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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령이 하시는 객관적 사역

작성자신부운동|작성시간07.09.28|조회수302 목록 댓글 1

성령이 하시는 객관적 사역 (1)

요 16:7~11 정진국 목사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정말 잘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께 큰 희망이 될 겁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우리에게 굉장한 소망과 확신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 말씀이 가지고 있는 비중은 대단히 큽니다. 우리는 그동안에 말씀을 통해 율법 시대가 마감이되고, 새 언약 시대. 즉 성령시대가 도래했다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밝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시고, 성령을 통해서 오늘 우리를 참된 의의 길로 이끌어 가시길 원하신다는 사실들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성령시대가 도래하게 되면, 성령은 어떤 특별한 사람들 혹은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에게만 임하는 것이 아닌 겁니다. 특별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거나 능력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은 보편적으로 구원받은 사람 누구에게나 내주하시는 시대가 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성령시대의 성령이라는 것은 과거 구약시대와 같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별히 선택되어진 사람들을 위해서만 특별히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 안에 생명으로 거하시고 그 생명이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 안에 보편적으로 동일하게 역사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난 수요예배의 말씀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 - 성령

저는 지난 시간에 우리가 성경에 나타난 시대구분을 성부시대와 성자시대와 성령시대로 나눌 수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오순절 이후의 성령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럼 이 성령시대가 대체 어떤 시대냐?”하는 것에 대한 개념들을 잘 모르고 있는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구약과 신약의 개념으로만 시대를 구분하다 보니, 구약 시대에 성부 하나님과 신약 시대에 성자 예수님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구약에서 어떤 특별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능력이고, 신약 시대에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는 능력이라는 개념으로만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보조적 역할을 하는듯한 그런 인상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 시대에는 성부, 신약 시대에는 예수가 역사의 주역인 것처럼 생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사는 이 시대에 참 중요한 핵심적인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이 신약 시대를 일컬어서 정확하게 말하면 새 언약 시대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새 언약의 내용은 심비에 새긴 법, 즉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영”입니다. (렘 31:33) 새 언약의 핵심은 영이에요. 즉 성령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신약 시대의 예수님은 과거 구약에서 저질러 놓은 인간들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신 것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새 언약 시대를 이루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을 초점으로 해서 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구약에서 인간이 죄를 범한 것에 대해 그 죄를 대속하시고,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내시는 그 구속사역에만 집중을 하고 있습니다. 이건 물론 중요합니다. 인간이 죄를 범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그 타락한 죄인이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가려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이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저질러 놓은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 인생의 온갖 문제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해결하셨다는 것은 매우 귀하고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조금도 폄하시키거나 약화시킬 수 없습니다. 이건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절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라 이 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그 안에 있는 양방향성을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본질적인 하나님의 경륜의 섭리 가운데에서 보게 되면, 죄를 대속하는 것이 본질적 사역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본질적 핵심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이십니다. (요 10:10) 그런데 인간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받기도 전에 죄를 범하고 타락을 했기 때문에, 생명을 주시기 전에 먼저 타락한 죄인들의 죄 문제부터 해결을 해야 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 죄 사함이란,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한 준비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대속 자체가 죄로부터의 구속이지만, 이것은 소극적인 측면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인간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타락한 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죄인들안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문제부터 해결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대속사역을 통해서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구속 사역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고,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인간이 저질러 놓은 문제를 해결하셔야만 하는 그런 성격의 사건이었다 이 말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더 궁극적인 사역은 무엇입니까? 앞서 말씀 드린대로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알로 이 땅에 오셔서 당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해방하시려고 오신 겁니다. (요 12:24)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계획하셨던 대로 그 생명을 오늘 저와 여러분 안에 나눠주시고, 심어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겁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이제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우리 모든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생명으로 해방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소극적으로는 죄에 대한 해결이고, 적극적으로는 생명을 주시기 위한 근본적인 작업을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럼 이 생명을 주시는 근본적인 작업은 누구를 통해서 이뤄집니까? 바로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저지른 문제를 해결하실 뿐만 아니라, 이제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해방시키셔서, 앞으로 보혜사 성령을 통해서 이 생명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시고 토대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본격적으로 역사하는 것은 성령시대부터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성령시대가 얼마나 중요하고 성령시대에 대한 깨달음이 얼마나 필요합니까? 단지 우리가 구약과 신약이라는 개념 속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에서 성령은 그냥 보조역할만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 언약 시대의 본질과 가장 중요시 되어야할 핵심은 생명이란 말입니다. 또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있게 해주시는 성령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시대가 바로 새 언약의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고, 구원받은 우리 안에 이제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 안에 본질인 의를 실천하고 완성케 하시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성령의 객관적인 사역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에 대한 예고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본문 말씀은 단지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의 안에서 무슨 일을 하실 것이냐?”하는 주관적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시대에 어떠한 일이 벌어질 것이냐?”하는 성령시대의 객관적인 상황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성령의 주관적 사역과 객관적 사역. 이 개념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주관적 사역이라는 것은 우리 각 사람 안에서 하나씩 하나씩 역사하시는 그 성령의 개체적인 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고, 객관적 사역이라는 것은 성령시대에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하셨길 바라며, 오늘 본문 말씀 보시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 16:7)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고난 이후에 성령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시지 않으면 성령시대는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시대와 성령의 시대는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에서 또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오시는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령사역의 기초와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와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한번 보십시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요 16:8)

성령님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을 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누구를 책망한다고 하십니까? 세상을 책망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성령의 객관적 사역을 말한다고 말씀드린 이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 이 말씀을 읽을 때, 1차적으로 너무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 안에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우리에게 의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시고, 우리에게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실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성령이 각 사람 안에서 주관적으로 역사하시는 그 성령의 개체적 사역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8절 말씀은 “성령이 너희를 책망한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을 책망한다고 합니다. 책망의 대상이 세상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이 세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이 세상. 다시 말해 예수를 부인하고, 예수를 못 박았던, 그리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 사탄이 붙잡고 군림하고 있는 그 세상을 말하는 겁니다. 그 세상을 책망하러 성령님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신다고 합니다. 그럼 이것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자세히 보겠습니다.

8절 말씀에서 “그”가 누구입니까? 성령입니다. 그리고 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보혜사는 두 가지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돕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보혜사의 의미는 우리를 도와주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혜사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대언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럼 오늘 8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성령의 사역은 돕는 자입니까, 대언자입니까? 오늘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고 계신 것은 예수님에 대한 대언자로서의 그 역사를 감당하기 위한 성령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돕는 자로서의 성령의 사역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언자로서의 성령의 사역을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해되십니까? 이 사실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본래 책망한다는 말에는 여러 다양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여러 의미 중에는 깨닫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 말씀을 주석을 할 때, 성령께서 돕는 자의 역할로 우리 각 사람 안에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고 의에 대한 추구를 갖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하신다. 그로 말미암아서 우리를 경건한 삶,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으로 이끌어간다고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었던 겁니다. 사실 이 8절만 놓고 본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근데 이 본문은 주님께서 직접 밑에다가 주석을 달아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이 성령의 사역이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한 주석을 달아놓으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 주석의 내용을 보게 되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주관적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 객관적 성령의 사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성령께서 이 세상에서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성령께서 세상에 대하여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 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예수님은 이 땅에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멘. 이것이 바로 객관적인 예수님의 사역이죠. 그러나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주관적으로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처럼, 성령님께서도 이 세상을 책망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책망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모두가 예수님을 믿게 하는 과정으로서의 책망이죠.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 책망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셨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책망한다”는 말은 깨닫게 한다는 의미보다는 더 본질적인 의미가 있는데, 증명하여 사실을 드러내고 그 사실에 근거하여 책망한다는 것입니다. 이 책망하다라는 말의 원어상의 의미는 깨닫게 하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것도 사실은 이 본질적 의미 안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증명하여 사실을 드러내어, 사실을 깨닫게 하고, 그 사실에 근거하여 책망한다는 것이 헬라어 원어상의 본질적 의미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8절 말씀은 성령시대에 성령의 객관적 사역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책망하신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 오늘 본문 9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죄에 대해 책망함.

그럼 먼저 성령이 하시는 첫 번째 일에 대해 보겠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16:8~9)

먼저 8절에서 말하는 “세상”의 일차적 의미는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부정했던 유대인들 말입니다. 실제로 오늘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말씀의 대상이 유대인들이기 때문에, 8절의 세상을 책망한다는 말은 유대인을 포함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9절의 죄에 대하여 라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을 믿지 않고, 도리어 미워해서 십자가에 못을 박는 그 사실이 죄라는 것입니다. 즉, 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대로 예수를 믿지 않는 그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책망하시기 위해서 성령이 오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본질적인 죄의 개념은 바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하여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믿지 않는 자들을 책망하기 위해서 성령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께서는 철저하게 예수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겁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예수님의 것을 가지고 말씀하시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 16:15) 예수님을 드러내고 예수님을 나타내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에 이것이 주관적이고 개체적인 성령의 사역을 말하는 것이라면 9절 말씀이 <죄에 대하여라 함은 나를 믿으면서도 불의를 행함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죄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밝히 드러나게 되는 죄의 성격은 “예수 믿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 대단한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 예수가 오시기 전과 예수가 오시고 난 이후가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가 오시기 전에 죄라는 개념은 불의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난 이후에 이제는 무엇이 죄가 되냐면, 불의보다는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더 큰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이미 죄로 정죄를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왜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왜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류의 모든 죄가 사해졌다 할지라도 이제는 예수를 믿지 않는 그 자체가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미 죄인이다”라는 사실들을 입증하고 드러내기 위해서 성령께서 오셨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예수 믿지 않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사도행전 2장 이하로부터 입증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베드로 사도가 성령을 받고 설교를 한 이후에 그들은 마음이 찔리며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했습니다. (행 2:37) 그때 그들은 무엇을 깨달은 것입니까? 불의를 행한 것이나, 도덕적으로 죄를 범했다는 걸 깨달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때 그들이 깨달은 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보내신 그 예수에 대해서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도리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 사실에 대해서 “어찌할꼬”한 것입니다. 그들이 그 죄에 대한 깨달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령의 사역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시대 이 세상에 대해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그 사람이 거짓말하고, 짜증내고, 그런 비도덕적인 잘못들을 들춰내어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 믿지 않는 그 사실이 바로 죄라는 것을 밝히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스데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베드로와 스데반의 설교를 보십시오. 그들의 설교는 한결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였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사실입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너희를 구원하실 구세주였다” 하는 설교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증거 했던 모든 복음의 내용들을 살펴보십시오. 사도행전에서 바울은 가는 곳마다 예수에 대해서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예수를 믿을 것이냐? 믿지 않을 것이냐?”하는 이 사실보다는 우리가 가진 도덕적인 관념을 가지고 당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애를 쓰고, 그렇게 해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예수 믿어라”하는 식으로 복음을 전한다 이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오히려 예수를 안 믿는 그 자체가 죄라는 사실을 드러내서 세상을 책망할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할 때 담대히 말해야 합니다. “예수 믿으십시오, 당신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당신은 이미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어야 하지만, 또한 예수를 믿지 않는 그것이 죄이기 때문에 당신은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선포해야 합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할 때, 세상을 책망하러 오신 성령님께서 그 복음의 내용과 함께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용기가 없습니다. 예수에 대해 담대히 선포를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성령께서는 예수를 믿지 않는 죄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말씀들을 보면, 오순절 이후에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였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곧 죄라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이 사실이 저와 여러분 안에 밝아지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담대하게 말하십시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은 당신이 스스로의 죄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당신이 믿지 않는 그 예수가 바로 의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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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형제 사랑 | 작성시간 07.09.28 그리고 이미 2000년전에 예수님이 주인이 되셨음을 담대히선포해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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