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캘러 창세기 4;11~26 2009년 설교 - 팀캘러 창세기 4;11~26 2009년 설교
요즘 저희는 성경이 어떻게 하나하나 별개의 도덕적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교훈을 주는 스토리들일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모든 내용들이 연결되어 인류의 무엇이 잘못됐는지,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그리고 종국에는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큰 흐름을 갖고 있음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선, 인류의 무엇이 잘못됐는지에 대해서 성경의 제일 앞부분부터 보고 있습니다. 창세기 1~4장은 지속적으로 인류의 무엇이 잘못됐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 부분인 창4장은 사실 조금 무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많이 설교되지 않는 부분이죠. 거기에는 두어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 중 한가지는 여기서 독자들이 (최소한 현대의 서양 독자들이) 자주 질문하는 내용인데요. 아담이브가 있고 두 아들을 낳았는데 가인과 아벨이죠.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세상으로 쫒겨납니다. 그때 가인이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합니다. 누가 죽이나요? "가인이 아내와 동침하매 임신하여"라는데 그녀는 어디서 나왔나요? "가인이 성을 쌓고Cain was then building a city"에서 씨티에는 누가 사나요?
여러분이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성경을 진지하게, 역사적으로 받아 들이신다면 이에 답 할 수있는 여러 가지 종류의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근데 제가 생각하기에 여러분이 성경의 흐름을 잘 이해하려면 다음 내용을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성경의 서술은 굉장히 선택적이고 개괄적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같이 읽어보시면 마가복음에서 읽었던 내용들에 대해 누가복음에서는 동일한 이벤트나 사건에 대해서 마가가 얘기해 준거보다 훨씬 더 자세하게 설명하며 훨씬 더 많은 일들이 있었음에 계속해서 놀라게 됩니다. 마가는 아주 개괄적입니다.
그럼 마가는 왜 다 얘기해주지 않은 것일까요? 거기 또 다른 천사가 있었다거나, 다른 사람이 더 있었다거나, 어떤 사람이 이런 일을 더 한것 등에 대해서 말이죠.
답은 이렇습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여러분이 알고 싶어하는 모든 정보를 다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그들이 강조하고자하는 포인트를 전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4장에서 저자가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모든 정보를 알려주지 않는 것은 창4에서 저자가 강조하고 교훈주고자 하는 포인트를 전달하고, 또 이를 이해하는데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성경의 궁극적인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구절을 통해서 전달하고 교훈주시고자 하는 포인트에 집중하여 깨달으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정확히 그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4에서 아주 중요한 3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폭 넓은 의미지만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인의 타락, 죽음의 문화, 그리고 미래에 있을 은혜의 도시에 관해서 입니다.
먼저 가인의 타락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주 설교를 기억 하신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께서 처음 하신 말씀은 "네 아우 아벨이 어디있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르시지 않지만 가인에게 물으십니다. 가인은 차갑게 답합니다."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왜 나한테 묻냐고 따지는 것이죠. 그 때에야 하나님께서 다시 물으십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이건 아주 강력한 선포입니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이런 선포가 있으면 도륙해서 그땅에 가인의 피를 뿌리는게 타당하다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가인이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그분이 주실 수 있는 모든 공간과 기회를 주십니다. 왤까요?
마틴 루터는 죄에 대해서 굉장한 정의를 내렸습니다. 그는 죄란 인간이 스스로에게 우상으로 새긴 자기자신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죄는 언제나 하나님이나 타인들보다 자기사진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타인들보다 자신이 우선이 되는 것이며, 늘 본인 중심인 것입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네, 나쁜행동을 하게됩니다. 근데 좀 더 깊숙히 들어가면 선행을 하는 경우에도 해당된다는 겁니다. 예배하고, 구제하거나 심지어 기도를 할 때에도 늘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하는겁니다. 나를 중심에 놓고 하나님이나 타인들을 맞춥니다. 이럴 때, 나에게 손해가 될 경우에는 즉시 그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왜냐하면 외적으로는 내가 하나님과 타인을 섬기는 걸로 보일지라도, 실제는 하나님과 타인들이 나를 섬기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란 그렇게 은밀한겁니다.
회개는 완벽하게 그 죄의 뿌리로 갑니다. 회개는 자기자신으로 부터 탈피해서 죄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회개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시작하며, 죄가 나의 인생에 가져왔던 눈닫힘 강팍함 자만심으로부터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그럼으로써 회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절대 없습니다.
근데 가인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가 하는말을 보십이오. 그는 어떤 면에는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는 속상해하고 슬퍼하고 있으며, 울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뭐라고하나요?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여기에 비극이 있습니다. 슬퍼하는 것이나 우는 것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지금 가인이 "내가 한일은 너무 유감이다."라며 부르짖고 울고 있는 것은 본인의 죄만큼이나 너무도 자기 중심적입니다.
오 하나님! 얼마나 상심되십니까? 얼마나 당신의 영광과 명예에 누가 되십니까? 혹은 아, 내동생이 자신의 피 속에 누워 있단 사실을 견딜 수 없습니다. 라고 하지 않다는걸 notice하셔야 합니다. 대신 가인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해서 유감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죄 자체가 아닌 죄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 유감스러워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나 타인에 끼친 영향보다 자신에게 돌아올 영향에 집착하고 있는겁니다.
즉, 자신이 행한 행동에 대해서 슬퍼하고 회개하고 울고 불고 하면 할 수록 더 자기중심적으로 만드는 종류가 있다는겁니다. 더 악화시키죠.
이부분은 너무 중요하고 넓어서 무한히 얘기할게있지만 넘어가야겠습니다.
그럼으로 첫번째 포인트는 이렇습니다.
만일 회개가 인류 타락의 밑바닥에도 있었고, 회개가 너무도 중요해서 하나님께서 그토록 가인에게 모든 기회를 주셨던 것이라면, 회개가 놓치기 쉽고, 잘못하고 있으면서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 것이라면. 우리는 평생동안 회개의 기술을 발전시켜 나가야만 합니다.
누군가 당신을 가리키며 당신의 잘못을 지적할때 우리의 본능적인 첫 반응은 어떤가요? ; 뭔소리야? 네가 뭘알아? 네가 감히? 네가 할소리냐?라고 할겁니다. 그러나 대신 우리는 중심에서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이라고 해야 합니다.
회개가 그토록 중요하고, 결정적이고, 놓치기 쉽고, 어러운거라면 우리는 서로 회개를 도울 수 있는 community가 되어 아주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가능한 빨리, 내가 잘못한 부분은 이거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류 타락의 중심에는 회개하지 못한 불능 무능이 있었던 겁니다.
두번째 포인트는 죄는 각 개인의 삶을 타락시킬뿐 아니라 인간사회와 문화도 타락시킨다는 겁니다.
우리가 여기 17절부터 마지막절에서 나타나는 가인의 후손들에게서 이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인류가 죄에 빠져 있더라도 하나님의 이미지가 나타나는걸 볼 수 있습니다. 문화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죠.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서 보시면,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반영합니다. 그에 따라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미지를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창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셨을 때, 경작(gardening)하라고 말씀하시는데 경작은 땅을 있는대로 내버려두는 것도 아니고, 망치는 것도 아닙니다. 경작이란 주어진 원료들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해서 생산하는 것입니다. 인류가 번성하고 자라고 살아가는 것을 돕는 음식이나 꽃이나 여러종류의 식물들을 생산해내는 것이죠. 여기서 경작은 문화의 패러다임입니다. 문화란 무엇입니까? 세상의 원료들을 이용해서 인류가 번성하는데 도움되는 것들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소리라는 원료와 인류의 경험으로 음악을 생산합니다. 예술이죠. 물질이라는 원료와 기술을 더해 과학을 만듭니다. 생물학적인 원료로 인류 번성에 필요한 약품 등 여러가지를 생산합니다.
비록 가인과 후손들이 죄로 타락한 상태에서도 그들은 문화를 창조합니다. 20절에서는 목축업이 생겼고 21절에서는 하프와 플루트 즉 음악이 생겼습니다. 22절에서는 기술이 생기죠. 장비, 구리, 철기를 사용하게됩니다. 그들은 문화를 만듭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이 문화는 죽음의 문화입니다.
최초에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아담이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을 때는 원료들을 재구성해서 삶을 지원하고 사람들을 위해서 도움되는 문화를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보십시요. 여기 4장에서 만들어진 문화는 첫째 우울이고 둘째 폭력입니다.
우선 우울입니다.
19절에서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했다고 합니다. 창2장24절에서는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라고 합니다. 최초의 계획은 남자가 아내wife와 합하여 입니다. 와이프들wives가 아니죠. 그러므로 일부다처제는 전혀 원래 결혼의 디자인이 아닌걸 알 수 있습니다. 근데 성경 나머지 전체에서 우리가 보는것은 일부다처제입니다.
유대 성경문학의 거장 로버트 얼쳐는 말합니다. 만일 당신이 창세기를 읽을 수 있다면, 창세기 전반에 숨겨진 주요 메시지 중 하나는 일부다처제 임을 알 수 있다. 여기부터 아브라함, 이삭, 야곱,요셉 등의 이야기에서 계속해서 일부다처제가 거론되는데 이는 창세기가 말하고자하는 포인트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일부다처제는 명확한 재난이라는 것이다.
창세기에서 그걸 볼 수 없다면, 글을 읽을줄 모르는것이라고 로버트 얼쳐는 얘기합니다.
일부다처제는 연관된 모든 이들에게 재난입니다만, 특히 여자들에게는 극명한 우울함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이제 우리는 우울함으로 이끌어가는 문화형태가 생긴겁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23절에서 라멕은 말합니다.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이럴수가! 이걸보십시오!. 우선 여기서 상처나 상함이라는 단어는 멍듦이나 긁힘을 의미합니다. 즉, 여기서 라멕은 말 그대로 어린아이가 나에게 살짝 긁힘을 입힌다면, 나는 그 목을 베겠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서 라멕이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것은 완전수인 칠을 두번 겹침으로 무한대를 의미합니다. 즉, 절대 복수를 멈추지 않겠다는 다짐 인것이죠. 절대 분노를 내려놓지 않겠으며, 나에게 조그만 잘못을 해도 절대절대 용서치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그가 자랑스러워하며 떠벌리고 있는걸 보십시오.
이건 원래 경작(문화)의 의미인 내 삶으로 너를 섬기겠다가 아닙니다. 반대인 너의 삶으로 나를 섬기겠다가 된겁니다. 놀랍도록 폭력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로 틀어진 문화는 더이상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며 원래 목적대로 삶으로 섬기는게 아닌걸 보게됩니다. 권력과 착취 학대 뿐이죠.
우리가 인지해야 할 또 다른 아주 중요한 한가지 포인트는 문화는 도시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성경에서 아니 역사적으로도 최초로 도시란 단어가 사용된 곳은 창4;17에서 "가인이 성을 쌓고 builded a city"입니다. 근데 여기서 사용된 히브리 단어 씨티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도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로는 4 ,5 정착민들(남자 기준)을 의미합니다.
아주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하나님께서 아담이브에게 만들고 발전시키라고 명령하신 문화와 문명은 씨티가 만들어진 후 처음 이루어지는 진다는 것입니다.
프랑스 크리스챤 학자인 헨리 브로쉐는 창4장에서 가인의 도시로부터 음악 등 문화가 발전하는 것을 눈여겨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로 물든 도시에서 문화가 생겨났다는 점에만 집중하여 도시나 음악, 엔지니어링 등의 문화를 비난해서는 안됩다고 합니다. 그럴 경우, 루소와 같은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왜 루소를 언급했을까요? 18세기에 루소를 비롯한 낭만주의자들은 왜 세상에 폭력이 난무하는가를 이해하려고 하면서 도시를 비난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선하고 아름답게 태어나지만, 사회가 이기심과 폭력성을 가르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도시와 문명에서 멀리 떨어진 원시부족들이 더 선하고 평화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벤자민 프랭클린이 전쟁을 도와달라고 파리에 갔을 때도 더 선해보이려고 일부러 원시부족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려고했던 일화도 있습니다. 당연히 현대에는 루소 등의 주장은 터무니없다는걸 누구나 압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도시의 환경이 시골보다는 더 죄악을 낳는다는 낭만주의자들의 생각이 현재의 미국, 특히 미국 크리스챤들의 정서에 박혀있다고 많은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도시를 부정적으로보는 시각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도시를 부정적으로 보거나 묘사하지 않습니다. 전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후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면서 그들에게 도시를 지으라 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인들을 바빌론으로 추방하실 때, 그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추악한 이방도시에 대해서 조차도 뭐라고 하시나요? 그도시의 평화와 번영을 구하라. 그도시를 위해서 기도하라,사랑하라, 돌보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선지자 요나를 당시 제국의 수도인 이방도시 니느웨에 보내실 때도 마지막에 하나님께서는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사실은 앞으로 살펴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하니님께서 바로잡으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바꾸신 세상이 뉴욕과 매우 닮아있다는 점입니다. 대도시입니다.
성경은 놀랍도록 도시에 대해서 긍정적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도시에 긍정적이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이브를 만드실 때 창조성을 갖도록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창조성을 주신 이유는 도시를 건설하고 문화를 만들도록 하신겁니다. 도시는 창의적인 곳이며, 도시에서 문화가 발생하고 성장합니다. 그래서 도시가 생긴 후에라야 문화가 발생한 겁니다. 왜냐구요? 저는 역사학적 이유와 논리적인 이유를 드릴 수 있습니다.
역사적인 이유부터 말하겠습니다.
도시란 성벽과 성벽 안의 정착민들에서 부터 사작합니다. 성벽 안이란 안정성을 의미합니다.
성벽 밖에서는 누군가 잘못하면 와서 죽이고, 다시 몰려가서 복수하고 서로에 대한 살육이 언제나 지속됩니다. 도시 안에서는 판사가 케이스를 듣고 조율하고 판단합니다. 평화로운 해결이 가능합니다. 성밖에서는 모든사람들이 각자 자급자족합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각자가 구합니다. 도시에서는 누군가는 옷을 잘만들고, 누군가는 음식을 잘하고, 누군가는 도구를 잘만듭니다. 경제와 사회가 생성되고 각종 서비스가 생깁니다. 성벽안에서 안정성이 보장된 상태라야만 인류의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겁니다. 지금 현대에는 더이상 안정감을 얻기 위한 성벽은 필요 없습니다. 관광지로서만 존재할 뿐이죠. 그럼 도시가 더이상 문화에 중요하지 않은걸까요? 아닙니다! 도시의 본성에 의해서 여전히 문화는 도시로부터 흐릅니다.
왜냐구요? 도시는 근본적으로 밀집성과 다양성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도시는 다른 곳보다 당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가장 많은 굣입니다. 또한 당신과 다른 부류도 다른 곳보다 가장 많습니다. 예를 들어보죠. 당신은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출신 지역에서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죠. 지역대회에서 우승한 후 전국 대회를 위해서 펜실베니아 역에 내립니다. 기차에서 내리는데 플럣폼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사람들이 지나치면서 빈 바이올린 통속에 동전을 던져줍니다. 근데 그의 실력이 당신보다 뛰어납니다! 오!노! 그때부터 당신은 깊숙한 힘까지 끌어올려 최선을 다해 연습합니다.
도시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느낍니다. 도시에는 다른 어느 곳보다 셀 수없는 많은 사람들이 당신과 같은 부류입니다. 당신의 최선을 끌어냅니다.
또한 도시는 다른 곳보다 당신과 다른 시람들이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다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당신이 하는 모든 행동에 의문이 생깁니다. 모든 행동을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창의적인 생각을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도시는 밀집성과 다양성으로 인해 마치 용광로같이 새로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흘러 넘칩니다. 그래서 문화의 성장은 도시의 성장과 함께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도시는 죄의 지배하에 있습니다.
밀집성. 당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은 자극이 되는 반면 죄로 인해 기진맥진하게 지치게도 합니다. 번아웃하게 합니다.
다양성. 당신과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엄청많다는 것 또한 자극도 되고 창의성도 생기지만 반면에, 도시는 죄로 인해 다양한 갈등이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도시의 중심은 언제나 전쟁 중입니다. 삶을 지원하고 다른 이들을 섬김을 생산하는 문화가 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명성을 위해서,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서, 권력을갖고 타인을 착취하기 위해서 단지 일하고 문화를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전쟁입니다.
인류문화는 근본적으로 타인을 섬기는 내 삶인가? 아니면 나를 섬기는 남들의 삶인가? 이 문제가 오늘의 마지막 포인트로 리드하는군요.
도시에서 문화의 힘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 살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번아웃에 빨려 들어가고, 갈등에 말려들지 않고 말이죠. 도시에서 살아가는 힘은 어디서 얻을 수 있을까요?
아 근데, 혹시 사회에 어떤 변화를 만들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그냥 행복한 삶을 원하시나요? 그냥 행복하기 바라신다면 아마도 여기있지 않는게 좋을 겁니다. 왜냐면 치열한 경쟁과 다양한 갈등. 밀집성과 다양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에 뭔가 변화를 만들고 싶고 인간 생활에 변화를 만들고 싶다면 도시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독성이 강하고 심장이 파괴된 인류 문화의 힘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면 엄청난 영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특히,사탄의 영향을 받은 도시일 경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 그 힘은 어디서 받을 수 있을까요? 마지막 포인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장시키시는 중인 미래의 은혜의 도시가 있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구요? 창4장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 아담이 다시 아들을 낳아 셋으로 이름짓고 셋이 에노스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보십시오. 새로운 라인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장에는 이름name이라는 단어가 두번 나옵니다. 가인이 도시를 건설하고 아나님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아들의 이름으로 도시의 이름을 짓습니다. 창11장에서는 가인의 후손들이 바벨탑을 건설합니다. 탑 즉 도시건설의 주요 이유는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죠. 그점이 바로 도시와 문화가 잘못된 포인트입니다. 당신이 당신 이름을 높이려 일하고, 당신의 이름을 높이려고 도시로 가는 것. 그러고보니, 대부분 사람들이 뉴욕으로 오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일이 사실은 당신 자신에 대한 것이고 인류 번영을 위한 생산이 아닐 때, 섹스가 당신 자신만을 위한 것이고 당신이 섬기려는 관계를 만드는 것도 가족을 만들려는 것도 아닐 때, 당신 자신만에 관해서고 당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것 뿐일 때, 이 것들은 죽음의 문화를 창조합니다. 도시가 죽음의 문화를 창조하는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새로운 라인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고 하지않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그 이웃을 위해서 삽니다. 그러므로 두 종류의 사회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는 권력에 기초하고 다른 하나는 섬김에 기초합니다. 하나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려하고 다른 하나는 단지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고자 하며, 그의 이름을 입고 싶어하고 그와 같이되고자 합니다.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그 두 그룹의 사람들은 어디에 살까요? 사실 그들은 같은 장소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유명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에게 "사도들아 너희는 세상의 빛이며, 언덕 위의 도시라. 너희 착한 행실을보고 이방인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하라" (**마태5;16의 예전 버전인것 같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셋의 후손들, 하나님을 믿는자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각 도시의 또 다른 도시 안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돌리며 살아가는 인간사회를 건설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경우 모든것이 변화될 겁니다. 섹스, 돈, 권력이 사용되는 방식이 달라질 겁니다. 가족관계나 비지니스 방식도 달라질 겁니다. 예수님이 언덕 위의 도시라 하신 의미는 주위의 다른 도시들이 너희의 좋은 행실을 보게하라는 겁니다. 좋은 행실은 단지 바른 마음이 아니라 섬김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면 여러분이 셋의 후손인것, 은혜의 도시의 일원인것,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도시의 일원인 것을 아는 방법 중 하나는 바깥 주변의 가인 도시의 사람들이 여러분의 믿음을 미심쩍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도시안에 있는 여러분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더라도 주변 사람들을 사랑해야합니다. 그들을 위해 희생해야합니다. 그게 하나님이 예레미야 29장에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래, 그도시가 너희를 억압했다. 그래, 그도시가 너희를 박해했고, 앞으로도 박해할거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거기살면서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길 바란다.
대체 어떻게 그럴수 있는 힘을 얻을까요?
베드로전서에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건 그들이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할 수도 있다가 아니라 그들이 반드시 비방할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말씀하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 도시, 각 도시 안의 또 다른 도시,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도시, 죽음과 권력이 아닌 생과 섬김의 도시의 일원이라면 당신은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오해받을 거라는 겁니다. 우리가 뉴욕시티에서 우리가 살아야하는 방식으로 이 곳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 우리를 쏟아 붇는다면 우리는 박해받도록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 오해받고 박해받고 어떤 경우에는 공격받을 수도 있습니다만, 우리는 속상해하거나 화내서는 안되는겁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우리가 은헤의 도시의 일원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이미 들었기 때문입니다. 가인의 도시가 아니라요.
그럼 그럴 수 있는 힘은 어떻게 생길까요?
자, 보십이요. 라멕이 24절에서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뭐 생각나는거 없으십니까? 제자들이 내게 죄지은 형제를 몇번 용서하리이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일곱번이 아니라 일곱번에 일흔번까지도 할지니라 라고 하십니다. 에수님은 라멕의 말을 기억하시고 이를 되돌리신겁니다.
라멕은 끝없는 분노를 말했습니다. 나는 절대 나의 분노를 놓지 않고 무한까지 품고 무한까지 보복하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인간의 끝없는 죄는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만나게 될거다.
라멕은 그럴 자격도 없이 끝없는 분노와 끝없는 보복을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나는 만물의 주로, 나만이 그런 말을 할 권한이 있다. 오직 나만이 인간에게 끝없는 분노를 품을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러지않겠다. 가인에게 그랬듯이 너에게도 끝없는 자비를 베풀겠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가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표(mark)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앞서 말한 성경의 선택성 이죠. 문신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마크라는 이름의 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겁니다. 죽어 마땅한 가인에게 자비가 베풀어졌습니다! 근데 공의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인에게 자비로울 수 있을까요? 어떻게 공의의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끝없이 용서하겠다고 하실까요? 라멕의 말과는 정반대입니다. 어떻게 여기서 하나님은 끝없는 자비와 용서를 줄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가인이 말했던 그가 받았어야 할 3가지가 사실 예수님에게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3가지는 14절에 나옵니다.
나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첫째,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둘째,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을 찾은자 들이 예수님을 끌고가서 축였습니다. 셋째,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되었습니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끝없는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 건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았기 때문입니다.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저주하시고는 자비의 표를 주십니다. 진짜 저주는 우리가 받게됐기 때문에, 축복도 그렇습니다. 저주는 예수님, 즉 하나님 자신에게 갔기 때문에 우리는 축복만 받게됐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이 모든걸 알게되면, 주님이 당신을 위해하신 모든걸 알게되면 당신은 더 이상 자신의 이름을 높일 필요가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당신이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일은 일일 뿐이며, 섹스는 더이상 당신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고 결혼한 상대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이 된겁니다.
이제 여러분은 은혜의 도시의 일원이 된겁니다. 은혜로 말미암아서요.
이 모든 것이 어디서 시작된 줄아십니까? 어떻게 당신이 조금씩 더 은헤의 도시의 일원답게 살아가게 되는지 아십니까?
회개입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회개하십시오. 회개하십이오. 그러면 여러분은 타락하지 않고 회복될 겁니다. 은혜의 도시.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갖게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