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 한국명상원(논현동) 일시: 2019년 10월 7일(월,오후 2시~5시) 강사: 이종숙
교재 : 사념처 수행(이종숙 지음)
1장 위빠사나 수행의 정의
※ 위빠사나 수행이란?
위빠사나(vi-passanā)는 지금 마음이 경험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통찰지혜 수행이다.
빨리(pāli)어 위빠사나의 위(vi)는 ‘다르게’ ‘특별하게’ ‘분리하여’라는 의미이고,
빨리(pāli)어 빠사나(passanā)는 ‘본다’는 의미다.
무엇을 ‘다르게’ ‘특별하게’ ‘분리하여’ 보는가?
지금 여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르게’ ‘특별하게’ ‘분리하여’본다.
어떻게 ‘다르게’ ‘특별하게’ ‘분리하여’ 보는가?
그동안 이 몸과 마음을 너무 당연하게 나와 동일시하면서 보던 것을 이제는 ‘나’라는 것을 빼고 오직 조건에 의해 연기된 법이라고 본다. 이렇게 자신을 연기된 법으로 볼 때[이치에 맞는 숙고] 이 몸은 나도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고 나의 자아도 아니라고 있는 그대로 꿰뚫어보는 앎(智)이 생긴다. 이런 앎이 위빠사나 수행의 통찰지혜이고 명(明, vijjā)이다.
명(明)의 일부 경(A2:3:10) : [대림스님 옮김. 앙굿따라니까야 1권 211-212쪽]
1.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은 명(明)의 일부이다.
무엇이 둘인가? 사마타와 위빳사나이다.
비구들이여, 사마타를 닦으면 어떤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마음이 개발된다.
마음이 개발되면 어떤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욕망이 제거된다.
비구들이여, 위빳사나를 닦으면 어떤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통찰지가 개발된다.
통찰지가 개발되면 어떤 이로움을 경험하는가? 무명이 제거된다."
2. "탐욕에 오염된 마음은 해탈하지 못하고,
무명에 오염된 통찰지는 개발되지 못한다.
비구들이여, 탐욕이 제거되어 마음의 해탈[心解脫]이 있고,
무명이 제거되어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이 있다."
※ 불교수행의 목적은 앎(知慧, paññā, 明)을 얻기 위한 것
붓다의 출가목적은 모두가 겪는 생사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는 것이었다. 붓다는 그 당시의 수행방법을 통해 가장 높은 단계인 무색계정(無色界定)을 얻었지만 그것으로 생사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이어서 6년간 고행을 하고 그 고행의 무익함을 알고는 버린다. 여기서 붓다는 감각적 쾌락과 극단적인 고행이라는 양극단을 벗어난 새로운 길인 중도(中道)를 발견한다. 거기서 사성제를 통찰, 明과 해탈을 얻고, 일체를 아는 者, 붓다가 된다.
붓다가 「초전법륜경」에서 제시한 길은 중도수행이다. 중도는 팔정도다. 정견(正見)으로 시작하여 법을 있는 그대로 보는 앎을 계발하는 방도다. 정견(正見)이 지금 경험하는 법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이라면 사견(邪見)은 법을 내 입장에서 분별하면서 보고 싶은 대로 보는 눈이다.
이것은 마음에 앎이 있는가, 아니면 무명이 있는가에 따라 법을 보는 눈이 정견이거나 사견으로 나뉜다. 정견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팔정도를 걸어서 괴로움을 소멸하지만, 사견이 생기면 팔사도를 걷어서 계속 생사윤회를 반복한다.
결국 불교수행은 마음이 지금 경험하는 법을 모두 조건에 의해 연기된 법(法)으로 보는 앎을 생기게 해서 괴로움의 근본원인인 무명과 갈애를 소멸하는 것이다. 수행자는 이러한 앎을 얻기 위해서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인 신·수·심·법에 알아차림(sati)을 확립하는 사념처 수행을 한다.
마음챙김(sati)의 확립 경(M10) [대림스님 옮김 『맛지마니까야』 제1권324-362쪽]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꾸루의 깜맛사담마라는 꾸루들의 성읍에 머물고 계셨다.
거기서 세존께서는 "비구들이여."라고 비구들을 부르셨다.
"세존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께 응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2. "비구들이여, 이 길은 중생들을 청정하게 하고, 근심과 탄식을 다 건너게 하고,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옳은 방법을 얻게 하고, 열반을 실현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니 그것은 곧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이다.
3. "무엇이 네 가지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身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며[受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며[心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法隨觀] 머문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고 근면하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챙기면서 머문다.
※ 수행의 대상은 항상 자신의 몸(身, kaya)
수행은 항상 자신의 몸에 주의를 집중하여 ‘나’라고 알고 있는 이 몸을 있는 그대로 알기 위한 작업이다.
그러기 위해 먼저 몸(身, kāya)에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들을 따라가며 보는 신수관[身隨觀]을 한다.
그러다가 몸에서 일어나는 법들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느낌이 일어나면 그 느낌에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수수관[受隨觀]을 한다.
그런 다음 마음이 대상을 만나면서 자동으로 일어나는 탐진치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심수관[心隨觀]을 한다.
이런 과정에서 저절로 쌓인 지혜가 지금 마음이 경험하는 것들을 단지 연기된 ‘법(法)’으로 보고, 그 법들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통찰하는 법수관[法隨觀]을 한다. 여기서 사성제를 통찰하면 생사(生死)의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 수행의 종류
수행에는 좌선, 경행, 일상의 알아차림이 있다.
좌선은 몸이 움직이지 않고 정지된 상태일 때 몸에서 일어나는 법들에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이고,
경행은 몸이 움직이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법들에 알아차림을 확립한다.
일상의 알아차림은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저녁에 잠들 때까지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에 주의를 집중하여 지금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법에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그 알아차림을 이어가는 수행이다.
정리하면 우리는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몸에 있는 여섯 감각기관을 통해서 매순간 어떤 대상을 만난다. 이때 그 대상이 주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작의(作意)가 일어난다. 지금 여기서 그것을 이치에 맞는 숙고[如理作意]를 하는지, 내 입장에서만 보는 非여리작의를 하는지에 따라 정견으로 대상을 보는가. 사견으로 보는 가로 갈라진다.
수행자가 현재 경험하는 대상을 단지 조건에 의해 경험하는 법(法, dhamma)이라고 여리작의를 하면 정견이 일어나서 괴로움을 소멸하는 팔정도를 걷지만, 현재의 대상을 ‘내 입장’에서 보는 非여리작의를 하면 사견이 일어나면 즉시 나를 위한 욕망 때문에 그 길이 괴로움인 줄도 모르고 팔사도를 걷는다.
결국 수행은 지금 경험하는 대상을 이치에 맞게 숙고하면서 그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지켜보는 알아차림의 확립이 핵심이다. 수행자가 이 두 가지를 갖출 때 마음에는 무명 대신 ‘앎과 봄[智見]이 생긴다. 이런 앎과 봄은 오온을 법으로 위빠사나하고 오온에서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한다. 이런 통찰지로 사성제를 깨달아서 열반을 증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