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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29연대 4중대 위치 - 과거와 현재

작성자전우|작성시간14.05.18|조회수113 목록 댓글 3

건쉽.gif

 



2009년 己丑年을 맞이하여 최진사님, 영문으로 전 세계에 한국을 빛내주시는 정재성님을 비롯 베트벳 운영진과 현지에서 전우들에 아낌없는 지원을 해 주시는 이남원님 한호성님 김성찬님 등... 또한 베트벳을 사랑해 주시는 모든님들의 건강과 가내 행운이 가득 깃드시기를 백마 29연대 4중대 박하사 새해인사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받으십시요.

 

우리 전우들의 보배같은 최진사님께서 고통스럽고 힘든 작업들을 마다않으시고 박하사의 간청을 받아주시어 반닌의 4중대를 찾아가 사진과 동영상을 올려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4중대 전우들 중 만나고있는 전관 중대장님과 임중복 소대장님 신병기 하사님 베트남참전유공전우회 동대문지부장을 맡아보시는 김형석님 경산의 노종근님등 모두 연락드리겠습니다. 또한 반닌을 기억하시고 4중대를 기억하시는 전우님들도 38년이 지난 젊음을 불태웠던 반닌의 모습을 보시면서 아련한 추억으로 가슴이 벅차오르실겁니다.

 

중대자리를 구석구석 돌아보지 못하는 아쉬움은 크지만 주위에 마을도 없었고 집한체 없었던곳이 이렇게 변한 주위환경과 겉모습의 중대기지를 보게되어 벅찬 감동이 몰려옵니다.

 

사진에서 채 설명을 드리지 못한 고구마능선의 가슴아픈 추억은, 3소대 월남신참으로 아마 소대배치 1달도 않된것으로 기억하는 동국댄가 단국댄가 다니다 입대했다던 앞날이 창창했던 청년이 가볍고 채신없는 초급지휘관의 무능으로 인해 전사한 유일한 4중대 전우이기에 아마 죽을때까지 잊지못할 것이다.

 

그것은 71년 1월에 도착하여 71년 12월 귀국시까지 우리중대에서 크고 작았던 모든 작전에서 부상자하나없이(내가 어느 큰 작전에서 무거운 장비들을 짊어진채 계곡의 바위를타고 내려오다 미끌어져 꼬리뼈를 다쳤는데 당시에는 이를 악물고 돌아다녔으나 나중에는 꼭 꽤병같이 이넘의 통증이 아플땐 걸음도 움직일 수없이 아프다가도 멀쩡해지곤 해서 전우들에게 눈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넘에게 누구에게 하소연도 보상도없이오늘날까지 괴롭힘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마 디스크를 알아본 사람이라면 이해하실겁니다.) 무사했던 중대에 사망자는 옆소대 장기하사 분대장의 비관 자살과 말라리아약 3알과 월남 고량주 한수통을 마시고 후송을 갔다 사망했다는 덩치크고 입심좋아 전우들을 웃기며 즐겁게 해주던 부산 머슴아인 내 분대원. 이렇게 2명 자살 이고 초급지휘자를 잘못만나 유일하게 적의 충탄에 어이없이 전사한 전우였기때문일겁니다.

 

다이란이 기억에 남는것은 도로경계를 나간적이 있었습니다. 월남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일부나마 관찰할 수있었던 유일한 기억이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철길을 보호하며 산쪽을 경계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차길에 서있는데 꽁가이가 나타나더니 우리를 보고 두리번 두리번 하길래 우리는 혹시나 하고 긴장을 하며 쳐다보는데 꽁가이는 기찻길을 건너 뛰어가더니 멀지도 않은 곳 싸리나무같은 풀옆에 빤히 보이는곳에 아래를 들추고 앉아 볼일을 보기에 우리들은 배꼽을 잡고 자빠졌지요.

 

기찻길 주변에 판자집같은 허름한 집들이 여러채 있었는데 어느집을 들여다보니 젖먹이가 둘인데 아마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이 생산했었던가봅니다. 젓먹이 위로 년년배로 열서너살까지 7~8명의 아이들과 두 여자뿐이였고 성인남자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당시 성인 남자들은 월남군이나 베트콩에 소속되어 집에는 성인남성들은 없다고 하던데 정말 그랬습니다.

 

집은 C레이션 각데기와 나무들로 얼기설기 지었놓았고 내부는 칸막이 하나없이 천조각이 몇군데 칸막이를 대신하고 있었으며 그 안에그물침대(해먹)가 2층구조로 몇개 걸려있고 입구 좌측에 어지럽게 널려진 식기류와 그옆에 조금 큰 돌을 세개 고여놓고 불을 피워 음식을 하니 온 집안애 연기가 가득한체 아이들이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나는 초롱초롱한 눈매의 아이들을쳐다 나의 배낭에서 C레이선을 꺼내 아이들에게 나누어주니 여자가 감사한 뜻인지 웃음한번 짓고  C레이선을 밖에 있는 좌판같은 곳에 올려놓는다. 아마도 팔려는 모양인데 주는사람과 아이들은 생각지도 않고 좌판에 당당하게 올려놓고 나서 집안의 모닥불?에서 꺼낸 주전자를 들고 갈라질대로 갈라져 더 갈라질 틈도없고 갈라진 틈에 새까맣게 때가 끼여있는 사기잔에 우리들에게 먹으라며 권하는데 맛은 홍차였다. 비위좋은 전우 몇이는 마셨는데 나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 아이들에게 주니 또 반색을하며 아이들을 나무라며 내게 권하기에 괜찮다며 배낭의 커피를꺼내 타서마셨다. 나는 이것을 보며 어렸을적 피난민들의 생활이 떠올랐으며 전쟁의 아픔을 다시한번 느꼈다.

 

또 한가지 기억에 남는것은 그들의 밥먹는 모습인데 갈라질대로 갈라진 자그마한 공기에 밥을담아 능막이라하던가요 시커먼 무슨 시골의 오줌독에서 꺼낸 색갈에 지독히도 비위를 상하게하던 비릿한 그 냄새(나는 이 냄새를 나트랑에 도착할때부터 공기속에서 맡았으며 이 냄새를 월남냄새라 불렀습니다) 그 물에 날아다니는 밥알갱이를 길다란 젓가락으로 하나씩 쌀알을 세어먹는것 같은 그 모습이 어찌나 답답하고 안스러웠는지 별걱정을 다했답니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나보다 했는데 또 불을 집려 밥을 하는 모습을 보고 하루종일 밥하고 하루종일 먹는모습을 보있답니다.

 

이곳이 다이란이란 것도 전우들의 글과 사진속을 헤메다가 얼마전 기억속에서 찾아냈고 당시에는 정글속만 뒤지고 다녀서인지 들은 지명이나 이름들만 기억날뿐 쑤이까이계곡이 어딘지 지금도 모른다.

 

2009년 己丑年새해 벽두에 베트벳을 사랑하시는 모든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월남전 출항.jpg

 

한국군 전술기지.jpg

 

땅속의 여자베트콩.jpg

 

전과 확인.jpg

 

전우 자료.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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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풀씨 | 작성시간 14.05.18 나트랑 부두가 아니고 캄란 부두일 겁니다.
    모든 군용 배는 모두 캄란에 정박하고 출항했으니까요. 그리고 닌호아나 나트랑 등으로 이동합니다.
    맹호지역 퀴논은 항구가 있지요. ^^
  • 작성자까만 조약돌 | 작성시간 14.11.03 님이나 저나 고생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퀴논항구에서 내리고 배을 탔지요.
  • 작성자무대뽀 | 작성시간 15.11.28 맞이요 나트랑 항입니다 부산을 출발하여 캄란에서 보급품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캄란으로 출발 합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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