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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나눔터

자신이 안 믿는 줄 모르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2.06.21|조회수163 목록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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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집에서 지내는 가족도 물리적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적으면 친밀한 관계에 적잖은 영향을 준다. 가족이 아빠이자 남편인 내가 가족을 사랑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안다 해도 그렇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많고 한 가족으로 살아도 실제로 그분과의 관계에 시간을 안 들이면 곧잘 서먹해진다.

2
영적인 가치와 윤리적인 가치는 함께 간다. 기독교의 영적 가치에 유리하다고 해서 불의가 있는 정당이나 정치인을 무조건 지지할 순 없다. 한때의 유익을 위해 영원한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섣불리 뒤로 물릴 순 없다. 적어도 끝까지 차선이란 전제가 있을 때만 일시적인 차선의 지지가 가능할 뿐이다.

3
만에 하나 동성애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기독교인들이 핍박을 받아야 할 상황이 오면 그대로 핍박을 피하지 않고 받아야 하는 것이 신앙인의 길이기도 하다. 핍박 없는 지금 순교적 신앙을 키워놓아야 그때 다가올 핍박을 감당해낼 수 있다. 결국 신자에게는 '앞으로나 잘 하면 되지' 하는 게 없다.

4
큰 교회들에서만 부목사 생활을 하다가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 자연스럽게 내 성향도 많이 바뀌는 걸 느낀다. 우선 큰 예배당 건물이나 외형적인 어떤 규모나 사람들의 인기를 얻는 데 별 감흥이 없어진다. 거기에 연연하는 게 허무하고 부질없게 여겨진다. 좁은 생명길 안에 있는 게 가장 재미있다.

5
건축 공사장을 지나가다가 아주 작은 물방울이 눈가로 떨어져 온 몸이 순식간에 서늘해졌다. 어쩌면 작은 물방울도 큰 물체가 떨어진 것 못지않은 대형 추락 사고다. 작은 실수나 죄를 소홀히하면 실은 영적 세계에서는 이미 큰 죄에도 무감각할 소지가 크다. 정말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

6
예수님을 믿는 건 그의 말씀을 믿는 것이고 그가 사신 대로 그의 가치관을 따라 사는 것이다. 말씀만 믿고 그 말씀대로 안 살면 주님을 닮을 수 없다. 믿음의 고백이 입으로만 살아 있고 삶으로 안 나타나면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안 믿는 줄 모르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7
"믿음을 온전케 하고"(딛 1:13).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약 2:22). 믿음은 온전케 해야 할 그 무엇이다. 내 믿음이 약하면 나를 통한 성령의 역사도 약하다. 성령이 약하신 게 아니라 내 믿음이 그 역사를 제한한다. 성령이 내 연약함을 도우실 때 외면치 말고 납작 엎드려야 한다.

8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기도로 들어가는 통로가 곳곳에 열려 있는 게 보인다. 어느 말씀에서 내 마음이 툭 터져 그 길로 한달음에 기도의 산으로 오르게 될지 모른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의 제목들까지 못 떠올리면 그 말씀에 순종할 의향 없이 그저 읽거나 공부만 하고 말 의도 탓이다.

9
교회 공동체 식구들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다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독특하고 형편과 분위기도 다르다. 이름이 바뀔 때마다 간구하는 내 마음의 색깔도 달라진다. 하나님의 뜻이 일정하고 신실하지 않다면 어디에 기준을 두고 하나라도 간구할 수 있을까.

10
꼭 많은 일, 많은 사람을 경험해야 많이 배우는 게 아니다. 한 사람, 한 사건을 통해서도 많은 걸 경험하고 깨달을 수 있다. 놓치지만 않으면 그 하나 안에 여러 사람, 여러 사건들의 DNA가 있다. 잘만 하면 같은 실수를 여러 번 안 저질러도 된다.

11
지식주의 기독교에 끌리다보면 세상에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 말하는 게 자기 품위를 해치거나 비지성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 천국 가려면 세상을 잘 알아야 한다고 강변한다. 세상을 잘 알려다가 자칫 세인들처럼 생각하고 살기 쉽다는 데는 무감각해진다.

12
균형잡힌 신앙에서 지식은 너무도 소중한 영역이지만 지식주의 기독교는 눈에 잘 안 띄는 신앙의 기본기를 소홀히한 채 과시성 지식으로 뭔가 된 줄 착각하게 만든다. 자기를 버림으로 채워지는 신앙의 역설을 버리고 지식을 우상화하는 걸로 자기를 지키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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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만 해도 많은 고난과 좌절과 시험의 대장정이다. 주님과의 진실한 관계가 다 그렇듯 이 여정은 금세 표가 안 난다. 지식주의가 매력 있어 보이는 건 적은 노력으로 큰 이득을 빨리 보장해줄 것 같아서다. 기도보다 책이 더 좋으면 어딘가에 병이 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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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고전 8:1). 세상에 대한 지식이든 신앙에 대한 지식이든 거기에 진정한 사랑이 없으면 지식만 따로 떨어져 겉돌게 된다. 지식을 추구하면서도 열정적인 경건의 추구가 식지 않아야 사랑으로 덕을 세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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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전선은 개인과 공동체의 영역에서 동시에 진행되어야 이상적이다. 다만 지금처럼 세속주의가 과도하게 범람하는 때일수록 개인의 영역에서 치러야 할 영적 전쟁에 전투력를 더 집중시켜야 한다. 안 그러면 세상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이도저도 못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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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인 지식주의 기독교가 가진 폐해의 정점은 무천년설 종말론으로 귀결된다. 그들은 성경 예언에 따른 이스라엘 회복을 자신들이 추구하는 정치적 이념의 방해물로 여긴다. 세상을 세인들의 눈으로 바라보는 데 어느새 동화되지 않았다면 결코 그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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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적, 윤리적 기독교에 익숙해진 이들은 주의 역사적 재림이나 휴거 같은 개념을 쑥스러워한다. 그런 이야기는 자신들의 깊은 지적 사유에 안 어울리고 오히려 지적 상상력과 재미를 감퇴시킨다고 여긴다. 지성이 거듭나지 않고 혼적인 데 머물러버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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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추구나 사회 참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예수님의 재림이나 교회의 휴거에 대한 관심은 양립 가능하다. 그런데 한국에선 이 두 관심사가 통합되지 못하고 나뉘어 있다. 그래도 둘 중 하나를 더 중시해야 한다면 후자가 교회만의 가치관에 더 부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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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천년설을 견지하는 이들은 성경의 거의 절반을 무시한 채 자신들이 선호하는 신학에 맞는 재료들만으로 기독교의 집을 짓는다. 거기에는 지성적, 윤리적 아젠다는 가득해도 역사적, 사실적 기독교에 대한 실체적 진실은 부차적이다. 한마디로 반쪽짜리 기독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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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천년설자나 지성주의자들의 역할과 나름의 활동은 한국 기독교의 한 자산으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이나 문자적 전천년설, 전통적 창조론을 성경적 기독교의 적이라도 되는 양 공격하는 모습에서 그들의 대담한 편견을 보았다.

21
지금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무엇보다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에 깨어 있어야 할 때다. 이 관계의 기초가 특히 더 견고하지 않고는 다른 어떤 일도 이전보다 더 큰 시험거리가 된다. 좋은 일도 이 관계의 시험에 미끄러지면 중독 성향으로 발전해가기 쉽다.

- 안환균 목사의 SNS에 수 년 전 오늘 나눈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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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하사엘 | 작성시간 22.06.22 말씀 구구절절이 진실로 아멘이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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