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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짙을수록 별은 빛난다.>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온통 어둠이 짙습니다. 그런데 힘든 시간을 보낼 때일수록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둠이 아닌 별을 보아야 합니다. 동방 박사들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을 보면서 예수님께 경배를 하려 영적 순례 여행을 하듯 우리는 어두운 밤일수록 별을 보면서 인생의 순례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제가 경험한 가장 어둠이 짙었던 때를 떠올려보면 남아공에서 선교를 할 때였습니다. 1주일간 머물면 선교를 했던 곳에 3가지가 없었습니다. 수도가 없었습니다. 화장실이 없었습니다. 전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척 불편했습니다. 물은 멀리서 퍼와 세수도 하고 밥도 짓고 양치도 했습니다. 화장실은 눈치를 잘 살피면서 아무도 모르게 처리를 했습니다. 해가 지면 깨어나고 해가 저물면 잠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적응을 하면서 불편함은 사라지고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좋았던 것은 별빛의 향연이었습니다. 전기가 없고 모든 집이 불을 켜지 못하니 동네가 깜깜합니다. 밖을 나와 눈을 들어서 하늘을 보니 은하수가 보였습니다. 아주 어릴 적 보았던 바로 그 은하수였습니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밤하늘의 별들의 향연이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거의 1~2분 간격으로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별똥별도 계속 보았습니다. 반딧불도 오랜만에 보았습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별은 더 빛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어둠의 시간을 보낼 때 어둠을 보지 않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둠이 아닌 별들을 보아야 희망이 보입니다. 삶의 아름다움이 회복됩니다. <본문 속으로>
사무엘상 1장부터 4장까지를 묵상하면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들이 보입니다.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상은 너무 악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시기에 사무엘도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엘리 제사장을 보조로 도우면서 자랐습니다. 자신의 선배세대인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행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분명 너무 어두운 시절이었습니다. 영적인 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희미해져 갔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엘리와 그의 아들들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갔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없다.> 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타락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은 아닙니다.
백성들이 보아야 하는 것은 엘리와 그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아닌 하나님 그분이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자리입니다. 사람은 그 누구든 하나님을 보여주는 안경의 렌즈와 같을 뿐입니다. 그 안경이 깨끗하면 잘 보입니다. 그 안경이 더럽고 지저분하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목회자든 성도든 성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깨끗해야 제대로 보입니다. 그 시대를 섬기는 목회자라는 렌즈가 깨끗해야만 그만큼 하나님이 잘 보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렌즈가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입니다. 렌즈가 더럽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러운 렌즈를 끼고 있으므로 하나님을 못보고 있을 뿐입니다. 목회자든 성도든 렌즈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계십니다.
사무엘은 엘리와 그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집중했다면 절망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이전 세대의 어둠을 보면서 하나님을 더 간절히 찾았습니다. 선배 세대의 죄악상을 보면서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 결과 사무엘은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 그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시대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과 같은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시대는 어둠이었지만 사무엘이 있음으로 별이 빛나는 밤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모든 예배자들이 시대적 어둠속에서 어떻게 빛나는 별처럼 살아갈 것인가를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어둠의 시대에 어둠의 일을 했었던 무너지는 인생의 대표격인 엘리와 그의 아들들이 나타납니다. 동시에 짙은 어둠의 시대에 빛나는 별처럼 살았던 세워지는 인생의 대표격인 사무엘이 나타납니다. <무너지는 인생>
먼저 * 무너지는 인생 특징은 죄와 저주의 문제가 있습니다. (삼상3:13-14절) "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14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하셨더라” 왜 무너지는 인생이 될까요? 죄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저주를 받을까요? 죄 때문입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 코로나가 창궐한 것도 깊이 뿌리를 보면 우리의 죄악된 삶의 방식 때문일 것입니다. 경쟁과 소비에 익숙해진 인간이 동식물이 점령했던 공간을 점령하면서 생태계를 오염 시킵니다. 그러자 동물에게 서식하던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옮겨옵니다.
성경은 계속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심판의 저주를 자청하지 말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엘리 가문은 심판을 자청했습니다.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우리 속담에 <스스로 매를 번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스스로 매를 버는 일입니다. 저주를 자청하는 일입니다. 죄를 지을 때 바로 그 순간 심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 때문입니다. 심판이 유보될 뿐이지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심판의 저주는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못 막는 것일까요?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금해야 하는 것을 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돌이켜야 할 때 돌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의 결과는 끔직 합니다.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엘리 집을 향한 강력한 심판의 경고입니다. 엘리의 집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죄의 무서움과 심각성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두렵고 떨림으로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자 하나님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경고 싸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엘리의 집안은 어떻게 됩니까? 이가봇 인생들이 됩니다.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전쟁터에서 전사합니다. 엘리의 며느리는 아기를 낳는 순간 그 소식을 듣고 자기 자식의 이름을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라고 짓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왜 엘리의 가문이 이가봇 인생들이 되었는가를 살펴보고 오늘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엘리 집안이 <이가봇 인생이 된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이가봇 인생이 된 이유는 아버지 엘리 제사장은 방심, 방관,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삼상3:13) “13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엘리는 아버지로서 해야 할 영적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자식들을 방임하고 방관하고 방치합니다. 이러한 영적 무감각, 무책임, 무관심은 자녀들의 육적인 부패와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아들들의 죄악에 대해서 징계해야 할 때 징계했으면 아버지와 아들 둘 다 살아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징계를 하지 않고 방심하고 방관하고 방치하니까 둘 다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영적 죽음이 육적 죽음으로 이어진 비극입니다. 영적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영적 감각을 키워야 합니다. 영적으로 자녀들을 챙겨야 합니다.
2. 이가봇 인생이 된 이유는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방종, 방탕, 방황했기 때문입니다.(삼상 3:22-24) “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4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엘리의 아들들의 죄악은 그들이 사는 시대를 뒤흔든 스캔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 아마도 죄를 지어도 징계가 없자 두려움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징계가 있는 것이 복입니다. 아픔을 느끼는 것이 복입니다. 아픈데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면 그 자체로 심각한 고통입니다. 방종하고 방탕하고 방황하는 홉니와 비느하스를 보면서 우리는 그들의 영적 감각이 마비된 것을 봅니다. 영적감각이 마비되니까 죄를 가볍게 여깁니다. 죄를 죄로 인식을 못합니다. 죄를 즐깁니다. 이러한 모든 * 죄의 결과는 이가봇 인생으로 끝납니다. (삼상4:21.22절) “21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이며 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이가봇 인생은 필연적으로 자기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인간은 죄에서 돌이키지 않고 그대로 죄에 빠져 살면 필연적으로 자기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은 사라집니다.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생명은 사라집니다. 죄가 있는 모든 인생은 시한부 인생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은 인생은 하나님과 관계 회복이 있습니다. 그때 인생은 영원성으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주의하고 죄를 안 짓게 되는 것은 오직 <코람데오 인생>일 때입니다. 죄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알 때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예민해질 때 죄를 분별하고 죄를 가지치기 합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마음은 돌이켜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본심은 저주와 심판이 아닌 회개와 회복입니다. <세워지는 인생>
엘리제사장과 홉니와 비느하스 그리고 엘리의 손자 이가봇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 (세워지는 인생의 3대 특징) > 하나님의 백성은 어느 시대나 무너지는 인생이 아니라 세워지는 인생을 추구합니다.
1. 세워지는 인생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삼상3:19) “19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세워지는 인생에는 빠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이것이 인생 특징이면 아무것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동행합니까? 우리는 우주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우리의 미래는 하나님께서 친히 빚어 가실 것입니다. 2. 세워지는 인생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삼상3:20) “20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사무엘 스스로 말하지 않아도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이 선지자로 세움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을 전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말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그 결과 그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람들은 점점 귀를 기울이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영혼에는 부흥이 경험되었습니다. 사무엘의 인생은 <성언운반일념>이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되게 가르치고 전하겠다는 오직 1가지 생각에만 삶을 송두리째 드린 것입니다. 오늘날 저희 같은 목회자들이 명심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 압니다.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스스로 증명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사무엘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다 알았습니다. 우리도 주변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임을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3. 세워지는 인생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삼상3:21) “21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사무엘의 인생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시는 인생이었습니다. “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다시 나타나시되” 하나님께서 말씀 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빚어 가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선명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복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심을 경험하여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 주시는 인생은 이가봇 인생이 아니라 임마누엘 인생입니다. 이가봇 인생과 임마누엘 인생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시대에 들리는 소리는 이전 세대와 선배 세대에 대해서 실망하는 소리가 많습니다. 비난과 비판의 소리도 많습니다.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수준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나는 어떠한가를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예외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그림: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나가며: 별이 빛나는 밤>
무엇보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기도하고 묵상하는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어둠이 짙을수록 별은 빛이 납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 같은 인생이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별이 빛나는 밤을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기를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