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입니다
읽을말씀: 갈4:1-31; 창21:9
주제말씀: 갈4:7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첫째, 종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1-7절).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갈4:7)
주인의 어린 상속자는 어릴 때는 누구와 다름없습니까? 종입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1절) 어떤 의미에서 말입니까? 장성하기 전까지는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2절)
마찬가지로 우리도 전에는 무엇 아래에 놓여 있었으며, 그것에게 종노릇하였습니까? 세상의 초등학문, 즉 율법의 행위와 육체를 따르는 것들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3절)
그런데 누가 우리를 여기에서 속량해 주시고, 나아가 아들의 명분까지 얻게 해주셨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4,5절)
또한 누구를 보내주셔서 이를 보증해 주셨습니까? 아들의 영, 곧 성령님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6절) 그러니 우리는 이제 마땅히 종이 아니라 누구로 살아가야 합니까? 아들, 곧 유업을 받을 자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7절)
둘째,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8-20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갈4:9)
전에는 우리가 본질상 무엇에게 종노릇하였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것들입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하였더니.”(8절) 그러나 이제는 누구에게 아신 바 되었습니까? 하나님입니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9절 상)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됩니까?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입니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9절 하) 여기서는 무엇을 극도로 경계한 것입니까? 날(안식일, 금식하는 날), 달(월삭), 절기(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 해(안식년, 희년) 등 모든 율법으로의 회귀입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10,11절)
사도 바울은 어떤 것들을 상기시키면서 감정적으로 호소합니까?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서 선교할 때 그들이 보여준 따뜻한 사랑입니다. 당시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의 육체적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어떻게 대했습니까? 업신여기거나 버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13,14절)
오히려 누구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까? 하나님의 천사 내지는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14절 하) 할 수만 있었다면 무엇까지도 빼어 줄 수 있었을 것 같았습니까? 그들의 눈입니다.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15절)
그런데 지금은 무슨 관계가 되어버렸습니까? 원수지간입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6절)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입니까? 거짓 교사들이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 사이를 이간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17절) 이로 보건대 열심에도 무엇이 중요합니까? 방향입니다. 열심을 내되 누구를 향하여 그리 하느냐에 따라서 잘못된 열심히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어떤 심정으로 그들을 다시 품겠다고 했습니까? 해산하는 수고입니다. 언제까지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때까지 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19절)
셋째, 행위 언약이 아니라 은혜 언약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20-31절).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갈4:30,31)
바울은 당시의 갈라디아 교인들을 누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까?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입니다.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21절) 어째서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에 있던 그들을 속량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되어서 다시 율법 아래로 돌아가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9절 하)
바울은 그런 그들을 깨우치고자 구약의 인물 중 누구를 예로 들었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그 몸종 하갈입니다.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22절)
이 두 여인을 어떤 식으로 비유했습니까? 하갈은 여종으로써 육체를 따라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23절 상) 사라는 자유 있는 여자로써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삭을 낳았습니다. “...자유 있는 여자에게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23절 하)
또한 하갈은 시내산 언약(행위언약)으로써 당시까지도 율법 아래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지금 있는 예루살렘’으로 비유되었지만,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노릇하고.”(24,25절) 사라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언약으로써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며 위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비유되었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26절)
그렇다면 성도들은 둘 중 어느 쪽입니까? 이스마엘과 같이 종의 자녀입니까? 아니면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입니까? 당연히 후자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28절) 그러나 옛적에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했던 것처럼,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창21:9) 당시에도 마찬가지로 누가 성령으로 난 성도들을 박해합니까? 육체를 따라 난 자들, 즉 유대교인들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29절)
하지만 분명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신 것처럼, 그들은 우리와 함께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30절)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더 이상 종의 자녀로 살지 말고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로 살아가야 하며, 더 이상 율법의 행위 아래에서 종노릇 하지 말고 오히려 약속의 자녀처럼 복음 안에서 자유함으로써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