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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한국

영적 각성의 세계관적 이해와 제자도, 이태웅

작성자이상갑|작성시간14.12.07|조회수386 목록 댓글 0

영적 각성의 세계관적 이해와 제자도

 

 

서론

 

오래 전에 한국에 왔던 한 서양선교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생겼다. 그는 한 때 부흥을 맞본 사람이라고 전해졌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매우 딱딱하고, 관료주의적이고 은혜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 후 오랫동안 “어떻게 한 때 부흥을 경험한 사람이 이처럼 기본적인 인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살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나의 뇌리에 맴돌았다.

 

반면에 영적 각성을 경험한 사람 중에 지속적으로 그 영향이 나타나는 경우도 꽤 많이 봐 왔다. 예를 들어서 내가 존경하는 교수 중에 한 분인 로버트 콜만 박사가 있다. 이분은 1970년 초 에스베리 대학교의 부흥의 중심부에 계셨다. 그래서 그는 에스베리 대학의 부흥에 관한 책도 저술한 바 있다. 나는 1976년에 그를 처음 만났고, 90년대에 들어서 그를 가까이 볼 수가 있었고 지금까지도 계속 가까운 사이가 되어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의 삶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청렴결백으로 점철된다. 나는 그의 집에서 하루 밤을 지낸 적이 있다. 그는 특별한 행동을 한 것도 아닌데 그의 가정과 그의 인품에서 느껴지는 하나님의 임재 때문에 내가 감동되었던 경험을 아직도 기억한다.

 

또 한 분은 지금은 한국에 계시지 않지만 그 당시 내가 만났을 때 구세군 사관학교 교장으로 계시던 라이도 박사이다. 그는 후에 구세군 세계 사령관이 되셨다. 이 분은 내가 알기로는 에스베리 대학교에서 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흥이 있은 후에 에스베리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고 따라서 부흥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접촉을 한 분이다. 그가 한국에 있을 때 나는 그 분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분의 인격과 신앙을 지켜보고 많은 것을 본받은 바 있다. 명석한 두뇌와 뜨거운 가슴이 그 분을 가장 잘 설명해주었다. 그가 말씀을 증거할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었고,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도전들이 있었다. 왜 이렇게 다른가? 부흥을 맛보았지만 그 효력이 계속 유지되지 않고 훨훨 타던 장작불이 꺼진 것처럼 된 경우가 있다. 반면에, 최소한도 외형적인 부흥의 불길은 꺼진 것처럼 보이지만 내적인 심령은 계속 불타고 있고, 그 결과로 열정과 인격의 변화와 공의로운 행위가 드러나는 경우가 있다. 이 두 경우에 대하여 우리는 세계관의 차원에서 설명을 해볼 필요가 있겠다. 이를 위하여 영적 각성과 부흥이 세계관에 대하여 최소한의 이해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다만 사용자 위주의 정의(working definition)만을 내리기로 하겠다.

 


영적 각성과 세계관의 의의와 상호연관성

 

고전적인 의미에서 부흥이나 영적 각성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말미암아 신비롭고도 강력한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일어나는 것이 특징이다. 성경 가운데서는 오순절 부흥사건이 바로 그러한 것이었다. 그 후에 영국에 있었던 복음주의 대각성운동, 미국에서 일어났던 제 1차에서 3차까지의 대각성운동은 비슷한 양상을 가지고 있었다. 1907년 우리나라에 일어났던 부흥도 역시 같은 맥락의 현상들이 일어났다. 이 경우 부흥과 대각성은 상호 교환하여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영적 각성이 하나의 운동으로 전개되면서부터 원래 고전적인 의미에서 차츰 변화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무디의 부흥운동이 고전적인 부흥/영적 각성과 현대 부흥운동의 경계선을 이루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보다 대표적인 현대 부흥운동은 빌리 그래함의 전도대회를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부흥운동들이 후자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조금 더 인간적인 준비를 통해서 부흥이나 영적 각성이 오도록 노력하는 쪽으로 치우쳤다. 여기서는 편의상 이런 모든 것을 구분하지 않고 부흥/영적 각성의 의미를 넓게 사용하는 것으로 하겠다.

 

반면에 세계관은 무엇인가? 세계관은 문화인류학적으로 봤을 때 한 문화가 그 문화로서 독특성을 나타내는데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요소이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한다면 우리가 아주 중요한 것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세계관이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신에 대해서, 창조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가정에 대해서, 영적 세계 전반적인 것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세계관이 결정된다. 문화를 한 집단이 생활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지도로 비유를 든다면, 세계관은 그 지도상에 나타난 중요한 도시들, 특히 수도가 어디에 있는가 등으로 비유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성서적인 세계관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관들이 성서적으로 변화되어서 그것이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서 행동으로까지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면 영적 각성과 세계관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우리가 원하는 바는 영적 각성이 일어났을 때 우리의 세계관도 성서적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부흥운동과 부흥에 대한 역사를 살펴봤을 때, 그리고 성서적인 근거들을 찾아봤을 때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한국 교회의 과거 120년사를 봤을 때 그것은 너무 확연하게 나타난다. 교회마다 예배를 통해서 엄청난 경험들은 하였지만 사회가 그들에 의해서 변하지 않았고, 그들이 삶에서는 예배드릴 때와 같이 행동하지 않는 것이 바로 좋은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가설을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영적 각성은 자동적으로 세계관의 변화까지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한번 부흥을 맛본 사람이 영구적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완전한 통계는 보지 못했지만 앞에서 말한 근거를 통해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영적 각성을 했다 할지라도 세계관의 변화를 위해서 계속적인 노력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결국은 기념할만한 경험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가설이 맞는다면 우리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도 적으나마 영적인 각성을 갖다 줄 수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예배 자체가 자동적으로 각 교인들의 세계관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다. 그것을 반대로 말한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아무리 많은 영적인 각성을 가져다 준다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세계관이 변화될 수 없기 때문에 거기에 부수적인 조치들을 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한국교회가 이와 같은 사실들을 인식하고 과거 120년 동안 영적 각성을 경험하는 그 자체로 그치지 않고 이를 세계관의 변화로까지 연결 지었다면 한국 사회와 교계는 지금과 훨씬 다른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더 많은 한국 교인들이 정계와 학계와 전문 업종에 들어가서 누룩의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통해서 이 사회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건전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라면 대통령이 된 다음에도 자신의 세계관을 따라서 정직하게 살며 공의를 이루었을 것이다.

 

 

영적 각성의 세계관 차원의 변화를 초래하기 위한 시도

 

영적 각성은 세계관을 변화시키기 위한 필요불가분의 요소이다.

영적 각성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다. 신약 가운데 나오는 첫 번째 괄목할만한 영적 각성은 오순절의 예를 들 수 있다. 그것은 교회 탄생이며, 동시에 영적 각성의 표본이 되었다. 오순절날 성령님이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에게 임했을 때 거기에는 신비롭고도 기적적이며 폭발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아마 현대에 일어난 그 어떤 부흥운동도 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후 사도들과 제자들은 변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 똑같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의심도 없었고, 육신적인 삶을 영위했다는 기록도 없다. 이들은 일관성 있게 나머지 생애를 한 푯대를 향해서 줄 곧 달려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부분까지 우리가 언급한다면 이들 대부분은 순교로 생애를 끝냈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이 생활화된 사람들이었다. 신학 책은 없었지만 그 사람 자체가 신학이었다는 것이다. 후에 우리는 신학을 책에만 기록하게 됐고,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일부 학자들 가운데 신학은 책에만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 속에 기록되어 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할 정도이다. 이런 사람들 속에서 신학의 근원이 되는 신약전서가 나왔다. 오순절 사건은 사람이 조직하고 계획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전혀 힌트를 주시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성경에 보면 오늘날 이와 같은 엄청난 부흥이 있을 것이라고 이미 예언한바 있다. 젊은 사람과 늙은 사람, 남녀노소가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새로운 말들을 하며 시와 찬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위에 엄청난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씀한바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성서적 세계관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영적 각성이 필요하다. 단순히 교육이나 훈련만 가지고서는 이를 달성할 수 없다. 일례로써 우리가 매주일 드리는 예배는 우리가 영적으로 각성할 수 있도록 돕는 아주 흔하고도 좋은 예이다. 이로써 좋은 예배가 있는 교회일수록 그 구성원이 성서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예배가 형식적으로 흘러가 버리거나 때우는 식으로 된다면 영적 각성을 전혀 주지 못하게 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럴 경우 그 구성원의 세계관이 성서적으로 변화되는 것도 물 건너 간 것으로 간주해야 될 것이다. 우리는 영적 각성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의 구성원들이 성서적인 세계관을 갖게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경계해야할 것은 영적 각성이 전혀 없이 순전히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우리의 세계관을 변화시키려는 시도이다.

 

영적 각성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쪽으로 더 기울여 졌다면 세계관을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 편에서의 순종과 연마에 더 치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영적 각성은 세계관의 차원에서 영향을 주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영적 각성의 특성을 보면 한결 같이 진공가운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상당한 준비 상태와 또 이를 존속하기 위한 후속조치(follow up)들이 있었다. 가령 오순절의 예를 들어보자. 오순절 전 예수께서는 3년에 걸쳐서 사도들을 위해 제자훈련을 시키셨다. 그리고 그 사도들은 또 소수의 정예로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당시 사회 전체에 영향을 나타내었다. 즉 그것은 하나의 소그룹운동이자 더 큰 운동의 일환으로 나타났다. 마태복음 4장 18절에서 22절을 보면 주님께서 소수의 무리를 불러서 심도 깊은 제자훈련을 시작한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4장 23절 이하를 보았을 때 이들과 사회 사이에 명확한 경계선을 긋지 않고 그 당시 사회에 영향을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대중을 위한 복음전파와 치유와 귀신을 좇아내는 일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렇게 3년간을 가르친 후에 주님께서는 섭리적으로 오순절을 무리에게 허락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영적 각성이 각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배운 진리들이 살아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누가는 예수님의 지상사역 중 지속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신 일에 대해서 사도행전 1장 1~2절에서 디오빌로에게 편지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암시를 하였다.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그것도 부족하다 생각하셔서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그 다음에 비로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미 사도들이 제자훈련을 받은바 있고 이것이 성령의 각성운동으로 말미암아 활성화 된 것을 볼 수가 있다. 심지어는 지상명령도 성령이 임하신 후에 활성화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패턴을 잘 아는 사도들은 일단 오순절 이후 말씀 선포를 통해서 3천명이 구원을 받았을 때 즉시로 주님이 하신 패턴에 따라서 또 다른 제자들을 가르치는 역사를 시작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내용은 사도행전 2장 42절에 잘 나타나 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더 나아가서 이들이 공동체로서 서로의 재산을 통용하며 모이기를 힘썼으며 예배드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각성운동에는 반드시 준비작업과 정비작업(follow up)을 통하여 말씀을 통한 제자훈련이 있어야 그것이 세계관의 변화까지 연결된다고 본다. 사도행전 2장 42절~47절에 나타난 것들을 원리화 시켜본다면 영적 각성이 있은 후에도 세계관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네 가지는 계속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계속 배우는 것, 서로 생애를 쏟아주는 교제를 하는 것, 마음을 합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을 찬미하는 예배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영적 각성을 경험한 사람들 중에서 세계관까지 변화된 사람들이 나중에 핍박이 임했을 때 흩어져서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안디옥까지 가서 안디옥 교회를 개척할 수가 있었다.

 

바울의 경우를 예를 들어보자. 바울은 구약을 깊이 아는 사람이었다. 이미 구약에서 가르치고 있는 도덕성과 사회적인 책임에 대해서 충분히 숙지한 사람이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핵심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영적 각성이 있었을 때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바울 사도가 거기서 끝났다면 그는 아마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바울처럼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일차적으로 3년에 걸쳐서 아라비아에서 충분한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그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을 것 같은데 그가 극적으로 경험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계시되셨는지를 그 기간을 통해서 충분히 소화했을 것이다. 그런 바울 사도를 통해서 우리가 아는 바울 서신들이 기록되었다. 바울의 서신서들을 보면 대개 두 가지 패턴으로 표현된다. 초반부는 교리적인 부분이다. 이 교리적인 부분이 문자로만 있으면 딱딱한 것이지만 거기에 성령이 함께 했을 때 그것은 곧 영적 각성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에베소서 1장에서 3장까지가 교리적인 부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등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4장에서 6장까지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내용 중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도둑질하는 자는 더 이상 도둑질하지 말고 남에게 줄 것이 있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라. 서로 섬기는 것과 거짓말을 하지 말 것과 더러운 욕을 입 밖에 내지도 말라. 그리고 구제하라 등의 아주 실제적인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처음 신앙을 가졌을 때 사실상 뒷부분은 너무 지루해서 앞부분만 읽었다. 내 관심사는 주로 영적 각성 부분에 그 초점이 맞추어 있어서 뒷부분은 주로 생략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발견한 나의 모습은 아주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뒷부분에 해당되는 실천적인 부분이 없었을 때 나는 신앙이 빈약하고 머리만 커진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세계관이 변화되지 않은 가운데 어떤 한 면만 커졌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참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야고보 선생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이 시점에서 평가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야고보 선생은 이러한 것들을 갈파하셨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야고보서 2:22­24)

 

우리의 세계관은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강력한 의식과 뒤따르는 공의로운 행동들이 우리의 삶 속에 계속 이어질 때 성서적으로 변하게 된다. 영적 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뒷부분이 간과되기가 쉽다. 하지만 성서의 예와 역사적인 영적 각성을 예로 본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과거 한국 교회가 영적으로 각성되어졌을 때 그것이 행함으로 나타나 사회적인 책임을 지는 것과 사회적인 참여가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서적인 세계관을 가진 교회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를 교도할 수 있고, 훈계할 수 있는 자존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잃어버린 한국 교회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가운데 한국 정치계나 경제계나 사회가 흘러가고 있다. 천만이 넘는 성도가 있다는 이 교회가 이처럼 무능해지고 무기력해졌다는 것은 실로 경악을 금치 못할 일이다. 10%만 헌신되어도 나머지 90%의 사회를 움직일 수 있다는 이론들이 있는 것에 비추어 봤을 때 한국교회가 처해 있는 현 상태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라 하겠다.

 

 

영적 각성과 세계관의 변화와 제자도

 

지금까지 영적 각성과 세계관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했다. 이제 제자도를 추가시켜서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보면 영적 각성은 제자도와는 관계가 먼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제자도의 진정한 의미는 영적 각성이 있는 가운데 훈련을 통하여 세계관이 변화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헤셀 그레이브 같은 선교학자는 세계관의 변화는 성경의 큰 그림을 아는 것을 통해 이루어지기 쉽다고 말한다(Trinity 신학교 강의 시간에 한 발언임). 성경의 한 부분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각 부분들, 그 중에서도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교회, 인간 등 성경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소재에 대하여 배우는 것은 우리의 세계관이 성서적으로 변화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따라서 일부 제자훈련운동 진영에서는 성경공부를 매우 충실히 하고, 이를 실천하도록 강도 깊은 훈련을 한다. 소위 성서적 세계관을 중시하는 교회나 사회적인 책임을 강조하는 교회 중에도 훈련이나 교육을 통하여 제자도를 성취해 보자는 예들이 있다.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세계관의 변화는 단순히 교육이나 훈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진정한 제자도는 영적 각성이 없이는 자칫 잘못하면 세뇌교육처럼 되어 지적으로는 다 알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냉랭할 수가 있다. 이런 사람을 우리가 성서적인 세계관을 가졌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부 세계관운동을 하는 분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이 바로 이런 것일 수가 있다. 오히려 영적인 각성을 통해 훈련한 내용이 세계관 차원까지 영향을 주어 성령의 지배를 받는 중 공의로운 삶까지 이어지는 것이 참 제자도라 하겠다. 오순절은 예수님의 제자훈련과 영적 각성을 그 당시 제자들의 생애 가운데 통합한 가장 좋은 예라 하겠다. 오순절은 이미 임했다. 그러나 오순절날 강력하게 교회 중에 나타나신 성령의 역사는 계속된다. 다시 말해서 교회 가운데 영적 각성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 원래 하나님이 갖고 계셨던 뜻이다. 우리는 참 예배를 통하여 이런 영적 각성을 거듭 거듭 경험해야 된다. 그런 구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제자도를 통하여 우리의 세계관이 성서적으로 변화된다. 이런 사람들은 성서가 가르치는바 사회와 국가와 세계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

 


결론

 

우리는 이제 다시 한 번 영적 각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준비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그 영적 각성이 한 번 불이 붙었다가 꺼지는 불꽃놀이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참된 제자도를 통해 우리의 세계관이 바뀌는 차원까지 가지 않고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18세기 영국 사회를 변화시켰던 웨슬리안 부흥운동처럼 또 신대륙에 국가를 건설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주었던 조나단 에드워드 시대의 각성운동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는데 일익을 감당하게 될 것이다. 아직도 한국 교회에게는 기회가 있다. 지금처럼 어려운 때가 바로 그 기회이다. 이때를 한국교회는 놓치지 말아야 될 것이다. 




출처: 영적 각성의 세계관적 이해와 제자도, 이태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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