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7월 24일 새벽 무렵이었다.
어머니의 몸이 이상이 생겼다. 저녁식사에 체(滯)한줄 알고 소화제 약만 드시고 자려고 했으나, 새벽 2시쯤 어머니는 아픈 배를 끌어않고 자고 계시는 아버지를 깨워 병원에 가자고 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황급히 인근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았는데 자궁외 임신 진단이 나왔다.
병원원장님 말씀이 오늘 수술해야 한다며 환자가 위급하다고 하자 아버지는 망설일 시간 없이 의사선생님 말에 동의했다. 우리가족은 수술에 응했고 어머니는 수술실로 옮겨졌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수술실에서 선생님이 나오더니 가족 앞에 머리를 숙이며 “자궁 외 임신이 아니라 급성맹장입니다. 맹장수술을 다시 해야 합니다”고 말했다. 우리가족은 엄마의 건강상태부터 물었고 또다시 수술을 허락했다, 이미 엄마의 배속은 맹장이 터져 빠른 속도로 썪어들었고 무사히 잘 될 거라고 숨 조리고 있는 가족 또한 목이 타들고 있었다.
6시간 끝에 수술은 끝났지만 엄마의 고통은 점점 더 커져만 갔고 그렇게 엄마는 수술 후 12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는데 난 마지막 길을 가는 엄마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볼 수가 없었다. 홀아비의 딸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엄마를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것이 너무 무서웠고 아무 말 없이 누워있는 사람이 내 엄마라는게 믿을 수가 없었다.
난 그때 6살 어린 나이였지만 그 때에 그 시간 모든 일들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어린 나에게는 가장 따뜻한 품이 식어 가고 있었기에...마음속 깊이 남아 있다. 난 그래도 어머니의 얼굴이라고 기억하지만 태여 난지 32개월도 안 돼는 동생은 어머니의 모습조차 모른다.
동생(여3세) 언니(9세) 난(6세)밖에 안 되는 딸과 아버지를 홀로 두고 먼 곳으로 떠나는 엄마가 미웠다. 엄마 없이 1년을 아빠와 살았을까! 아빠한테 중매가 들어와 선을 보게 됐는데 아줌에게는 2딸이 있었고 두 가정이 합하면 일곱명이 한가족이 셈이다. 계모의 큰딸은 나와 나이가 같았고, 작은딸이 동생과 나이가 같았다. 집안은 바람 잘 날 없이 하루가 멀다하게 말썽이였다. 딸만 다섯이다 보니 먹는거 가지고 다투고 설거지 하는 것 땜에 많이 싸웠다.
그땐 농장에서 분배도 잘 줬고 직장에서도 배급을 잘 줄때였지만 일곱식구가 먹고 살기엔 역부족이다. 얼마 후 남동생이 태어났고 식구는 한명 더 늘어났다. 생활은 점점 더 안 좋아지니 계모는 간밤에 자기 딸 둘만 데리고 친정집으로 도망갔다. 젖먹이 남동생은 (친)할머니 가 돌봐주게 됐는데 젖을 먹어야 할 아이가 젖 없이 찹쌀가루로 쓴 죽만 먹이니 영양실조에 걸려 동생은 4살 되던 해 하늘나라로 갔다. 이듬해 겨울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고 우린 부모 잃은 고아가 되었다
우리 삼형제는 친할머니 집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외할머니가 와서 언니를 데려가고 또 하루는 고모가 와서 날 더러 자기 집에서 살자며 데려갔다. 난 선택의 여유 없이 작은 옷 보따리를 챙겨가지고 고모의 뒤따라 무거운 발거음을 옮겼다. 고모의 집에 가니 고모부랑 오빠들이 잘 왔다고 반겼지만 난 기쁘지만은 않았다. 고모의 집에서 생활하는 동안 난 부모 잃은 서로움이 날로 커져만 갔다. 아무리 나한테 잘 해준다고는 하지만 어머니. 아버지처럼 나의 장래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것이 어린 나에겐 서럽기만 하다.
하루는 학교에 갔다 오는 길에 집 앞에서 할머니를 봤는데 딸집에 와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왔다갔다 하기만 했다.
“할머니 왜 안들어 가세요?”
저 멀리서부터 집 앞에 서계신거 보고 물어 본건데...
“응 금방 왔어. 막 들어갈려는 참이야”
“빨리 들어와요”
할머니를 모시고 들어갔는데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앉아만 있다가 집에 가신다고 일어나 신발을 신고 집밖을 나서자 아무 말 없던 고모도 그때서야 할머니를 부르며
“엄마 이거 가져가야죠”
할머니한테 주는 걸 봤는데 옥수수가루 2킬로그램 남짓했다. 그걸 받는 할머니의 손은 피투성이였다. 산나물 캐러갔다가 손을 다치신 모양이다 그날 저녁 잠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통 안오고 낮에 할머니의 모습만 눈앞에서 맴돌았다 온 밤 생각 끝에 고모, 고모부 앞에서“저... 할머니 집에서 살면 안될까요?”
“고모나, 고모부가 너한테 뭐 잘못하거나 못해준 거라도 있니? 아니면 오빠들이 힘들게 힘들게 했니?”
“아니에요. 난 그냥 할머니하고 같이 살고 싶어서 그래요”
며칠 고민하고 의논 끝에 내가 원하는 대로 (친)할머니 집에서 동생이랑 같이 살게 되었지만 워낙 생활이 어렵다보니 주말엔 할머니 따라 산나물 캐러 다녀야했고 학교 갔다 오면 수돗물 나오는 집 아니면 우물에 가서 물을 길러 독에 가득 채워야했다. 산나물과 물은 늘 해야하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물과 나물만 먹고 살수는 없잖는가! 지금 생각해도 어린 나이였지만 옆집 아줌마가 하는 장사를 따라 했다. (14세) 리야카(손수레)를 빌려서 석탄 200킬로그램 되는 무게를 싣고 4킬로미터 떨어진 읍에 가서 팔고 집으로 올 땐 식량을 사가지 와 끼니를 때웠었다. 석탄을 팔고 사고 하는 걸 3년정도 하다가 조금 더 나은 장사를 하게 되었다. 식량 장사였는데 집에서 함북도 새별~청진까지 왕복 3~7일 걸리는 거리를 식량 70~90킬로그램의 무게를 혼자 지고이고 역으로 다니군했다.
처음 타 보는 기차라 신나기만 했는데 자주 반복 되다보니 죽을 뻔했던 일도 여러번 있었다 한번은 장사짐을 차에 싣을려고 보니 사람이 너무 많아 일단 내가 먼저 차에 타고 짐이 올랐는데 내 위로 무거운 짐들이 줄줄이 쌓이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가 없이 거꾸로 깔려있었는데 옆에 같이 타고 있던 언니들이 허우적거리는 다리를 봤는지 짐을 치우면서 “00가 짐에 깔렸어” 재빨리 짐을 치워주는 바람에 난 일어날 수 있었다.
“어휴~ 죽을뻔 했네”
난 그제서야 숨을 내쉬며... 일어났는데 언니들은 깔깔거리며 웃었다. 땀에 훔뻑 젖은 머리가 얼굴에 달라붙고 입에 들어간 것이 그리도 웃겼던지 배 끓어지고 웃어댔다.
하루는 할머니와 다툼이 있었다. 큰아버지와 사촌오빠가 집에 짐을 싸들고 온 것이었는데, 감을 보니 계속 머무를 예상이여서 할머닌데 여쭤보니 2년만 같이 살자고 했다. 난 같이 살아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만 3개월이 지나고 보니 한푼한푼 모아두었던 돈도 얼마 안 남았고 큰아버지는 매일 술로만 세월을 보내고 일은 안하고 난 점점 짜증나고 화가나 할머닌데 얘기했다 .
“더 이상 큰아버지랑 같이 못 살겠습니다. 나 혼자 벌어서 다섯명의 식량을 담당 못하겠어요”
“같이 살 수 없으면 니가 나가 살아”
며칠동안 아무 말도 안하고 지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중국 가서 돈 벌어 와야겠다) 중국 갈 계획을 짜고 있던 중 같이 갈 사람이 나타났다. 한동네에서 사는 오빠(20세) 였는데 같기 중국에 가자고 졸랐더니... 우리 같이 가기 전에 한 가지 약속 있다고 했다.
중국 갔다가 자기 돌아올 때 같이 와야 한다는 약속이다. 난 그렇게 하기로 하고 2003년 9 21~28까지 중국 00교회 전도사님 집에 머물다 두만강을 건너 집으로 가는 길엔 큰 장애물도 많았다. 두만강 물살은 거세기만 했고 난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으려고 온갖 힘을 다해 물을 건너야 했다. 드디어 강을 건너고 북쪽 두만강뚝을 넘으려하는데 국경경비대 한명이 전지불 비추며 우리 쪽으로 거침없이 오고 있었다. 난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풀숲에 주저 앉아 군대가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다. 올 것이 왔다.
“여기서 뭐해? 일어나 같이 가자!”
난 울면서 “한번 만 봐주세요.”라고 말하는데 옆에 있던 오빠가 담배 한 막대 꺼내면서...
“00이 아버지...” 를 불렀다.
뜬금없이 부르는 소리에 놀라기는 했지만...... 군대의 행동이 달라졌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었고 우린 훈춘에서 오늘 길이라 했더니 군대는 얼굴을 가리면서 길을 안내해 주었다.
무사히 두만강 뚝을 벗어나 논밭 쪽으로 길을 찾아 집으로 갔다. 큰 도로로 다니면 사람들의 눈에 띄면 보위에 잡혀가기 때문이다.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땐 새벽 3시20분이였다. 그때 집에 들어가면 중국에 갔다 왔다고 의심 받을 테고 옆집에서도 보위부에 신고 할 것이다. 난 일 주일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숨기기 위해 온갖 거짓말을 다했다. 심지어 할머니한테까지......
날이 밝기 전에 00오빠의 집에 짐을 맡겨두고 곧장 역으로 가 기차 시간을 알아보고 기차오기를 기다렸다. 3일에 한번씩 다니는 차인데 때를 맞춰 아침 10시에 들어오는 것이다. 난 기회다 싶어 10시에 들어오는 차를 기다렸다가 한 정거장 가서 내려 슬렁슬렁 걸어 집에 갔다. 집으로 가는 중 담당보안원(경찰)이 “너 어디 갔다 오는거야?”라고 말했다.
“저요 고모 집에 갔다가 지금 오는 길이예요”라고 말했다. 별다른 의심은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집은 다르다. 우선 나한테서 냄새부터 날것이다. 중국냄새 (향비누)가 문제였다. 다른 방법이 없이 그냥 집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 집엔 동생 혼자였는데 이미 중국에 떠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식구들이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집안 청소를 했다.
이번일은 이렇게 조용히 넘어갔다. 하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중국에서 며칠 지내던 생각이 나고 집안 돌아가는걸 보니 나한테만 의지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큰아버지 문제 때문에 할머니하고 얘기하면 큰아버지를 나가서 살라고 하지 말고 너희가 나가 살라고 하지 그렇다고 언제까지 온 가족이 힘들게 살순 없었다.
난 다시 중국 가기로 결심하고 기회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국경을 넘는 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두만강을 건너다 목숨을 잃는 사람도 수없이 많았고 가는 길에 잡혀 모진 매를 맞으며 감옥생활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집 바로 옆에 깡판(감옥에 가지 않고 6개월~1년을 보위부에서 주는 처벌 )이 있어 모든 걸 잘 알기에 두려움은 두 배로 컸다. 하지만 두려움 보다 빨리 중국에 가야 살수 있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넌 여기서 빨리 떠나야 돼?)
누가 내 등을 떠미는 것 같이 중국의 대한 환상이 생겼다. 며칠 뒤 친구가 자기랑 중국 안 가겠냐고 물었다 누구랑 같이 가는지부터 묻자 한 동네 사는 00언니랑 같이 간다고 했다. 나도 때마침 갈려고 마음먹고 있던 차라 가겠다는 답을 줬다. 그때 4.25명절이 있어서 국경경비가 심했다.(함북도 훈륭)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두만강과 거리가 가까워 강을 건너기에는 안성맞춤이이였다.
난 친구랑 같이 가기에 마음 놓고 수가 있었다. 왜냐면 떠날 때 중국 가서는 연선비만 주면 중국 넘어가서는 자기 갈 길을 갈수 있다고 했기에 ...철석같이 믿고 떠났다.
2004. 4.26밤에 훈륭에 있는 한 농사꾼의 집에서 이틀 동안밖에 나오지도 못하고 방에 숨어 있었다. 4.29새벽 집 주인이 우릴 깨우며 지금 두만강 건너야 돼니 빨리 차비하라고 했다. 경비대 군대를 따라 강으로 나가니 중국 쪽에서 사람이 우리를 향해 헤엄쳐 오고 있었다.
우린 그 사람이 가져 온 자동차 즘(자동차 타이어 속에 있는) 을 타고 무사히 중국을 땅 밟았다. 우리 셋을 데리러 나온 중국사람 두명이 데리고 가는대로 따라갔다. 한참 차로 간 곳은 훈춘 어느 아파트였는데 그 집엔 우리뿐이 아니었고 북에서 온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가볍게 몸을 씻고 방에 들어갔는데. 집 주인이 한 명씩 자기 방에 부르는 것이다.
친구가 먼저 불러서 들어갔는데 이상한 행동을 하기에 화를 내며 나왔고, 두 번째 날 또 불렀다. 난 심장을 조이며 들어가 보니 50대 되는 아저씨가 침대위에 앉아있었다. 아저씨는 자기 옆에 앉아라며 내 손을 잡아끌었고 난 소리치며 앉지 않겠다하자 음성은 더 커졌다.
목소리가 커지니까 아저씨는 빨리 나가라고 소리쳤다. 난 황급히 나와 00언니랑 친구가 있는 방에 들어가 쉼 호흡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이였다. 아저씨는 화난 얼굴로 날 쏘아보더니 “저녁에 사람이 오니 넌 그 사람들과 같이 가면 돼”라고 말했다. 난 왜 그 사람들과 같이 가냐고 물었더니 몰라서 묻냐고 하며 버럭 화를 냈다.
친구랑 00언니는 낼 심양에 간다고 얘기 해주고 옷이랑 신발도 가져다주었지만, 나한텐 옷 하나 주질 않았다. 낮에 집 주인이 나가고 점심을 먹는데 이미 북에서 와 있던 사람한테 핸드폰이 있는걸 보고 조용히 물었다.
“핸드폰 한번만 쓰게 해주세요. 여기 삼촌이 있는데 연락 할려구요. 집 주인이 우릴 팔려구 하는 것 같아서 그래요.” 라고 했더니 핸드폰 번호 불러보라고 해서 훈춘에 있는 00교회 전도사님한테 전화를 했다. 전도사님은 지금 어디냐고 물었고 난 자세한 내용을 얘기 해주었다. 저녁에 집 주인이 들어왔는데 한참 뒤 전도사님한테서 전화가 왔다
“거기 내 조카 있다고 들었는데, 데리러 갈테니 보내세요”
집 주인은 당황해하며 장소를 약속했다. 전화로 어떤 얘기가 있어고 거래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난 그날 저녁 그 집에서 나왔고 00언니랑 친구는 그 후 로 어떻게 됐는지 모른다.지금도 그때 일들이 꿈에서 날 괴롭힌다. 난 현재 한국에서 살지만 형제와 헤어져 살고 늘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나 같은 이산가족이 더 이상 생기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
<출처: pscore 인권.통일/ 김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