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포츠 단신

[스포츠 뉴스][박동희의 야구인] ‘영혼의 국적은 재일’ 히초리의 은퇴

작성자사랑방 지기|작성시간15.09.29|조회수802 목록 댓글 0

[박동희의 야구인] ‘영혼의 국적은 재일’ 히초리의 은퇴

B8F0B8AEB8F0C5E4-C8F7C3CAB8AE.BDBAC6F7C3F7C3E1C3DF.jpg

9월 28일 은퇴식을 치른 모리모토 히초리(한국명 이희철)(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자이니치(재일교포)’로 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항상 외국인 등록증을 갖고 다녀야 하죠. 무슨 일을 해도 외국인 취급을 받아야 하고. 솔직히 전 일본에선 외국인이었고, 한국에서도 한국인 대접을 받지 못했어요. 그저 재일교포였을 뿐입니다. 박 기자님은 제 영혼의 국적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2011년 8월이었다. 기자는 당시 일본 요코하마에 있었다. 그곳에서 일본 프로야구팀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외야수 모리모토 히초리(한국명 이희철)를 인터뷰하고 있었다. 한창 인터뷰가 진행 중일 때 기자는 그에게 ‘자이니치’로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가’하고 물었고, 히초리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간의 고충을 털어놨다. 그리고서 기자를 향해 돌발적으로 질문한 게 바로 “제 영혼의 국적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였다.

B8F0B8AEB8F0C5E4-C8F7C3CAB8AE.BDBAC6F7C3F7C3E1C3DF5.jpg

2006년 올스타전에서 만화 '드래곤 볼'의 주인공 피콜로 분장을 한 채 더그아웃에 앉아있는 모리모토 히초리(사진 가운데). 기요하라 가즈히로(사진 왼쪽)와 마쓰자카 다이스케(사진 오른쪽)가 히초리를 보고 웃고 있다(사진=2006년 퍼시픽리그 홈페이지)

#
 히초리의 부모님은 제주가 고향인 한국인이다(인터넷엔 히초리의 어머니가 일본인으로 돼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역시 한국인이다. 한국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히초리는 한번도 자신이 한국인임을 잊은 적이 없었다. 항상 “네가 한국인임을 잊지 마라”고 강조했던 부모의 영향도 있었지만, 히초리 스스로 한국인임을 부끄러워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어릴 적 1년간 일본 주재 한국 소학교(초교)에 다닌 히초리는 그곳에서 한국어와 한국인의 정서를 배웠다. 집에서도 부모들이 늘상 한국어로 대화했기에 그에게 한국은 ‘특별한 나라’가 아닌 우리 부모와 내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으로 비쳐졌다.


그렇다고 그가 마냥 일본을 부정한 건 아니었다. 그가 태어난 곳은 일본 도쿄였고, 한국 소학교에 1년 다닌 걸 제외하면 모든 교과과정을 일본 학교에서 이수했다. 한국 친구보다 일본 친구가 더 많고, 야구의 꿈도 일본에서 키운 까닭에 그는 일본을 한국 못지않은 ‘내 나라, 내 고향’으로 생각한다. 자이니치의 운명적 갈등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히초리는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한국에서 그는 일본인 취급을 받았다. 어눌하게 한국말을 쓰면 당장 ‘반쪽발이’라는 비아냥이 들렸고, 일본말을 쓰면 ‘일본놈 행세를 한다’는 비난이 날아왔다.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고, 자란 곳이 일본이기에 일본인이나 다름없는 그였지만, 간혹 들리는 ‘조센징’ 소리에 가슴 아파해야 했고, 어딜 갈 때마다 들고 다녀야 하는 외국인 등록증 때문에 무력감을 느끼곤 했다.


그랬다. 그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닌 그 무엇이었다. 기자는 “제 영혼의 국적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라는 히초리의 질문에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히초리가 시선을 창밖으로 돌린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제 영혼의 국적은…‘재일(在日)’입니다.”

GG.jpg

은퇴경기 마지막 타석에서 눈물을 흘리며 타석에 들어서는 히초리(사진=세이부 라이온스 동영상 캡쳐)

#
 1981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히초리는 원래 축구에 재능을 나타낸 아이였다. 그러다 고교시절부터 야구에 집중했다. 천부적 능력이 뛰어난 까닭이었는지 고교시절 내야수를 맡으며 ‘거포’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고교시절 그가 기록한 홈런수는 무려 34개였다.


1998년 니혼햄은 그런 히초리에 집중했고, 신인드래프트에서 그를 4순위로 지명했다. 그리고 입단이 결정되자마자 강한 어깨와 빠른 발을 높이 평가해 그를 외야수로 전향시켰다. 당시 일본야구계에선 “꽤 쓸만한 고교 유망주가 입단했다”며 “2, 3년 안에 백업 외야수로 성장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야구계의 기대와 달리 히초리는 2002년까지 제 자릴 찾지 못했다. 1, 2군을 오가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2003년 트레이 힐먼 감독이 부임하며 사정이 달라졌다. 힐먼 감독은 히초리를 ‘향후 니혼햄의 운명을 책임질 젊은 기대주’로 지목하고서, 그를 계속 경기에 투입했다.


2005년 드디어 프로 6년 차에 100경기 이상에 출전한 히초리는 2006년 드디어 주전자릴 꿰차고 이때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06년은 그야말로 꿈같은 시즌이었다. 이해 정규 시즌 개막전에 선발로 나간 이후 134경기에 출전한 히초리는 퍼시픽리그 득점왕에 오르며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는 겹경사를 누렸다. 이해 올스타전에 출전한 건 차라리 덤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이해 히초리는 일본시리즈에서 맹타를 휘둘러 소속팀 니혼햄이 대망의 우승컵을 안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담당했다. 


2007년은 야구인생의 절정이었다. 팀의 ‘간판스타’ 신조 쓰요시가 은퇴하자 히초리가 공석이 된 니혼햄 중견수를 맡았다. 이해 히초리는 첫 타율 3할과 24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며 2년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에 성공했고, 베스트나인에 뽑히는 영광까지 누렸다. 일본 야구계는 히초리의 맹활약을 지켜보며 롱런을 기대했다. 원체 자기 관리에 능한 선수였기에 그의 갑작스러운 하향세를 우려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2008년부터 상대 투수의 공에 맞아 왼손 새끼손가락이 골절되면서 그의 야구인생은 모래시계의 모래가 내려가듯 조금씩 조금씩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2009, 2010년에도 2년 연속 손가락을 다치면서 히초리는 이전과 같은 호타준족을 선보이지 못했다.


2010시즌을 끝으로 FA(자유계약선수) 자격을 취득한 히초리는 결국 12년간 자신의 모든 것이던 니혼햄을 떠나 요코하마로 둥지를 틀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자신의 타구에 발을 맞으며 히초리는 그토록 염원하던 ‘부활’에 성공하지 못했다. 기자가 시즌 중 히초리를 장시간 인터뷰할 수 있던 것도 그가 2군에서 재활 중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히초리는 기자에게 “반드시 부활하겠다”고 약속했으나, 결국엔 이 약속 역시 또 한 번의 왼손 골절로 이루지 못했다. 2013시즌을 끝으로 요코하마에서 나온 히초리는 세이부 라이온스의 가을 캠프에 연습생으로 참가해 재기를 노렸다. 다행히 실력을 인정받아 정식계약에 성공한 히초리는 지난해 99경기에 출전해 타율 2할5푼2리를 기록하며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BFE4C4DAC7CFB8B6.jpg

요코하마 시절 한화와의 연습경기를 끝마치고 벤치로 돌아가는 모리모토(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2015시즌을 앞둔 스프링캠프에서 기자는 히초리와 잠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과거 “최지우같은 예쁘고 착한 한국 여성을 소개해달라”던 히초리는 이미 결혼해 기혼자가 돼 있었고, 한창때 날렵했던 몸은 30대 중반의 베테랑답게 조금은 넉넉해져 있었다. 히초리는 “열심히 몸을 만들어 개막전 엔트리에 들고 싶다”는 소망을 밝히며 “나중에 시간 되면 꼭 보자”는 인사말을 남긴 채 훈련장을 향해 뛰어갔다.


히초리는 소망대로 올 시즌 개막 엔트리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기자는 이번만은 그가 지긋지긋한 부상에서 벗어나 후회없는 시즌을 만들길 바랐다. 그러나 시즌 개막 이후 11타수 무안타의 빈타에 시달린 히초리는 결국 2군행을 통보받았다. 이때 히초리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결정한 듯하다. 일본야구계에선 히초리가 시즌을 앞두고 큰 결심을 발표한 것이란 소문이 돌았다. 아니나다를까.

N.jpg

은퇴를 발표하는 히초리(사진=세이부 라이온스)

히초리는 9월 21일 기자회견을 통해 은퇴를 발표했다. 은퇴 발표에서 히초리는 “2군으로 떨어질 때, 지금이야말로 은퇴를 결심하기 좋은 타이밍이라 생각했다”며 2006년 니혼햄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한순간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라 말하고서 “실수가 많은 프로 스포츠에서 17년간 변함없는 성원을 보내주신 팬들과 내 자신에게 ‘멋진 인생을 살게 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은퇴 소감을 밝혔다. 


물론 이때도 히초리는 ‘퍼포먼스의 제왕’답게 “그림으로 눈물을 그렸으면 은퇴 장면이 더 극적이지 않았겠느냐”는 농담을 빼놓지 않고 들려줬다. 


히초리의 은퇴 경기는 28일 열렸다. 히초리는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경기에 세이부가 3대 1로 리드한 8회 초 7번·우익수로 교체 출전했다. 8회 말 타석에 서려면 반드시 앞 타자인 구리야마가 살아나가야 했다. 만약 구리야마가 아웃된다면 세이부가 리드한 상황이었기에 9회 초로 경기가 끝날 수밖에 없었다.


구리야마는 어떻게든 히초리를 타석에 세우고자 참고 또 참았다. 결국 볼넷으로 출루. 이 장면을 대기타석에 지켜보던 히초리는 눈시울을 붉히며 타석에 섰다. 생애 마지막이 될 타석에서 히초리는 초구를 받아치기 위해 힘껏 스윙했다. 결과는 헛스윙. 2구 볼을 골라낸 히초리는 3구째 공을 다시 한번 힘껏 받아쳤다.


“딱!” 소리와 함께 타구가 날아간 곳은 3루수 글러브였다. 비록 타구는 평범한 내야 아웃으로 끝났지만, 관중석에 있던 팬들은 터질 듯한 함성과 박수로 17년간의 야구인생을 마감하는 히초리를 격려해줬다. 


경기가 끝나고 히초리는 장내의 관중에게 “전력으로 뛰는 야구와 즐기는 야구, 두 가지를 키워드 삼아 오늘까지 계속 달려왔다”며 “앞으로도 지금처럼 후회없는 인생을 살도록 전력으로 뛰고, 즐기겠다”고 약속했다.

20150928_142757.jpg 히초리가 마지막 타석에 들어서자 응원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응원하는 팬들(사진=세이부 라이온스 동영상 캡쳐)

#
 히초리의 은퇴를 기자는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그라운드에서 늘상 허슬플레이를 선보이던 히초리를 다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가슴에 커다란 도넛 구멍이 생긴 것처럼 허한 감정이 느껴졌다. 한편으론 미안한 감정도 가득했다. 어쩌면 이는 한국야구계가 동시에 느껴야할 감정일지 몰랐다. 이유가 있다. 한국야구계가 그에게 해선 안 될 비매너를 범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히초리가 요코하마에서 퇴단을 결심했던 2013년. 히초리에게 KBO리그 모 구단이 접근했다. 이 구단은 히초리를 영입할 것처럼 행동했고, 구체적인 계약조건까지 제시했다. 당시 현역 생활 지속을 두고 장고를 거듭하던 히초리는 한국 구단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자 은퇴에서 현역 지속으로 방향을 틀었다.  


히초리와 모 구단의 협상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봤던 A 씨는 “한국인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생각하는 히초리는 한국에서 야구인생의 마지막을 불태우는 걸 항상 꿈꿔온 선수”라며 “그래선지 다소 조건이 좋지 않아도 모 구단 입단에 매우 적극적이었다”고 귀띔했다. 


따지고 보면 히초리의 한국행 시도는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2010시즌 종료 후 FA가 됐을 때 히초리는 KBO리그에서 뛸 생각을 했었다. ‘한창 잘할 때 모국에서 뛰는 게 선수로서의 예의’라 생각한 까닭이었다. KBO리그에서 뛰었던 NPB(일본야구기구) 외국인 선수들에게 한국야구에 관해 물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하나같이 부정적이었다.


히초리는 기자에게 “외국인 선수들이 ‘한국은 일본과 야구 환경과 스타일이 다르고, 무엇보다 훈련량이 많아 절대 (훈련을) 따라가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며 “마침 요코하마에서 러브콜이 와 한국행을 접고 일본무대에서 계속 뛰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덧붙여 “요코하마와 계약하기로 마음억었을 때 ‘역시 내 정체성은 한국이니까 재일교포로서 열심히 일본 무대에서 뛰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한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의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2013년 KBO리그 모 구단의 영입 제안에 히초리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건 그래서 당연할지 몰랐다. 하지만, 모 구단은 어느 시점부터인가 히초리와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히초리는 계속 이 구단의 연락을 기다렸지만, 콜은 없었다. 결국 히초리는 기다리다 지쳐 녹아웃됐고, 현역 지속을 결심한 마당이라, 세이부에 연습생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모 구단이 히초리와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은 건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바로 “히초리가 귀화한지 몰랐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구단은 히초리가 여전히 한국 국적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선수 에이전트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고, 하다못해 인터넷만 뒤져도 쉽게 알아낼 정보를 이 구단은 한창 입단 협상 중일 때 알게 된 것이었다. 


이 구단은 “한국 국적 선수면 어떻게 입단을 시켜보려 했는데 일본 국적이라, 만약 히초리를 데려오려면 외국인 선수 신분으로 영입해야 했다”며 “‘외국인 선수 티오(TO)를 하나 희생하면서까지 데려올 만한 선수는 아니다’라는 자체 판단 아래 결국 영입을 포기했다”고 밝혔다. 이 구단은 “해당 선수(히초리)에게 설명을 잘했다”며 “연락 두절은 과장”이라고 항변했는데 “어떻게 히초리의 국적 여부도 모르고, 입단 제안을 한 것이냐”는 질문엔 “세상 일이 어디 내 맘대로 되느냐”는 말 같지도 않은 궤변을 늘어놓았다.


히초리는 여전히 한국에 우호적이지만, 이때 입은 상처가 얼마나 컸을진 물어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으리라.

히초리_박동희_기자.jpg

늘 유쾌했던 사나이, 모리모토 히초리. 그가 한국에서 '이희철'로 불릴 날이 올 수 있을까(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히초리는 “은퇴 후 어떤 일을 할지 아직 정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시즌이 모두 끝나야 미래의 청사진이 나올 거 같다. 히초리는 기자가 취재한 재일 한국인 스포츠 선수 가운데 전(前) 한신 타이거스 타자 히야마 신지로(한국명 황진환)와 함께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이 한국인임을 공표한 이였다. 그리고 한국인임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 이였다. 


비록 일본으로 귀화하긴 했지만, “미국에서 오래 살면 미국 시민권자가 되듯 일본에서 오래 살아 일본 시민권자가 된 것뿐”이라며 “내 정체성은 여전히 한국”이라고 목소릴 높은 이기도 했다. 자신이 불리하면 일본인 행세를 하고, 유리하면 한국인 행세를 하는 어느 스포츠 선수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이였다(그는 자기에게 불리하면 한국말을 모른 척하고, 유리하면 유창한 한국말을 쓰는 이로 아주 유명하다.)


히초리가 한국야구에서 선수로 뛸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일본프로야구에서도 첫손가락으로 인정받았던 그의 수비능력과 작전수행능력 그리고 리더십만은 한국야구에서도 충분히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으리라 본다. 


모리모토 히초리가 ‘이희철’이란 이름으로 한국야구계에서 널리 불리는 날이 온다면. 그의 영혼의 국적은 ‘재일’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 어디에서든 자유로운 ‘그라운드’가 될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