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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 명상의 세계

< 사념처 명상의 세계 > 제 5장 관념(觀念)과 실재(實在) ; 3. 관념이란 무엇인가

작성자한국 명상원|작성시간19.01.23|조회수450 목록 댓글 2

사념처 명상의 세계

 

< 사념처 명상의 세계는 그간 발표한 대념처경 주석서 1권 2권 3권과, 12연기 1권 2권의 방대한 내용을 새롭게 간추린 글입니다. 대학교 교재로 사용하기 위해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한 내용도 있습니다. 수행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자 연재를 합니다. 감사합니다.  묘원 합장 >




3. 관념이란 무엇인가




 우리말로 관념이라고 할 때는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말합니다. 또는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에 잠기는 것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관념은 이런 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관념의 정확한 뜻을 알기 위해서는 빨리어의 어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관념을 빨리어로 빤냐띠(paññati)라고 합니다. 빤냐띠라는 뜻은 표명(表明), 서술(敍述), 가설(假說), 명칭(名稱), 개념(槪念), 가정(假定), 시설(施設) 등을 의미합니다. 표명(表明)은 드러내서 명백하게 밝힌다는 뜻입니다. 서술(敍述)은 차례를 쫓아 말한다는 뜻입니다. 가설(假說)이란 실재하지 않는 것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명칭(名稱)은 사물을 부르는 호칭이나 이름을 말합니다. 개념(槪念)은 여러 관념 속에서 공통요소를 추상하여 종합한 하나의 생각입니다. 이 말을 콘셉트(concept)라고도 합니다. 가정(假定)은 임시로 정한다는 말입니다. 가설은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방편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이상의 뜻을 종합해 보면 관념이란 것은 실재가 아닌 것으로 단지 말하기 위한 것이나 혹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라한은 명칭이라서 관념입니다. 아라한은 부르기 위한 명칭일 뿐입니다. 아라한의 실재는 욕망과 집착이 끊어진 마음입니다. 명칭은 부르기 위한 호칭이므로 내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된 자는 없고 아라한의 지혜는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내가 아라한이 되었다’라고 말하면 관념이고 그냥 아라한의 정신적 지혜만 있다고 말하면 실재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제자들에게 스스로 도과를 얻은 것을 밝히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관념이 아닌 실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관념은 일상적인 관용어로 표현되는 개념입니다. 무엇을 부르기 위한 명칭이나 습관적으로 말하는 것의 일반적 개념일 뿐입니다. 관념은 사람, 나, 너, 남 자, 여자, 동물, 아름다움과 추함, 크고 작음 등으로 사물을 부를 때 그것을 지칭하는 명칭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명칭을 통하여 존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존재라는 것도 관념입니다. 그러나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오래되면 하나의 사실처럼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나’라는 것이나 ‘너’라는 명칭입니다. ‘나’는 자신을 부르기 위한 명칭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의 실재는 정신과 물질의 결합물입니다. 이것은 다섯 가지 무더기인 오온(五蘊)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라고 하거나 ‘너’라고 합니다. 이때 나와 너라는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오직 부르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하는 명칭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견해로 인해서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개아(個我), 자아(自我)가 있다고 확신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이 관념으로 인해서 생기는 착각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알기 전에는 내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깨달은 자에 의해서 이러한 진실이 밝혀지고 비로소 무아를 알아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는 해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장미꽃은 부르기 위한 명칭이라서 관념입니다. 장미꽃의 실재는 부드러운 꽃잎과 향기입니다. 만약 장미꽃을 가시꽃이라고 새로 명칭을 붙여도 가시꽃은 여전히 부드러운 꽃잎과 향기를 그대로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명칭이 갖는 한계를 알아 실재를 파악해야 합니다. 이런 명칭이 진실로 통용되면 진실은 숨어버리고 잘못된 견해만 남습니다. 자동차는 많은 부속이 조립되어서 만들어집니다. 이때 자동차는 이런 부속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것을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관념입니다. 그러므로 핸들이 자동차가 아니고 엔진이 자동차가 아니고 바퀴가 자동차가 아닙니다. 핸들은 핸들이고 엔진은 엔진입니다. 그러므로 자동차는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관념이라서 실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물질적인 부속물들의 조합입니다.


 인간도 부르기 위한 명칭으로 관념입니다. 인간의 실재는 정신과 물질의 조합물입니다. 정신은 여러 가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몸은 무수한 장기들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결합이 인간이라고 부르는 존재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도 관념이고 여기서 이것을 소유하는 자아도 없으므로 나라고 하는 것도 관념입니다. 이처럼 관념에 실재가 없으면 관념이 지배하게 되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어리석음이라서 우리의 눈을 가리어 사물을 왜곡합니다. 이것의 피해는 온전하게 자신이 당해야 합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본다면 없는 것을 있다고 알게 되어 세상을 살면서 많은 괴로움을 겪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관념이 부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관념은 여전히 관념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나’를 나라고 부르지 않고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우리는 여전히 관념을 사용하면서 실재하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알면 됩니다. 그래서 관념은 관념으로 알고, 실재는 실재로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 다. 관념을 속제(俗諦)라고 하며 세속적 진리 또는 관념적 진리라고 말합니다. 관념이 없는 실재는 없고, 세간이 없는 출세간은 없습니다.


 관념은 사마타 수행의 대상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대상의 실재하는 성품을 알기 위해서 하는 수행이 아니고 고요함을 얻기 위해서 하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하나의 관념을 붙잡고 근본집중을 해서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합니다. 사마타 수행은 통찰지혜 수행이 아니라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정 기간 사마타 수행을 한 뒤에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궁극의 열반에 이릅니다. 사마타 수행의 덕목은 자비입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의 덕목은 지혜 입니다. 자비는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측면이 있어 수행자에게 필요합니다. 지혜는 지적이고 이성적인 측면이 있어 수행자에게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조화를 이룰 때 바른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정서만 강조되어서는 지적이지 못해 선한 바보가 됩니다. 지적인 것만 강조되면 정서가 없어 냉혹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관념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관념이라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 관념이라고 말할 때는 실재를 말하기 위해서 관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관념은 실재를 향해서 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관념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관념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재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관념은 관념으로서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관념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념에 의해 실재가 숨어버립니다.
 

 수행을 할 때 처음부터 대상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경우에는 관념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럴 경우 처음에는 관념의 중앙에 강하게 고리를 걸어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야 합니다. 이렇게 붙잡기 쉬운 관념을 대상으로 붙잡고 열심히 알아차리면 차츰 실재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이 말은 처음에는 사마타 수행을 해서 대상을 강력하게 붙잡은 뒤에 열심히 알아차리면 나중에 차츰 위빠사나 수행의 실재가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관념을 대상으로 하는 사마타 수행과 실재를 대상으로 하는 위빠사나 수행을 병행할 경우에는 먼저 관념을 알아차리고 나서 차츰 드러나는 실재를 알아차리는 방법도 하나의 수행 과정입니다. 관념이 강하면 실재가 약해지고 실재가 강하면 관념이 약해집니다. 그래서 우선은 어떤 방법이 되었건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알아차리는 힘이 강해지면 지혜를 얻는 쪽으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은 다양한 방법이 있으므로 반드시 스승의 지도를 받는 것이 좋습니다.

 수행이 어려운 것은 법을 따르지 않고 먼저 나를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수행을 하면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수행은 내가 알고 있는 정신세계가 아닌 새로운 정신세계를 계발하는 것이라서 관념적인 나를 내세우면 안 됩니다. 법을 보고자 할 때는 나의 기준이 아닌 법의 기준에 따라야 합니다. 자아를 가지고 있으면 수행을 시작하기도 어렵고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계속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승들은 수행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판단은 내가 한다. 너는 알아차리기만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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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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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종범 | 작성시간 19.01.25 귀한법문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 _()_
  • 작성자선문 | 작성시간 19.02.24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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