된 사유(*23)를 할지라도 우리는 바른 사유를 하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⑬ '다른 사람들은 그릇된 말을 할지라도 우리는 바른 말을 하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⑭ '다른 사람들은 그릇된 행위를 할지라도 우리는 바른 행위를 하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⑮ '다른 사람들은 그릇된 생계를 영위할지라도 우리는 바른 생계를 영위하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⑯ '다른 사람들은 그릇된 정진을 할지라도 우리는 바른 정진을 하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⑰ '다른 사람들은 그릇된 마음챙김(*24)을 할지라도 우리는 바른 마음챙김을 하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⑱ '다른 사람들은 그릇된 삼매를 가질지라도 우리는 바른 삼매를 가지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⑲ '다른 사람들은 그릇된 지혜(*25)를 가질지라도 우리는 바른 지혜(*26)를 가지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⑳ '다른 사람들은 그릇된 해탈(*27)을 할지라도 우리는 바른 해탈(*28)을 하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㉑ '다른 사람들은 해태와 혼침에 빠질지라도 우리는 해태와 혼침을 떨어버리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㉒ '다른 사람들은 들뜰지라도(산만함) 우리는 들뜨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㉓ '다른 사람들은 의심할지라도 우리는 의심을 건너뛰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㉔ '다른 사람들은 분노할지라도 우리는 분노하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㉕ '다른 사람들은 적의를 품을 지라도 우리는 적의를 품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㉖ '다른 사람들은 모욕할지라도 우리는 모욕하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㉗ '다른 사람들은 얕볼지라도 우리는 얕보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㉘ '다른 사람들은 질투할지라도 우리는 질투하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㉙ '다른 사람들은 인색할지라도 우리는 인색하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㉚ '다른 사람들은 속일지라도 우리는 속이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㉛ '다른 사람들은 사기 칠지라도 우리는 사기 치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㉜ '다른 사람들은 완고할지라도 우리는 완고하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㉝ '다른 사람들은 거만할지라도 우리는 거만하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㉞ '다른 사람들은 훈도하기 어려운 사람이 될지라도 우리는 훈도하기 쉬운 사람이 되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㉟ '다른 사람들은 나쁜 도반을 사귈지라도 우리는 좋은 도반[善友]을 사귀리라.'(*29)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㊱ '다른 사람들은 방일할지라도 우리는 방일하지 않으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㊲ '다른 사람들은 믿음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믿음을 가지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㊳ '다른 사람들은 양심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양심을 가지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㊴ '다른 사람들은 수치심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수치심을 가지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㊵ '다른 사람들은 적게 배우더라도 우리는 많이 배우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㊶ '다른 사람들은 게으르더라도 우리는 열심히 정진하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㊷ '다른 사람들은 마음챙김을 놓아버리더라도 우리는 마음챙김을 확립하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㊸ '다른 사람들은 통찰지가 없더라도 우리는 통찰지를 갖추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㊹ '다른 사람들은 자기 견해를 고수하고 굳게 거머쥐고 그것을 쉽게 놓아버리지 못하더라도(*30)
우리는 우리의 견해를 고수하여 굳게 거머쥐지 않고 그것을 쉽게 놓아버리리라.'라고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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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처럼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비구의 禪은 위빳사나의 토대가 되지 않기 때문에
지워 없앰의 머묾이라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고, 이제는 44가지 형태로 지워 없앰을 보이시면서
이렇게 ‘지워 없앰을 실천해야 한다.’라고 하신다.
그러면 이런 여덟 가지 증득[八等至, aṭṭha samāpatti]도 오염원들을 억압하여 일어난 고요하고 수승한 높은 법들인데
이들은 지워 없앰이라 하지 않고, 왜 여기서 상해하지 않음 등을 지워 없앰이라 하셨는가?
상해하지 않음 등은 출세간법의 토대가 되고(lokuttara-pādakatta),
외도들의 여덟 가지 증득은 오직 윤회의 토대(vaṭṭa-pādaka)가 되기 때문이다.”(MA.ⅰ.186)
여기 나타나는 이 44가지 형태의 지워 없앰 가운데서 어떤 것은 특정한 범주에 속하는데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것은 측정한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이다.
②~⑪은 열 가지 유익하고 해로운 업의 길을 말한다.
⑫~⑱은 팔정도와 팔사도의 길 가운데서 첫 번째인 정견·사견을 제외한 7가지이다. 정견·사견은 ⑪과 중복되었다.
⑲~⑳은 10가지 正道와 邪道 중에서 두 가지이다.
㉑~㉓은 다섯 가지 장애 가운데 마지막 세 가지이다. 처음의 두 가지는 ⑨와 ⑩과 같다.
㉔~㉝은 16가지 오염원들 「옷감의 비유 경」(M7) §3 가운데 10가지이다.
㊲~㊸은 7가지 좋고 나쁜 자질을 말한다.「유학 경」(M53) §§11~17참조
(*21) “여기서 ‘지워 없앰(sallekha)’은 상해(傷害)하지 않음(avihiṃsa)‘을 말한다.
상해하지 않음은 상해를 지워 없애고 끊어버리기 때문에 지워 없앰이라 부른다.
이 방법은 여기 나타나는 다른 곳에도 적용된다.”(MA.ⅰ.187)
(*22) “여기서 ‘그릇된 견해(micchā-diṭṭhika)’는
열 가지 해로운 업의 길 중에서 마지막인 열 번째와 여덟 가지 그릇됨 중에서 처음을
가르침의 순서에 따라 하나로 묶어 보인 것이다.
둘 모두 그릇된 견해의 상태가 동일하기 때문이다.”(MA.ⅰ.188)
(*23) “‘그릇된 사유(micchā-saṅkappa)’란
전도되고 [해탈로] 인도되지 않는 해로운 사유를 말한다.(MA.ⅰ.188)
(*24) “‘그릇된 마음챙김(micchā-sati)’이란 어떤 개별적인 법이 없다.
그것은 다만 과거를 생각하면서 일어난
[수·상·행·식의] 네 가지 해로운 무더기를 두고 한 말이다.(MA.ⅰ.188)
(*25) “여기서 ‘그릇된 지혜(micchā-ñāṇa)’란
나쁜 행위에 대해 [그물이나 올가미 등의] 수단을 궁구함에 의해 죄를 짓고도
’난 잘했어‘라고 반조하는 형태로 일어난 어리석음(moha)을 말한다.”(MA.ⅰ.188)
(*26) “‘바른 지혜(sammāñāṇa)’란 19가지로 분류되는
반조의 지혜(paccavekkhaṇa-ñāṇa)를 바른 지혜라 한다.”(MA.ⅰ.188~189)
19가지 반조의 지혜란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가 각각 다섯 가지로 반조한다.
즉 ① 도를 반조하고 ② 과를 반조하고 ③ 버린 오염원들을 반조하고
④ 남아 있는 오염원들을 반조하고 ⑤ 열반을 반조한다.
마지막 아라한은 남아 있는 오염원들이 없기 때문에 네 가지만 반조하여 모두 19가지 반조의 지혜가 있다.
(*27) “이들은 [색계禪과 무색계禪을 얻은 것만으로는] 윤회에서 해탈하지 못한 상태임에도
‘우리는 해탈했다’라는 인식을 가진 자들(vimutti-saññino)이다.”(MA.ⅰ.189)
(*28) “‘바른 해탈(sammā-vimutti)’이란
과와 함께한 바른 견해 등 여덟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법들을 바른 해탈이라 한다.
그것은 그릇된 해탈을 지워 없애고 머물기 때문에 지워 없앰이라 한다.”(MA.ⅰ.189)
(*29) 주석서는 데와닷따 같은 ‘나쁜 도반(pāpa-mitta)’도 있고,
부처님이나 사리뿟따 존자 같은 ‘좋은 도반(kalyāṇa-mitta)’도 있다고 예를 들고 있다(MA.ⅰ.189)
(*30) “자기에게 일어난 ‘이것만이 오직 진리이다.’라는 견해를 쥐고는
부처님께서 바른 방법을 보여주시고 설명해주셔도
‘자기 견해를 고수하고(sandiṭṭhi-parāmāsi)’, ‘굳게 거머쥐고(ādhāna-gāhi)’,
‘쉽게 놓아버리지 않는(duppaṭinissaggi)’ 자들을 두고 한 말이다.”(MA.ⅰ.190)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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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해맑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5.28 세상의 여러 가지 견해들은
오온에서 일어나는 자아에 대한 이론과 연관되어 있다.
오온을 ... 108가지 갈애로서 이것은 내 것이다....]
9가지 자만으로 이것이 나다...
62가지 사견으로 이것이 나의 자아다... 라고
거머쥐던 사량분별을 수행을 통해서 ... 위빳사나의 통찰지로 볼 때
오온에 대한 자아이론, 20가지 유신견이 수다원의 도로써 완전히 버려진다.
그런데...
수행과정에서 색계사선과 무색계 사선을 성취한 경우
그것을 <오염원들의 지워없앰> 이라고 잘못 알 수 있다.
이 8가지 증득은 <지금 여기에서 행복한 머묾일 뿐> 이다.
수행자는 8가지 증득에 안주하지 말고.... 다음의 지워없앰을 실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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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해맑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5.28 실제로 지워없앰은
① '다른 사람들은 상해(傷害)을 입힐지라도
우리는 상해하지 않으리라.'라고 실천해야 한다.
같은 방법으로 44가지 지워 없앰을 실쳔해야 한다.
열가지 선업을 행함으로써
팔정도의 길로 나감으로써
다섯 가지 장애를 버림으로써
16가지 오염원을 버림으로써
7가지 선한 자질이 키워짐으로써 ...
본경에 언급된 44가지 오염원들의 지워 없앰을 실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