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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나눔터

성경인물탐구 "비느하스"

작성자계시탐정|작성시간16.04.05|조회수2,330 목록 댓글 23

이름: 비느하스
생몰연대: 미상
주소: 벧엘.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신 성막
직업: 군인, 대제사장, 이스라엘의 지도자
가족관계: 할아버지 아론, 아버지 엘르아살


1. 비느하스의 행적

오늘 소개해 드릴 분은 너무나 멋지고, 훌륭하고, 그 이상 더 ‘님 좀 짱’일 수가 없는 분이다.

그 이름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비느하스’ 사마 되시겠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움의 여신 ‘비너스’를 본딴 것인지 이름조차도 간드러진다.

(원래 비느하스의 이름 뜻은 '흑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비느하스를 흑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뽀얀 피부의 꽃미남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만..ㅎㅎㅎ)

정상적으로 교회를 다니고 설교를 듣고 주일학교를 다녔다면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는 인물인 비느하스의 하나님을 향한 의기와 열정은 더할 바가 없다.

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의 것인양 함께 진노하며 우상숭배로 인한 징벌로 내려진 역병으로 이스라엘 자손 2만 4천명이 죽어자빠지는 와중에도 쎄쎄쎄에 여념이 없었던 두 연놈들 - 시므리와 고스비 - 을 긴 창으로 한 큐에 꼬치구이로 만들어 버린 일타 쌍피의 신화를 민수기 25장 8절에 화려하게 남기는 것으로 비느하스는 구약 성경에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이토 히로부미를 한 방에 절단낸 안중근 장군처럼, 상해 홍구 공원을 한 방에 박살낸 윤봉길 의사처럼, 하나님의 막힌 속을 시원하게 뚫어 드린 ‘비느하스 의사’(?)의 의거에 하나님께서도 극찬하셨고 그런 그에게 하나님은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주시는 것으로 치하하셨다.


이 잘난 청년 비느하스의 할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의 형이자 대변인인 아론이요, 아버지는 당대의 제사장 엘르아살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당시 이스라엘에서 당 서열(?) 2, 3위의 거물이며 신앙적으로도 어느 하나 손색이 없는 로열패밀리이다. 신라시대로 치면 성골 귀족에 해당하고 상위 0.5%의 명문가이다.

(후일 사무엘을 키워낸 제사장 엘리에게도 똑같은 비느하스라는 아들이 있었다.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와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는 아들은 동명이요, 아버지들끼리도 이름이 비스무리한 조합인데 엘르아살의 경우 자식농사를 잘 하여 이후 수천년을 깃발 날리는 영웅을 만들어 낸 데 비해, 엘리의 경우 자식농사를 잘~하여 이후 수천년을 씹히는 건달을 만들어 냈다. 홉니와 비느하스의 악행으로 인한 천벌. 그리고 비느하스의 부인이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짓는 것은 주일학교와 교회에서 반드시 설교 주제나, 교육 주제로 재탕, 삼탕, 곰탕으로 달여먹는 소재이다.)


각설!

아무튼 정리해 보자면 비느하스는 신앙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세상에서의 지위나 명망에 있어서도 톱을 달리는 가문의 장손으로 태어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철저한 신앙과 영적 자세를 물려받았으며 수많은 이들이 미디안의 만신무당 발람의 계략으로 인해 미디안 신당에서 제삿밥(?)을 얻어먹고 우상 앞에 넓죽 엎드려 절을 하고 2차로 신녀(?)들과 질펀한 검열삭제까지 벌이는 와중에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 충성을 잊지 않았다.


그의 이름 앞에 반드시 따라붙는 ‘청년 제사장’이란 타이틀이 말해주듯 당시의 비느하스도 피 끓는 청년이었을 터이나 그는 우상과 성적인 유혹 앞에 끝내 넘어가지 않고 정신적, 육체적 순결을 지켜내었다.

그 본인만 깨끗하고 만 것도 아닌, 이스라엘 진중의 한복판까지 미디안 여자를 데려와 보란 듯이 관계를 하던 이를 그와 함께 여자까지 망설임없이 창으로 내리쳐 없애버리는 ‘실천하는 믿음’을 보여주었다.

비느하스가 이 사건으로 하나님께 극찬을 받은 것은 단지 음행하는 남녀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기분을 풀어드린 것만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의 ‘믿음’을 보신 것이었다. 자신의 안위를 내던지고 하나님의 진노에 공감한 믿음을.

자세히 보면 비느하스가 죽인 시므리는 시므온 지파의 한 지휘관이었고 고스비는 미디안의 다섯 왕 중 하나인 수르의 딸, 즉 미디안의 공주였다. 시므온 지파의 지휘관, 그리고 미디안의 공주. 과연 이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창을 내리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그 당시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책임으로 각 지파의 주요 지휘관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살벌한 와중이기는 했으나 시므온 지파의 부하들에게 보복을 당할 수도 있었고 미디안의 보복 침공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 어찌 되었든 결코 무사할 수 없는 그 상황에서 비느하스는 자신의 안위 따위는 생각지도 않은 채 오로지 하나님의 진노에 공감하여 담대하게 복수의 창을 내리꽂았다.

우리는 약간은 쉽게 ‘비느하스와 같이’ 청년들이 일어날 것을 외치지만 실제 그 상황에서 비느하스는 자신의 목숨을 건 한판, 하얼빈 역에서의 안중근 장군, 홍구 공원에서의 윤봉길 의사와 같은 마음으로 일어났다. 결코 낭만적이고 멋지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이후 행적은 뚜렷하게 나타나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모세가 미디안을 토벌하러 출정할 때 비느하스는 각 지파에서 1천명씩 선정된 1만 2천명의 돌격대를 지휘하여 마침내 미디안을 멸망시키고 자신이 죽인 고스비의 아버지 수르와 무당 발람까지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다.


모세 사후에는 아버지를 이어 제사장으로 활동하였고 7년 전쟁 후 가나안 땅을 분양할 때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자신들만의 제사용 단을 쌓아 타 지파들과 분쟁이 일어났을 때도 여호수아에 의해 특별 사절로 임명되어 이스라엘 전 지파의 대표단을 인솔해 가서 한 순간에 분쟁을 해결하고 평화를 되찾는 공로를 세우게 된다.

진노로 창을 내리꽂던 용사는 이렇게 평화의 사절로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호수아 사후에도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직무를 계속했고 그의 집안은 주후 70년, 이스라엘이 로마의 침공으로 멸망하는 그날까지 제사장의 직분을 이어 갔다. 그리하여 수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는 그를 ‘청년 제사장’으로 기억한다.


2. 청년의 영광, 만년의 그림자

여기까지 본 비느하스는 완벽한 인물이다.
비꼬는 것이 아닌 진짜 완벽한 사람이다.

신앙적으로, 인간적으로, 그가 이루어 낸 공로들과 얻어낸 명예와 지위. 어느 것 하나 완벽하고 멋지지 않은 것이 없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 이순신 장군과 같이 그 이름이 비단에 수놓인 꽃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영웅이다.

에벨과 같이 지워지고, 묻혀지고 가려져 온 일그러진 영웅도 아닌, 하나님과 사람에게 모두 인정받고 극찬을 받는 샤이닝 스타이다.

성경에서는 여호수아서 이후로 그 행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에 우리는 흔히 ‘그 후에도 비느하스는 청년 제사장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완벽하고 훌륭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마치 동화책들이 항상 ‘그래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것처럼.

그러나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사사기에 보면 줄기차게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배도와 하나님에 대한 배신. 신앙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없애버려야 할 가나안 민족들과 쿵짝이 되는 육체적, 영적 음행들. 그리하여 사사 시대 400년을 한결같이 쥐어터지는 악순환.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을까?

우리가 기억하는 의기의 영웅 ‘청년 제사장’ 비느하스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째서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라는 것이다.

비느하스의 마지막 행적은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기브아 성에서 벌어진 베냐민 지파의 참혹한 범죄 - 레위인의 첩을 윤간, 살해하는 - 를 징벌하기 위한 이스라엘 군대가 출전했다가 참패하여 쫓겨 온 후 벧엘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올릴 때 비느하스가 그곳에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셨다고 나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의미심장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그러한 범죄가 벌어졌을 당시 이스라엘의 최고지도자가 비느하스였다는 것이다. (언약궤는 제사장 또는 사사만이 모실 수 있었고 언약궤를 모신 이가 곧 이스라엘의 최고지도자이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베냐민 지파들이 기브아에서 저지른 죄악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흔히 간과하기 쉽지만 기브아에서 첩을 잃은 레위인도 마찬가지이다.

레위인, 즉 제사장은 철저한 일부일처로 결코 ‘첩’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었다. 그런데도 그 레위인은 ‘첩’을 두고 있다. 그것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첩을 두고 있는 것이 자랑인양 죽은 첩의 시체를 찢어 각 지파로 전달하고 베냐민 지파에게 복수해 달라고 떼를 쓰는 저 뻔뻔함은 2인조 여성 듀오 다비치의 노래 한 소절처럼 ‘어디서 나온 그런 자신감인지’ 심히 의심스럽다.


베냐민 지파를 징벌한답시고 모인 이스라엘 지파 중 어느 누구도 레위인의 축첩에 대해 뭐라 하는 사람 하나도 없다.

그 뿐인가?

베냐민 지파가 거덜이 나서 폐문이 될 위기에 처하자 기껏 생각한다는 방책이 동포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빼앗아 나눠주고 (야베스 길르앗), 춤추러 나온 실로 여자들을 납치하여 아내로 삼도록 베냐민의 패잔병들에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것이다.

이건 도대체 무슨 놈의 시츄에이션인가? 막장드라마가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청년 제사장’ 비느하스가 다스리던 시기의 이스라엘에서 벌어져 성경에도 시퍼렇게 기록된 사실이다.

더 쇼킹한 것을 알려주자면 첩을 들인 그 레위인은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 에브라임 산지는 7년 전쟁 후 비느하스에게 영토로 주어진 땅이었다.

비느하스의 아버지 엘르아살도 그곳에 묻혔고 훗날 사무엘도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서 태어났으니 대대로 제사장의 성지인 곳이었다.

비느하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벌이는 영적, 육적 타락과 죄악을 제어하고 통제하기는 고사하고 당장 자신이 직접 소유하고 관리하는 지역에서 벌어진, 그것도 자신의 동족이자 제사장 동료인 레위인의 축첩 행위조차도 제대로 징벌하지 못하였다.


세월이 흘러 제사장 엘리의 아들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올리는 제물들을 착복하고 성막에서 일하는 여성들과 놀아나는 악행을 저지르다 마침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3만명의 병사들과 함께 죽고 하나님의 언약궤마저 빼앗기고 말았다.

그의 사망 소식이 들려왔을 때 막 출산한 아내는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는 의미의 ‘이가봇’이란 이름을 태어난 아이에게 지어주었다.

의로운 분노로 일어섰던 영웅, ‘청년 제사장’ 비느하스.

시대를 역행하고 하나님을 위해 일어섰던 그는 그의 만년에 결국 죄악으로 흘러가는 시대를 가로막지 못했다.

죄악의 방치와 침묵, 그것은 결국 영광을 이스라엘에서 떠나게 했고 마침내 자신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청년 제사장 비느하스의 타락과 최후로써 끝을 맺었다.



3. 총평

비느하스는 우리가 알고 있던 것처럼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믿음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이해하며 공감했으며 목숨을 건 의거로써 그 믿음을 실천하였고 하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인물이었다.

소돔과 고모라는 단 열 명의 의로운 자가 없어 모조리 멸망당했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비느하스 한 사람의 의로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고 명맥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청년의 시기에 정욕과 유혹을 이겨내고 육체적인 순결과 영적인 정절을 지켜냈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계승하여 마침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우뚝 선 청년 제사장 비느하스.

오늘날까지도 위대한 신앙의 인물로 그 이름이 길이 빛나는 그는 세월이 흐르고 노쇠한 때문인지, 가르치고 말해봐야 소용이 없었는지, 어떤 이유였는지는 모르나 타락해 가는 이스라엘 민족을 깨우치지 않았고 그들을 향해 호통을 치지 않았고 시므리와 고스비를 꿰뚫었던 그 서릿발 같았던 창날을 두 번 다시 꺼내어 휘두르지 않았다.

훗날 패역한 이스라엘 민족들을 질타하여 미스바에서 거대한 부흥운동을 일으켜 다시금 신앙을 회복시킨 사무엘을 생각해 볼 때 비느하스의 행동은 너무나 아쉬울 따름이다.

모세와 여호수아와는 달리 비느하스의 행적이 민수기 이후로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그의 만년의 행실을 가려주고 빛나는 청년의 시기만이 기억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의 행실을 잊지 않으신 하나님은 훗날 엘리의 아들이자 또 하나의 청년 제사장 비느하스를 통하여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나는 징벌을 내리셨다.

우리는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하신 말씀을 안다. 그러나 ‘시작은 창대하나 나중은 미약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믿음은 결코 왕년이 아닌 지금 이 순간이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청년’ 비느하스를 우리의 모토로 삼고 달려가고 있다. 그러나 ‘만년’ 비느하스도 우리의 반면교사로 삼아 어느 순간이라도 뒤를 돌아보며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집필자 : 계시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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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계시탐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4.08 깊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작성자예수님께집중 | 작성시간 16.04.08 앞서 올린댓글은 삭제 하겠습니다.
  • 작성자예수로 사는 사람 | 작성시간 16.04.08 재미있는 성경이야기 시리즈네요..잘 읽었습니다..
    젊어 크게 쓰임 받는이들은 많은데..정말 중요한건 마지막이네요..
    끝까지 초심을 잘 지켜 잘 쓰임 받아야하는데...
    다들 그게 쉽지않은가 봅니다.
  • 작성자이즌이 | 작성시간 16.04.10 글 읽으면서 씁쓸하네요.
    한국교회의 부흥세대였던 대형교회 목사님들이 비스하스와 오버랩이 됩니다 ㅠㅠ
  • 답댓글 작성자계시탐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4.10 그 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장한 한국교회는 없었겠죠;;; 거기까지는 딱 좋았는데 지금은...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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