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학년에 실컷 놀라는 진학지도 선생님
뭐! 11학년에 실컷 놀라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점심을 먹을 시간이었지요. 큰 녀석이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진지하게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오늘 우리학년 진학담당 선생님이 들어와서 1시간이나 입시 공부에 대해 이야기 했어.”
“그래?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11학년 공부는 관심도 없는 줄 알았더니 독일도 고학년은 역시 다르기는 다르구나. 그런데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니?”
“응, 11학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엄마 눈치 한 번 흘깃 보더니) 원 없이 실컷 노는 일이래.”
“뭐라고? 그게 입시준비를 시작해야할 학생에게 할 말이야? 안 그래도 너무 놀아서 문제인 아이들에게.”
갑자기 어이없어 말을 끊고 목청을 높이는 엄마를
‘내 저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한심하게 바라보는 이 녀석.
‘너, 내가 이럴 줄 알았다는 눈빛인데 그래도 말도 안 돼.’라고 맞대응 하며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내말 먼저 잘 들어봐. 독일도 12.13학년에는 내신도 있고 해서 열심히 하는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하거든.”
“야, 그 때는 다 열심히 하는 거고, 그런데 실컷 놀다가 갑자기 공부하려면 바로 코드가 바뀔 줄 아니? 엄마 학교 다닐 때는 방학도 없었어. 놀다가 하면 풀어진다고 방학 때도 학원이다 학교다 쉬지 않고 다녔어.”
“그럼 그게 방학이야? 왜 방학이 있는데?”
“....... ”
요즘은 녀석이 머리가 커서 말싸움도 논리와 전략이 필요합니다. 요 대목에 오면 항상 말문이 막히곤 했는데, 오늘도 흥분하는 바람에 깜박 내 스스로 수렁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육체와 정신적인 에너지는 한계가 있다는 거야.
“오늘 선생님이 한 말이 나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뭔데?”
벌써 내 목소리는 이미 퉁명스러워 졌습니다. 아무래도 느낌이 또 지는 것 같아서…….^^
“사람의 육체와 정신적인 에너지는 한계가 있다는 거야. 12학년 가서 열심히 공부하려면 그 전에 후회 없이 놀고 할 것 다 해보고 나서 시작하면 더 집중이 잘 되고 효율적이라는 거지. 기계도 잘 돌아가게 하려면 사전에 기름 치고 닦아주고 해야 하잖아. 사람도 마찬가지 거든.”
“그렇게 말하니까 아이들 반응은 어땠어?”
“반응? 그저 당연하다는 얼굴이지 뭐. 우리 학년 아이들은 이미 엄청 놀고 있거든. 매주 술 마시고 춤추러 무도회장 가고.”
“맞아 참 그렇다고 했지.”
생각해 보니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습니다. 독일 아이들은 11학년에는 정말 실컷 노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는 아직 만으로 15세이지만 보통 11학년의 평균 나이는 16세입니다. 그런데 독일학교는 유급과 월반이 활발하기 때문에 같은 학년이라도 17,18세도 많고 심지어는 19세까지 있습니다.
독일학교에서 11학년은 안식년과 같은 해
독일은 16세부터 맥주 마시는 것이 허용되고 크나이페라고 하는 술집이나 무도회장 출입이 가능합니다. 그 나이가 보통 11학년에 시작되지요. 우리가 대학 입학하고 나서 한동안 넘치는 자유를 주체하지 못해 우왕좌왕 하는 때의 기분을 독일에서는 김나지움 11학년 때 느끼는 것 같습니다. 실업계에 진학한 아이들은 이미 10학년에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나이기도 하지요.
앞으로는 김나지움 학제가 13학년에서 12학년으로 바뀌어 없어지겠지만 지금까지 독일학교에서 11학년은 안식년과 같은 학년입니다. 공부도 부담이 없고 해외로 나가 있는 학생들도 있고 스스로 입시 과목을 결정하기 위해 이 과목 저 과목 실험적으로 들어보며 적성을 알아보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우왕좌왕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어떤 학년보다 여유가 있습니다.
수업도 많은 부분이 복습을 위주로 진행되어서 그런지, 당장 우리 큰아이를 보더라도 매일 노는 것 같은데 성적은 잘 받아 오더라고요. 자기가 아무래도 천재인 것 같다고 요즘 들어 걱정이 태산입니다.^^ 이렇게 학교 공부가 쉬우니 아이들도 당연히 느슨해질 수밖에 없지요. 특히 여기선 학원도 없고 학교가 전부이다 보니.
엄마, 나도 춤 배우면 안 될까?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다. 그래도 그렇지 선생님이 새삼스럽게 강조할 것까지는 없잖아. 그런데 왜 그 말을 진지하게 하는 건데?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야? 지금보다 더 놀겠다고?”
슬쩍 엄마 얼굴을 한 번 보더니.
“나도~ 춤 배우면 안 될까?”
“뭐, 춤?”
“지금 나는 나이가 안 되서 무도회장도 못가잖아. 스포츠센터에서 하는 코스에라도 가서 배우고 싶어, 내 친구 엄마가 강사로 있는 댄스클럽이 있거든.”
“그거 좋은 생각이다. 매일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 보다는. 당장 시작 해라, 해.”
“정말! 역시 우리 엄마는 최고야. 고맙습니다. 어머니~.”
정말 기분 좋으면 한 번 나오는 듣기 힘든 존댓말 인사까지 깍듯이 하더군요. 엄마가 혹시 반대하면 어쩌나 장황하게 말문을 열은 보람도 없이 너무 쉽게 허락을 하자 약간 뜻밖이라는 반응이었습니다. 잘 노는 것에 관해서라면 저와 남편은 언제나 찬성입니다. 엄마 아빠가 신나게 놀아보지 못한 한이 있어서 그런지.
11학년은 공부보다는 많은 시간 취미활동과 좋아하는 일을 위해
이렇게 우리 아이는 지금 11학년인데 탁구는 이 지역 청소년 대표 팀에서 뛰고, 또 11학년 되어서 시작한 기타에 빠져 요즘은 학교만 다녀오면 뚱땅거리더니 춤도 배운답니다. 그렇다고 큰아이가 공부를 못하는 부류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릴 때 워낙 한국식으로 훈련을 잘 들여 놔서 지금도 항상 선두를 놓치지는 않고 있습니다. 완전 독일식으로 공부시킨 작은 아이가 너무 느려 속이 좀 터지는 편인 것에 비하면 큰 아이는 공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걱정시킨 일이 없었습니다. 좀 자랑이 심한 것 같지요? 11학년에서 노는 학생들이 문제아가 아니라 평범한 아이들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다보니. 용서해 주시길…….^^
12학년 가서는 정말 열심히 할지 어떨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지금 현재는 많은 시간 취미 활동과 공부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는 아이들을 여기 방식대로 내버려 둡니다. 큰 아이는 이미 공부든 취미 생활이든 스스로 결정하고 알아서 하기 때문에 엄마의 영역밖에 있지요. 그래도 굳이 물어보는 것은 허락보다는 엄마의 차가 필요해서입니다. 혼자 이동하려면 아무래도 어려운 곳이 많다보니.^^
한국에서 특히 공부 좀 한다는 학생들에게는 정말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로 들릴지도 모릅니다. 저도 처음엔 적응하기 쉽지 않았으니까요. 그런데 여기서는 진학지도 선생님의 말처럼 11학년에 놀기만 하다가 12학년 올라가서 무섭게 집중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 이유는 놀다보니 공부도 좀 해야겠기에, 혹은 대학가서 하고 싶은 전공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