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부, 김병수, 고종수…. 이들은 한국 축구사를 대표하는 ‘비운의 스타’들로 꼽힌다. 물론 지금은 지도자로 각자의 위치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지만, 선수 시절에는 이런저런 사연들로 인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이번에 연재하는 인물들은 축구인생의 전성기를 달리다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접은 축구인들 얘기다. 차기석, 이우영(상·하)에 이어 백승철에 대한 인터뷰가 이어진다.
<대구 수성대 축구부를 맡고 있는 백승철 감독. 그의 가장 찬란했던 프로 생활은 딱 1년이었다.(사진=이영미)>
프로축구 K리그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1998년 K리그 플레이오프 울산 현대와 포항 스틸러스와의 1,2차전. 당시 리그 3위를 기록했던 포항이 준플레이오프에서 4위 전남을 승부차기 끝에 5-3으로 꺾고, 2위 울산과 플레이오프에서 격돌하게 된 상황이었다.
포항에서 벌어진 1차전은 전반부터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반 17분 울산 정정수의 프리킥 골이 득점으로 이어지면서 1-0으로 울산이 앞서나갔지만 후반 13분 포항 김명곤의 동점골이 터지면서 경기는 뜨겁다 못해 데일 정도였다. 경기 종료를 앞둔 후반45분 포항 최문식의 역전골이 터지면서 포항이 2-1, 역전에 성공하는 듯했다가 추가 시간에 나온 울산 김종건의 헤딩 동점골로 경기는 다시 무승부로 돌아갔다. 그렇게 끝날 것으로 보였던 경기가 후반 51분 포항 백승철이 벼락같은 중거리슛을 성공시키면서 포항이 3-2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2차전은 울산에서 펼쳐졌다. 후반 26분 울산 김현석의 선취골이 터지면서 울산이 1-0으로 앞서나갔다. 그러다 후반 40분 포항 박태하의 동점골이 터지면서 1-1 무승부를, 1차전을 합한 종합 스코어는 4-3으로 포항이 앞서나갔다. 후반45분, 울산의 프리킥 찬스에서 명장면이 펼쳐졌다. K리그 최초로 골기퍼 김병지가 극적인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종합스코어(1, 2차전 합계)를 4-4 무승부로 돌려놓았다. 결국 울산은 승부차기에서 포항을 4-1로 꺾으며 기적같이 결승에 진출했다. 1998년에 펼쳐진 포항과 울산의 플레이오프는 이후 ‘동해안 더비’의 시작이 되었다.
축구 선수 백승철의 이력은 굉장히 짧다. 1998년 영남대 졸업 후 포항 스틸러스 신인 선수로 프로에 데뷔한 그는 이동국, 안정환 등과 함께 신인왕을 다툴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뽐냈다. 데뷔 첫 해 20골과 4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하는 듯 했지만 이듬해 백승철은 부상으로 수술과 재활을 반복하다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
그런 그가 지금은 대구수성대 축구부 감독으로 활약 중이다. 도대체 1998년에서 1999년 사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인터뷰를 통해 그의 불운했던 축구 인생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은퇴 후 인천 운봉고 코치로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대구수성대 감독은 언론에 대학 대회 관련 기사를 통해 알게 됐다.
“아마 나를 알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운봉고 코치로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2년 전 대구수성대 축구팀을 맡게 됐다. 창단팀이라 시작할 때부터 고생을 각오하고 덤벼들었다. 그래도 전국체전에서 8강에 오르는 등 고무적인 결과를 나타내고 있는 중이다.”
창단팀은 선수 구성하는 게 가장 어려웠을 텐데 어떻게 팀을 만들었나.
“처음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도 주위에서 도와주신 분들 덕분에 1,2학년 선수들로 20명 정도의 팀을 구성할 수 있었다. 중도 포기하는 선수들도 하나 둘씩 생겨났다. 축구 선수로서의 미래가 불투명하다보니 군대에 자원 입대하거나 아예 축구를 떠나 대학 졸업 후 회사에 취직하려는 선수들도 있었다. 신입생 10명 중에서 3명 정도가 그런 형식으로 팀을 나갔다.”
많이 안타까웠을 것 같다.
“당연하다. 계속 노력하고 두드리면 길이 보일 텐데 요즘 아이들은 현실적인 계산이 아주 빠르다. 창단팀 감독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가야만 한다. 자신감 하나로 덤벼들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어디서부터 무슨 얘기를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어차피 오늘은 제대로 ‘타임머신’을 타기로 했으니 축구를 시작한 그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서울에 있는 성내초등학교를 다니던 2학년 때 축구부의 김원일 선생님이 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는 내게 다가오셔서 ‘축구 한 번 해볼래?’라고 말씀하셨던 게 축구와의 인연이 된 시작점이다. 부모님은 내가 운동하는 걸 반대하셨다. 선생님은 매일 집에 찾아와서 부모님을 설득시켰다. 어렵게 허락을 받았고, 그 덕분에 선생님으로부터 축구의 기본기를 잘 배울 수 있었다. 4학년 때까지 게임에 나가지 못했다. 선배들처럼 그라운드를 질주하며 패스를 하고 멋지게 슈팅을 하며 뽐내고 싶었지만 김원일 선생님은 기본기가 중요하다며 2년여 동안 게임에 내보내지 않으셨다. 5학년이 돼서야 경기에 출전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2년여 동안 줄기장창 기본기만 배웠던 게 이후 축구하는데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동북중학교에서 동북고 축구부가 아닌 영등포공고에 진학했다.
“키가 작아 동북고에선 날 받아주질 않았다. 그러다 영등포공고 3학년이 돼서야 키가 15cm나 자라 178cm 정도 됐다. 당시 팀 성적이 좋지 않아 서울에 있는 대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때 영남대 박수덕 감독님께서 날 받아주셨다. 대학에서 축구 실력이 급성장했다. 원래는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는데 부상으로 3개월가량 쉬면서 웨이트트레이닝만 했더니 체격도 커지고 파워가 생기더라. 그게 축구로 연결됐다. 전국체전에 나가 우승도 하고 대통령배축구대회에서 실업팀을 만나 준우승까지 올라갔다. 대학 3학년 때부터 게임에 자주 나가면서 경북 지역 득점상, 춘계 대학 시합에서 득점왕에 올랐다. 포항 스틸러스에서 그런 날 점찍었고, 자연스레 프로에 입단한 것이다.”
K리그 명문팀으로 꼽히는 포항 입단은 엄청난 동기부여가 됐을 듯하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도시이다. 포항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돈을 벌게 해준 곳이다. 비록 프로 생활은 2년 밖에 못했지만 짧고 굵게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스틸러스 경기장엔 항상 많은 관중들이 축구를 보러 왔다. 엄청난 함성과 응원 속에서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전율이 일어날 정도였다. 막상 팀에 들어가 보니까 TV에서만 보던 어마어마한 선배들이 존재했고, 무엇보다 이동국이란 걸출한 동기이자 동생 덕분에 더욱 즐겁게 축구할 수 있었다.”
당시 어떤 선배들이 있었나.
“최문식, 박태하, 안익수, 이영상 형들이 주축을 이뤘다. (고)정운이 형도 세레소 오사카에서 포항으로 복귀했고, (황)선홍이 형도 일본으로 진출하기 전까지 6개월가량 같이 뛰었다. 한국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잇는다는 황선홍-이동국이 한 팀에서 뛰다 보니 동료로서 계 탄 기분이라고 할까? 같이 생활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짜릿하기도 하고…. 정말 기분 좋았다.”
계 탄 기분이 들게 한 황선홍-이동국 조합은 어떤 이미지로 각인돼 있는지 궁금하다.
“같은 공격수라고 해도 느낌이 틀렸다. 선홍이 형한테 패스가 들어가면 반드시 해낼 것 같은 믿음이 있었다. 의지할 수 있는 선배였고, 카리스마도 장난 아니었다. 선홍이 형한테 더 배우고 싶었는데 세레소 오사카로 떠나면서 짧은 인연 밖에 맺지 못했다. 동국이는 ‘한방’이 있는 친구였다. 볼터치가 워낙 좋았고, 발리슛에 대한 자신감도 돋보였다. 지금 전북 경기를 보면 이전과는 또 다른 이동국이 있더라. 포항 시절과는 많이 다른.”
어떻게 다르다는 건가.
“나이가 어렸을 때는 ‘한방’만 있는 친구 같았는데 지금은 팀을 위해 뛴다는 느낌? 축구 스타일이 많이 성숙해졌다. 동국이도 힘든 일들을 겪으면서 생존을 위해 자기 스타일에 변화를 준 게 아닌가 싶다. 변함이 없는 점이라면 그때나 지금이나 골을 잘 넣는다는 것이다.”
당시 부산 대우의 안정환, 이동국, 백승철 등이 신인왕 경쟁을 벌였다.
“안정환, 이동국보다 잘한다는 자신감은 있었다. 첫 해부터 득점도 많이 했고, 어시스트 기록도 있기 때문에 그들과 경쟁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항의 여학생들은 99% 동국이 팬들이었다. 동국이가 작은 제스처만 취해도 여학생들이 자지러질 정도였다. 그랬던 친구가 지금은 다섯 아이의 아빠로 살고 있더라.”
(1998년은 K리그의 황금기였다. 눈에 띄는 신인들이 대거 나타나면서 경기장에는 ‘오빠부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안정환, 이동국이 존재했다. 당시 신인왕 후보는 안정환, 박성배, 이동국, 백승철 등이었는데 부산의 안정환은 17경기 5골 2도움을, 전북의 박성배는 10골을 득점했지만 출전 경기수가 백승철보다 적어 득점 순위 2위를 기록했다. 이동국은 15경기 7골 2도움이었는데 청소년대표 차출로 인한 공백이란 점이 정상 참작됐다. 결국 투표 결과 이동국이 32표를 얻으며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그 해 최우수선수로 뽑힌 이는 고종수였다.)
은퇴 후 포항 경기장에 가본 적이 있나.
“2년 전 포항 스틸러스 40주년 레전드 모임에 초청을 받아 오랜만에 포항을 찾았다. 나로선 너무 짧은 선수 생활을 보낸 곳인데, 날 잊지 않고 불러줘서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그때 정말 많은 분들이 오셨다. 원로 선배님들부터 1998년 함께 뛰었던 선수들 까지. 그러나 내 입장에선 그 자리가 편하지 않았다. 내가 과연 ‘레전드’란 타이틀에 걸맞는 선수였나 싶기도 하고.”
1998년, ‘동해안 더비’의 시작점이었던 울산과의 플레이오프 1,2차전은 선수 백승철을 각인시켰던 중요한 대회였다.
“솔직히 말해서 그 두 경기 갖고 먹고 살고 있는 중이다(웃음). 골은 결코 혼자 넣지 않는 것이다. 당시 포항에는 한국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히는 최문식(대전 감독) 선배가 있었다. 같이 뛰다 보면 왜 그 선배를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부르는지 절감할 수 있게 된다. 문식 선배는 내가 뛰는 곳으로 자석처럼 골을 패스해준다. 그 플레이오프가 인상적일 수밖에 없는 건 1차전 후반전과 추가 시간에 터진 골들이 다 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내가 찬 슛이 골망을 가를 땐 경기장이 지진이 난 것처럼 들썩거렸다. 경기 종료 1분을 앞두고 역전골이 터졌으니 얼마나 난리가 났겠는가. 2차전에서 (김)병지 형이 선보인 헤딩슛도 일품이었다. 명품 경기로 손꼽히기에 충분했다.”
그 경기 이후 포항의 최고 스타로 등극했다고 들었다.
“여러 골을 넣었는데도 그 골 하나로 포항 팬들의 반응이 달라졌다. 포항 시내를 걸어 다니는 게 불편할 정도였다. 외출할 때는 모자를 꾹 눌러 쓰고 다녔으니까.”
이동국과의 추억도 많을 듯하다.
“동국이가 골 세리머니 연구를 잘했다. 한 번은 경기를 앞두고 내게 골 세리머니를 제안했다. 둘 중 한 명이 골을 넣으면 바로 달려와서 같이 손잡고 빙빙 돌다가 쓰러지자는 내용이었다. 결국 내가 골을 성공시켰고, 동국이가 바로 달려와선 내 손을 잡고 빙빙 돌다가 같이 쓰러졌다(웃음).”
신인왕을 다퉜던 부산 안정환의 인기도 만만치 않았다. 화장품 광고에 나왔을 정도였으니 말이다(당시 안정환은 긴 머리 덕분에 샴푸 광고에도 출연했었다).
“정환이랑은 그리 친한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부산 원정 경기 때 프로에서 처음으로 정환이를 만났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영화배우 뺨치는 이목구비를 하며 그라운드에 들어서는 정환이를 보고 가슴이 설렐 정도였다. 너무 잘생겨서. 호주로 동계훈련을 갔었는데 대우도 그곳으로 동계훈련을 왔고, 덕분에 정환이랑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지금 TV에 나온 정환이를 보면 많이 아저씨가 됐더라. 신은 공평하다는 걸 느꼈다(웃음).”
그렇게 화려한 데뷔 첫 해를 보내고 이듬해 수술을 하더니 2년 있다가 은퇴를 했다. 그 사연을 좀 들어보자.
“은퇴라기 보단 그냥 조용히 하차했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팀을 떠났다. 1999년 부천 SK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한 이후 부상을 당했는데 수술 후 재활만 2년 정도 하다가 독일의 병원에서 내 무릎 상태로는 축구는 고사하고 테니스도 칠 수 없는 것은 물론 운동을 더 했다간 휠체어 신세를 면치 못할 거라는 얘기에 운동을 접었다. 물론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일본까지 건너가 3개월가량 테이핑 치료를 받으며 몸 상태를 체크했다. 처음엔 조금 나아지는가 싶더니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수술만 네 번을 했다. 한국에서 두 번, 독일에서 두 번.”
도대체 어떤 부상을 당했기에 그토록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됐단 말인가.
“선수생활하면서 부상당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SK전에서부터 결승골을 슈팅할 때 땅바닥을 긁으면서 찬 게 공중으로 떠서 득점이 된 건데 그 당시에는 별다른 통증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왼 무릎이 퉁퉁 부었더라. 병원에서 진찰받은 결과 반월판이 약간 찢어졌고, 무릎에 물이 찼다며 치료 받고나면 몇 주 동안은 축구하지 말고 쉬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 팀 상황이 부산과 포항 두 팀 중에서 누가 플레이오프에 올라가느냐를 놓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중이었다. 일주일 정도 쉬다가 괜찮아진 것 같아서 경기 출전을 강행했고, 이후 8게임을 연속 출장했다. 시즌을 마치고 무릎이 너무 아파 다시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갈 때만 해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전에 무릎에 물이 찼던 상태로만 짐작하고 검사를 받았는데 담당 의사가 반월판이 완전히 찢어졌고 십자인대와 무릎 전체가 모두 심각하다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수술을 했던 건가.
“구단에서 지정한 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일주일에 같은 부위를 두 차례나 수술했다. 처음 수술하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병원의 실수로 바이러스에 감염이 됐다는 말도 안 되는 얘길하더라. 월요일에 수술하고 금요일에 하반신 마취하고 또 수술을 했다. 그 병원에서 도통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서울의 대형 종합병원으로 옮겼고, 조금 호전되는 걸 느낀 후 독일로 향했다. 나중에 독일 병원에 가서 그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하니 자기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의료 행위라고 하더라. 수술 부위가 곪아도 한 달 뒤에 하는 게 상식적인 치료법인데 하반신 마취를 일주일에 두 번이나, 그것도 운동선수의 생명을 담보로 그런 대응을 한 데 대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의사 말로는 내 무릎이 6,70대 노인들 무릎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지금도 조금만 뛰면 통증을 느낀다. 무릎 연골이 없다. 날이 흐리고 비가 오면 무릎이 쑤시는 증상도 나타난다.”
처음 수술했던 병원에서 제대로 관리를 해줬더라면 바이러스 감염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2차 수술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 병원을 상대로 소송할 생각은 안했나.
“물론 했다. 병원측에서도 내가 소송하면 대응을 하겠다고 하더라. 그땐 그 병원을 용서할 수 없었다. 소송하려고 알아보고 다니던 중 아버지가 나서서 소송을 만류하셨다. 병원을 상대로 이긴다고 한들 내가 다시 뛸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면서. 그 후로 난 병원에서 하는 말을 잘 믿지 않는다. 내가 가르치는 선수들 중에 부상이 생기면 의사 말을 다 믿지 말고 반드시 종합병원 가서 정밀검사를 받은 후 최종 결정하라고 조언한다.”
(백승철은 독일에서 수술 후 재활하는 과정에서 여러 축구인들을 만났다고 한다. 독일에서 처음으로 차범근 감독과 차두리를 만났고, 이기형, 윤정환도 수술 후 함께 재활하며 동고동락했단다. 그러나 다른 선수들은 수술 부위가 호전돼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백승철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고 소득 없이 귀국했고, 한국에서 재활에 몰두하다가 일본의 테이핑 요법에 대해 소개받고, 일본까지 찾아갔다는 얘기가 이어졌다.)
일본에 다녀와서 은퇴를 한 건가.
“통증이 너무 심해 수면제 없인 잠을 이루질 못했다. 구단에 민폐만 끼치는 것 같아 그만둬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구단에서 지원을 받기도 했지만 수술과 재활하느라 그동안 번 돈을 다 쏟아 부었다. 돈은 돈대로 들고 재활은 전혀 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은퇴 밖에 없었다.”
은퇴 직후엔 어떻게 생활했나.
“당시 부모님이 고깃집을 운영하셨다. 장사하는 걸 배우려고 식당에서 일했는데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더라. 고기판을 닦고, 숯을 피우고, 설거지를 하는 등 하루 10시간 이상을 일했지만 무릎이 쑤셔서 오래 서 있을 수 없었다. 얼마 안가 그 일도 그만뒀다.”
<무릎 수술이 잘못되는 바람에 고생을 거듭해야 했던 백승철. 한때 수면제 없인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사진=이영미)>
그러다 인천의 운봉고등학교 코치로 가게 된 건가.
“아는 선배가 그 학교를 소개시켜줬다. 문영래 선생님이 감독을 맡고 계셨다. 면접 볼 때 내가 선생님께 ‘무릎이 좋지 않은데 괜찮겠습니까?’라고 물었다. 문 선생님이 ‘콘은 놓을 수 있지?’라며 따뜻하게 받아주셨다. 문 선생님이랑 운봉고에서 5년, 이후 원광대에서 5년, 총 10년을 함께 보냈다. 감독과 코치로. 고등학교 코치 시절, 처음엔 선수들 뛰는 걸 보며 답답해한 적이 많았다. ‘저게 왜 안 되지?’ ‘이렇게 쉬운 것도 못한다고?’라고 생각하면서 선수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수들이 나한테 맞추는 게 아니라 내가 선수들 눈높이에 맞는 지도법을 발휘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은퇴 후에 무릎 상태가 나아졌다면 복귀했을 것 같나.
“당연하다. 은퇴 후 악몽을 많이 꿨는데 하루는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는 꿈을 꿨다. 아침에 눈을 뜨고선 그 꿈을 생각하며 방안에서 살짝 뛰어봤다. 여전히 통증이 심했다. 그 아픈 현실에 대한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한동안 술만 마시고 다녔다. 술을 마시지 않고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1년을 보내다 운봉고 코치로 가게 된 것이다.”
얘기만 들어도 그 상황들이 너무 안타깝다.
“처음엔 정말 억울했다. 그 병원을 가지 않았더라면, 처음부터 서울의 대형 종합병원을 찾았더라면 내 축구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은퇴 후 2002년 한일월드컵이 열렸다. 선수들 뛰는 모습 보면서 배가 아프다 못해 쓰릴 정도였다. 모든 연락을 다 끊었다. TV도 켜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이 본선 진출에 성공하고 16강 8강에 올라설 때부터 TV를 다시 켰다. 그땐 나도 열렬히 대표팀을 응원했다. (안)정환이가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골든골을 넣은 후 반지 세리머니하는 걸 보면서 엄청 짜증이 났었다(웃음).”
기구한 운명이란 건 이럴 때 쓰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한때 K리그 신인왕 후보에 오를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선보였던 백승철은 무릎 부상으로 모든 걸 접어야 했다. 1999년 부천 SK전에서 결승골을 넣은 후 무릎 통증을 느꼈을 때, 의사의 지시대로 경기 출전 강행 대신 몸 상태를 확인하며 휴식을 취했더라면 어떠했을까. 시즌 마치고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그 병원에서 좀 더 세심하게 백승철을 치료했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는 “젊은 나이다 보니 몸이 금세 회복될 줄 알고 몸 관리에 소홀히 했던 게 조기 은퇴로 이어졌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결국은 내 잘못이다. 누구 탓을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뭐가 있겠나. 이젠 뒤돌아보며 속을 태우기 보단 앞만 보고 살아야 할 시기이다. 여건만 된다면 외국에 나가서 축구 공부를 하고 싶다. 감독을 맡고 보니 배울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너무 많다. 가끔 수성대 선수들이 ‘감독님 선수 때 엄청 대단했네요’라며 선수 시절의 영상을 보내주기도 한다.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어느새 17년의 시간이 흘러 버렸다.”
인터뷰를 마치고 백승철 감독과 영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영상 말미에 백 감독이 이동국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