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부, 김병수, 고종수…. 이들은 한국 축구사를 대표하는 ‘비운의 스타’들로 꼽힌다. 물론 지금은 지도자로 각자의 위치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지만, 선수 시절에는 이런저런 사연들로 인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이번에 연재하는 인물들은 축구인생의 전성기를 달리다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접은 축구인들 얘기다. 지난 번 <이영미 人터뷰>에 소개된 ‘축구계의 풍운아, 성한수를 아시나요?’를 진행하며 부상으로 사라진, 그러면서도 근황이 궁금한 축구인들을 만나고자 했다. 그 처음은 청소년대표팀에서 정성룡을 벤치에 앉히고 주전으로 맹활약했던 전 전남 드래곤즈 골키퍼 차기석 스토리이다.
<골키퍼 차기석을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이 모습이 꽤 반가울 것만 같다. 현재 연세대 코치로 활약 중이다.(사진=이영미)>
2005년 6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청소년(U-20)축구선수권대회의 핫이슈는 A대표팀에 막 승선한 ‘축구 천재’ 박주영이었다. 그러나 대회가 끝난 뒤 박주영보다 더 큰 관심을 불러 모은 이는 주전 골키퍼 차기석이었다. 대회를 관전하러 경기장을 찾은 당시 PSV에인트호벤 히딩크 감독이 현지를 방문한 대한축구협회 정몽준 회장에게 차기석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고, 피스컵코리아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스카우트를 전제로 차기석을 에인트호벤 팀 훈련에 합류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차기석은 그라운드에서 쓰러졌다. 병명은 만성신부전증이었다. 에인트호벤입단의 꿈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버지는 아픈 아들을 위해 자신의 신장 하나를 내놓았다. 차기석은 아버지의 신장을 달고 전남 드래곤즈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병이 재발되었고, 급기야 팀에서 방출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살기 위해서 이번엔 작은 아버지의 신장을 이식받았고, 2009년 K3리그인 경주 시민축구단에 입단했다가 그 해 부천 FC 1995로 이적했다. 그의 수술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작은 아버지의 신장에도 문제가 생겨, 마지막으로 막내 작은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그는 선수 생활을 유지했다.
191cm의 키, 83kg. 골키퍼로는 최적의 신체조건을 지닌 차기석은 경기의 흐름을 읽는 눈이 뛰어나고 위기 대처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만성신부전증으로 한국 차세대 골키퍼의 꿈을 접고 세 차례나 신장 이식 수술을 받았던 차기석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차기석’이란 이름이 최근에 거론된 건 연세대 골키퍼 김동준이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전을 앞두고 울리 슈틸리케 감독의 부름을 받을 때였다. 슈틸리케 감독은 김승규(울산), 권순태(전북)의 경쟁 구도에 김동준을 합류시켰다. 대표팀이 대학생을 불러들인 건 김보경(당시 홍익대) 이후 5년 7개월 만의 일. 김동준은 연세대에서 차기석 코치가 전담해서 키운 선수다. 1986년생. 올해 스물아홉 살인 차 코치는 연세대 코치로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와 오랜 시간 동안 나눈 인터뷰를 정리해 본다.
언제 연세대 코치로 부임한 건가요?
“2014년 2월경이었어요. 2008년 전남에서 은퇴 후 경주시민구단에 입단했다가 부천 FC 1995로 옮긴 후 2010년에 완전히 선수 생활을 접었습니다. 지도자하려고요. 스물다섯 살의 나이에 지도자 3급 과정을 밟았습니다. 그러다 2급을 거쳐 1급으로 올라갔었죠. 1급 지도자 과정 동기가 (이)운재 형, (김)병지 형이었어요. 당시 연수를 받으며 시범을 보이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부천 FC에서 어정쩡한 상태로 선수 생활을 이어갔던 터라 시범을 보이는 부분이 어렵지 않았거든요. 제가 하는 걸 보고 운재 형, 병지 형이 다시 프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2급에서 1급 지도자 과정을 밟기란 굉장히 어려운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차 코치는 바로 1급 과정에 올라갔네요.
“2급 과정을 받으며 운 좋게 전체 참가자들 중 1등을 차지했어요. 1등한테는 1급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거든요. 그래서 1급 지도자 연수를 받은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지도자 연수를 받았던 게 잘한 선택이었어요. 남들보다 일찍 준비할 수 있었으니까요. 연수를 통해 다양한 분들을 만났습니다. 여자축구 지도하는 선배도 계셨고, 프로, 대학팀에서 고생하시는 분들도 계셨고요. 그런데 골키퍼 코치를 뽑을 때 자격 요건 중에서 운전면허증이 꼭 있어야 한다는 걸 아세요? 필드 코치의 자격 요건에는 운전면허증이 없거든요. 면접 때도 ‘운전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데요. 골키퍼 코치를 뽑을 때 전문성 보다는 선수단의 버스를 운전하고, 뒤에서 보조 역할을 하는데 더 중점을 두는 거죠. 골키퍼 코치에 대한 폄하된 시선에 속상한 나머지 자존심도 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좋은 골키퍼가 나올 수 있도록 그를 가르치는 지도자도 제대로 대우해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선배들이 생생하게 전해준 겁니다.”
선수 생활 시작할 때부터 골키퍼를 맡진 않았죠?“
축구를 시작하기 전에 투포환 선수로 활약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면서 축구를 했던 것이고요. 선수로서 별다른 임팩트가 없었어요. 달리기도 못했고, 키도 163cm 정도 밖에 안됐고. 필드에서 뛰다가 하루는 감독님이 장갑 끼고 골대 앞에 서 보라고 하시더라고요. 연습 중 슈팅이 날아왔는데 넘어지면서 그 볼을 잡았어요. 기분이 좋더라고요. 짜릿했던 것도 같고. 외동아들이라 집에선 운동하는 걸 심하게 반대했거든요. 그래도 골대 앞이 좋아 부모님께 거짓말하면서 축구를 놓지 않았어요.”
그 후로 중학교에서도 축구를 계속했던 것이고요?
“그렇죠. 부모님을 설득 시킨 후 포철중학교 축구부에 입단했어요. 그런데 선배들이 심하게 괴롭혔습니다. 매일 집합하고, 얻어맞고. 하도 빨래를 많이 해서 주부습진이 걸릴 정도였죠. 축구부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축구가 점점 싫어졌어요. 선배뿐만 아니라 감독님한테 까지 맞았으니까요. 외동아들로 귀하게 커서 근성, 오기, 이런 게 없었어요. 하루는 감독님이 아버지를 호출하시더라고요. 아버지를 세워 놓고 제가 보는 데서 ‘기석이는 축구에 재능이 없으니 더 이상 축구부에 안보내도 된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어린 나이에 심하게 충격 먹었습니다. 아버지가 감독님 앞에서 죄 지은 사람 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면은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그 후로 축구를 그만두고 집에서 쉬고 있으니까 키가 20cm나 자라더라고요. 아버지는 절 영국으로 유학 보낼 계획을 세웠습니다. 축구가 안 되면 영어라도 배우고 오라면서. 그러다 우연히 경신중학교에서 골키퍼를 구한다고 알려왔고, 외국보다는 서울이 낫겠다 싶어 경신중으로 전학을 갔는데 당시 감독님이 절 보시자마자 아버지 손을 덥석 잡으시더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선수를 보내주셔서’라고 인사하시시더라고요. 순간 ‘이게 뭐지? 왜 나 같은 선수를 보고 이런 인사를 하는 거지?’하는 생각이 들었었죠.”
(차기석이 경신중학교로 전학을 갔지만, 포철중학교에선 이적 동의서를 끊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축구 못한다고 그만두게 한 건 포철중 감독이었지만, 다른 학교에서 축구를 계속하는 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차기석의 아버지가 두 달 가량 마음 고생을 톡톡히 한 후에 겨우 이적동의서를 손에 쥘 수 있었고, 경신중 2학년에 편입이 가능했다.)
어렵게 들어간 만큼 더 열심히 했을 것 같아요.
“하루에 다이빙을 500번 넘게 했어요. 매일 아침마다 언덕을 오르내렸고요. 중 3 정도 되니까 힘이 붙는 느낌이 나더라고요. 원래 볼을 차면 하프라인도 넘어가지 못했거든요. 밤마다 학교 담벼락에다 공을 차면서 힘보다 요령을 알게 됐어요. 킥이 좋아지니까 경기 후반이 되면 감독님께서 공격수로도 내보내주셨어요. 페널티킥이나 프리킥은 주로 제게 맡기셨고요. 3학년 전국대회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팀인 풍생중학교랑 맞붙은 적이 있는데 후반에 제가 공격수로 들어가 골을 터트렸고, 승리한 적이 있었어요. 축구가 정말 재미있다고 느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경신중 이희철 감독은 차기석을 풍생고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자신이 가면 다른 선수 한 명이 빠져야 한다는 얘길 듣고 거절할 수밖에 없었단다. 당시 수원삼성의 김호 감독은 차기석의 가능성에 점수를 주고 프로팀에 들어와 훈련하면서 테스트를 받아볼 것을 권유했고, 실제 수원삼성에서 날고 기는 선배들과 훈련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2004년 청소년대표팀에서 만난 차기석(왼쪽), 박주영, 김진규.(사진=연합뉴스)>
그런데 왜 수원 삼성에 입단하지 않았어요? 김호 감독도 원했다고 들었는데.
“당시 제 나이가 중 3이었어요. 세상 물정 모르는 애가 TV에서 자주 봤던 프로선수들과 함께 생활하다보니 신기한 것보단 스트레스를 더 받았어요. 그 상황이 너무 무섭더라고요. 아프다는 핑계대고 도망치다시피 하면서 그곳을 나왔습니다. 조광래 감독님이 계셨던 안양 LG에서도 절 데려가려 하셨어요. LG엔 부상 핑계대고 가지 않았고요. 그런 가운데 아버지의 권유로 서울체육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그 학교 골키퍼 코치가 장필규 선생님이셨어요. 지금은 신갈고 코치로 계시는데 장 코치 님 덕분에 죽기살기로 체력 훈련에 매달렸고, 1학년 춘계대회를 앞두고 3학년 형이 십자인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제가 첫 대회부터 출전할 수 있었습니다. 1학년부터 골키퍼로 두각을 나타냈고, 17세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일찌감치 대표팀 생활을 경험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던 거죠.”
(2002년 9월 23일(한국시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부다비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17세이하) 결승전에서 맞붙은 한국과 예멘은 전후반과 연장전까지 120분의 혈투 끝에 1-1무승부를 기록했다. 결국 승부차기로 이어졌다. 승부차기에서 한국은 5-3승리를 거뒀다. 1986년 이후 무려 16년 만에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누렸다. 시상식에서 최우수선수에 뽑힌 선수는 필드플레이어가 아니었다. 바로 골키퍼 차기석이었다.)
17세 청소년대표로 참가한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기억나요?
“그럼요. 당시 코치님한테 듣기론 경기마다 골키퍼를 바꾸겠다고 하셨어요. 전 그런 줄 알고 있는데, 첫 게임부터 절 선발로 집어넣으시더라고요. 두 번째 게임 때도 선발 라인업에 제 이름을 올리셨고요. 세 번째 상대팀이 예멘이었어요. 그때도 출전했고, 전반전 마칠 때까지 1-2로 지고 있었습니다. 수차례의 슈팅이 골문을 향해 밀려왔어요. 코치님은 그런 상황에서도 두 골만 먹은 건 진짜 선방한 것이라고 위로해주셨지만, 이겨야 하는 경기라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반에 간신히 2-2 무승부를 만든 후 경기를 마쳤는데 그 팀을 결승전에서 또 만난 겁니다. 연장까지 1-1 무승부를 기록했어요. 당시 아부다비 경기장이 8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관중이 7만9000여 명이 입장했다고 하더라고요. 모두가 하얀색 옷을 입고 소름 돋을 정도의 응원전을 펼쳤어요. 위축되고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한 번 상대해본 팀이라 자신은 있었어요. 승부차기에서 제가 두 골을 막아내는 바람에 한국이 5-3 승리를 거뒀고, 16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축구 시작한 이래 대회에 나가 우승해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시상식이 펼쳐졌고, 전광판에 제 이름이 뜨더라고요. 전 GK상인 줄 알았어요. 수상하고 내려와서 상패를 보니까 MVP 상인 거예요. 엄청 놀랐었죠. 골키퍼에게 MVP를 주다니 의아해 할 수밖에요. 그 후로 제대로 상승세 탔습니다. 귀국 후 수많은 미디어들로부터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요. 덕분에 17세 월드컵에도 출전했고, 20세 이하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나갔다가 히딩크 감독님의 관심을 받게 된 겁니다.”
(히딩크 감독이 ‘찜’한 차기석은 우선 K리그에 데뷔하기로 결정한다. 1억5000만 원의 계약금을 받고 전남 드래곤즈에 입단했고, 냉정한 승부의 세계를 경험하며 상당히 애를 먹는다.)
전남에서 김영광 선수(현 이랜드 FC)와 선후배로 만났어요.
“당시 전남엔 김영광, 염동균 선배가 있었어요. 전 넘버3였습니다. 쟁쟁한 선배들이 있다 보니 출전 기회를 잡기가 쉽지 않았어요. 김봉수 골키퍼 코치가 살부터 빼라고 하더라고요. 2주 동안 7kg을 뺐습니다. 하루 4번 운동하고, 저녁에 설사약 먹고. 체중 조절 못하면 운동 안 시키겠다고 하셔서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뛰어다녔습니다. 후반기 들어선 완벽히 적응이 됐고 2군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1군으로 복귀해선 계속 1군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친할머니가 위급하시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당시 암 투병 중이셨는데 제가 병원에 도착하고 이틀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가족의 죽음은 처음이었고, 할머니랑 워낙 각별한 사이였기 때문에 할머니의 죽음이 믿기지 않았어요. 괴로운 나머지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며칠 동안 술에 의지하며 지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몸이 이전 같지 않더라고요. 피로감이 심해지고, 도통 의욕이 생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아버지와 함께 지방의 한 병원을 찾았는데 만성신부전증이라는 거예요. 이미 수술할 시기도 놓친 것 같다면서. 빨리 서울의 큰병원에 가서 정밀검사를 받으라고 하더라고요. 전 그 의사가 무슨 말을 하나 싶었어요. 도통 이해가 안 갔거든요. 아버지랑 병원에서 나와 차를 타고 가다가 아버지한테 저 좀 내려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도저히 그 상태로 집에 가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방황하는 시간을 가졌나요? 수술을 미루고? 예고 없이 찾아든 병이 인생 전체를 흔들어 놓았을 것 같아요.
“아픈 건 괜찮은데 축구를 못한다는 건 저한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걱정했던 건 딱 한 가지였어요. 수술하고도 축구를 계속할 수 있는지, 선수 생활을 이어갈 수 있는지의 여부였어요.”
서울의 큰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해봤나요?
“네. 아산병원을 찾아갔고, 그곳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습니다. 역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신장 이식을 받으려면 순서를 기다려야 했고, 축구를 해야 하는 저로선 그렇게 오랜 시간 대기표 받아 놓고 기다릴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결국엔 가족들 중에서 맞는 사람을 찾아야 했어요. 어머니가 자신의 신장을 기증하시겠다고 했지만 부정맥 증상이 나타나면서 성사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버지 신장을 받게 됐었죠.”
아버지의 신장을 기증 받는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아버지는 제가 걱정할까봐 당신의 건강은 절대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오히려 절 더 걱정하셨죠. 수술할 때는 마취로 인해 잘 몰랐지만, 수술이 끝난 후 진통제를 맞아도 통증이 가라앉지를 않았어요.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고통이었습니다. 호흡도 곤란했고, 잘못하면 수술한 부위가 터질 것만 같았고. 그런 통증 속에서도 ‘과연 이런 몸으로 내가 축구를 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절 미치게 했습니다. 수술하고 체중이 10kg이나 빠졌어요.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했고, 걷기가 불편하니 뛰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죠. 2년 가까이 재활에만 매달렸습니다. 무릎이나 발목 수술을 받으면 재활 기간이 정해져 있지만, 저 같은 경우엔 재활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기약이 없었어요. 그게 가장 괴로웠던 것 같아요.”
<피스컵코리아에 참가한 에인트호벤 팀에 들어가 훈련 중인 차기석의 모습. 당시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았었다.(사진=연합뉴스)>
그런 고통을 참아가면서 결국엔 그라운드에 복귀했어요. 당시 전남 상황이 복잡했었죠?
“허정무 감독님이 대표팀으로 가시고, 박항서 감독님이 부임하셨죠. 시즌을 앞두고 터키로 가서 전지훈련을 가졌는데 그곳에서 몸 상태가 회복됐어요. 박 감독님도 기회를 많이 주셨고요. 더욱이 (염)동균이 형이 부상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박 감독님은 2008년 3월 7일, 날짜도 잊지 않습니다. 전남과 포항의 개막전에 출전하라고 얘기해주셨습니다. 얼마나 기쁘던지 하늘을 날아오를 것만 같았습니다. 그 개막전을 마치면 곧장 서울로 이동해 AFC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위해 호주로 떠나는 스케줄이었습니다. 3월 1일 휴가를 받아 친구들과 함께 복어를 먹으러 갔어요. 그런데 그 음식을 먹고 기절했다가 병원으로 실려 갔고, 깨어나는 순간 토하면서 정신을 차렸어요. 눈을 뜨니까 병원 천장의 형광등이 보이더라고요. ‘아, 난 이제 다 끝났구나. 다 망가졌구나’하는 생각부터 앞섰습니다. 신장이 좋지 않은 사람은 복어를 먹으면 안 된다는 걸 그땐 몰랐던 거죠. 그 수많은 음식 중에서 그날 왜, 하필이면 복어를 먹으러 갔을까요?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있나 싶었습니다.”
평소 음식을 조심했어야 했는데, 정말 안타가운 일이었네요. 복어는 일반인도 조심해서 먹는 편이잖아요.
“몸이 좋아지면서 제가 아프다는 걸 살짝 잊은 거죠.”
그럼 또 다시 병원 생활을 했겠네요.
“두 달 가량 입원해 있었습니다.”
작은 아버지 신장을 또 이식했다고 들었어요.
“네. 복어 사건 이후 다시 수술해야만 하는 상황이었어요.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친척들 모두 병원에서 검사를 받게 됐죠. 작은 아버지 신장이 저랑 맞는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작은 아버지가 제게 신장 이식을 해주셨어요.”
아버지도 아닌 작은 아버지가 조카를 위해 신장을 기증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이후 막내 작은 아버지 신장도 이식 받았잖아요.
“그러게요. 둘째 작은 아버지 신장을 이식받았지만 부작용이 나타나는 바람에 막내 작은 아버지마저 돕겠다고 나선 거예요. 사실 세 번째 신장이식수술은 제가 거부했어요. 투석하면서 버텨보겠다고, 또 다시 누군가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게 못할 짓인 것 같아서, 제가 견뎌보려고 했던 거죠. 오랫동안 버티다가 죽을 것만 같아서 막내 작은 아버지 걸 받았습니다. 저라도 작은 아버지들처럼 행동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그래서 더 잘 살아야 했어요. 저 하나 살리려고 자신의 신장을 기증해주신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건강을 되찾아야 했습니다.”
그로 인해 소속팀이었던 전남에서도 방출 당하는 수순을 밟았는데요. 구단 입장을 고려하면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고 봐요.
“당연하죠. 구단도 할 만큼 했어요. 충분히 이해했고요. 전혀 서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론 인생의 바닥을 헤매는 듯 했어요.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우울증 말기, 공황장애 등 또 다른 병을 안고 생활했습니다. 사실 신장 수술을 세 차례나 받은 사람이 축구를 계속한다는 건 기적이나 마찬가지예요. 아니 계속 축구를 하겠다는 게 미친놈이죠. 지금까지도 수면제 없이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해요. 누워 있으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거든요. 심한 자괴감에 빠져 좋지 않은 생각을 한 적도 있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2009년 K3리그인 경주시민구단에 입단을 했어요. 부모님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겠어요.
“제가 수술을 2006년, 2008년, 2013년 11월에 받았거든요. 경주시민구단은 두 번째 수술 이후 10개월 만에 입단했습니다. 당연히 부모님은 크게 반대하셨죠. 특히 어머니는 ‘축구하려거든 날 죽이고 가라’고 노발대발하셨습니다. K3리그는 프로처럼 훈련량이 많거나 일정이 빡빡하지 않거든요. 주말을 이용해 경기를 치르고, 훈련장과 경기장을 포항 집에서 출퇴근할 수 있다며 안심 시켜드렸습니다. 가족들은 걱정했지만, 전 그라운드에 서 있는 게 정말 행복했어요. 어느 때보다 마음 편하게 축구를 할 수 있었고요. 그러다 그 해 7월, 부천 FC 1995로 전격 이적했습니다. 부천 FC에 있으면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던 것이고요.”
몸이 아프기 전까지만 해도 정성룡 선수와 경쟁 상대였어요. 청소년대표팀 시절에는 오히려 앞서 있었고요. 우승컵을 들어 올렸던 2004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을 비롯해 2005년 U-20 FIFA 월드컵 등 중요한 국제대회 주전은 항상 차기석 코치의 몫이었는데, 그런 점에서 2010남아공월드컵을 지켜보는 심정은 복잡다단했을 것 같네요.
“정성룡 선수가 실력이 좋은 거죠. 실력이 없었다면 월드컵에서 주전 골키퍼로 뛸 수 있었을까요? 저랑은 비교할 수 없는 선수예요. 부상도 제 몫이고, 선수는 경기를 통해 평가받는 겁니다. 물론 한때 제가 주전을 도맡은 적이 있었지만, 그 또한 지난 일이에요.”
지금도 투석을 하고 있나요?
“그렇진 않아요. 약만 먹고 있어요. 이전보다는 몸도 많이 좋아졌어요. 연세대 신재흠 감독님이 불러주셔서 지난해부터 연세대 코치로 활약하며 좋은 경험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대표팀에 들어간 (김)동준이는 제가 많이 신경 쓴 선수였어요. 성인대표팀에 뽑히는 건 대학생 선수로서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부분인데, 대표팀에 소집돼 동준이도 저도 굉장히 기뻤고, 의미가 컸습니다. 워낙 감각이 뛰어난 선수라 프로에 가서도 잘해낼 것으로 믿어요(김동준은 성남 FC로의 입단을 앞두고 있다).”
<2005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당시, 차기석은 네덜란드 언론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었다.>
차기석 하면 ‘비운의 스타’란 말이 떠오릅니다. 자신을 향해 그런 시선에 대해 부담스러운가요?
“비운이긴 하죠. 그런데 제 운명이 이렇게 정해져 있었나봐요. 그래서 일찌감치 지도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요. 아직 젊잖아요. 축구선수로선 불행했지만, 지도자로선 날개를 달고 싶어요. 그래야 억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국 축구 골키퍼 유망주에서 예기치 않은 병으로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던 차기석. 그의 인생에 드리운 불행의 그림자는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지금 그의 옆에는 제자들이 존재하고, 곧 프로팀 입단을 앞둔 김동준도 그 뒤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촬영을 위해 다시 연세대 축구부를 찾았을 때 마침 대표팀에서 복귀한 김동준이 차기석 코치와 함께 나타났다. 김동준은 스승 차기석 코치를 위해 기꺼이 카메라 앞에 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