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경 선생님의 옛날 글입니다.
한국의 제도권 교육의 상황이 너무나 열악하기 때문에 많은 부모님들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 새로운 학교형태를 찾고 있다. 그런 와중에 발도르프 학교도 하나의 대안학교로 한국에 소개가 되고, 발도르프 교육에 대한 관심도 상당히 높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발도르프 학교가 정말 우리 부모님들이 원하는 그런 대안학교인지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물론 개개인의 상황과 조건이라는 것을 자세히 들어 봐야 할 일이지만, 그럴 수가 없기 때문에 이 글이 본인이 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하며, 그래서 여기에 설명하는 것에서 거리가 먼 경우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한국의 교육은 두 번 볼 필요 없이, 의심의 여지가 없이 대학입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아이의 소질, 즉 그 아이가 지적능력을 지녔는지, 사회적 능력을 지녔는지, 장인적 손재주를 지녔는지는 부모, 특히 어머니라면 7세 이전에 이미 알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소질에 따른 교육을 하기 보다는 우선 무조건 대학에 가야한다는 것이 사회의 맹목적인 시각이다. 즉 아이가 중심에 서지 않고 사회시각이 전면에 부각된다. 그러니 초등학교의 수업내용 역시 그런 방향으로만 정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대학의 결정이 중학교에서(!!) 결정되었는데, 요즈음은 초등학교 5학년(!!!!!)에서 결정된다는 뉴스를 읽은 적이 있을 정도이니....
한국처럼 그렇게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독일 역시 공립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아비투어를 위해서 과외수업을 받기 마련이다. 대학졸업 후에 일자리가 없어서 몇 년 씩 실습생으로 일을 해도 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은연중에 저변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독일에 존재하는 많은 대안학교들, 특히 잘 알려진 몬테소리 학교 같은 경우도 잘 들어 보면 마지막으로는 항상, "그렇게 하면 아이가 나중에 수학을 잘 하게 됩니다. 저희 학교에서는 아비투어(대학입학 자격시험) 합격률이 대단히 높습니다."라는 문장을 듣게 된다. 이는 말하자면 수업방법만 달리 할 뿐, 그 배후의 근본정신에서 보아 교육의 목표를 역시 지식축적에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발도르프 학교의 경우에 중등과정의 아이들은 학교의 고학년 학생에게 저렴한 가격을 주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과외수업을 받기도 한다. 초등과정, 즉 8학년까지의 아이들이 수학이나 영어 과외 수업을 받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한 반에서 유난히 지적인 배움에 뒤떨어지는 아이의 경우에는 담임교사가 이미 그 아이를 위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보충수업을 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며, 아이의 발달상황을 보아서 치유오이리트미나 다른 치료를 받도록 사전강구가 되기 때문이다. 내 딸애 한나는 3학년에서 산수가 유난히 떨어져서 몇몇 다른 아이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학교에 남아서 보충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 담임선생님의 말로는 한나가 산수에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닌데 잘하고 싶은 욕심이 나서 그런 것이라며 보충수업에 참가하도록 배려를 해 주었다. 그런데 그 보충수업의 내용이 정말 산수를 못하는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보니 한나에게는 너무 쉬워서 곧 자기는 산수를 잘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지고 보충수업에 더 이상 가지 않았던 적이 있다.
최초의 발도르프 학교 설립을 앞두고 슈타이너는 1919년 8월 24일 그 학교의 교사가 될 사람들 앞에서 행한 강의의 첫 부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낡은 학교 제도에서는 모든 것이 나쁘다고 믿는다면, 사실 발도르프 학교의 설립을 오해하게 됩니다. 발도르프 학교 설립의 출발점이 낡은 학교 제도의 비평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믿으셔서는 안 됩니다. 사실은 더 많은, 완전히 다른 어떤 것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발도르프 학교와 그 정신, 전집 297. 최혜경 역, 2006년 밝은 누리사>
이 책에서 슈타이너는 발도르프 교육을 이 시대, 즉 후기 아틀란티스 제 5문화기, 의식영혼시대의 초반부를 위한 교육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500년 후에는 다시금 다른 식의 교육문화가 생성되어야 한다고 했다. 15세기 초반에 시작된 의식영혼시대가 이미 500여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아직 제 4문화기의 여파에 시달리고 있으며, 가장 극단적으로 그 여파가 드러나는 곳이 바로 교육제도인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발도르프 학교는 기존 학교제도가 추구하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아이에게 전달하는" 그런 대안학교가 절대로 아니다. 즉 과거에 근거를 둔 학교가 아니며, 미래를 형성하는 학교라는 깊은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면, 사실 "불가피하게" 발도르프 교육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발도르프 교육을 오용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식축적은 사실 깊은 배움을 위한 전단계라고 볼 수 있다. 깊은 사고를 위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은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러나 그 지식을 모으기 위한 교육이 교육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며, 지식주입이 수업의 주된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
그럼 도대체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아니, 사실은 질문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칩니까?"
어린이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한다면,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보다 훨씬 더 똑똑해야만 한다는 전제조건이 생긴다. 그러다 보니 학교의 교사가 시원찮아서 학원에 가서 그 "무엇을" 더 배워 보려는 과외수업이라는 것이 성행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을 자세히 드려다 보면, 신세대가 구세대 보다는 항상 더 똑똑하기 마련이다. 정신과학적으로 보아 인간의 신체가 인류존재의 전체과거의 집적체라고 본다면, 구세대 보다 좀 더 긴 과거를 지닌 신세대가 더 똑똑치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덜 똑똑한 구세대가 더 똑똑한 신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가?
아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아무것도" 가르칠 수가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슈타이너는 이런 문장으로 아는 것이 없는 우리를 위로하고 있다.
"...머슴뿐만 아니라 자명종 역시, 자신보다 훨씬 더 똑똑한 사람을 깨우도록 준비시킬 수 있는 것처럼, 재능이 거의 없는 사람, 심지어는 별로 훌륭하지 않은 사람도 자신보다 더 나은 소질을 지닌 사람을 교육할 수 있습니다."
<일반 인간학, 최혜경 역, 2008 7월, 밝은 누리사 출간예정>
못난 구세대도 더 잘난 신세대를 일단 교육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을" 가르쳐서가 아니라 머슴이나 자명종도 할 수 있는 "깨우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어린이의 잠자고 있는 머리를 깨우는 것이 초, 중등과정의 교사의 의무라고 했다. 그런데 잠자고 있는 녀석을 일어나라고 걷어차면 정말 기분이 나빠져서 으르렁거리기 마련이다. 초, 중등과정에 이르기까지 지나치게 지식을 머릿속에 넣어주는 교육은, 바로 잠자는 녀석을 발로 걷어차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그런 수업을 받는 아이들이 기분이 나빠서 으르렁 거리면서 분주하게 날뛰고, 그런 모양새를 ADHS라는 병명을 붙이고 약물투여로 고요히 진정시켜 보려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현상이 아닌가?
그러면 잠자는 아이의 머리를 어떻게 깨워야 하는가? 의지기관과 정서기관을 이용해서, 즉 완전히 깨어있는 사지체계와 꿈꾸고 있는 가슴체계를 이용해서 간접적으로 살포시 깨워야하는 것이다. 그리고 발도르프 교육의 초등과정 방법론이 모두 잠자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어떻게" 깨울 수 있느냐는 것과 관계한다. (방법론은 세미나에 오시면 배우게 됩니다. ^^ )
발도르프 학교에 아이를 보내려면 우선은 아이를 왜 교육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양파 껍질을 모두 벗겨 내고 자신의 속을 드려다 보니 "내 아이는 그래도 나중에 대학을 꼭 가야 해!"라는 의도가 있다면,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내 아이가 나중에 남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는, 그 직업이 무엇이든지 간에, 연봉이 얼마가 되든 간에, 사회에 헌신하는 그런 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근본 생각이 없으면, "불가피하게 발도르프 교육을 오해하는 것이다."
일반인간학의 마지막을 슈타이너는 다음의 시구절로 마무리하고 있다.
"상상력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라,
진실에 대한 용기를 지니라,
영적인 책임감을 예리하게 가꾸라."
이 구절들의 깊이를 '이빨이 부러질 정도로' 잘근 잘근 씹으면서 되새겨 보면, 대학입시가 교육의 목표가 되어서도, 지식주입에서 수업이 소진되어서도 절대로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