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은혜의 나눔터

디트리히 본회퍼, ‘경건한 공동체에 대한 이상이 그리스도인 형제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다... 교회에 불평 많을 때 꼭 기억해야 할 것'

작성자Stephan|작성시간24.03.30|조회수405 목록 댓글 0

디트리히 본회퍼, ‘경건한 공동체에 대한 이상이 그리스도인 형제 공동체를 파괴할 수 있다... 교회에 불평이 많아질 때 꼭 기억해야 할 것'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형제가 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내게 행하신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형제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그에게 행하신 일을 통해서 다른 사람은 내게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형제가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지하게 형제애를 갈망하며 나와 마주 서 있는 경건한 사람이라 해도, 성도의 교제를 나누도록 인도된 형제가 아닐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제는 그리스도에 의해 속량되어 죄 사함을 받고, 믿음과 영원한 삶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가 가진 내면성과 경건한 성품이 성도의 교제를 이루게 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행하신 일이 우리의 형제 관계를 규정합니다.

우리가 나누는 성도의 교제는 오직 그리스도께서 우리 두 사람에게 행하신 일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처음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리하여 시간이 지나면 다른 무엇이 우리의 사귐에 첨가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언제까지나 그렇게 머물러 있습니다.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다른 사람과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그 사귐을 지속하게 됩니다. 우리의 사귐이 참되고 깊어질수록, 우리 사이에 존재하던 다른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의 사귐이 더 분명하고 순수해질수록, 우리 사이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역사하심만이 유일하게 살아 있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서로에게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서로를 소유하며, 진실로 서로를 소유하며, 서로를 완전하게 영원히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더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는 불순한 갈망에 처음부터 작별을 고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사이에 이루어 놓으신 이상의 것을 원하는 사람은, 다른 곳에서 이루지 못한 특별한 사귐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일 뿐,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에 불분명하고 불순한 소원들을 가지고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여기서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는 대개 초창기부터 최대의 위기를 맞으며, 내부 깊숙이 독성이 퍼져 나가는 위험에 처합니다. 말하자면, 경건한 공동체에 대한 이상과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를 혼동하는 것은 그리스도인 형제 공동체의 영적 현실과 공동체를 향한 경건한 마음의 자연스러운 갈망이 혼합됨으로써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 형제 공동체가 처음부터 다음 사실을 분명하게 하는 것은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는 이상이 아니라 거룩한 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는 인간적인 현실이 아닌 영적 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수없이 많은 경우에 기독교 공동체는 이상에 기초해서 산 결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 삶의 공동체에 첫발을 들여놓은 진지한 그리스도인은 흔히 그리스도인의 공동생활에 관한 특정한 이상을 함께 가지고 들어와서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이러한 종류의 모든 꿈이 신속히 깨어지도록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커다란 실망,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 전반에 대한 실망과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이 우리를 짓누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대한 인식으로 인도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전한 은혜로써 우리가 단 몇 주간이라도 자신의 환상 속에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며, 우리를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는 즐거운 체험들과 행복한 도취 속에 내어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서를 자극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불쾌하고 악한 모습에 환멸을 느낀 공동체야말로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본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며, 자신에게 주어진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실망이 개인에게나 공동체에 빨리 찾아올수록, 양자에게 훨씬 유익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망을 감당하지 못하거나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의 이상에 집착하는 공동체는, 그 이상이 깨어지는 순간 기독교 공동체에 주어진 약속마저도 상실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이러한 공동체는 언제든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속으로 함께 가지고 들어온 인간적인 이상은 참된 공동체를 방해하므로 반드시 깨어져야 하며, 그럴 때 비로소 참된 공동체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의 꿈을 기독교 공동체 자체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아무리 정직하고 진실하며 헌신적인 사람이라 해도, 결국 모든 기독교 공동체의 파괴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몽상을 미워하십니다. 왜냐하면, 몽상은 사람을 교만하고 거만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떤 공동체상을 꿈꾸는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그 꿈을 이루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는 요구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 자신의 법을 만들어서는 그 법에 따라 형제들과 하나님을 심판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형제들 사이에서 다른 모든 이들을 향하여 마치 살아 있는 비난처럼 완고하게 서 있게 됩니다.

그는 마치 자신이 기독교 공동체를 만들어내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이 꿈꾼 대로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려고 행동합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실패라고 말합니다. 그 결과 그는 처음에는 형제들을 정죄하고, 그 후에는 하나님을 정죄하며, 마지막에는 절망에 빠져 자기 자신을 정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공동체의 유일한 기초를 이미 놓아 주셨으며, 우리가 디른 사람들과의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훨씬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과 한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구하는 자가 아니라, ‘감사하는 자요 선물을 받은 자로서’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공동생활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대해 감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 아래, 하나님의 용서와 약속 아래 살아가는 형제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인해 감사합니다.

죄와 곤궁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축복 아래로 함께 나아가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형제들을 주신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그 어떤 날에도, 심지어 곤경에 처한 힘든 날에도 그리스도인의 형제 공동체에 주신 하나님의 선물은 측량할 수 없이 크지 않습니까? 죄와 오해가 공동생활을 침해하는 곳에서도, 죄를 지은 형제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 함께 서 있는 형제가 아닙니까?

그리고 그의 죄는 나에게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 아래서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새롭게 감사하게 하는 기회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형제에게 크게 실망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비할 수 없이 유익한 구원을 가져오는 시간이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그 시간은 나로 하여금 우리 모두가 결코 자신의 말과 행위를 근거로 살 수 없으며, 오직 우리를 진리 안에서 이어주는 유일한 말씀, 유일한 행위에 의해서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죄의 용서에 의해서만 살 수 있음을 철저하게 가르쳐 주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환영의 아침 안개가 걷히는 곳에 기독교 공동체의 밝은 하루가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서도 감사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큰 것도 받습니다. 우리가 일상의 선물에 감사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준비해놓으신 더 큰 영적인 선물을 받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미 주어진 작은 영적인 인식과 체험, 사랑 따위에 감사해서는 안 되며 항상 더 큰 은사만을 열렬히 사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그리스도인에게는 허락된 커다란 확신과 강한 믿음, 풍성한 체험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 앞에 한탄하며, 이러한 불평을 경건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것을 구하면서 매일의 작은(그러나 사실은 작은 것이 아닙니다!) 선물에 대해 감사하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떻게 작은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려 하지 않는 자에게 더 큰 것을 맡기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소속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대해 날마다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모든 것이 우리 기대와는 달리 너무 초라하고 보잘것없다며 불평만 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를 위해 이미 준비해놓으신 경륜과 부유함을 따라 우리 공동체를 성장시키려는 하나님을 방해하게 됩니다. 혹여 우리 공동체가 위대한 체험이나 풍성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너무도 연약하고 믿음이 없으며 어려움만 가득하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일은 무엇보다도 목회자나 열심 있는 성도들이 자신의 교회에 대해 종종 불평을 늘어놓곤 하는 일들에서 나타납니다. 목회자는 자기 교회에 대해 불평해서는 안 되며, 무엇보다도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불평을 늘어놓아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교회를 맡기신 것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교회를 고발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부름받아 소속된 기독교 공동체와 어긋나서 고발하는 자가 되었다면, 그는 하나님에 의해 깨어져야만 할 자신의 이상은 없는지 우선 자기 자신부터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적 이상이 발견된다면, 이러한 궁지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하나님의 교회를 고발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불신을 한탄하며, 자신의 실패와 특별한 죄를 깨닫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죄를 인식하는 가운데, 다른 형제들을 위해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감당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복 있는 사람)에서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