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 베드로의 젊음과 늙음
/쌍문동산소망교회 김 목사
요한복음21:15~18
예수께서 목요일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마태복음26:31)"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하였습니다.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부정적이었습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겟세마네라는 감람산에
올라가 날이 새기까지 기도하였습니다.
날이 새어 예수께서 무리에게 붙잡히시니 이에 제자들이 예수를
버리고 다 도망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나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6시간동안 매달려 십자가상 7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혔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죽은 자 가운데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태복음28:6)"
예수께서 금요일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시고 무덤에 묻혀 안식일
토요일을 지나 안식후 첫날 새벽에 살아나셨습니다.
예수께서 안식후 첫날 살아나시어 이 후에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조반 먹은 후에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신 뜻을 살펴봄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이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 부인할 것을 예언(마태복음26:30~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태복음26:34)"
예수께서 부활하신 몸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을 합니다.
베드로는 이 세 번의 질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경솔하게 행동하여 세 번 부인한 것을 떠 올렸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전에 처럼 경솔히 대답하지 않으므로 겸손하게 대답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1>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 나를 버릴 것을 말씀하심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라
하였느니라(마26:31)"
예수께서 수난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흩어질 것이나 죽은 후에 살아난 후에 제자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2>베드로의 맹세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태복음26:33)"
베드로는 예수님의 예언에 반박하여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는 나는 예외가 될 것이라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진실로 말하였습니다.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그래도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맹세하여 반박하였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마태복음26:35)"
과연 베드로의 맹세와 예수님의 예언 중 누구의 말이 맞을까요?
베드로의 맹세는 틀렸고 예수님이 예언은 그대로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하여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앞으로 닥칠 일에 대하여 미래를 보시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맹세하여도 틀린 것은 베드로는 마음에서는 나를 소리를 내어도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말씀하시는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감정에 의지하여 맹세하는 것은
환경에 따라 바뀌는 감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혼에서 나는 감정, 의지, 지식은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맹세하는 것을 믿을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 이름으로 구하는 자가 되어야겠습니다.
성경에는 말씀에 의지하는 것 없이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마태복음5:34~36)"
하나님께 겸손하게 구하는 자가 되어야지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맹세는
하지 않은 것이 좋습니다.
오직 주의 말씀으로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 하여야
악을 좇아 나지 않습니다.
3>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맹세코 모른다 함
예수와 함께 제자들이 감람산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갔습니다.
예수께서 앞으로 닥칠 수난을 감당하기 위하여
간절히 아버지께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맹세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맹세코 십자가를 지고 가리라 맹세코 아버지의 뜻을 행하리라는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나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와 다른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맹세하여 일을 진행하는 것이었고
예수님은 맹세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태복음26:39)"
베드로는 두 번 이상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예수님에게 자신의 의지를
보이는 맹세를 하였으나 예수께서 붙잡혀 가시고 나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맹세와 다르게 행동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말씀하신 것 처럼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마태복음26:70)"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마태복음26:72)"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마태복음26:74)"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던 맹세는 온데간데 없고 맹세하여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다 부인하여도
나는 결코 부인하지 않으리라는 맹세보다 주님여 이손을 꼭 붙잡고 가소서라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4>베드로가 배신에서 돌이킴과 가롯유다의 영원한 배신자
예수께서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베드로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셨음을
베드로에게 알리셨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1~32)"
베드로의 배신과 가롯유다의 배신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둘 다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배열에서 첫 제자는 베드로이고 12번째 후미에
배열 되는 것이 가롯유다입니다.
베드로는 어부출신이고 가롯유다는 가롯출신이라 가롯유다라 합니다.
베드로는 다혈질이고 가롯유다는 머리 회전이 빨라 계산적입니다.
베드로는 다혈질이라도 주를 위하여 맹세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을 각오도 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감정에 치우친 의지였습니다.
그런데 가롯유다는 어떻습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예수님을 이용하여 이득을 챙길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자기에게 돌아올 이득을 생각하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를 통하여 내게 돌아오는 것이 어느정도일까하는 계산기를
두덜겨 보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셨지만 가롯유다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은 가롯유다의 종말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마태복음26:24)"
베드로는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아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아가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이득을 취하는 것이라 돈 궤에
손을 넣는 것이었고 언제나 계산적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고 자신에게
돌아 올 것이 있는지 여부를 재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 예수님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나의 몸을 위한 이득입니까?
예수께서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할 것을 아셨고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으나 돌이키는 통곡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하자 닭이 곧 울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가롯유다는 은 삼십냥에 예수를 팔아버렸습니다.
가롯유다는 예수님을 팔고나서 자신의 한 짓에 대하여 괴로와하였습니다.
자책만 할 뿐 통곡하는 회개가 없었습니다.
결국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다가 자살을 택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범죄에 대하여 자책하여 괴로움을 당하다가
견디지 못하여 자살을 생각합니다.
누구든지 죄를 짓습니다.
자책감에 있지 않고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자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살리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부활로 살리려고 다시 오십니다.
2.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을 하셨다.
1>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첫번째 질문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한복음21:15)"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예수님을 세 번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여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돌이킨 베드로에게 첫번째 질문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라 하지 않고 시몬이라 불렀습니다.
베드로의 의미는 반석입니다.
시몬의 의미는 갈대입니다.
예수께서 사용하고자 하실 때 강한 것이 아니고 약한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본 이름은 사울입니다.
사울은 큰 자입니다. 바울은 작은 자입니다.
베드로라 부르지 않고 시몬이라 부르시는 것은 맹세하는 베드로가 얼마나
약한 시몬인 것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갈대는 바람부는대로 움직입니다.
반석은 바람불어도 움직이지 않은 고집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약한 자로 성령의 바람부는대로 움직이는 자가 되기를바랍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이름을 옛적의 이름 시몬이라 부를 때 첫번째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 자신을 돌아봄으로 나는 아무것도 아님을 발견하고
진정으로 자신을 고백하였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한복음21:15)"
예수께서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내 어린 양을 먹이라"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다 같을 수 없습니다.
연약한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가 있다 할지라도
어린 양도 먹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두번째 질문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요한복음21:16)"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두 번째 질문은 첫 번째 질문과 같은 말인 것
같으나 다릅니다.
첫번째 질문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이고 두번째 질문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첫번째 질문은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이고 두번째 질문은 예수님과 자신의
비교입니다.
자신 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입니다.
대게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자신을 위한 것이냐 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것일 때 아벨의 제사이고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가인의 제사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예배이지만 가인은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예배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자신 보다 예수님을 더 우선하는 사랑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마태복음22:37)"
그렇습니다.목양은 자신을 드러내어 자신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선하는 사랑으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가르치는
영혼의 양식으로 양을 치는 목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양이 내 양이라 생각하여 내 맘대로 하는 것은 양을 칠 자격이 없습니다.
오르지 예수님의 양을 치는 주의 종으로 양을 치는 목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목자 위에 목자장이 있습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베드로전서5:3~4)"
주장하는 자세란 군림하거나 주인 노릇 하려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권세를 가지고 지배하여 대접받을려고 하고 섬김을 받을려고 하는 거만한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양을 치는 것은 주인이 내게 맡긴 것을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번째 질문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내 양을 먹이라(요한복음21:17)"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 전에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였습니다.
세번째 예수님의 질문에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저주하며 맹세한 것을
생각할 때 자신이 얼마나 약한 시몬인가 돌아볼 때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약한 사람임을 알 수 있어 예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맹세가 아닌
주의 사랑을 받을 수 없으면 여전히 나는 맹세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 고백하는 것은 오직 예수의 사랑을 받아야한다는 것을
주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양을 먹일 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생각, 나의 지식, 나의 경험, 나의 상식, 나의 경력을 예수님의 양에게
먹일 것이 아닌 오직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먹일 때 영의 양식으로
양육할 수 있읍니다.
3.베드로의 젊음과 늙음의 행동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한복음21:18)"
1>베드로의 젊었음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따라 가도
젊음의 실수가 많았습니다.
장점보다 단점이 많이 드러났습니다.
부활 전에 베드로의 모습을 보세요.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 졸다가 기도하는 중에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변형된 영광을 보아도 육신의 생각을 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서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마태복음17:4)"
예수님의 공중재림은 이 땅에서 잘될려고 집짓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공중재림은 7년 환난이 오기 전에 신부된 몸으로 하늘로
데려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을 듣는 자가 되어야지 주의 영광을 보는 것이
이 땅에 집짓고 잘 사는 목적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부활 전의 모습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으나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구하는 것은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불리하게 이루어질까봐 예수님의 말씀을 가로막았으나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를 책망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마태복음16:23)"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2>베드로의 늙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하고
심히 통곡하여 돌이키는 자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변형되신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바라보고 젊어서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여 젊어서 원하는 것을 다니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육신에 있지 않은 하나님을 뜻을 행하러 오신 예수님 처럼 능히 죽기까지
목숨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을 데려가는 순교가 있을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젊어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것을 버리고
예수께서 세 번 질문한 것을 되새겨 로마에서 십자가에 꺼꾸러 매달려 순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보다 자신을 보이는 자가 되지 말고 예수님의 부활을 보는 말씀으로
바라보아 예수님 같이 부활하는 몸으로 예수님과 영원토록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가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쌍문동산소망교회 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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