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부:부활은 실제다. 요20:16~18절, 이상갑목사
4부: 예수님, 저 너무 힘들어요. 요한복음20:11~18절, 이상갑목사
예수님의의 부활을 기뻐 찬양합니다. (사진, 설명시 밑줄 친 부분은 그대로 띄워 두세요.)
어제는 부활절 맞이 대청소를 100분 넘게 동참해 주셔서 잘 마쳤습니다. 다양한 모습으로 함께 해 주시고 섬겨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오후예배시 부활절 칸타타가 있습니다. 부활절 꽃나눔을 합니다. 이웃에게 선물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한 것은 부활절을 맞으면서 복합문화센터를 열었습니다. 더 브릿지 센타가 공식 명칭입니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어이지고, 교회와 지역사회가 이어지고, 복음과 세상이 이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지금 여기까지 기도해주시고 함께 해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커피가 무료로 제공됩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부활은 실제다.>라는 제목으로 나누겠습니다.
“저 너무 힘들어요.” 우리가 종종 듣는 말입니다. 저는 힘들 때마다 예수님께 문제를 자꾸 맡깁니다. 예수님이 부활 하셨기에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은 실제입니다. 기독교는 사상이나 철학 위에 세워진 종교가 아닙니다. 이론이나 상상속의 종교도 아닙니다. 자기 수련을 통해서 깨우치는 수행 중심의 종교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Historical Event) 위에 서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서 일어난 사실임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예수님을 따랐던 이들에게 큰 충격이고 슬픔이고 상실이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이들이 많았습니다.
* 절망의 무덤에 있을 때 초점이 중요합니다. 막달라마리아가 빈 무덤을 발견하고 초점을 어디에 맞춥니까? (요20:1,2)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한마디로 멘붕의 상황입니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는 계속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습니까? <무덤>입니다. 무덤은 죽음의 공간입니다. 절망의 장소입니다. 상실의 공간입니다. 마리아는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무덤에 집중했기에 예수님이 무덤에서 보이지 않자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에만 관심을 쏟았습니다. 여전히 죽은 예수님만 찾고 있습니다. 무덤에 초점을 둘수록 절망입니다. 낙심입니다. 좌절입니다. 마리아는 너무너무 힘들어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상실감에 허탈합니다. 허전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났지만 세상의 염려, 걱정, 근심,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무덤에 갇히고, 무덤에 머물게 됩니다.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왜 입니까? <부활은 이론이 아닌 실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부활의 첫 목격자가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당시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여성의 법적 증언은 잘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조작하려 했다면, 결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성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내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의 목격자를 있는 그대로, 사실 그대로 기록했기에 여성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성경 기록의 역사적 신뢰성을 증명합니다. 성경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활은 실제입니다.> 무덤에 머물지 않으려면 부활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열심히 삽니다. 부, 명예, 권력, 인기, 성공, 꿈, ...그러나 그 끝은 무엇입니까? 무덤입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없다면 누구든지 그 끝은 무덤입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인생의 마지막에 도착한 곳이 ' 무덤'이라면 어떡하시겠습니까? 그 끝에 가기 전에 <부활은 실제다> 라는 사실을 깨닫아야 합니다.
* 베드로와 요한도 빈 무덤을 확인합니다. 그들은 초점을 어디에 맞춥니까? (요20:4~8)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베드로와 요한도 달음질하여 빈 무덤을 확인합니다. < 세마포 놓인 것, 머리를 쌌던 수건 >을 확인합니다. 그것은 부활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또 주목할 것은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몸만 빠져 나간 듯, 쌌던 자리에 그대로 정돈된 상태입니다. 이것은 강력한 부활의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예수님의 신체적 부활의 물리적 증거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도 무덤에만 집중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생각 하지 못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이 사라졌어요> 라고 달려와서 자신들에게 했던 말을 그때서야 믿습니다. 그들의 시선도 생각도 무덤에 갇혀 있습니다. 부활을 생각지도 못합니다. 안타깝습니다.
* 약속이 아닌 빈 무덤에만 초점을 맞추자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요20:9,10,11) "9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10 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1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마리아도, 베드로도, 요한도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는 부활에 대해 깨닫지 못합니다. 빈 무덤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빈 무덤에 생각이 갇혀 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낙심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미래와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랐지만 머리로만 아는 신앙은 힘이 없습니다. 지식에 머무는 신앙은 위기와 절망 앞에 떠남의 길로 향합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마리아도 슬픔과 상실의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님이 죽으셨는데 시신마저 사라졌으니 세상이 무너진 느낌입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저 너무 힘듭니다. 저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열심히 하고, 성경공부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왜 제 인생은 왜 여전히 무덤입니까? 왜 텅 빈 모습니까? 왜 제 문제는 안 풀리고, 왜 내 몸도 마음도 점점 힘이 듭니까?” 우리도 모르게 각종 무덤에 갇히곤 합니다. 우리도 두려움과 불안으로, 막막함과 답답함으로 울고 서 있는 우리 자신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무덤에 초점을 맞출 때 누구나 경험하는 일입니다.
* 빈 무덤에서 희망을 노래하려면 초점이 바뀌어야 합니다. 천사들은 마리아의 초점을 어떻게 바꿉니까? (요20:12~14) "12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마리아가 혹시나 하고 다시 무덤 속을 살피는 순간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천사가 묻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천사들은 마리아에게 질문을 통해서 그 시선을 예수님께로 돌리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리아의 시선은 무덤에 있습니다. 심지어 부활하신 예수님이 서 계신데 눈으로 보고도 예수님을 바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왜 일까요?
사람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왜 입니까? 예수님은 죽으셨다는 견고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이 서 계신데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곤 합니다. 빈 무덤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우리의 아픔, 슬픔, 결핍이란 무덤만 봅니다. 내 인생의 고통의 문제, 상처의 문제,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라는 무덤만 바라봅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보고 듣고 느끼고 계십니까? 혹시 아니라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만나 주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느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실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 예수님은 마리아의 초점을 어떻게 바꿉니까? (요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자신의 슬픔 속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부활하신 주님을 보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에게 묻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오늘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영적 시야가 열리지 않으면 우리는 여전히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 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을 통해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빈 무덤은 이론이 아닌 실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상상이나 망상이 아닙니다. 부활은 실제입니다.
* 우리는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부활하신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생명력 있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요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예수님은 죽음의 사고 속에 갇혀 있는 마리아에게 먼저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마리아야"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다가오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부르는 그 친밀한 목소리, 그 따뜻한 목소리를 듣고 주님을 알아차립니다. 모두가 자신을 비난하고 비방하고 수군거릴 때 다가오신 바로 그 음성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초라하고 비참한 시간을 보낼 때 자신을 만나 주시고 고쳐주신 그 음성입니다. 마리아는 곧바로 반응합니다. “랍오니” “선생님”하고 친밀하게 반응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다가오십니다. 두려움, 불안 가운데 있을 때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절망과 낙심 가운데 있을 때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염려와 걱정 근심에 마음이 짓눌려 있을 때 우리 이름을 불러 주십니다. “애야, 너 너무 힘들지. 그런데 내가 있잖아. 왜 자꾸 무덤만 보니? 애야 나를 봐. 나 좀 바라봐” 그때 우리도 이렇게 고백하면 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그 순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때 좌절은 새로운 소망으로 바뀝니다. 그때 염려는 평안으로 바뀝니다. 죄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 사망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막노동을 할 때 차가운 창고가 무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자주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그곳에 찾아오셨습니다. 제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상갑아 불안해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 주님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에 꿈을 주시고 미래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이든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확신하십시오. 부활은 실제입니다.
*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무엇을 말씀 하십니까? (요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부활하신 주님은 마리아에게 말씀 하십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 왜 입니까?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이 끝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가셔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예수님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온전히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이후에 새로운 가족을 만드셨습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우린 주 안에서 영적인 가족입니다. 부활은 실재였기에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새로운 영적 가족이 탄생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이름을 부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셨다면, 부활을 목격한 마리아는 어떤 대가를 지불했습니까? 그녀는 자신의 슬픔에 안주할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나를 붙들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기쁨보다 제자들에게 달려가 부활을 알렸습니다. 진짜 부활을 믿는다면 우리도 '증언하는 삶'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자 마리아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요20: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마리아는 달려갑니다. 힘차게 외칩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우리는 외쳐야 할 증언이 생깁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면 더 이상 무덤에 머물지 않습니다. 세상을 향해 외칩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를 만나 주신 예수님, 나를 무덤에서 건져 주신 예수님, 나를 살려 주신 부활의 주님을 증언하십시오. <내가 주를 보았다> 주님을 증언하는 일이야 말로 부활절 최고의 예물일 것입니다.
"산본가족 여러분, 부활은 이론이나 지식이나 관념이 아닙니다. 부활은 실제입니다. 어제 문을 연 '더 브릿지 센터'는 죽은 공간이었지만 아름다운 공간으로 살아났습니다. 죽어가는 지역사회를 살리고, 단절된 세대를 잇는 이 공간이야말로 '무덤'에 갇힌 세상 속에 '부활의 생명'을 흘려보내는 실제적인 통로입니다. 커피 한 잔을 나누는 그 자리가 바로 마리아가 주님을 만난 동산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고 증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 주님, 우리 눈을 열어 절망의 무덤이 아닌 빈 무덤에서 부활의 주님을 보게 하소서. 부활하신 주께서 친히 "저 너무 힘들어요"라고 울고 있는 성도들의 이름을 주님이 직접 불러주옵소서. '더 브릿지 센터'를 통해 세대와 세대가 이어지고, 교회와 지역사회가 사랑으로 연결되게 하시고 우리 모두가 세상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축복의 통로 축복의 브릿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찬송 149장 , 성찬으로의 초대
+ 4부
부활절을 보내면 이 말씀을 적용해 보십시오.
적용 1. "요즘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무덤'은 무엇인가요?"
(취준, 학점, 인간관계, 텅 빈 통장, 미래에 대한 막연함 등 지금 내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것 -> 문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 나도 혹시 문제(무덤)에 너무 집중하느라, 내 삶에 이미 찾아와 일하시고 계신 부활의 주님을 놓치고 있지는 않나요?
=> 모든 시선을 주님께 돌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느끼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적용 2. 주님과의 인격적 만남이 중요합니다. : "알고리즘이 아닌 내 이름을 부르시는 분" -> 세상은 나를 '스펙'이나 '숫자'로 보지만, 주님은 내 '이름'을 부르십니다. 최근 기도나 말씀을 통해 내 마음을 만지셨던 주님의 따뜻한 음성이 있었다면 무엇인가요?
=> 성경읽기, 큐티, 기도로 보혜사 성령님의 만져주심을 경험하십시오.
적용3. 우리가 이 시대의 '더 브릿지'가 되어, 죽어가는 세상에 부활의 생명을 전하게 하소서.
-> 아침에 눈 뜨자마자 스마트폰(인스타그램, 뉴스)을 보기 전, 3분간 **"주님, 오늘 내 시선이 무덤이 아닌 주님을 향하게 하소서"**라고 선포하기.
=> 우리는 주님께 집중할수록 힘듦에서 자유해집니다. 부활은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경험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 눅 19:1~10, 이상갑목사
히끼꼬모리란 말이 있습니다. <틀어박힘>이란 뜻입니다. 자택이나 자기 방에서 장기간 틀어박혀서 다른 사람이나 사회와 접촉을 하지 않고 생활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청소년, 청년 사이에서 증가하여 사회 문제화가 된 것입니다. 가까운 우리말 유사한 표현으로는 외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외토리를 표현할 수 있는 가요가 있습니다. 개똥벌레라는 노래입니다. 이런 가사입니다.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저기 개똥 무덤이 내집인걸
가슴을 내밀어도 친구가 없네 노래하던 새들도 멀리 날아가네.
마음을 다주어도 친구가 없네 사랑하고 싶지만 마음뿐인 걸
나는 개똥벌레 어쩔 수 없네 손을 잡고 싶지만 모두 떠나가네.
가지마라 가지마라 가지말아라 나를 위해 한번만 손을 잡아 주렴
아아 외로운 밤 쓰라린 가슴 안고 오늘밤도 그렇게 울다 잠이든다"
우리 시대 많은 청소년 청년들 어쩌면 장년과 노년도 진정한 친구가 없이 외톨이가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SNS는 화려한 것들로 넘쳐납니다. 화려한 음식들, 유명한 관광지들,. 그런데 SNS에 오래 머물수록 외로워집니다. 비교의식에 시달립니다. 정작 깊은 마음을 주고 받을만한 친구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 외톨이 인생인 아웃사이더란 의미의 아싸에서 인사이더라는 의미의 인싸로 바뀔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외톨이에서 변화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 삭개오가 사랑을 경험한 장소는 어디입니까? (눅19:1절) “1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여리고입니다. 여리고는 어떤 인식이 있는 곳입니까? 고대부터 잘 알려진 무역도시입니다. 시간적 배경은 수난 주간 전 목요일쯤입니다. 왜 여리고로 지나 가셨을까요? 지나가셨더라는 표현에서 예루살렘으로 고난 받으시기 위해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굳은 의지가 보입니다.
*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눅19:2절)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전통적 유대인 이름입니다. 의인을 뜻하는 <자카이>라는 말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그 뜻은 경건한 사람,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의 의미와는 사뭇 다른 단어가 보입니다. <세리장> 이란 표현입니다. 세리장은 세관의 최고 책임자입니다. 세리장은 세금을 걷을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으로 유대사회보다는 로마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여리고는 팔레스타인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하였기에 통관세를 받고, 무역도시이기에 향유와 여러 무역 상품의 세금을 받고, 특산물이 나는 지역이어서 그 세금까지 징수하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여리고 세리장하면 돈방석 그 자체였습니다. 세리장들은 로마를 등에 업고 막강한 공권력을 동원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부자>라는 표현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는 세상적으로 성공의 사다리를 오른 남자입니다. 그러나 세리장이었기에 매국노라고 유대인들로부터 욕을 먹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관계적인 면에서는 외톨이에 가까웠습니다. 삭개오는 관계적으로는 고립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주변에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습니다. 세리장이요 부자지만 외롭습니다. 괴롭습니다. 스스로를 개똥벌레 같다고 느낍니다.
*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기에는 장애물이 된 삭개오의 부족하고 연약한 연약함은 무엇이었습니까? (눅19: 3절) “3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삭개오는 약점과 단점이 있었습니다. 키가 작았습니다. 약점과 단점은 열등감으로 작용하기 쉽습니다. 비교의식에 빠지기 쉽습니다.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고 살기 쉽습니다. 자신을 알아주고, 자신과 마음을 나누고, 자신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개똥벌레처럼 살았다고 추측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연약하고 소외된 이들의 친구,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말이 들렸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보내신 분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습니다. 순간 삭개오는 모두다 자신을 피하지만, 예수님이라면 자신을 품어 주실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만나고 싶은 호기심이 솟구칩니다.
* 삭개오가 자신의 연약함을 넘어서기 위해 취한 행동은 무엇입니까? (눅19:4절) “4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문제는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문제 앞에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돌무화과나무를 발견합니다. (사진)
체면을 뒤로하고 무조건 그 나무에 올라갑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최대 15m 이상 자라며, 약 600년까지 생존 가능한 나무입니다. 나무의 원줄기가 매우 두텁고 질긴 잎파리를 지닌 매우 큰 나무입니다. 열매는 무화과와 유사하지만 더 작은 열매가 열립니다. 당도가 떨어져 상품성이 낮아 돌무화과 나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개복숭아 나무나 돌배나무를 생각하면 상상이 될 것입니다. 돌무화과 나무는 어찌 보면 삭개오를 닮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고 싶은 갈망과 열망을 도운 것은 돌무화과나무입니다. 돌무화과나무는 삭개오가 자신을 타고 올라와서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또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실 수 있도록 삭개오를 받쳐 주었습니다. 모든 것이 최고여야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해도 됩니다. 연약해도 됩니다. 누구든 열망을 가지면 예수님은 만나 주십니다. 우린 부족해도 예수님을 만나도록 돕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 사랑의 말 한마디가 인생을 바꿉니다. 그 한마디는 무엇입니까? (눅19:5 절)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예수님은 돌무화과 나무에 올라서 자신을 바라보는 삭개오와 눈을 마추치십니다. 그 순간 삭개오의 마음과 영혼을 고독과 고립, 슬픔과 상처를 보십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눈을 보시고 말씀 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와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함께하고 싶구나" 인격적 초대입니다. 주권적 초대입니다. 무시나 멸시가 아닌 환대입니다. 그 사랑의 한마디가 삭개오의 영혼 전체를 울리며 메아리처럼 퍼집니다. 순간 얼음 같았던 마음이 사르르 녹습니다. 삭개오는 세상에서 높이 올라가고만 싶었습니다. 관계가 끊어지고,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수군거림을 받아도 어찌하든지 그들을 딛고 올라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내려오라는 한 마디에 약육강식의 야생의 세상에서 내려놓음의 영성으로 향합니다.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집니다. 얼굴에 있었던 짙은 그늘이 밀려나고 환해집니다. 기쁨입니다. 자유입니다. 해방입니다. 사랑입니다.
차별하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은 사람 차별하지 않습니다. 비교하는 세상 속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비교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조건을 따지며 거부하고 거절하지만 예수님은 소외되고 고립된 이들도 초대하시고 환대 하십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 사회 전체가 히끼꼬 모리병에 걸린 것처럼 보입니다. 관계는 단절되고, 고립 속에서 고독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집니다. 그들에게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청년 사역을 하면서 변화된 청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은 지옥고의 삶을 살았습니다. 지하실, 옥탑방, 고시원에서 살면서 이성교제나 결혼을 꿈꾸지 않습니다. 집을 살 생각조차 못합니다. 대기업이나 정규직이 아닌 많은 청년들이 자발적 외톨이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신을 개똥벌레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예수님께로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세상 속으로 나아가기를 기대하십니다.
백수, 오타쿠, 우울증, 비만 등 아싸의 굴레 속에 살았던 순한 곰 작가의 <아싸여서 앗싸>라는 책의 글귀를 소개합니다.
"순한곰, 너는 남들에게 행복하게 보이기 위해 사는 것 같다." 가면이 벗겨지고 눈물이 쏟아졌다. 진정한 나를 받아주는 삶을 살고 싶었다. 아싸인 내 모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들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게 아닌,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 순한곰, 아싸여서 앗싸 中 P16-23.-
혹시 남들에게 행복해 보이려고 너무 힘쓰고 애쓰는 분이 계십니까? 다른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힘겨워 하는 분이 계십니까? 어릴 때는 부모님의 기대치에 따라 힘겹게 살고, 어른이 되어서는 사회의 기대치, 남편과 아내의 기대치에 허덕이고, 어쩌면 스스로를 남과 비교하며 종종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자신을 마주하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만나시면 이런 말을 해 주실 것 같습니다. “너무 애쓰지 마라. 너는 너로 충분해”
나는 반딧불이라는 가요가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나는 내가 빛나는 별인 줄 알았어요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죠
몰랐어요 난 내가 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난 눈부시니까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어요 소원을 들어주는 작은 별
몰랐어요 난 내가 개똥벌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아 나는 빛날 테니까
이 가사처럼 저도 제가 개똥벌레인 줄 알았습니다.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습니다. 스스로를 남들과 자꾸 비교하고 스스로를 비하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알고 보니 개똥벌레가 아니라 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저에게 개똥벌레라고 말해도 그것이 더 이상 저를 흔들거나 상처를 주지 못합니다. 개똥벌레여도 예수님께 사랑받는 경험을 하면 별처럼 빚날 테니까요. 예수님은 말씀 하십니다. “너무 애쓰지 마라. 너는 너로 충분해, 난 네가 어떤 모습이든지 너를 사랑한다.”
* 사랑을 경험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에 대하여 삭개오는 어떤 반응을 합니까? (눅19:6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급히 내려와, 즉각적 반응입니다. 즐거워하며, 우울과 아픔, 냉소와 소외, 짙은 상처가 즐거움으로 바뀌었습니다. 영접하거늘, 주를 향한 인격적 반응입니다.
*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의 반응은 어떠하였습니까? (눅19:7절) “7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그러나 유대인들, 바리새인들 반응은 수군거림입니다. 수군거림은 자신의 죄악을 알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만 보고 흉보는 비판심리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시기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마저 비판합니다.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죄인의 친구라고 꼬리표를 붙입니다. 낙인을 찍습니다.
100% 확인된 진실이 아니라면 수군거리는 무리에 들지 마십시오. 품지 못할지언정 손가락질 하지 마십시오. 손가락질을 할수록 하나는 비방하는 대상에게 향하지만 3개는 자신에게 돌아오고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 사랑을 경험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 대한 결단은 어떻게 표현됩니까? (눅19:8절)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삭개오를 세상 속으로 끌어냅니다. 그는 고립되었을 때 자신만을 위해서 이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는 바뀝니다. 고립에서 벗어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는 삶, 섬기는 삶. 베푸는 삶을 선택합니다. 동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향해서도 긴장과 갈등과 착취의 길이 아니라 공존, 공생, 공감의 길로, 나눔과 섬김의 길로 향합니다. 변화는 예수님을 아는데서 시작됩니다. 변화는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가 흘러넘침으로 일어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뀝니다. 삶의 방향이 이기적인데서 이타적인 곳으로 바뀝니다. 사랑을 깊이 경험할수록 입술만의 변화가 아닌 라이프 스타일 자체가 바뀝니다. 가치가 바뀝니다. 목적이 바뀝니다.
* 가장 완전한 사랑이 임할 때 일어나는 일은 무엇입니까? (눅19:9절)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면 정체성이 바뀝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은 <너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친백성이다.>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 중심성, 예수 그리스도 중심성으로 바뀌는 순간 오늘, 지금, 여기에서 즉각적으로 임합니다. 현재적으로 임합니다. 분리되고 단절되었던 삶을 살았던 삭개오가 회개와 동시에 회복을 경험합니다. 하나님 나라 가족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진인적인 치유와 회복이 일어납니다.
* 가장 완전하고 온전한 사랑으로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의 목적은 결국 무엇입니까? (눅19:10절) “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임한 즉각적인 구원 선언이후에 그 선언에 대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이라고 밝히심으로 신적 권위를 부여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가신 목적은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고난의 길로 가신 목적은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뿐 아니라 타락하고 부패한 죄인들을 혐오와 배제가 아닌 환대로 초대하십니다. “내려오라. 내게로 오라”
저는 예수님을 만난 순간을 기억합니다. 제 안에는 아버지의 부재가 주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 환경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많이 듣는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가요 프로를 들으며 밤을 보냈지만 제 인생은 여전히 별이 아닌 개똥벌레처럼 느껴졌습니다. 여전히 짙은 밤이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외로웠습니다. 두려웠습니다. 힘겨움에 계속 숨고 숨었습니다. 가장 깊이 숨었던 곳이 막노동을 하였던 먼지 나는 창고였습니다. 그 창고 속에서 저는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을 마주치는 것이 싫어서 친구들이 이동하는 시간을 피해 더 빨리 출근하고 하루 종일 창고 속에 머물렀습니다. 친구들이 다니지 않는 시간에 맞추어서 퇴근하였습니다. 길거리에서 친구를 만나면 친구들이 <너 요즘 뭐하고 지내냐?> 묻는 것이 참 싫었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그 안에 숨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면서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창고 속에서 신약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성경 속의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처럼 저의 꼬리표로 저를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속의 예수님은 5명의 남편을 두었던 사마리아 여인을 품어주고 변화 시키는 분이었습니다. 세리장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고 죄인이라고 왕 따 취급했던 삭개오도 변화 시키시는 분이었습니다. 투박하게 물고기를 잡으면서 거친 파도와 싸우는 베드로를 부르시고 힘과 지혜와 능력을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면서 저는 비로소 세상 속으로 나왔습니다. 더 이상 친구들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먼지가 나는 추운 창고 속에 숨어 지내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절망과 낙심의 감옥 에 갇히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세상 속으로 주님과 함께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여전히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불안도 있었습니다.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너 좀 봐라. 넌 안 돼. 넌 구제불능이야, 네가 무슨 목회자가 된다고 그래. 넌 음치 박치고, 넌 아는 것도 없고 넌 수포자고 넌 초라한 모습이잖아> 그때마다 성경을 펼쳐 들고 읽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통해 저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할수록 영혼의 깊은 곳에 이런 소리가 들립니다. < 넌 사람받는 하나님의 자녀다. 난 너에게 소원을 두고 행한다. 나는 너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기 원한다. 넌 상처입은 치유자가 될 것이다. 난 너와 함께 한다. 난 너를 도울 것이다. >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 영혼에 선포하곤 하였습니다.
빌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4:13. “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에 선포하면 다시 일어 설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말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시는 약할 때 강함 되시는 주님의 음성을 수없이 제 영혼에 선포하며 걸었습니다.
예수님은 혐오나 배제를 당하는 사람들을 품어 주셨습니다. 개똥벌레처럼 외롭고 괴롭고 삶이 쓰라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그 사랑을 경험하면 누구든지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을 피해 다니다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예수는 메시야라고 외치며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삭개오는 세리장, 부자라는 꼬리표가 아닌 예수님의 사랑 받는 자로 자신의 정체성이 바뀌자 자신의 재산까지도 나눔과 섬김에 사용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인격적으로 만나자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개똥벌레가 아닌 별처럼 반짝이는 존재가 됩니다. 개똥벌레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할수록 별처럼 빛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정체성이 회복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말씀 하십니다. “나에게로 와라. 내가 너와 함께하고 싶다. 너무 애쓰지 마라. 내가 너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함께 지고 가도 싶다. 내 안에 있으렴. 정말 그것으로 충분하단다.”
설교 후 찬양: 약할 때 강함 되시네
1.
약할 때 강함 되시네
나의 보배가 되신 주
주 나의 모든 것
주 안에 있는 보물을
나는 포기할 수 없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2.
십자가 죄 사하셨네
주님의 이름 찬양해
주 나의 모든 것
쓰러진 나를 세우고
나의 빈 잔을 채우네
주 나의 모든 것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예수 어린 양 존귀한 이름
1,2,3부: 본질이 이끄는 교회, 본질에 집중하는 교회, 엡6:10~18절,이상갑목사
주일 4부: 시대를 섬기는 좋은 교회의 3가지 특징, 엡6: 10~20, 이상갑목사
(3부 예배 설교 전: 리안, 아쉬르 축하 및 기도의 시간)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 전쟁의 연속입니다. 그 전쟁은 미사일이 날라가고 폭탄 터지는 것보다는 일상과 일터의 영역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현실을 살되 그리스도인으로 본질을 붙잡고 성경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신앙과 삶은 어떻습니까? 김관성목사님은 본질이 이긴다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아주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주님 때문에 사생결단하고 목숨을 내놓아야 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진짜 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로 헌신해야 할 사람이 있는 반면 자신의 직장과 가정을 거룩한 믿음의 전당으로 수호하고 지키는 자리로 부름을 받는 자들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잔소리와 짜증을 따뜻한 미소로 겸손하게 받아 내는 일은 죽는 것보다 쉽지 않습니다. 남편의 발광을 인자함과 여유로운 이해로 수용하는 일은 순교만큼 힘든 것입니다. 순교는 일순간이지만 삶은 죽을 때까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자 각자에게 맡겨진 신앙의 과제와 사명은 ‘그 누구는 더 어려운 일을, 그 누구는 더 쉬운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몫은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눈물겨운 사투를 벌여야 하는 것들입니다. - 본질이 이긴다. 김관성, 성도 본질을 추구하다 ‘사소한 것을 온 마음 다해 감당하는 사람’ 중에서 – 본질에 집중하는 것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누구나 그런 사투를 벌이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본질에 집중해야 함을 강력하게 말씀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신분에 맞게 새로운 삶, 조화롭고 균형잡힌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 시대를 섬기는 좋은 교회로 본질에 집중하려면 첫째, 강건한 교회여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HOW? 엡6:10) “10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세상은 부, 명예, 권력으로 강해지려고 합니다. 어찌하든지 좋은 스펙을 쌓으려고 합니다. 힘이 있어 보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강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강건해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합니다. 그 힘은 군림하는 힘이 아닙니다. 섬기는 힘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다른 사람보다 강해보이려고 발버둥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본질적인 것은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영적으로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해지십시오.
* 시대를 섬기는 좋은 교회로 본질에 집중하려면 둘째,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왜 입니까? (WHY? 엡6:11)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바울은 성령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권면합니다. 왜 입니까? 마귀를 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마귀의 간계는 간사한 계락을 말합니다. 마귀는 교활한 특징이 있습니다. 마귀는 이리지만 양으로 위장하고 들어옵니다. 감추고 속이면서 미혹합니다. 그러므로 마귀와 싸우라는 것은 교회에 주신 메세지입니다. 세상은 마귀와 싸우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마귀와 싸우라고 합니다. 마귀는 상상이나 환상이 아닙니다. 영적 실체가 있습니다. 우리의 싸움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영계에 대한 부분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귀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무너뜨리여 합니다. 그러한 마귀와 싸우는 방법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싸움이기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세상은 명품을 입으라고 합니다. 광고를 통해서 수없이 반복해서 듣는 메세지는 명품을 입어야 명품인생처럼 느껴지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트랜드에 민감합니다. 유행이 있으면 그 유행을 따라갑니다. 광고에 길들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진정한 명품 인생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사람입니다. 명품 옷을 입었다고 해서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본질적인 싸움대상은 마귀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요 속이는 자입니다. 어찌하든지 사람들을 미혹하고 유혹하여 영적으로 잠들게 하고, 병들게 하고, 죽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마귀는 간교한 계략으로 파고 들어옵니다. 유튜브에 빠지게 합니다. 이단에 빠지게 합니다. 이념에 빠지게 합니다. 세상의 좋아 보이는 것에 빠지게 합니다. 드라마에 빠지게 합니다. 게임에 빠지게 합니다. 마귀의 간교한 계략에 속으면 점점 영적인 죽음의 길로 갑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단순합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명품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시는 여러분 되십시오.
* 시대를 섬기는 좋은 교회로 본질에 집중하려면 셋째, 씨름하는 교회입니다. 누구와 씨름해야 합니까? (WHO? 엡6:12)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씨름한다는 것은 레슬링처럼 엎치락 뒷치락하는 것입니다. 이길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레슬링을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대상이 혈과 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누구입니까?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입니다. 쉬울까요? 쉽지 않습니다. 초자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존재는 신화나 미신이 아닙니다. 실재로 영향을 끼치는 영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싸우는 영적 세력은 어떠합니까?
첫째,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모두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주로 악한 방식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입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역사 합니다. 악한 정치지도자, 악한 사회적 구조 배후에 역사합니다. 모두 공포, 두려움, 불안으로 세상을 뒤흔듭니다.
둘째,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은 사악합니다. 마귀는 영적인 권세를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죽이고, 멸망시키고, 파괴적으로 사용합니다. 모든 사악한 일의 배후에는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인 귀신들의 역사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정직하지 않습니다. 정의롭지 않습니다. 거짓과 미혹과 죄악을 선호합니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은 어두움과 사악함으로 통치하고 다스립니다.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조정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강하고, 사악하고, 교활하여 거짓과 미혹이 특징인 마귀의 세력과 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점을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 굿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배후에 귀신들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점보기 좋아하고 굿을 좋아하면 귀신에게 이용당하고 결국 멸망의 길로 향합니다.
* 시대를 섬기는 좋은 교회로 본질에 집중하려면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요? (WHAT? 엡6:13)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하나님에 의해서 공급되어지는 영적 전쟁의 장비들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이유는 2가지입니다.
첫째, 악한 마귀와 대적하기 위함입니다. 전신갑주를 입어야 마귀와 싸울 수 있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둘째, 넘어지지 않고 견고히 서기 위함입니다. 선다는 것은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죽는 자는 다 넘어집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끝까지 살아남아야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보호자요 구원자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 그러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WHAT? 엡6:14~17) “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여러분이 영적 전쟁에서 꼭 입어야 하는 명품을 살펴보십시오. 사탄 마귀가 뚫을 수 없는, 이길 수 없는 전신갑주의 6가지 목록이 나옵니다.
1) 진리의 허리띠: 허리띠는 주로 싸우기 전에 철저히 자세와 태도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허리띠를 조인다는 말은 바짝 긴장하여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준비합니까? 진리입니다. 여기서 진리는 교리적으로는 영적 진리를 말하면서,인격적으로는 중심의 진실함을 의미합니다. 마귀는 정직하고 진실하면 싫어합니다. 어둠의 말들, 어둠의 행동들을 하는 사람들을 골라서 그들을 통해 일합니다.
2) 의의 호심경: 의의 호심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의롭게 보시는 칭의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이 회복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관계일 때만 가능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보호해 주는 호심경입니다. 자기 의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의입니다. 마귀가 아무리 참소해도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안전합니다. 항상 참소하는 자는 마귀 사탄입니다. 적이란 의미의 히브리적 이름이 사탄이고, 비방하는 자라는 헬라적 명칭이 디아볼로스, 즉 마귀입니다. 사탄 마귀의 악한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되면 도덕적 감각이 생겨서 죄악된 말과 행동을 멀리 합니다. 영적 감각이 예민해져서 점점 죄를 짓기 싫어합니다. 용서받은 감격이 있고 의롭게 된 기쁨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마음과 성품을 조금씩 닮아갑니다.
3) 평안의 복음의 신: 로마 군인들의 신은 가죽으로 만듭니다. 바닥은 징으로 박습니다. 발목과 정강이도 보호대를 합니다. 아주 단단합니다. 견고합니다. 그 신을 신으면 전투할 채비와 준비가 됩니다. 복음은 그것을 믿는 이들에게 견고함과 든든함을 줍니다. 복음은 믿고 영접하는 이에게는 평안을, 마귀 사탄에게는 싸울 때 승리할 수 있는 견고함을 줍니다. 신학교 뒷산으로 산 기도를 갈 때 뱀이 나타나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신학생들이 2번이나 독사에 물려 응급실에 실려 간적이 있었습니다. 독사에 물리면 독이 퍼지고 위험합니다. 그때 산에 올라가 산기도를 하고 싶으면 군화를 신었습니다. 군화를 신으면 바닥이 단단하여 뱀을 밟아 죽일 수 있습니다. 발목과 정강이까지 가죽이 감싸고 있어서 뱀의 공격에도 안전하며 튼튼하고 든든합니다. 뱀을 발로 밟아서 이기듯 원수 마귀를 발로 밟아 이기고 승리하려면 평안의 복음의 신을 신는 것이 필수입니다.
4) 믿음의 방패: 여기서 방패는 온 몸을 보호할 정도의 크기입니다.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잘 보호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거짓의 사람, 미혹의 사람, 어둠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 낙심하면 무너집니다. 그런 때일수록 진리 안에서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저는 청년사역을 오랫동안 했기에 온갖 이단과 이단성 있는 이들과의 영적인 싸움, 극단적인 이념 세력과의 영적인 싸움, 부, 명예, 권력의 세습 세력과의 싸움을 하면서 온갖 거짓뉴스에 시달렸습니다. 온갖 어둠의 사람들의 간사한 계략에 시달렸습니다. 최근에도 cbs의 올포원과 크리스찬 칼럼을 하면서 올해부터는 방송 전반에 대해서 자문을 하는 CBS자문 위원으로 섬기는데 cbs가 진화론을 옹호한다는 중상모략에 가끔 시달립니다. 또 극단적인 좌우의 정치꾼 목사를 경계하지 않으면 기독교가 추락한다는 칼럼을 썼었는데 극우들이 저를 새빨간 좌파라고 간사한 모함을 하지만 무시합니다. 거짓과 음모는 마귀의 일이기에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방패를 굳건히 붙잡고 전혀 흔들림이 없습니다.
시편 18:30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 잠언 30:5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성경은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라고 말씀 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보호자라는 것은 최고의 방패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어둠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불화살을 소멸하는 것은 나의 힘과 지혜와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믿음입니다. 성경말씀에 대한 절대 믿음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 믿음입니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5) 구원의 투구: 투구는 인체의 핵심인 머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진리와 지식으로 이성과 지성으로 무장된 지성적 제자도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사고하고 사색하는 힘이 부족할수록 속습니다. 이용당합니다. 어둠의 사람, 거짓의 사람들의 숙주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모든 것을 성경에 비추어서 해석해 내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구원에 대한 바른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성령의 감동감화와 교통교제를 분별하는 영적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감정이 흔들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단이 흔들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념이 흔들 수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악한 마귀나 그 하수인들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도록 성경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모든 것을 새롭게 합니다. 구원 받은 백성은 결코 죄와 악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6) 성령의 검: <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 >은 유일하게 공격과 방어가 다 가능한 무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신자들의 최고의 공격용 무기이자 방어요 무기입니다.
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모든 것은 반드시 다 드러납니다. 아무도 숨기거나 감출 수 없습니다. 말씀 앞에 자주 머물러야 하는 이유는 말씀으로 나를 살피고, 말씀으로 무장해서 성경정신으로 시대의 어둠과 거짓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과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검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으로 분별하고 마귀를 싸워서 이길 수 있습니다.
* 시대를 섬기는 좋은 교회로 본질에 집중하려면 기도와 간구를 언제해야 합니까? (WHEN? 엡6:18)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여기에서 <항상>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십시오. 모든 기도와 간구를 언제 해야 합니까? 항상 해야 합니다. 항상 하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이 주시는 감동감화를 따라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어둠의 시대일수록 영적으로 깨어 구하되 항상 깨어 구해야 합니다. 적당히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수요성령집회가 올해부터 드려지고 있습니다. (사진)
은혜 가운데 많은 분들이 함께 찬양과 말씀과 기도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중직자들과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사모하는 분들은 함께 더 자주 찬양과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부모세대와 자녀 세대가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나타내시도록 간구하면서 참여 하십시오.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더 힘써 기도하십시오. 부모세대는 자녀 세대를 위하여 기도하고, 자녀 세대는 부모세대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와 간구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우리를 하나님께 연결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으로 이끌어 갑니다. 더욱 더 기도함으로 더 깊이 하나님을 경험하십시오.
* 시대를 섬기는 좋은 교회로 본질에 집중하는 그리스도인의 초점은 모엇입니까? (FOCUS? 엡6:19,20)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은 본질에 집중하는 메시지와 더불어 자신과 에베소 성도들이 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입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은 영광입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복음의 비밀을 당연히 나누어야 할 말로 여기며 담대히 전할 때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셔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일마다 더하게 하실 것입니다.
설교 후 찬양: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이곳은 주님을 위한 자리
내가 기도하는 모든 땅 위에서 하나님 예배받을 그 날을 고대하네
나의 노래로 주님의 성전을 지으리 높임을 받으소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 거하신 주님은 거룩하십니다
두 손 들어 주님의 보좌를 만들고 온 맘 다해 경배하리
그룹 날개 사이에 임하신 것처럼 내 위에 임하소서
(시간에 따라서 반복은 조절)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이곳은 주님을 위한 자리
내가 기도하는 모든 땅 위에서 하나님 예배받을 그 날을 고대하네
나의 노래로 주님의 성전을 지으리 높임을 받으소서
이스라엘의 찬송 중 거하신 주님은 거룩하십니다
두 손 들어 주님의 보좌를 만들고 온 맘 다해 경배하리
그룹 날개 사이에 임하신 것처럼 내 위에 임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이 곳에 섰으니 이 땅을 치유하소서
하나님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주를 높이리라
열방들아 주님을 송축할지어다 그 발 아래 입맞추라
영원한 통치자 주 예수 그리스도 그는 위대하신 왕
그는 위대하신 왕 그는 위대하신 왕
우리는 주의 움직이는 교회 이곳은 주님을 위한 자리
내가 기도하는 모든 땅 위에서 하나님 예배받을 그 날을 고대하네
1,2,3부: 어둠의 자녀, 빛의 자녀, 엡5:11~13, 이상갑목사
4부: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엡5:11~21, 이상갑목사
현대인들은 어둠의 유혹에 노출된 삶을 살아갑니다. 혼탁하고, 혼란스럽고, 혼미한 시대입니다. 마귀의 전략은 하나님 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는 추악하고 더러운 것으로만 유혹하지 않습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운 것으로 유혹합니다. 나쁜 것이 우리 신앙과 삶을 망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좋아 보이는 것들이 우리 신앙과 삶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 빛의 자녀는 시대를 역류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엡5:11~13)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여기서 어두움의 일이란 이미 말한 음행, 부정, 탐욕, 더러운 말, 어리석은 말, 희롱하는 말 등을 포함한 온갖 죄악된 말과 행동을 의미합니다. 여기엔 평안이 없습니다. 만족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참여하지 말라고 하는데서 더 나아가 책망하라고 합니다. 책망하는 것은 꾸짖고 드러내어 폭로하는 것입니다. 빛이 되면 자동적입니다.
열매 맺는 삶을 살려면 어둠의 일, 은밀히 행하는 일들,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들, 책망을 받는 일들을 가지치기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말과 행동을 달아보면 좋습니다. 어둠의 일이라면 가지치기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면 좋습니다.
나의 이 말과 행동은 <어둠의 일, 은밀히 행하는 일들,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들, 책망을 받는 일들>인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
어둠은 어둠 속에 있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있으면 모든 것이 다 드러납니다. 빛의 밝기만큼 어둠은 드러납니다. 우리는 어둠의 말과 행동에 주목하지만 어둠을 제거하기 위해서 더 필요한 것은 은혜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 지난 주간에 저의 고향인 함양에 큰 산불이 났었습니다. 마천 화제 현장에는 불을 끄려고 소방관, 군인, 민방위, 동네 사람들 모두가 각자의 방법으로 진화 작업을 했습니다. 심지어 수많은 헬기까지 물을 뿌렸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면 다시 퍼지고 또 퍼집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제가 한 것은 기도였습니다. "하나님, 헬기로 물을 퍼부어도 안 되니 눈이나 비를 내려 주세요."
그런데 그 기도를 한 다음 날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붙어도 쉽지 않았지만 함박눈이 내리니까 불이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눈이 내린 것이 제 기도응답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쉽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눈을 내려 주시니 산불이 전부 진압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삶에 적용하면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제하고 조심하려는 노력이 불필요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보다 가장 본질적인 필요는 은혜를 듬뿍 받아야 삶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산불이 사람의 힘으로 쉽게 진화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눈과 비를 내려 주시면 쉽게 진화되듯, 어둠의 일은 빛이 강하게 임하면 임할수록 해결 됩니다. 모든 어둠의 일들은 빛의 문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목회자, 성도, 교회가 목회자다움, 성도다움, 교회다움을 지키면 어둠이 그만큼 밀려납니다.
오늘처럼 혼탁한 시대 * 빛의 자녀에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엡5:14)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우리 시대에 가장 깊이 있게 들려오는 성령의 탄식하시는 음성이 바로 이 음성입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영적 무관심, 영적 무지, 죄로 인한 무감각에서 깨어나라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중심에 좌정하시고 다스리시면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영이 살아납니다. 우리 인생의 왕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면 죄악의 어두움이 생명의 빛이 비취는 만큼 밀려납니다. 죽음의 권세가 생명의 권세에 의해서 밀려 납니다. 내 힘과 능력이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빛이요 생명이요 변화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세상흐름에 매몰되어서 영적으로 죽어가는 어린이, 청년, 신혼부부 등의 자녀세대를 향해 이 말씀을 하십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나님을 알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에 매몰 된 장년과 노년 부모세대를 향해 이 말씀을 하십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나님을 믿지만 욕구, 욕망, 욕심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추구하지 않는 신앙인에게 말씀 하십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취심을 입은 자들은 살아날 것입니다. 그 음성을 들어야 삽니다.
만일 * 빛의 자녀로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첫째, 세월을 아끼십시오. (엡5:15,16)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아낀다>는 말은 세월을 도로 사다. 세월을 속량하다는 의미입니다. 사단이나 악한 자에게 이용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는 순간순간들이 모두 세월을 아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월을 카이로스,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시간으로 인식하면서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삼고, 기회를 잡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세월을 아낍니다. 꼭 해야 할 일에 집중합니다. 종종 요양원에 계신 권사님들을 만나면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 봉사할 때가 가장 좋았어요” 이 말이 세월을 아낀다는 의미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사랑의 수고를 하는 것은 세월을 아끼는 것입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게서 기억하시는 시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 빛의 자녀로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둘째, 주의 뜻을 이해하십시오. (엡5:17)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이해하라>는 말은 어떤 것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어떤 것에 특별한 노력을 쏟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자신의 뜻만 생각합니다. 자기 이익에만 몰두합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자는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자 합니다. 주의 뜻에 마음을 기울이고, 생각을 기울이고, 시간과 물질을 헌신합니다. 주의 뜻에 특별한 노력을 쏟습니다. 목회자가 주의 뜻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성도가 주의 뜻이 무엇인가에 특별한 노력과 시간과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이 주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고 건강한 신앙입니다. 주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은 특정한 사람의 말이나 시대의 흐름을 표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습니다. 그 시대와 세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집중해서 추구합니다.
로마서 12:2절은 말씀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추구하는 목회자나 성도는 어느 시대나 고민하고, 고뇌하면서 살아갑니다. 누구든지 시대의 흐름대로 살아가면 편합니다. 그런데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면 시대의 물살을 거슬러야 합니다. 시대 풍조에 저항해야 합니다. 불편합니다. 힘이 듭니다. 그러나 편안한 삶보다는 평안의 삶을 추구합니다.
* 빛의 자녀로 잠에서 깨어 일어났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셋째,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엡5:18)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당시 헬라 문화권에서는 술취함이 일반적인 일상이 된 사회였습니다. 로마에서는 <박카스>가 술의 신으로 유명했습니다. 축제에서 술은 필수였습니다. 술의 문화가 교회 안에 파고 들어왔기에 성도들이 방탕, 방종, 방황하는 일들이 일어나자 죄의 원천을 차단하는 의미로 성령의 충만을 강조하였습니다. 성령충만은 인격적이신 성령님이 그리스도인을 온전히 지배하며 인도하는 상태입니다. 술에 취하면 온 몸이 영향을 받듯 성령에 취하면 전인격이 영향을 받습니다. 술에 취하면 술이 생각과 행동을 주장하듯, 성령에 취하면 성령께서 생각과 행동을 주관하십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단어는 현재수동태명령형으로 사용됩니다. 왜일까요? 성령충만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동태인 것은 사람이 주체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충만케 해 주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명령형인 것은 특별히 목사나 중직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시간 조절) 회사 다닐 때 고참 2명이 있었는데 1명은 술과 담배에 찌들어 살면서 사장님과 높은 사람들 앞에서는 온갖 아부와 아첨의 말을 다합니다. 그런데 뒤돌아 서면 그분들을 뒤에서 욕합니다. 다른 한명은 늘 은밀하게 다른 분들의 어려움을 도와주면서 해결합니다. 사장님께는 아부하거나 아첨하지 않지만 어찌하든지 회사를 잘되도록 도우려고 합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기억될까요? 우린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할까요?
세상 술을 취하면 여러 특징이 나타납니다. 말이 사나워집니다. 쓸데없는 말, 거친 말들을 하면서 한 말을 또 하고 또 합니다. 술 취하면 행동이 사나워집니다. 평소엔 양같이 순한데 술이 많이 들어가면 늑대로 바뀝니다. 구타와 폭력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술 취하면 인격이 사나워집니다. 더럽고 추함을 잘 모릅니다. 양심의 감각과 영혼의 감각이 무디어집니다.
성령에 취해도 여러 특징이 나타납니다. 말이 고와집니다. 격려와 응원과 감사의 말이 증가합니다. 행동이 고와집니다. 섬김의 자리에 늘 머물러 있습니다. 인격이 고와집니다. 양심이 살아 숨쉬고 영적 감각이 더 예민해집니다.
술은 단순하게 알콜이 들어간 술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것을 대표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사람들은 세상의 온갖 유혹하는 술에 취하는 길로 가고, 그 유혹에 점점 빠질수록 삶은 혼돈하고 공허해집니다. 지혜로운 빛의 자녀는 성령충만을 구하고 성령의 감동을 따라 사는 길로 갑니다. 그 길로 깊이 들어갈수록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 성령으로 충만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첫째, 주께 영광의 찬송을 드립니다. (엡5:19)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성령충만하게 되면 기쁨이 넘칩니다. 그 결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냥 있어도 찬송이 콧노래로 흘러나옵니다. 세상 사람들은 술 취하면 가요를 부르고,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취하면 찬양을 부릅니다.
* 성령으로 충만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둘째, 범사에 감사합니다. (엡5:20) “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령충만하면 감사가 넘칩니다. 마귀의 언어가 비난, 비방, 비판이라면 천사의 언어는 감사, 감사, 감사입니다. 불평과 불만의 언어는 사용할수록 불신의 늪에 빠지고 감사의 언어 축복의 언어는 사용할수록 생수의 강에 빠집니다. 거짓의 언어는 마귀에게 이용당하고, 감사의 언어는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감사의 언어는 서로가 서로를 살리고 세우고 키우는 언어입니다. 자녀에게 감사의 말을 하십시오. 부모에게 감사의 말을 하십시오.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감사의 말을 하십시오. 감사의 말이 넘치면 마귀는 그 사람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비난, 비방, 비판의 말에 익숙하면 마귀가 일하는 통로로 사용합니다.
* 성령으로 충만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셋째, 피차 복종합니다. (엡5:21) “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충만하면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맺혀져 갑니다. 복종한다는 것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서로 섬기려고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섬기는 공동체는 싸우지 않습니다. 다투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행복한 가정처럼 세워져 갑니다. 산본 교회는 성령충만하여 우리 시대 또 하나의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성찬으로의 초대 149장
1,2,3부 : 함께하고 싶은 사람, 꼭 피해야 할 사람, 엡5:1~10, 이상갑목사
드라마팀의 수준이 높아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습니다. (사진)
선교지에서 볼 때마다 은혜가 되어서 동남아 공연을 마치고 교회서도 나눕니다. 하나님 사랑을 잘 보여주는 드라마입니다. 수고한 다음세대를 위해 다시 한번 더 박수로 축복합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태국 선교의 자세한 보고를 풍성하게 나눌 예정입니다.
(사진)새봄 소년부 성경학교도 기도해 주셔서 잘 마쳤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참 좋습니다. 함께하면 할수록 닮아갑니다. 올림픽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딴 김길리 선수는 초등학교 때 본으로 삼은 선수가 최민정선수였다고 합니다. (사진 )
이번에 최민정선수와 함께 올림픽에 출전해서 영광이라고 고백하면서 두 선수가 1500미터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땄습니다. 김길리선수에게 본이 된 선수, 본으로 삼은 선수가 동네 스케이트장에서 만난 아마추어가 아닌 국가대표 선수였기에 그 자리에 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본을 받으면 닮아갑니다.
*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본받아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엡5:1) “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사랑하면 닮아갑니다. 닮아가는 방법은 2가지입니다. 첫째, 사랑하면 닮아가고, 둘째 미워해도 닮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함으로 닮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린 누군가를 사랑하면 닮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사랑을 할 줄 아는 능력이 커집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깊고 친밀하게 만난 사람들은 사랑을 하는 힘이 커집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 그 사랑을 공급 받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출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음입니다. 사랑을 받으면 얼굴이 밝아집니다. 사랑을 받으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 사랑 받은 사람은 그 사랑을 주신 하나님을 본받는데서 자라갑니다. 본이 있으면 본받게 됩니다. 본이 있으면 따라가게 됩니다. 여러분의 신앙과 삶에서 부모님이든 또 어떤 분이든 본을 삼고 본받으시면 그분을 닮아갈 것입니다.
* 우리가 받은 하나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엡5:2)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뿌리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우리이기에 사랑받는 존재로 사랑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드려진 사랑을 하셨습니다.
지난 목요일 심방을 하고 식사를 하는데 92세 되신 어머니를 챙겨드리는 70세 따님의 모습이 정겹습니다. 어머니께서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생하면서 자녀를 키우신 이야기를 하는 자녀의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아는 자녀, 어머니의 수고와 헌신을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은혜로 생각하는 자녀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우린 사랑을 받으면서 사랑을 배웁니다.
(시간 조절시 생략) 저도 아버지께서 6학년 때 갑자기 돌아가시고 어머니의 수고와 헌신을 보고 듣고 자랐습니다. 어머니니까 고생과 희생이 당연한가요? 아닙니다. 사랑하기에 대가지불을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아는 것이 은혜 받은 증거입니다. 효란 그 사랑을 알고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철이 든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은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숙의 재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행하신 일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면 변화됩니다. 요한복음 3:16은 말씀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주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생을 주시는 사랑입니다. 사랑하기에 대신해서 죽어주는 사랑을 알면 변화됩니다. 사랑하기에 하늘 영광 버리고 낮고 낮은 이 땅 위에 종의 형체로 오신 것을 알면 변화됩니다.
빌2:6~9절은 말씀 합니다.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사랑하기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하도록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사랑을 알면 변화됩니다. 사랑하기에 우릴 위해 피 흘리신 그 보혈이 우리 심장과 영혼을 적시면 변화가 나타납니다.
*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 자신이 꼭 피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음행, 더러운 것, 탐욕의 사람입니다. (엡5:3) “3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바울은 성도들에게 절대적으로 피해야 하는 3가지를 말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입니다. 이것은 인간을 타락 시키고 무너지게 하는 것들입니다. 주로 성적인 범죄와 관련됩니다. 음행은 결혼 생활 이외에 빚어지는 모든 성적 부도덕한 행위입니다.
더러운 것은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추한 모든 행위입니다.
탐욕은 끊임없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성적인 죄에 관대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도 성경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성적인 각종범죄는 말조차 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 그리스도인으로서 꼭 피해야 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둘째, 누추함,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엡5:4) “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습관이 된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그 말이 그 삶이 됩니다. 누추함이란 천하고 속되고 더러운 말입니다. 어리석은 말이란 죄악의 성향을 지닌 좋지 못한 말들입니다. 바보같이 중얼거리거나 분별없이 내뱉는 군소리들입니다. 희롱의 말은 외설적인 내용이나 상스러운 농담, 독설 등입니다. 사람이 타락하면 그 말이 오염됩니다.
말은 영혼의 온도계입니다. 우리를 영적으로 도약하도록 이끄는 말은 감사의 말입니다.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말을 하면 할수록 삶이 풍성해집니다. 감사의 말은 삶을 잔치하는 자리로 이끕니다. 감사를 싫어하는 이는 없습니다. 감사가 차고 넘치면 삶이 감사가 내는 길로 흘러갑니다. 감사를 자주 표현하십시오. 작은 감사라도 자주 표현하면 삶이 감사로 채색되어갑니다. 삶을 바꾸고 싶습니까? 먼저 말을 부정의 언어가 아닌 감사의 언어로 완전히 바꾸십시오.
* 그리스도인으로서 꼭 피해야 할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셋째, 우상숭배자입니다. (엡5:5) “5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모든 종류의 우상숭배자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무당과 점장이나 모든 귀신과 접신하는 사람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혼이 더럽혀지고 귀신의 영향을 받습니다. 성경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이들도 곧 우상 숭배자들이라고 말씀 합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자들과 연결되면 될수록 오염되어 인격과 삶이 더러워집니다.
성적으로 문제가 있는 목회자를 조사하거나 치리하는 일에 참여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이 사람들은 목사라는 직분은 가지고 있지만 우상숭배자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기 사랑에 빠져서 자기가 하나님 노릇을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인격적으로 함부로 대합니다. 사람을 이용합니다. 자기 멋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에게는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숭배하는 자기 과신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겸손하지 못하고 대부분은 교만합니다. 겸손한 척 잠시 꾸미지만 교만하기에 사람을 조정합니다. 마귀는 이러한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네가 네 인생의 주인공이다. 네 마음대로 해." 이러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면 어느 한 순간 경계선을 넘습니다. vs 지혜로운 사람은 선을 넘지 않고 선긋기를 잘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에 늘 자신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시간 조절시 생략) 마귀의 유혹에 그 누구도 예외는 아닙니다. 제 사무실에는 2대의 카메라가 늘 지켜봅니다. 그래도 대부분의 상담은 부목사님과 함께 진행합니다. 혼자 있는 경우엔 문을 열어둡니다. 개인적으로 차의 옆자리는 가족 외에는 못 앉게 합니다. 사무실 청소나 손님이 오시면 부흥회나 특별한 교회 행사 외에는 커피와 차 섬김이나 설겆이도 모두 제가 합니다. 저는 금욕주의자가 아닙니다. 편한 것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할까요? 마귀가 파고 들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목회자뿐일까요? 아닙니다. 우리 시대와 사회 자체가 에베소 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마귀의 유혹이 많아지는 시대입니다. 모두가 겸손하게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악한 시대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엡5:6) “6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헛된 말, 거짓과 속임수를 가지치기 하십시오. 이것들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통로입니다. 자주 거짓뉴스나 음모론을 주의하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헛된 말은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합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을 철저히 경계합니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주변에서 속이고, 거짓된 가르침으로 미혹하고, 세속적인 허망한 흐름에 사로 잡히도록 하는 것들을 가지치기 하라고 합니다.
*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거짓의 사람, 어둠의 사람, 미혹의 사람을 피하십시오. (엡5:7) “7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
결국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함께 하면 함께 죽습니다. 사기꾼과 함께 하면 결국 사기 당합니다. 도박꾼과 함께 하면 결국 도박으로 재산을 잃습니다. 거짓의 사람과 함께 하면 평생 가스라이팅 당하여 두려움에 끌려 다니면서 종노릇 합니다. 미혹의 사람과 함께 하면 결국 영혼은 파탄에 이릅니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는 노는 친구들이 꽤 있었습니다. 허세와 허영에 찌든 친구들을 보면서 함께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끝날 때까지 공부하는 친구들과 함께 동아리를 만들고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노는 친구들은 다른 학교 원정을 갔다가 50여명 가까이 퇴학과 정학을 당하였고 도서관에서 함께한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 진학을 하였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둠의 사람이 아닌 빛의 사람들과 함께 하십시오.
* 우리의 모든 좋은 변화는 존재의 변화에서 시작됩니다. (엡5:8) “8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어둠에서 빛으로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빛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있습니다. 어둠은 우리를 방황하게 합니다. 방탕하게 합니다. 빛은 우리를 질서가 회복되게 합니다.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합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이 밀려납니다. 거짓이 밀려납니다. 죄가 밀려납니다. 문제는 빛의 밝기입니다. 빛이 밝은 수준만큼 어둠은 밀려납니다.
*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인 빛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착함, 의로움, 진실함이 있는 사람입니다. (엡5:9) “9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착함은 관대합니다. 온유합니다. 도덕적입니다.
의로움은 공정합니다. 정의롭습니다. 올바른 행위를 추구합니다.
진실함은 행위가 순수합니다. 동기가 순수합니다. 삶과 인격이 정직합니다.
빛의 자녀들은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인격과 삶에서 자라고 꽃을 피웁니다. 오랫동안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의 신앙과 삶에 이런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 기쁨이요 감사요 은혜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러하기를 소원합니다.
*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인 빛의 자녀인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둘째,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을 시험하고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엡5:10) “10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시험한다는 것은 (도키마존테스) 여러 실험을 통해서 실증하고, 규명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실험하고 시도하는 것은 교회를 살아 있게 합니다. 산본 교회는 믿음의 도전, 믿음의 실험, 믿음의 시험을 하는 교회입니다.
이제 다음세대와 지역을 섬기는 복합문화 센타가 착착 진행 중입니다. (사진)
이름을 공모합니다. 이름과 그 이름을 지은 의미를 덧붙여서 사무실로 제출해 주십시오. 참 좋은 공간에 맞는 참 좋은 이름을 기다립니다.
부룬디의 어린이들을 위한 교실을 3개 건축에 들어가려고 최종적인 나눔을 마쳤습니다. 이 모든 것이 아름다운 믿음의 도전이고 실험입니다.
청년부에서도 청년들을 위한 희년은행을 만들려고 준비중입니다. 무이자로 돈을 빌리고 또 갚아가는 그런 은행을 청년들의 헌신으로 1,2년 안에 시작될 것이 기대가 됩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믿음의 도전과 실험을 이어 가십시오, 그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꼭 피해야 할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한 주간도 여러분 머무는 곳에서 함께 하고 싶은 사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길 바랍니다.
설교 후 찬양: 야곱의 축복
너는 담장 너머로 뻗은 나무 가지의 푸른 열매처럼
하나님의 귀한 축복이 삶에 가득히 넘쳐날 거야
너는 어떤 시련이 와도 능히 이겨낼 강한 팔이 있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와 언제나 함께하시니
너는 하나님의 사람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
나는 널 위해 기도하며 네 길을 축복할 거야
너는 하나님의 선물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열매
주의 품에 꽃피운 나무가 되어줘
살아나는 교회, 죽어가는 교회, 엡3:1~13, 이상갑목사
기독교방송국에서 한국교회의 목회 나침판과 같은 발제를 부탁 하여서 <목회, 나침판을 보다>라는 제목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발제를 준비하면서 교회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인데 정말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상 속에 존재하는가? 이 질문을 던지고 고민하면서 한국 교회를 향하여 4가지 목회 나침판을 제시하였습니다. 저희 교회가 나아갈 방향이기도 합니다.
첫째, 극단을 경계하여야 교회와 신앙이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극우든 극좌든 극단적인 경향이 강화되어가는 것은 위험 신호입니다. 성경의 진리에 따라서 선명한 경계선을 두어야 합니다. 신앙 위에 이념이 있으면 안 됩니다. 제사장적 관점의 사랑, 선지자적 관점의 공의의 두 축을 견지하면서 성경이라는 나침판을 따라갈 때입니다.
둘째, 청년과 다음 세대 살리기의 마지막 시그널을 읽어야 합니다. 앞으로 기회의 파도는 계속 오지 않습니다. 지금은 자녀 세대의 산앙을 위하여 지원, 자원, 후원에 집중할 때입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 될 것입니다. 산본 교회는 지난 10년 믿음의 실험을 하면서 인구 5만이 줄어든 고령화 지역에서 영적 사막화가 심각하지만 청년과 신혼부부가 아주 건강하게 세워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모세대와 자녀 세대가 함께 하는 특별새벽기도회, 부흥회, 수요성령집회를 통해 함께 만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청년과 다음 세대 복음화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최우선 순위입니다. 다음세대를 위해서 아낌없이 주는 나무같은 교회가 산본교회입니다.
셋째, 불신자의 눈으로 상식의 관점으로 교회를 객관적으로 보아야 할 때입니다. 상식과 불신자의 눈으로 보아야 제대로 보입니다. 그래야 전도의 문이 열리도 선교의 문이 열립니다. 불신자의 기독교 호감도 9% 비호감도 91%의 시대를 마감하려면 이런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합니다. < 교회가 시대를 해석해 내는 능력이 있는가? 세대를 맞춤식으로 접근하는 성육신적 사고가 가능한가? > 불신자 복음화는 상식의 눈으로 또한 불신자의 눈으로 냉정하고 냉철하게 내부를 볼 수 있어야 가능해집니다. 시대의 눈으로 해석하는 통찰력과 세대의 눈으로 보는 성찰을 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넷째, 목회적관점에 선교적 관점을 더하여야 미래를 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아시아 최초 다인종. 다문화 국가 271만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5.2% 가 이주민입니다. 새로운 관점이 필요합니다. 국내에서도 인종과 민족을 넘어서는 타문화권 선교가 필요합니다. 태국선교는 해외로 가지만 2월 11일에는 몽골선교를 중랑구로 갑니다. 제가 2년동안 지도하고 설교로 섬겼던 몽골인 교회가 개척을 해서 한국에 있는데 집회요청이 있어서 사례비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한국적 상황에서 이주민 복음화는 세계 열방에서 우리에게 선교를 국내에서도 하라고 우리 곁에 모아 주셨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4가지가 너무 중요합니다. 4가지 방향으로 간다면 살아나는 교회가 될 것이고 이것들을 놓치면 죽어가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산본 교회가 4가지에 초점을 맞추고 미래를 열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죽어가는 교회들, 마른 뼈 같은 교회들이 가득한 상황에서 살아나는 교회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 살아나는 교회는 첫때, 그리스도 예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소명자가 있습니다. (엡3:1) “1 이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이 말하거니와”
- 복음은 그냥 전해진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그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고 헌신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인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 바울은 예수를 위해 갇힌 자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 속에 갇혀서 에베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의 종이 아닌 예수의 종입니다. 제도권의 종이 아닙니다. 황제의 종이 아닙니다. 소유의 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복음의 종입니다. 그는 사명자요 소명자입니다.
우리에게도 바룰처럼 복음 안에 세워진 정체성이 필요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나는 예수님의 사람이다. 나는 성령의 사람이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이러한 복음으로 세워진 정체성은 삶을 형성합니다.
저는 고2 때 교회학교 선생님이셨던 이경식 선생님이 복음을 처음 설명해 주었습니다. 영적으로 갈급해 있을 때 사영리를 가지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때의 그 순간, 그 예배당, 그 느낌까지 기억이 납니다. 당시엔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거듭난 이후에 이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린 그리스도 예수의 종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그 분은 여러분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알게 해주고 영원한 생명의 진리로 인도했기 때문입니다.
* 살아나는 교회는 둘째, 그리스도의 비밀이 숨 쉬고 있습니다. (엡3:2~5) “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먼저 간단히 기록함과 같으니 4 그것을 읽으면 내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 수 있으리라 5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으니”
여기에 중요한 단어들이 나옵니다. 은혜의 경륜,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은 이방인 구원 계획을 위한 바울의 사도직을 말합니다. <비밀, 그리스도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 복음을 말합니다. 이방인들도 유대인처럼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말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비밀은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십자가 죽음은 우리 죄를 위한 죽음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면 복음의 진수를 깨닫는 것입니다.
비밀은 은밀한 것입니다. 감춰진 것입니다. 밭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대가지불을 합니다. 그 밭을 삽니다. 비밀을 알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비밀입니다. 이 비밀은 은혜를 입은 자에게 알려집니다. 이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인생에게 나타납니다. 이 비밀은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는 밝히 나타났습니다. 복음은 모든 사람이 들어아 합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성경공부를 <비밀>로 해야 한다고 하면서 속이고 감추고 숨기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천지를 비롯한 이단이나 사이비입니다. 이들은 비밀을 강조합니다. 남들은 모르는 것을 자신들만 안다는 은밀한 특권의식과 호기심을 심어 주어서 속입니다. 사람들은 비밀이라고 할 때 호기심을 느끼고 그 비밀을 지키려고 합니다. 이것을 이단과 사이비가 가장 잘 사용합니다. 신천지는 성경공부를 은밀히 시키면서 < 이 비밀을 때가 되면 봉인을 해제해도 되는데 지금은 아니다. 부모님에게 알리지 마라. 사역자에게 알리지 마라. 비밀을 지켜라. > 이렇게 은밀성을 강조하면서 세뇌를 시킵니다. 그들은 비유풀이나 계시록풀이 등 모든 성경공부가 이단 사이비의 계보에서 짜집기를 한 것인데 마치 자신들이 무슨 보불을 발견한 것처럼 위장함으로 거짓으로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제 복음은 비밀이 아닙니다. 모든 민족에게 모든 열방에게 전파되어야 할 복 된 소식입니다. 복음의 사람은 투명합니다. 맑고 밝고 환합니다.
* 살아나는 교회는 셋째, 상속자, 지체, 약속에 참여하는 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엡3:6) “6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복음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고 그 비밀의 주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순간부터 상속자, 지체,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됩니다.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믿는 하나님 나라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 가족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게 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상속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고 예수님을 여러분의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순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연합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순간부터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상속자가 됩니다. 롬8:16,17절은 말씀 합니다. “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갈라디아서4:6,7절은 말씀합니다.“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상속자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함께 지체가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우리는 그 몸의 지체가 됩니다.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 주인, 주관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엡4:15,16절은 말씀 합니다.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고린도전서12:12,13,27절 말씀입니다. “12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골1:18절은 말씀합니다.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우리는 지체요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우린 혼자가 아닙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상호의존합니다. 상호책임집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됨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약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동일하게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이 우리에게도 참여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갈3:22,27~29절은 말씀 합니다.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영접 하고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로 옷입은 것입니다. 그 결과 약속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간부터 존귀한 인생입니다.
* 살아 있는 교회는 넷째,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들이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엡3:7~9)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일꾼 됨은 선물입니다. -> 일꾼은 3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 복음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섬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닌 복음을 위하여입니다. 그것이 건강한 섬김입니다. 섬김을 사람에 초점을 주면 상처 받기 쉽습니다. 사람은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일꾼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해야 합니다. 성령충만하면 왠만한 상처를 다 밀어냅니다. 튕겨냅니다. 상처가 다가와 손짓하면 매몰차게 튕겨 내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해집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일꾼 됨은 은혜의 선물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음이 은혜입니다. 은혜에 반응하는 삶이 기쁨이요 감사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직분이 계급입니다. 저희 교회 중직자는 계급이 아닌 섬김의 직분입니다. 저희 교회는 중직일수록 더 중하게 섬겨야 합니다. 중직자일수록 더 기도하고 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도들의 의견을 두루 살피고 신앙과 삶을 두루 살피고 중보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일꾼됨은 교회 뿐 아니라 회사에서, 가정에서,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섬기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 회사에서 중직을 맡아서 섬기는 데 주를 사랑함으로 섬기면 직장속의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 가정에서 연로하신 부모님을 향한 섬김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찾아뵙는 것, 전화 드리는 것, 맛있는 것을 대접해 드리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무엇보다 복음 전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대를 기뻐하십니다. 개인전도를 기뻐하십니다. 직장 속에서 전도하기 위해 행하는 모든 것을 기뻐하십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태국 선교팀 선교중입니다. 내일 어린이 팀도 출발합니다. 저는 해외 여행도 좋지만 해외 선교에 꼭 1번은 참가를 해 보라고 권합니다. 해외여행은 맛 집 투어고, 뷰 포인트 투어입니다.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올립니다. 선교여행은 복음투어입니다. 영적순례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저는 안식년에도 선교지를 가고 최선을 다해서 선교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고 복음의 여사를 느끼고 오려고 씨름합니다. 제 안에 복음과 하나님 나라가 살아 숨 쉴 때 그 은혜가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변질되지 않고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봉사자를 1년에 4번 공식 모집하고 수시로 필요한 부분은 상시 모집을 할 예정입니다. -> 코로나를 지나면서 많은 교회들이 식당의 문을 닫았습니다. 산본 교회는 코로나를 지나면서 봉사자의 섬김으로 차고도 넘치는 은혜로 섬김을 활발하게 이어갑니다. 구역마다 함께 섬겨 주시니 힘이 됩니다. -> 남,여선교회도 복음의 일꾼이 된 기관입니다. 남여선교회는 말 그대로 선교를 위해서 조직된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에서 먹방으로 바뀌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모이면 복음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동산과 부동산 이야기를 나누고 주식과 코인 이야기만 나누다보니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본교회 남, 여 선교회는 복음을 나누고, 은혜를 나누는 그리스도의 몸 된 기관입니다. 함께 참여하시고, 지체로서 힘을 보태 주십시오.
남,여 선교회는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 바로 이것이 목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저는 자주 여전도회에서 섬기는 교회를 방문하곤 합니다. 십시일반으로 만원씩 모아서 후원하는데 그것이 개척교회와 미자립교회에 큰 힘이 되어 줍니다. 돈가스를 만들어 팔고, 바자회를 섬기고, 다양한 섬김을 통해서 선교사님들을 후원하고, 여러 목회자들을 지원해 주는 것이 참 고맙습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 살아 있는 교회는 다섯째,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엡3:10~12)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교회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보고 듣고 배우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 하셨습니다. 교회는 가정과 더불어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교회는 시시때때로 부패하고 타락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은 교회를 말씀으로 새롭게 하시고,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 시대 속에서 일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신비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 교인들이나 산본교회 교인들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 가운데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과 친밀함 사귐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는 죽어가는 교회가 아닌 살아나는 교회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사람입니다. (엡3:13)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바울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과 각종 고난과 환난 때문에 조금도 근심하거나 낙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해 받는 환난과 고난은 영광이라고 격려합니다. 여러 환난 가운데서도 바울은 미래를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환난조차도 영광이 됨을 봅니다. 세상과 다른 가치입니다. 세상과 다른 생각입니다. 세상과 다른 삶입니다.
에베소처럼 영적으로 무너지는 시대에 저희 교회는 수요성령집회를 통해 찬양- 말씀-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합니다. 일주일의 한번의 예배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수요일 한 주간의 절반 지점에서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면서 살아가기를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 기름부어주신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다시 교회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능히 이 시대를 이길 것입니다. 그러면 죽어가는 교회가 아닌 살아나는 교회로 우리도, 가정도, 교회도 세워질 것입니다.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 땅 가득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 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리는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 볼 때까지
담을 만드는 교회, 담을 허무는 교회, 엡2:11~22, 이상갑목사
이번 주간은 산본교회 78주년입니다. 지금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금요일은 고등부, 토요일은 중등부 수련회에 가 보았습니다. (사진)
정말 역동적이고 참 좋았습니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됩니다. 오늘 우후에는 중직자 은퇴 및 임직식이 있습니다. 기도해주시고 축하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담을 만드는 교회, 담을 허무는 교회>입니다.
직장 생할을 3년하고 대학 입시를 준비할 때입니다. 동생도 고3 이고, 저도 직장 생활을 마치고 신학을 하고자 공부할 때입니다. 집 주인이 입시 1달을 남기고 갑자기 전세값을 너무 심하게 올려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어머니는 입시생이 2명이나 봄에 이사 갈 수 있도록 배려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매몰차게 거절했습니다. 반지하였기에 아버님이 남기신 빚을 갚고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이사할 집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1층은 단란주점이어서 밤마다 소양강 처녀가 울려 퍼졌습니다. 중년 남성들이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를 외칠 때 젓가락을 두드리면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그 소리 때문에라도 공부를 할 수 없는 저도 슬피 울었습니다. 정말 이사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돈이 없어서 도무지 이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자 집 주인은 방2개 가운데 1개를 사무실로 사용하겠다고 비우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공부하고 돌아와 보니 방1칸에 사무 집기를 가득 채워 두었습니다. 입시 1달을 앞두고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실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저 내쫓기 위한 횡포였습니다. 정말 공부를 하고 싶어서 밤에 그 방에서 공부를 하면 불빛을 보고 주인은 도둑이냐고 왜 남의 사무실에서 공부하냐고 고래고래 창을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때 악마를 보았습니다. 적어도 그런 사람을 사람답다고 보기는 힘들었습니다. 어머니보다 족히 20살은 어린 집 주인은 어머니에게 막말을 하면서 무시하는 모습을 보면서 분명 악마를 보았습니다.
그 다음 해 그 집을 떠나 이사를 했고 몇 년 후 우연히 그 옆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옆 집 주인은 사업에 망하여 야반도주를 했다는 말이 들렸습니다. 그때 마음속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보다는 "그 인간 그럴 줄 알았다."였습니다.
"우리 가족을 그토록 괴롭히더니 너도 한번 당해봐라." 이런 마음인 셈입니다. 미움, 다툼, 시기, 질투를 버리고 사랑하기에는 받았던 상처가 너무 컸던 모양입니다. 세상은 크고 작은 이런 일들의 연속입니다. 세상은 언제는 담을 쌓습니다. 사람을 차별합니다. 자신보다 부족하면 무시합니다. 자신보다 약하면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사람을 차별한다는 실상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별되지만 세상에서 차별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3부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엡2:11~12절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를 말씀 합니다. 엡2:13~18절은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다룹니다. 엡2:19~22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를 다룹니다.
* 과거에 그리스도 밖에 있는 우리는 어떤 존재였습니까? (엡2:11,12)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생각하라는 말은 기억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입니까? 1절에서 언급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신 것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은혜의 시작, 과정, 결과를 기억하면 함부로 못 살게 됩니다. 과거의 나를 기억하면 함부로 못 삽니다.
저는 1년에 몇 번은 제가 만든 기도터를 방문하곤 합니다. 이번에도 히브리서 연구를 하는 세미나를 하면서 잠시 제가 기도했었던 산꼭대기의 기도터를 다녀왔습니다. 올라가는 길이 거칠었습니다. 비탈진 경사와 눈과 낙엽으로 자꾸 미끄러집니다. 눈이 신발 안으로 들어옵니다. 차갑습니다. 운동화도 눈이 녹으면서 물이 배여 듭니다. 그래도 기도터에 가서 기도하는 것을 포기할 수 없어서 끝까지 올라갔습니다.
제가 만든 기도터인 에벤에셀에 도착하니 눈에 덮힌 십자가가 보입니다. 눈을 치우고 학부 때처럼 청년의 마음으로 십자가 위에서 기도를 합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승리케 하신 하나님, 앞으로도 인도하시고 산본교회가 축복의 통로로 주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로 쓰임받게 하소서” 그리고 마지막 밤에 새벽기도회를 거의 빠지지 않고 드렸던 다락방 기도실에 들려 찬양을 올려 드렸습니다. "주님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써 주소서. 나의 맘 나의 몸 주께 드리오니 주 받으옵소서" 갑자기 울컥하고 눈물이 쏟아집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은혜요 감사라고 느껴졌습니다. 생각하고 기억하는 장소에서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인생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고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이 너무 크기에 그만큼 변화되었습니다. 얼마 전 딸이 질문 했습니다. “아빠는 다시 기회가 주어지고 돈과 모든 것이 다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고 싶어요?” 저는 망성임 없이 바로 답했습니다. “아빠는 목사로서 교회를 섬겼으니 또 다시 기회가 있다면 선교사로 가고 싶다.” 그렇습니다. 저는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경험했기에 더 좋은 목사, 더 좋은 선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생각하고 기억하면 바뀝니다. <육체로는 이방인,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 그리스도 밖에 있었던 인생,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던 우리였습니다. 그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리신 은혜를 기억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은혜를 망각하면 철부지 신앙인이 되고, 은혜를 기억하면 철 든 신앙인이 됩니다. 과거 죄악의 종노릇, 어둠의 종노릇, 마귀의 종노릇하던 데서 해방된 은혜를 기억하면 죄악된 삶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은혜 없는 편안함보다 은혜가 넘치는 불편함이 좋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말합니다. <네가 누구였는지 기억하라> 에베소 교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세계를 기억했을 것입니다. 에베소 지역은 이방 신전으로 가득했던 곳입니다. 온갖 우상 박람회 수준으로 영적으로 어둡고 칙칙한 곳이었습니다. 우상숭배와 그에 따른 음란한 성 문화와 쾌락을 추구하는 시대 풍조가 가득하였습니다. 황제숭배를 하면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차별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차이와 차별이 가득하였습니다. 생각하라. 기억하라는 것은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이 뭔가를 묻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고 하나님이 없 자처럼 살아가는 이방인 세상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기에 뭐가 다른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뭐가 달라졌습니까? 사실 오늘 여기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부교역자로 사역하면서 심방을 갔는데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담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물어 보았습니다.
"왜 저런 흉한 담을 세웠어요?"
"목사님 저는 반대 했는데 아파트 주민들이 품격 떨어진다고, 아파트 값 떨어진다고 임대 주택과 분리하기 위해서 담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부탁 드렸습니다. "기회 있는대로 저 담을 허물자고 이야기해 주세요. 저런 담이 많아질수록 집값은 올라갈지 모르지만 혐오와 배제를 조장하고 사람을 아파트 평수로 사람을 차별하잖아요. 그러면 아이들이 뭘 배우겠어요. 저 담 빨리 허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믿기에 시대 풍조와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은 담을 만듭니다. 인종의 담, 학벌의 담, 스펙의 담, 아파트 평수와 차량 종류에 따라서 담을 만들기도 합니다. 심지어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에 담을 만들어 이동을 차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고약한 마음입니다. 사실 그게 하나님 없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아파트뿐일까요? 세계사는 전쟁사이기도 합니다. 힘이 센 나라가 임이 약한 나라를 침범하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 기록이 세계 역사입니다. 2차 대전 이후에 인간의 죄성을 직면하면서 평화의 시기를 보냈지만 최근 다시 나라가 나라를, 민족이 민족을 대적합니다. 힘의 논리가 다시 힘을 얻고 있습니다. 지구에서 평화의 시기는 길지 않습니다. 전쟁의 연속입니다. 분열과 분쟁의 연속입니다.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죄가 자리한 이후로 인간은 가인의 말을 자주 합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은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뻔뻔하게 발뺌을 합니다. 죄는 하나님을 떠나게 합니다. 죄는 형제도 죽이게 합니다. 죄는 상호책임지거나 상호 의존하기 보다는 나만 생각하게 합니다. “내가 약자를 지키는 자입니까? 내가 소외된 이들을 지키는 자니이까?” 작게는 우리 마음속에서도 죄와 벌이 작동을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내가 아벨을 지키는 자니이까?” 이 소리가 넘쳐 납니다. 곳곳에서 아벨의 피가 호소합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인생사는 전쟁사요 잔혹사요 양육강식의 역사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첫째,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으로 이끄셨습니다. (엡2:13)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예수님의 피는 용서입니다. 희생입니다. 사랑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흘리셨기에 하나님의 용서를 가져 왔습니다. 분리되고 단절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회복 시켜서 다시 가깝게 하였습니다. 친밀한 사귐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친밀함이 회복되었습니다.
*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둘째, 그리스도의 육체의 대속적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케 하는 관계 속으로 이끄셨습니다. (엡2:14,15)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님은 우리의 화평입니다. 화평은 샬롬을 의미합니다. 삶의 총체적인 행복과 평안이 샬롬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보혈의 피가 막힌 담을 허무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었다가 예수님을 믿게 된 에베소 교인 사이엔 막힌 담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선민의식이 대단했습니다. 특권의식이 대단했습니다. 그들 사이에 파고 들어갈 틈이 없었습니다. 이방인은 기존의 모든 관계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사실 에베소 사람들의 모든 관계는 우상숭배를 중심으로 하는 네트워크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다 우상 숭배 중심의 네트쿼크가 형성된 상태인데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 모든 관계망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때로 고난과 가난을 의미합니다. 고립을 의미합니다. 기회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부, 명예, 권력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가족과 친지 집단으로부터의 퇴출을 의미합니다. 그런 엄청난 대가지불을 했는데도 정통 유대인들은 그들을 멀리 합니다. 소외시킵니다. 끼리끼리만 있고 파고들어서 서로 어우러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예수님 안에 더 깊이 은혜를 경험한 유대인과 이방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화평이 존재합니다. 왜 입니까?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진 새 사람이 됩니다. 새 사람의 특징은 화평입니다. 샬롬입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을 잘 믿을수록 기득권이 무너집니다. 특권의식이 사라집니다. 선민의식이 사라집니다. 사람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곳엔 오직 은혜로 가득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 은혜를 경험할수록 막힌 담이 사라집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계층을 만들지 않습니다. 소외 시키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도 예수님을 진짜 잘 믿을수록 그들은 담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 담을 허무는 인생이 됩니다. 하나됨이 어려운 것은 자신이 하나님 노릇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준이 자기 자신입니다. 내 생각, 내 뜻, 내 의지, 내 계획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회복되면 예수님이 기준입니다. 예수님이 척도입니다. 예수님이 본입니다. 예수님이 모델입니다.
*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셋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평안의 사람으로 이끄셨습니다. (엡2:16~18)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몸 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이 머리가 되시고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그 몸의 지체가 되기 때문입니다. 각각이 아닙니다. 한 몸입니다. 이전에는 원수된 관계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한 몸으로 바뀝니다. 지체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평안이 임합니다. 화평이 임합니다.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한다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민족과 열방 가운데 함께하도록 헌신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은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모두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도록 이끕니다. 하나됨의 관계속으로 이끕니다. 복음이 이 땅에 처음 들어 왔을 때 백정이었던 박성춘은 선교사님의 초대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합니다. 그가 교회에 오자 양반들이 대다수였던 교회에서 큰 소란이 생깁니다. 그리고 많은 양반들이 백정과 함께 교회 다닐 수 없다고 떠납니다. 그들은 진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이들은 아니라고 보입니다. 그러자 박성춘은 최선을 다해 전도를 하고 섬깁니다. 그리고 그는 승동교회 첫 번째 백정 출신 장로가 됩니다. 진짜 예수님을 믿는 양반들은 그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는 형제자매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유사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모교회에서 전도사가 되었을 때 회사 다닐 때 사장님과 과장님이 같은 교회에 있었습니다. 사장님이셨던 장로님은 교회 사역자로 섬기도록 추천을 해 주시고 또 부서 교사로 함께 섬겨 주시면서 최고의 응원자요 격려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사역자로 잘 섬겨 주셨던 덕분에 부족함과 연약함이 많았던 제가 사역자로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었습니까? (엡2:19)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예수의 피와 십자가로 인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하나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우린 더 이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외인이 아닙니다. 우린 돌아갈 본향이 없는 떠돌이 나그네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돌아갈 본향, 내 아버지의 집이 있습니다.
* 담을 허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엡2:20)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담을 허무는 것은 무엇입니까? <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는 것입니다. <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란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의미합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면 그 순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모퉁이돌은 가장 중요한 기초석입니다. 모퉁이돌은 모든 부분을 연결합니다. 결국 하나님이 성도들을 세우시는 주체입니다. 성도들은 택하신 분도 하나님, 부르신 분도 하나님,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 삼아 주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 담을 허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엡2:21)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우리는 어떻게 성전이 되어 갑니까? 그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합니다. 연합합니다. 그리하여 성전이 되어갑니다. 여기서 성전에서 사용 되는 용어가 일반적인 건물로서의 성전을 의미하는 <히에론>이 아닙니다. 성전 내부를 가르키는 용어인 <나오스>입니다. <나오스>는 건물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나오스>는 하나님이 거주하시고, 하나님이 만나시고, 하나님이 교제하시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에베소서의 여러 신전들은 크고 웅장함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강조하는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보혜사 성령님을 친밀하게 경험하고 있는 그 성전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교회입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됩니다. 우리가 담을 허무는 교회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함으로 지체가 됩니다. 지체가 된다는 것은 외인으로 머물지 않는 것입니다. 저희 산본교회는 돌아가면서 식당 설겆이 봉사를 합니다. 함께 섬겨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문화센타가 완성되면 그곳에도 많은 봉사자들이 필요합니다. 일상의 선교사라는 마음으로 함께 섬겨 주실 분들이 많이 세워지기를 기대합니다. 문화센터는 점점 모습을 갖추어 갑니다. 다음 주에는 조감도도 걸릴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으로 섬겨주실 봉사자들이 필요합니다. 2월중에 모집할 예정입니다. 주중의 일상 선교사로 봉사해 주신다면 이웃을 환대하는 공간이 더욱 살아날 것입니다.
* 담을 허무는 그리스도인은 현재 어떤 존재로 살아갑니까? (엡2:22)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삼위 일체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입니다. 성령 안에 거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어져 가는 존재입니다. 지어져 간다는 것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습니다. 이미 구원 받았습니다. 아직 완전한 구원은 오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생각 하십시오.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는 건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입니다. 기억 하십시오. 우리가 막힌 담을 허무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우리는 담을 쌓는 모든 곳에서 담을 허무는 교회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입니다.
설교 후 찬양: 주는 평화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염려 다 맡기라 주가 돌보시니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주일1,2,3부 : 살리셨고, 일으키사 엡2:1~10절, 이상갑목사
주일 4부 : 사랑을 받을수록 살아난다. 엡2:1~22절, 이상갑목사
지난 주간 신년부흥회는 은혜 가운데 마쳤습니다. (사진) 함께여서 행복했습니다.
손자와 할아버지, 사위와 장모님, 딸과 아빠의 메시지를 통해 풍성함을 누렸습니다. 다음 세대가 마지막 날 찬양을 섬겨 주어서 참 좋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면서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때 영적 실상을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영적 진단을 하게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엡2:1)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죽어 있습니다. 허물은 바른 길에서 이탈해 있음을 의미합니다. 죄는 표적에서 빗나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허물과 죄 때문에 하나님과 단절되고 분리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영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순간부터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 영은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 함께 하십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 다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인간의 실존은 어떠합니까? 첫째,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른다는 것입니다. (엡2:2)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영적으로 죽어 있으면 우리를 조정하는 것은 세상입니다. 육체의 욕심입니다. 마귀입니다.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세상풍조는 유행입니다. 한국인은 유독 유행에 민감합니다. 산엘 가도 약간 과장하면 다 에베레스트 등정복 차림입니다. 학생들도 다 동일한 메이커의 동일한 옷, 가방, 신발을 신습니다.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고 살면 왕따가 된다고 생각해서 두려워합니다. 이런 세상 풍조를 이기는 힘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됨의 정체성과 자존감입니다.
세상 풍조는 돈입니다. 세상은 돈이 왕이다라고 합니다. 돈이면 뭐든 됩니다. 돈의 힘을 어린아이들도 경험합니다. 그러다보니 초등학교 졸업식을 보니 장래희망이 거의 돈 버는 것과 관련됩니다. 부자, 최고부자 되는 것이 꿈입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졸업식에서 장래 희망이 여군, 회사원, 등 평범한 내용이 더 귀하게 여겨졌습니다. 분명한 것은 돈은 가치중립적입니다. 돈을 잘 벌어서 좋은 일에 사용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돈이 신의 자리를 대신한다면 위험합니다. 돈은 거짓 신으로 우리 삶에 군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돈을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풍조는 명품을 추구합니다. 언젠가 부자 성도, 힘 있는 성도들만 관리하는 목사를 보면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목사는 설교 준비를 교인들의 사업장 가서 합니다. 그때마다 기도해 주고 콩고물을 챙깁니다. 해외 여행을 갈 때도 몸 종 부리듯 성도들의 차량 서비스를 적극 활용합니다. 태워다 주고 태우려 오게 합니다. 그것을 성도가 영광스럽게 여기도록 그루밍합니다. “이런 목사가 정상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일어난 일입니다. 동대문의 통일 상가에서 10만원대에 산 양복을 10년 넘게 입고 있었습니다. 그날 온 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목사를 만났습니다. 그 목사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요즘 청년 목회를 하려면 명품 옷 정도는 입어 줘야 합니다. 제가 입은 이 명품 옷을 보고 감각 있다고 등록한 청년들도 있습니다." 순간 어안이 벙벙하였습니다. "뭐 이런 목사가 있나?" 말로 하지 않았지만 답답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분이 명품으로 끝내지 않고 3억이 넘는 외제차를 타고 다닌다고 자랑하였습니다. 그것도 성도가 선물로 사 준 것 이라고 자랑을 합니다. 그분은 수시로 성도들의 돈을 플로잉 받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말했습니다. "저는 성도들의 플로잉은 개척 교회, 미자립 교회, 선교사님들의 후원으로 사용합니다. 성도들의 눈물, 피, 땀인데 함부로 저를 위해서 사용하지 못하겠더라구요." 그 말을 한 이후로 저와 그 분 사이엔 긴 침묵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따라 살면 세상 풍조에 의해 흔들리지도, 휘둘리지도 않습니다. 저는 가끔 옷을 아름다운 가게에서 사 입습니다. 시가보다 아주 저렴합니다. 그것 때문에 제가 저렴해지지 않습니다. 또 편하게 입는 옷으로 가끔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에서 사 입지만 그것 때문에 자존심 상하거나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세상 풍조는 명품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명품인생으로 살면 굳이 명품을 사지 않아도 자존감도 건강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머물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면 누구나 명품 인생입니다.
반대로 사단, 마귀를 따라는 이들도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공중의 권세 잡은 자는 누구입니까?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사단, 마귀입니다. 상상이 아닙니다. 실제하는 영입니다. 우리 삶을 파고들어서 어둠의 영향을 끼칩니다. 사단 마귀가 좋아하는 사람은 불순종의 아들들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단 마귀는 구체적으로 역사하여 자신을 따르게 합니다. 처음에는 좋아 보이지만 결국은 비참합니다. 무속인를 보면 행복하거나 거룩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의 길흉을 말하며 속고 속이고 이용합니다. 그 결국은 초라합니다. 누구든지 사단 마귀를 따라가면 거룩해지지 않습니다. 깨끗하지 않습니다.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단 마귀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인간을 속이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단 마귀와 결속한 종교는 항상 성 문제가 생깁니다. 돈 문제가 생깁니다. 정치적 로비를 일삼습니다. 우린 사단 마귀의 하수인들과 선긋기를 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단 마귀가 속이면서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내 몰아가는 것은 이념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 주인, 주관자가 아니라 이념이 신앙 위에 있으면 거짓 신앙입니다. 마귀는 이념을 따라 가도록 속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특정 집단의 편이 아닙니다. 교회는 특정 사람의 편도 아닙니다. 교회는 특정 정당의 편도 아닙니다. 교회는 부자 편도, 약자 편도 아닙니다. 성경적으로 본다면 교회는 공의와 사랑의 편입니다. - 교회는 진보와 보수, 여당과 야당의 이념과 성향에 갇히지 않는 공동체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2가지 중요한 성품인 사랑과 정의를 따라 가는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느 시대나 성경을 따라 갑니다. 성경이 우하면 우하고, 성경이 좌하면 좌하는 공동체, 좌와 우 이 둘이 만나고 어우러지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진보도 보수도 하나가 되는 공유, 공감, 소통 가능한 집단이어야 정상입니다. 교회는 여당 지지자도 야당 지지자도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체가 정상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그 몸의 지체로 존재하는 공동체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입니다. 사단 마귀는 어찌하든지 이념과 진영논리로 교회를 분열하게 만들고 분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교회는 신앙 위에 이념을 둘 수 없습니다. 교회는 진영 논리가 성경 논리를 앞서지 않는 곳입니다. 다시 그리스도의 몸 된 영광스러운 교회를 고민할 때입니다. 이념으로 갈라진 틈 사이에 서서 성경의 진리를 들고 외칠 때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인간의 실존은 어떠합니까? 둘째,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입니다. (엡2:3)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이것이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육에 속한 사람에게서 성령이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쾌락을 추구합니다. 탐욕, 탐심을 추구합니다. 내가 왕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죄와 악을 행합니다. 왜 그렇게 살까요? 성경은 명쾌하게 알려 줍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성령의 통치와 다스림을 떠난 모든 사람은 진노의 자리에 머무는 진노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통일교나 신천지 등의 교주를 추종하며 거짓과 미혹이 특징인 삶을 삽니다. 그 자체가 저주요 거짓 신을 믿기에 지옥에 가는 것이 저주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 찾아 오는 것은 죽음과 어둠의 종노릇과 저주입니다. 이것이 죄의 증상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 나라를 고민하지 않게 됩니다. 육체의 욕심은 자연적인 욕망들인 음식, 잠, 성욕 등 인간의 자연적인 욕망들이 죄의 성격을 띄는 욕망들로 변하는 것들입니다. 마음의 욕심은 지적인 자만과 교만, 그릇된 야망, 진리를 거부하는 생각, 해롭거나 죄짓는 마음입니다. 인간은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최와 허물로 육체적 죽음과 영적죽음을 경험합니다. 세상과 육체의 욕심과 마귀에 예속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저주에 처합니다.
인간은 육체의 욕심과 마음의 욕심에 빠지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고민하거나 고뇌하면서 묵상하고 순종하는 삶이 사라집니다. 언젠가 어떤 사역자의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설교 준비는 10분이면 충분합니다."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진담이었습니다. 그리고 영업 비밀을 자랑스럽게 털어 놓았습니다. AI에게 시키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순간 "이건 아니잖아."라는 탄식이 마음속에서 나옵니다. 설교자로 고민, 고뇌, 고독이 사라지고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그저 먹고, 놀고, 자는 원초적 본능에 충실하다면 위험 수위를 넘어선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목회가 무거운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시대와 세대를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의 힘든 삶의 현실을 보고 듣고 고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마주하는 고독한 공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강단은 말잔치가 풍성합니다. 연기력도 탁월합니다. 울리고 웃기고 자유자재입니다. 심지어 설교하면서 눈물까지 흘립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목사가 아니라 광대입니다. 삶이 빠진 말만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연기와 연출은 잘하지만 정작 삶을 파고 들어가면 십자가가 보이지 않습니다. 말은 잘하나 삶은 잘 살지 못하는 이것이 진짜 비극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가지 않고 성령의 감동감화를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노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초대하셨고 그 초대에 반응해서 우리가 영적으로 살아나고 일어나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엡2:4,5)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크고 놀라운 사랑입니다. 아들을 내어 주신 사랑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새로운 구원의 길을 열었습니다. 부활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무엇입니까? (엡2:6)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죽음의 권세가 사라졌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이 부활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은 우리에게 전가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또 함께 일으키사 >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셨습니다. <살리셨고, 일으키사> 이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적용됩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회복 시켜 주셨습니다. 자세히 본문을 살펴 보십시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사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3개의 동사가 연결되어집니다. 살리다. 일으키다 앉히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부활과 생명을 간접적으로 경험합니다. 간이식을 합니다. 신장 이식을 합니다. 세포이식을 합니다. 피를 투석합니다. 새로운 생명의 시작입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이것은 부분적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언젠가 우리는 온전한 생명, 온전한 부활을 우리는 경험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자로 살아가는 완전한 그날이 올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리시고 일으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엡2:7)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우리의 구원은 우리만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 오직 은혜로 받은 구원을 우리를 통해 세상 가운데 전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치유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회복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꿈을 꾸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가정에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부부가 생명력이 더해지기를 바랍니다. 부모와 자녀가 생명이 넘치는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우리 교회에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이번 주부터 수요 예배가 수요 성령집회로 드려집니다. 수요성령집회에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치유가 나타나기를 사모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차고도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자녀세대와 부모세대가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며 말씀 듣는 가운데 그 은혜의 풍성함을 경험하여 알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한 주간의 중간 지점에 오프라인으로 현장에 나와서 찬양, 말씀, 기도 가운데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그 은혜의 풍성함을 경험하여 알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조금은 부담을 가지고 중직자들은 할 수만 있거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함께 예배하기를 원합니다. 조금은 더 은혜를 사모하면서 중직자 뿐만 아니라 제직도, 성도도, 부모세대도, 자녀 세대로 할수만 있거든 함께 하나님께로 향하여 예배하기를 소망합니다. 다음세대도 함께 할 수 있는 집회입니다. 자녀들이 함께 나올 수 있으면 영적 부담감을 갖고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뉴욕에 방문시 영적으로 살아있는 교회를 갔더니 한국보다 더 바쁜 삶 가운데 수요일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경험하여 알아야 하는 시대입니다. 종교성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여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수요성령집회 가운데 함께 나가 그 은혜의 풍성함을 경험하여 알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리시고 일으키신 방법은 어떠합니까?(엡2:8,9)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의 구원은 선물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선물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선물입니다. 구원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나의 의를 자랑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전적으로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행하신 일의 결과가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죄의 대가 지불을 다 하셨습니다. 그것을 믿으면 깨끗케 됩니다. 자유케 됩니다. 온전케 됩니다.
*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리시고 일으키신 목적을 따라 사는 신앙과 삶은 어떠합니까?(엡2:10)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거듭나는 순간부터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아하 나는 아메바에서 진화되고 원숭이에서 진화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존재구나 이것을 확실하게 깨닫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을 향합니다. 진정한 예배자가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세상을 향합니다. 진정한 봉사자가 됩니다. 그래서 참 된 예배자는 참된 봉사자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는 정체성을 가진 참 된 예배자는 몰상식하지 않습니다. 상식을 존중하면서 초월성을 경험하며 삽니다. 참된 예배자는 좋은 시민이 됩니다. 세상의 법이 필요 없어도 될 만큼 생명의 성령의 법이 역사하기에 세상의 법을 지키는 수준을 넘어서 그 이상으로 정직하게 됩니다. 정의롭게 됩니다. 선한 일에 힘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이들은 누구나 다양한 모습으로 세상을 아름답고 건강하게 만드는 일에 쓰임 받습니다. 2026년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함께 일으키사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의 신령한 영적인 눈이 열리고 신령한 복을 경험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이 찬양이 우리의 삶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메마른 땅에 샘물 나게 하시기를
가난한 영혼 목마른 영혼
당신을 통해
주 사랑 알기 원하네.
주일설교 1,2,3부: 하늘에 속한 복을 추구하는 법, 엡1:2~7절, 이상갑목사
4부: 하늘에 속한 사람, 하늘에 속한 복. 엡1:1~14절, 이상갑목사
오늘 말씀은 <하늘에 속한 복을 추구하는 법>입니다. 기독교는 복 주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복을 현세에만 생각하여서 기복으로 흐릅니다. 심지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인적인 복만 구하다가 무속과 차이가 없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복을 긍정적 사고방식과 잘되는 나로 생각하는 이들이 빠지는 오류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서 하나님을 이용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 기독교의 복은 무엇일까요? 에베소서1:2절은 기독교의 복을 이렇게 말씀 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Grace and peace to you from God our Father and the Lord Jesus Christ.)"
기독교의 복은 무엇보다 구원 받은 백성으로 누리는 은혜와 평강입니다. 은혜 카리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함을 통해 얻은 구원의 은총을 의미합니다. 평강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에 해당합니다. 축복과 번영을 기원하는 말입니다. 이 출처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입니다. 우리 시대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을 실제적으로 누리고 하나님을 경험하여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 기독교의 본질적인 복을 에베소서1장 3절은 이와 같이 말씀 합니다. “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Praise be to the God and Father of our Lord Jesus Christ, who has blessed us in the heavenly realms with every spiritual blessing in Christ.)
” 찬송하리로다는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복은 근원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복입니다. 성부 하나님이 주시는 본질적인 복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어지는 하늘에 속한 복입니다. 신령한 복은 성령의 실제적인 역사로 인해서 주시는 영적인 복입니다.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입니다. - 우리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늘 인식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출발해야 부패하거나 타락하지 않습니다. 복은 나에게서 시작하거나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복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그런 의미를 담아서 인사 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서로 인사)
기독교의 본의 근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4~6절은 성부하나님이 주신 복을, 7~12절은 성자 하나님이 주신 복을, 13,14절은 성령 하나님이 주신 복을 잘 드러냅니다.
* 성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과거의 선택에 기초함을 인식해야 합니다. (엡1:4,5)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성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며 기원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세전에 선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선택을 하셨습니까?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정을 통해서입니다. 구원의 예정은 성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의존합니다. 선택과 예정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첫째,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둘째, 예수 그리스도로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령한 복이 주어지는 유일한 통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복보다 크고 놀라운 복입니다. 이 신령한 복에 눈이 열려야 합니다. 성부 하나님을 통해 주어진 하늘에 속한 복은 선택과 예정입니다.
* 성부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의 목적은 무엇입니까?(엡1:6)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사랑하시는 자는 초대교인들에게 메시야의 호칭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어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왜 선택하셨습니까?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최종목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까닭에 찬송가 1장은 이런 내용입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주어지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입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속죄 곧 죄사함을 받음을 통해서 신령한 복이 부어집니다.(엡1:7)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신령한 복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신령한 복은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함으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는데서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로 믿고 영접하였습니까? 그렇다면 속량, 죄사함을 얻습니다. 진정한 용서를 받습니다. 죄로부터 해방됩니다. 사망으로부터 해방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이암아 죄사함을 받습니다.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늘에 속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으로 말미암은 속량, 죄 용서함입니다.
그런 까닭에 * 신령한 복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어지는 은혜임을 분명히 보아야 합니다. (엡1:3~13)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안에서,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라는 단어가 11회 반복되고 있습니다. 모든 신령한 복이 주어지는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에베소서 첫 부분은 온통 예수 그 이름으로 가득합니다. 죄로 오염된 인간은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죄 용서함을 받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치유를 받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회복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케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온전케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주어지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둘째, 오직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주, 주인, 주관자이신 머리로 모시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엡1:8~10)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신령한 복은 우리가 노력이나 수행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가 아닙니다.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비밀을 알게 하십니다.
<그 뜻의 비밀>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입니다.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예정된 이들이 신령한 복에 참여합니다. 이러한 선택과 예정의 교리는 논쟁의 영역이 아닙니다. 신비의 영역입니다. 은혜의 영역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을 깨닫게 되면 그리스도를 주, 주인, 주관자로 모시는 것이 쉬워집니다. 그것이 영광스러워집니다. 점점 삶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임 받음이 기쁨이요 감사가 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주, 주인, 주관자로 인정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선택하고 예정하신 것입니다. 내가 한 것 같은데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내가 믿은 것 같은데 하나님이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감정 따라서 바뀌지 않습니다. 구원은 행위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나의 행위, 나의 공로, 나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에 기초합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연합과 통일을 가져옵니다.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늘에 속한 복은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주어지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셋째, 오직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안에서 기업이 되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엡1:12) “11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은 받은 것은 최고의 복입니다. 우리가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예정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최고의 복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음”은 최고의 복입니다.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늘에 속한 복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기업, 그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함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기업이요,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은 목적이 있어서입니다. 우리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엡1:12) “12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결국 성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죄용서함과 통일됨과 기업이 되고 상속자 됨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제 * 성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성자 예수님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어진 모든 신령한 복을 추구한다면 우리에게 적용하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주목하십시오. (엡1:13,14) “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구원의 복음은 진리의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인 복음을 듣고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 주인, 주관자로 영접하면 약속하신 성령으로 인 쳐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 구원의 보증이 되십니다.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하늘에 속한 복은 약속하신 성령을 선물로 주셔서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 구원과 영생의 보증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충만하게 받고 구원의 역사를 경험하면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됩니다. 이번 신년부흥회는 신령한 복을 나누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사진)
이번 부흥회는 좀 특별합니다. 첫 날은 손자인 안성원목사님과 할아버지인 안광표선교사님이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안광표선교사님은 선교사 · 한인 사회 · 현지 교회를 잇는 다리 역할을 감당해 온 선교사님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선교의 부르심을 받고 몽골로 가서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의 선교적 모델을 세웠고, 몽골연합신학대학 이사장으로 종신교수로 섬기며 현지 목회자와 신학생들을 세우는 일에도 헌신했습니다. 둘째 날은 사위인 김예성목사님과 장모님인 김영선 목사님입니다. 목사님은 "신앙공동체, 교육공동체, 생활공동체" 비전을 갖고, 지역사회의 소외된 이들을 돌보며 인천 계양산 자락의 해인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셋째 날은 딸인 강예정전도사님과 아버지인 강동익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강동익 목사님은 작은자리, 소외된 자, 한 영혼을 위한 목회와 목양을 꿈꾸며 담임목회를 하며 동시에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기 위해 사회복지를 겸하였습니다. 어디에서나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한 영혼에 대한 갈급함으로 지금까지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소개를 들으시면 아시겠지만신년부흥회는 특별한 시간들입니다. 손자와 할아버지, 사위와 장모님, 딸과 아버지의 신년부흥회를 통해 영적 축복의 전수가 일어나기를 기대합니다. -> 이번 부흥회 헌금은 문화센터를 위해서 사용될 것입니다. 오랜 기간 기도해 왔던 다음세대를 섬기고 지역사회를 품고 섬기는 복합문화센터 리모델링을 통해서 산본교회가 말로만 다음 세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보여주기를 원합니다.
공사가 계속 진행 중입니다. (사진)
세워지는 공간을 보여드리면 3개의 소그룹실이 있어서 그곳에서 교사모임을 하고, 구역모임을 하고, 성경공부를 하고, 각종 양육과 교육을 할 것입니다.
유모차를 가지고 와서 커피를 마시고 아기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이고, 수유를 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화장실을 잘 준비하여 쉼과 자유를 누리는 공간이 되게 할 것입니다. 자녀들과 함께 와서 책도 일고 커피도 마시는 공간, 만남의 광장처럼 웃음꽃이 피는 공간이 될 것을 기대합니다. 얼마 전 타교회 교인을 만나서 상담하고 기도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하는 산본교회에 감사하다면서 교회학교 겨울 섬김을 위해 헌금을 해 주셨습니다. 교회학교 6개 부서에 간식비로, 어린이 비전트립으로 목적헌금을 드렸습니다. 또 목사님 기도하시면서 필요한 곳에 사용해 주십시오 라고 주신 것도 전액 문화센터 목적헌금으로 그분의 이름으로 드렸습니다. 크고 거창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다음세대와 지역사회를 품고서 문화센터 목적헌금으로 벽돌 한 장, 의자 하나, 책상 하나 하는 마음으로 십시일반으로 동참해 주시면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복을 추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성부 하나님 안에서 선택과 예정이 신령한 복입니다. 성자 예수님 안에서 십자가의 죽음과 보혈의 능력으로 속량 죄사함이 신령한 복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약속, 인, 보증되심이 신령한 복입니다. 이러한 복을 경험하면 자동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6절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됩니다. 12절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게 됩니다. 14절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하늘에 속한 복과 찬송이 풍성한 해가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