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의무’ 온라인 논쟁 점화
돈에 대한 욕심을 제어하는 데 가장 좋은 훈련
성직자라면 ‘가진 자들의 사회적 회심’ 촉구해야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레 27:3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십일조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일부 교단에서는 ‘교인의 의무’로 규정해 헌법에 명문화시키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이번엔 온라인에서다. 논쟁은 지난 21일 오전, 김동호 목사(높은뜻연합선교회 대표)가 “개인적으로 나는 십일조 헌금을 매우 중히 여긴다”면서 자신의 SNS에 올린 ‘마하나임 10’으로 시작됐다. 이후 십일조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시한 청년사역연구소장 이상갑 목사, 새물결아카데미 대표 김요한 목사의 글들이 21일 오후와 22일 각각 뒤를 이었다.
# 말라기서의 말씀, 문자적으로 확신
김동호 목사는 “하나님을 코너로 모는 배짱”을 강조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는 아주 엄격히 (십일조 생활을) 요구하여 거의 율법적으로 지키려고 노력해왔다. 십일조에 관한 말라기서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는다”면서 당위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쌓을 곳이 없도록 물질적인 복을 받고 싶어서도, 그런 말로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설교하고 강조하고 싶지는 않다는 입장 또한 밝혔다.
십일조를 강조하는 이유는 뭘까. “온전한 십일조 생활이 돈에 대한 욕심을 제어하는 데 가장 좋은 훈련이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 김 목사는 “돈에 대한 욕심을 제어할 수 있으면 그 밖의 다른 욕심들은 비교적 쉽게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면서, “마하나임의 군사로서 욕심과 싸워 하나님 나라를 쟁취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십일조 훈련을 통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십일조 훈련의 덕을 제법 보았다는 고백도 털어놓았다. 미국 교회 청년들의 십일조 생활에 자극을 받아 누진 십일조 생활을 연습했고, 십일조를 넘어 십의 사점 칠팔조(4.78/10)까지 이르게 됐다는 것. 이에 더해 “헌금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라는 확고한 입장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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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십일조는 헌금과 관련해 성경이 직접 언급하는 규정이다. 하지만 이 규정은 진-보수 혹은 시대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기도 한다. |
김 목사의 글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십일조에 관한 글을 올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고 페이스북 마당이 한산해 질 줄 알았다는 심경을 토로했다. 십일조 강조에 대해 그만큼 우려했다는 말이다. 하지만 “깜짝 놀랐다. 그 부담스러운, 공포스러운 십일조 글에 많은 친구들이 동조했다. 놀랐고 감사했다”며 반응을 소개했다.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배짱이 없다면 작은 믿음 하나도 실행할 수 없다. 십일조 하나도 제대로 할 수 없다. 마하나임의 군사들은 하나님을 코너로 모는 배짱이 있어야만 한다. 그것을 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십일조의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청년사역연구소장 이상갑 목사는 ‘의무가 아니라 은혜’로 십일조를 해석한 글을 올렸다. “아무리 좋은 것도 하나님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말로 글을 시작한 이 목사는, “‘가져오라’는 단어에만 주목하고 머문다면 율법의 의무에 묶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험하여 보라’로 나아가면 은혜가 보인다”며 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고 자녀 자격을 박탈하지 않으신다. ‘넌 자격이 없다’라고 하시지 않는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고 싫어하시거나 미워하시거나 벌을 주시지 않는다. 그리 쫀쫀한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이 치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목사는 오히려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를 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은혜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자원함으로,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다. 은혜는 십일조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십일조를 섬김에 흘러가게도 한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십일조와 헌금의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정확한 십일조에 대한 계산보다는, 우리 삶에 대한 정확한 계산을 하시기를 원하시고,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삶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세워져 가고, 이것이 바로 십일조 정신임을 역설했다.
하루 뒤인 지난 22일, 이번에는 김요한 목사(새물결아카데미 대표)가 논쟁에 뛰어들어, “우리 사회 전반,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생활수준이나 형편 전반의 사정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며 김동호 목사의 십일조 이해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한국 개신교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리더라면, 최저 생활비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수입에 허덕이는 교인들을 양산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소득구조를 혁파하고 극복할 수 있는 정책적, 사회적 노력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한 김 목사는, “가진 자들의 사회적 회심을 촉구하면서 우리 사회 전반의 자원의 재분배를 통해 사회적 십일조의 시행을 촉구하는 것이 올바른 성직자의 도리”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또한 “종교라는 것이, 신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들에게는 엄중하고 냉정한 십일조 기준을 요구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을 갖고 있는 힘 있는 자들에게는 겨우 개인적 차원의 연보만 강조할 뿐 그들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에서는 침묵한다면, 이런 종교야말로 민중의 아편 노릇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온라인에서 재 점화된 십일조 논쟁은 글마다 수백 개씩의 댓글들이 달렸고, 수십 수백 회 공유로 이어지면서 퍼져나가, 십일조에 대한 신앙적 이해가 시대상황과 맞물리면서 새로운 논의의 장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출처:
공종은 기자l승인2016.04.27l수정2016.04.27 10:35l1340호 공종은 기자 jekong@igoodnews.net공종은기자가 내 글을 인용하여 기사를 쓴 모양이다. 앞뒤를 생략한 모양새이기에 설교의 원 의미를 살리고자 설교를 나눈다. 4월 17일 했었던 설교 내용을 일부 발취하여 21일에 일부만 인터넷에 올렸다. 이런 내용이다.
아무리 좋은 것도 하나님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라기 1
1. 한국교회에 십일조 논쟁이 있습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그만큼 고민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헌금에 대해 고민함니다.
2.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를 잘 드리기에 "나는 믿음이 좋다. 나는 하나님께 할만큼 했다." 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3. 어떤 분은 십일조를 못 드리기에 "하나님은 나를 싫어하신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됨의 자격이 없어."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옳은 생각일까요?
4. 말라기 3장 10절을 보십시오.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5. 여기에는 두 단어에 주목할 팔요가 있습니다. 가져오라(Bring)는 단어와 시험하라(test)는 단어입니다.
6. 여기에서 제가 발견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은혜입니다. 가져오라는 단어에만 주목하고 머문다면 율법의 의무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하여 보라로 나아가면 은혜가 보입니다.
7. 저는 십일조를 의무로 보기보다는 은혜로 해석합니다.
8.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고 자녀 자격을 박탈하지 않습니다. 넌 자격이 없다 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자녀됨은 거듭남이 전재조건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고 싫어하시거나 미워하시거나 벌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 쫀쫀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서 하나님이 치셨다라는 것은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9. 그러나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원함으로 감사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은혜는 십일조 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십일조를 섬김에 흘러 가게도 합니다.
10. 언젠가 수박서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너무 수박이 먹고 싶어서 친구와 함께 수박밭에서 서리를 하는데 갑자기 후레쉬 불빛이 저희를 비추었습니다. 주인에게 들킨 것입니다. 그런대 도망갈 수도 없어서 그대로 잡혔습니다. 저희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 죽었다. " 그때 주인은 우리에게 딴 수박을 다 먹으라고 했습니다. 잠시후 가장 좋은 수박을 가져와서 짤라 주었습니다. 배 터져 죽으라는 의도였겠습니까? 아니였습니다. 수박 밭 값을 다 물어내게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수박 밭의 주인은 참 좋은 분이였습니다. 그래서 가난하고 어려워서 수박을 사 먹기 함든 저희들에게 수박을 마음껏 먹도록 하신 것입니다. 저희가 집으로 갈 때 수박 한 통을 손에 들려 주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긍휼히여김을 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법대로 한다면 평생 수박값을 다 갚기 전에는 죄인이 됩니다. 그러나 은혜는 모든 것을 덮어줍니다.
11. 저는 수박 밭 주인 아저씨의 은혜를 늘 기억합니다. 참 좋은 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연약하고 소외된 이웃을 섬기면서 수박밭 아저씨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따스함이 저를 통해서도 흘러가기를 소원합니다.
12. 저는 수박 밭의 주인보다 하나님이 더 좋으신 하나님이라고 생각 합니다. 적어도 제가 경험한 하나님은 참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13. 십일조와 헌금의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입니다. 돈의 액수가 아닌 것입니다.
14.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정확한 십일조에 대한 계산보다는 우리 삶에 대한 정확한 계산을 하기 원하십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세워져 가야 합니다. 그것이 십일조 정신입니다.
15. 본질이 사라지고 비본질로 싸움질하는 인생은 잿더미에 불과합니다. 차갑게 식어버린 마음에하나님의 임재도 사그라집니다. 십일조의 본질은 "네가 다른 어떤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면 십일조의 액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16. 본질이 더 중요합니다. 본질이 사라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본질이 살아 숨쉬고 있다면 더 이상 논쟁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17. 아무리 좋은 것도 하나님이 빠지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아무것도 없어도 선하고 아름다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한 분 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 하루를!
#이상갑목사 #설래임
* 이날 다 올리지는 못했지만 이어지는 설교의 핵심 내용은 이런 내용이다. 설교문이기에 논쟁조로 접근한 것이 아님을 밝혀 둔다. 그리고 십일조에 대한 반대의견이 아니라 십일조를 은혜의 관점으로 접근하고 십일조에 대해 소모적인 논쟁을 하기보다는 생산적으로 오히려 본질을 살려야지 신앙이 풍성해지고 행복해 진다는 관점으로 나누는 것임을 밝힌다.
본질이 중요합니다.
요즘 한국교회에는 십일조에 대한 다양한 논쟁이 있습니다. 저는 논쟁이 그리 달갑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질 회복을 위한 의미에서 나누고자 합니다.(아래의 글을 구어체와 경어체로 바꾸어서 본질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1. 나는 첫 십일조를 500원을 하였다. 용돈으로 차비와 밥값으로 5000원을 받았는데 500원을 십일조하고 싶어서 했다. 그것은 단순한 500원이 아니라 나의 차비중 일부였다. 십일조를 은혜에 감격함으로 내고 월곡동에서 답십리까지 걸어서 집으로 하교를 했다. 그것이 무거운 짐이 아니었다. 첫 십일조는 내게 기쁨이었다. 그리 큰 금액이 아닐런지 몰라도 내게는 차비였기에 차를 타는 대신 십일조를 내고 그 액수만큼 걸었지만 너무 행복하였다. 은혜에 대한 감격 때문이었다.
2. 대학교때 아르바이트를 해서 월급으로 70만원을 받았다. 그런데 학비가 부족하였다. 십일조를 해야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십일조를 하였다. 그 돈은 내게 없어도 있어도 내 삶을 크게 좌지우지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십일조를 낸 그 날 저녁에 교회 권사님께서 나에게 봉투를 하나 주셨다. 기도하는데 학비를 보탰으면 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것이라고 하셨다. 봉투에는 70만원이 들어 있었다. 감사하였다. 십일조를 냈더니 축복해 주셨다는 거창한 간증보다는 십일조를 드렸던 나의 중심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 드릴 수 있음이 내게는 감사고 기쁨이었다. 은혜는 우리 삶을 부요케 한다. 물질의 부요함이 아니라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경험으로 부요케 되는 것이다.
3. 박사과정 수업 중에 있었던 이야기다. 폴스티븐슨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십일조에 대해 질문을 하셨다. " 십일조를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손을 들어 보라" 라고 하셨다. 대부분은 당연한 질문을 왜 던지냐는 마음으로 손을 들었다. 잠시 후 교수님은" 저는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씀 하셨다. 한 순간 학생들이 술렁거렸다. 교수님의 말씀이 충격을 주었다. 속으로 비난과 비판의 소리를 난무함을 느꼈다. 잠시후 침묵을 깨고 교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저는 은퇴자입니다. 그래서 수입이 없을 때는 1/20, 1/30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입이 생활에 비해서 과분하게 많을 때는 2/10, 3/10를 드리기도 하고 심지어는 7/10, 9/10를 드리기도 합니다. 저는 이것이 십일조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일상 생활 속에서 이웃을 섬기는 것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물이라고 생각합니다. "
4. 가끔 십일조 논쟁이 있을 때마다 생각해 보는 수업 시간의 나눔이다.
5.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를 위해서 자원함으로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헌금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은혜다.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고나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비난하거나 비판하지말아야 한다.
6. 중요한 것은 본질이다. 본질이 살아나면 형식은 따라 온다.
7. 십일조는 율법적 경직성에 빠지면 안 된다. 그보다는 은혜의 자발성으로 이어져야 한다. 말라기는 종교적 형식은 남았으나 본질이 사라진 시대에 기록되었다.
8. 여전히 우리 시대에도 십일조를 했으면 종교적 의무를 다했으니 내 마음대로 살아도 구원 받는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오히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해서 죄성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작지만 정성을 다해 드리는 헌금의 소중함을 배워야 한다.
9. 결국 이 말은 십일조 하지 말자고 하는 말이 아님을 지각이 있으면 알 것이다. 그 본질적 정신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10. 십일조는 드리는 것은 성도에게 유익이 크다. 의무가 아닌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십일조 생활은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함으로 하게 되고 인색함이 아닌 풍성하게 정성을 다해 드리게 한다.
11. 십일조의 유익은 경건훈련에 좋다. 나의 욕망에 브레이크 장치가 되기도 한다. 우리의 욕심은 그대로 두면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처럼 곤두박질 친다. 그 결국은 추락이다. 그러나 십일조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훈련이 된다.
12. 이러한 이유로 꼭 십일조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10조, 3/10조, 4/10조, 9/10조도 가능해야 한다. 동시에 1/20, 1/30, 1/40조도 그형편과 처지에 따라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분명한 것은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13. 동시에 삶으로 흘러가는 섬김으로 표현하는 십일조, 선교헌금, 구제헌금도 중요할 것이다. 일상과 일터에서 자연스럽게 섬기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기빠받으시는 예물이라는 것이다. 봉투에 담아 드리는 것도 예물이지만 일상과 일터에서 담아내는 다양한 섬김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이라는 것이다. 교회에 드리는 예물만큼이나 일상과 일터에서 드리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14. 그런 까닭에 십일조 논쟁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것을 부당한 것으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 십일조는 논쟁보다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정상이다. 단지 봉투에 담아 드리는 것 이상으로 삶으로 은혜를 담아 내어서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산 제사가 되어야 한다.
15. 십일조애 대한 논쟁보다는 본질을 담아 내어야 한다. 넉넉하면 많이 섬기는 것이 좋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마음을 담아내는 것이 좋다. 한국 초대교회사를 살펴보면 돈이 없어서 안타까워하면서 시간의 십일조를 드려서 교회에 봉사를 하고 전도하는 일에 헌신한 기록들이 나온다.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나는 이것이 본질을 담아낸 것이라고 생각 한다.
16. 결국 우리는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소모성 논쟁보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드려지는 삶과 예물의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예물만 드리고 삶을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본질을 외면하는 것이고 삶은 있는데 예물이 없는 인생은 없다.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자라가야 한다.
17. 십일조를 논쟁적 관점으로 접근하지 말라. 십일조는 의무로 해석하기 보다 은혜로 해석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풍성해진다. 그것이 은혜요 행복이다.
* 결론적으로 의무가 아닌 은혜로 본질적 접근을 할 때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은 더욱 풍성해진다고 생각 된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와 성도가 김동호목사님의 견해와 김요한 목사님의 견해가 손을 잡고 만나야 한다고 생각 된다. 신앙은 개인적이며 동시에 공동체적이기 때문이다. 이 또한 은혜 속에서 본질을 살려내야 할 것이다.
* 참고자료
김동호목사님 글 전문 : 나도 오늘에야 읽어 보았다.
마하나임 10.
1.
우리 교회에는 특전사 출신 장로님이 계신다. 얼마 전 인기리에 끝난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 나오는 알파부대와 같은 전투를 수행하셨던 분으로 알고 있다.
특전대원들이 낙하산을 타고 적진에 뛰어내리기 위하여 레펠이라고 하는 타워에서 약 3개월 정도 점프 연습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레펠의 높이가 10m란다. 이유를 물었더니 그 높이가 사람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높이기 때문이란다.
더 높이 올라간다고 더 무서워지지는 않는단다. 거기가 제일 무서운 높이이기 때문이다. 그 이상은 비슷비슷하단다. 때문에 10m 레펠에서 뛸 수 있으면 하늘에서도 뛸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 머리 속에 엉뚱한 생각이 지나갔다.
'알았다. 십일조란 사람이 돈에 대하여 가장 공포를 느끼는 액수다.'
'십일조를 뗄 수 있으면 드디어 돈에 대한 욕심과 공포를 극복할 수 있다.'
2.
개인적으로 나는 십일조 헌금을 매우 중히 여긴다. 나 스스로에게는 아주 엄격히 요구하여 거의 율법주의적으로 지키려고 노력하여왔다. 나는 십일조에 관한 말라기서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는다. 쉽게 말해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면 하나님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신다는 말씀 말이다. 나는 그것을 기복적으로가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중히 여기는 까닭은 쌓을 곳이 없도록 물질적인 복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리고 그런 말로 교인들에게 십일조를 설교하고 강조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온전한 십일조 생활이 돈에 대한 욕심을 제어하는데 가장 좋은 훈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돈에 대한 욕심을 제어할 수 있으면 그 밖의 다른 욕심들은 비교적 쉽게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마하나임의 군사로서 욕심과 싸워 하나님 나라를 쟁취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훈련을 통과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십일조 훈련 말이다.
십일조 훈련은 욕심을 버리고 죄와 싸워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마하나임의 군사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최상의 그리고 최고의 훈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3.
나름 자신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십일조 훈련을 실시하였다. 흠없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기 위하여 거의 율법적으로 십일조 생활을 하였다. 교인이 사과 한 상자를 선물해도 십일조를 떼었다.
돈으로 쉽게 계산하기 어려운 과일이나 생선은 그냥 10개 중의 하나를 떼었다. 제일 좋고 실한 것으로. 그리고 그것을 집 가까이에 있는 장애우 공동체에 가져다 주곤 하였다.
4.
미국에서 목회하시는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미국 교회 청년들의 십일조 서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미국 교회에는 청년 때에 하나님께 십일조 서원을 하는 친구들이 많단다. 대개 이런 식으로 한단다.
'하나님 연봉 10만 불까지는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연봉 10만 불에서 15만 불까지는 십의 일점 오조를 드리겠습니다.'
'연봉 15만 불에서 20만 불까지는 십이조를 드리겠습니다.'
그렇게해서 십구조까지를 약속한단다.
그리고 그 약속과 서원을 지키는 친구들이 꽤 있단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달부터 나도 그와 같은 약속을 하고 누진십일조 생활을 연습하였다.
그것을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금전출납부를 쓰기 시작했었다.
최고로 많이 드렸던 해는 십칠조를 드렸었다.
너무 힘들고 쪼들려서 수정하였다.
평균 십의 사점 칠팔조 정도하였다.
물론 그 돈은 선교비와 구제비를 다 포함한 돈이다.
사실 그렇게 장부까지 적지 않아도 교회 생활 열심히 그리고 정직히 하시는 장로님 집사님 권사님들도 평균 십의 이삼조 정도는 하신다. 그보다 조금 더 열심히 했다고 할 수 있다.
10년 동안 장부를 적고 실천하다가 재작년 말로 장부 적기를 그만 두었다. 이젠 내 신앙의 근육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5.
나는 이 훈련의 덕을 제법 보았다. 하나님이 말라기 3장에서 온전한 십일조를 하면 황충을 금하고 기한 전에 열매가 떨어지지 않고 땅에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쏟아부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이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제법 큰 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훈련을 통하여 확실히 돈에 대한 욕심이 제법 많이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돈에 대한 욕심이 어느 정도 제어되다 보니 돈 때문에 추해지는 일을 확실히 덜할 수 있게 되었다. 돈에 대한 욕심이 어느 정도 컨트럴 되다 보니 다른 것에 대한 욕심도 덩달아 제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마하나임의 군사가 되려고 하는 분들에게 온전한 십일조 훈련을 강추하고 싶다.
6.
군인은 나라를 위하여 생명을 바쳐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우리는 헌신이라고 한다.
헌금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헌신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정말 헌신하고 싶으시다면 헌신을 위하여 헌금 훈련부터 제대로 받아 보실 수 있기를 권한다. 마하나임의 군사 300에 정말로 들고 싶으시다면 그냥 밥 굶을 각오하고 온전한 십일조부터 시행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란다.
7.
십일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늘 많은 질문이 올라온다. 그리고 토론이 올라온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하나임에 대한 글이 끝날 때까지 질문과 토론을 받지 않으려고 한다.
그대신 나만 옳다고 고집하지 않을 것이며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도 비난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냥 나와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과 함께 힘을 합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마하나임의 군사가 되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다.
함께 뜻을 같이 할 300명이 있으면 좋겠다.
김요한목사님 글 전문
성경의 원리는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영원한 강제력과 설득력을 갖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방식이나 내용은 시대적 한계 속에 갇힐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김동호 목사님은 "십일조"가 물질에 대한 탐욕을 제어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에 십일조를 실천해야 하며, 누가 뭐라고 하든지 이것은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할 수 없는 신앙적 원리이고, 또 본인은 평생을 그런 믿음과 신념을 갖고 살았다고 자부하신다.
사실 김 목사님의 이런 주장은 너무 익숙한 이야기여서 여기에 대해 시시콜콜 이의를 제기하거나 딴지를 걸고 싶지는 않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십일조의 신학적 정당성을 떠나서, 기왕이면 더 많이 물질적 헌신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업을 하는 지금도, 우리 회사의 경우 어떤 식으로든지 100% 환원을 목표를 하고 또 그것을 실천해왔기에, (겨우?) 십일조에 대한 기준 자체가 위협스럽게 느껴지거나 부담스럽지 않다는, 다소 도발적인 주장까지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김동호 목사님의 "십일조"에 대한 해석은 본인이 살았던 시대의 효용성과 제약이란 한계를 완전히 벗어나기 어렵다고 본다. 즉 김동호 목사님이나 그 외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열심히 땀흘려 일하면 적당한 수입이 주어지는 것이 상례였고, 그중에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 역시 어느 정도 수준의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 사회 전반의, 그리고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의 생활 수준이나 형편 전반의 사정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는 수많은 중년의 크리스천 가정들이 대출과 빚과 적은 소득으로 경제적인 고통을 겪고 있고, 30-40대의 가정들이 한달 벌어 한달을 살아가는, 간신히 생존을 영위하는 수준이며, 무엇보다 20대의 청년들이 미래가 안 보이는 절망적 상황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이런 문제의 원인의 상당 부분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불평등과 불의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교회에서 나름 영향력이 상당한 대형 교회 출신의 혹은 대형 교회에서 현재 목회를 하고 있는 설교자들이 고작 일생의 신념으로 내세우는 가치나 문제 의식이 "십일조"에 대한 개인적 결단을 촉구하는 수준이라면, 미안하지만 한국 개신교의 미래 뿐 아니라 우리 사회 역시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본인이 한국 개신교에 대해서, 그리고 그 안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에 대한 지분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리고 한국 개신교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는 리더라면, 십일조를 하고 싶어도 최저 생활비에도 턱없이 못 미치는 수입에 허덕이는 교인들을 양산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소득 구조를 혁파하고 극복할 수 있는 정책적, 사회적 노력을 촉구하는 메시지를 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불과 몇 퍼센트의 소수의 사람들이 국가 자원의 대다수를 독식하고 있고, 나머지 절대 다수는 생존의 위험에 내몰리면서까지 적은 수입으로 생활을 연명해야 하는 현실에서, 가진 자들의 사회적 회심을 촉구하면서 우리 사회 전반의 자원의 재분배를 통해 사회적 십일조의 시행을 요구하는 것이 올바른 성직자의 도리일 것이다.
사실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일년에 300조가 넘는 정부 예산 가운데 합리적인 예산 배분과 사용을 통해서 이런 사회적 십일조를 시행할 수 있는 부분이, 또 수백조의 사내 유보금을 장만해놓고 있는 재벌(대기업군)의 금고에서 분출할 수 있는 사회적 십일조가, 수천억의 현금을 은행에 넣어놓거나 명동의 사채 시장에서 은밀하게 굴리고 있는 대학의 돈 중에서 장학금 확충과 시간 강사들의 강의료 현실화 등으로 운용할 수 있는 사회적 십일조가 적지 않다는 것을 갈파할 수 있다.
종교란 것이, 신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들에게는 엄중하고 냉정한 십일조 기준을 요구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이 많은 돈을 갖고 있는 힘 있는 자들에게는 겨우 개인적 차원의 연보만 강조할 뿐 그들이 당연히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에서는 침묵한다면, 미안하지만 이런 종교야말로 민중의 아편 노릇을 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김동호 목사님의 개인적 진정성이나 진실함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번에 당신이 페북에 올린 글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역시 한 시대가 확실히 갔다는 것과, 자신의 시대가 이미 흘러갔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경험과 성경 해석의 우물에 갇혀 흘러간 강물을 거꾸로 돌리려고 하는 것의 부질 없음과 무익함을 다시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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