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타이너의 사회적 삼지성에 따르면 경제생활에는 상품생산, 상품순환, 상품소비만 속한다.
상품의 생산, 순환, 소비에 속하지 않는 것은 결코 돈으로 환산해서 지불할 수도 없고,
또한 ‘소유’의 대상물도 되지 않는다.
경제생활에 ‘직접적으로’ 속하지 않게 때문에 역시 ‘직접적으로' 환산해서
지불할 수 없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인간, 인간의 노동력이다.
자유 시장경제 체제에서 나오는 개념에 의해서 사고방식이 완전히 점유된 오늘날의 사람들은
노동력이 지불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면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묻는다.
‘노동과 그 대가’, 이 양자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는 한
그 사회는 결코 ‘진정한 인간’의 존엄에 걸 맞는 상황을 제공할 수 없다.
여기서 다시금 그 ‘진정한 인간’이 무엇인지를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상황은 항상 필연성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에
진정한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이 들어 있었다.
15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의식영혼의 시대’에 진정한 인간은 실로 정신적인 자아, 나, Ich다.
슈타이너는 인간존재를 7 구성체로 나누면서 의식영혼과 정신자아를 하나로 묶는다.
정신자아란 자신의 자아를 정신적인 것으로 보는 존재를 의미한다.
의식영혼과 정신자아가 특정한 의미에서 하나라는 시각은,
오늘날의 인간이 이미 자신의 자아, 즉 자신의 본질을 정신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의 정신적인 자아, 나, Ich가 감각적 세계에서 살기 위한 껍데기로 걸치는
신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내부에서 좀 더 그 빛을 발하도록 하는 것이
의식영혼시대를 사는 인간의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삶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의 시간이 인간의 껍데기를 보살피는데 소비된다.
‘밥벌이’의 범위를 보면 그것이 결코 문자 그대로의 ‘밥’벌이에 머물지 않는다.
그 ‘밥’이, 인간의 껍데기에 해당하는 세 가지 몸(신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에
될 수 있으면 많은 편안함과 안락함을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까지 확장된다:
좋은 집, 큰 자동차, 비싼 옷, 맛난 음식, 휴가, 스트레스 해소법으로서의 ‘뉴 에이지-명상-요가-종교-단식-다이어트-기도’.
그 모든 것을 재정적으로 꾸려나갈 수 있기 위해서 열심히 자신의 노동력과 시간을 파는 것, 그것이 현대인의 초상화다.
바로 노동이 지불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또한 직업의 귀천에 대한 편견이 생긴다.
많은 대가를 받는 직업은 추구할 가치가 있는 좋은 것이고, 그 댓가가 적을수록 비천한 일이 된다.
그러니 ‘누가 요즘에 청소일을 하려고 해?’라는 질문을,
인간의 기본 생활이 국가/권리생활에 의해서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하면
즉각적으로 누군가가 뱉어내기 마련이다.
‘누가 요즘 청소일을 하려고 해?’
라는 질문 속에 현대인의 영혼상태를 보여주는 너무나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1. 청소일로는 형편없이 적은 돈을 받는다.
2. 청소일은 더런 일이다.
3. 청소일을 하기에 나는 너무 똑똑하다.
4. 더 나아가서 청소일은 못 배운, 나보다 못한 사람이 하는 일이다.
5. 그런 일을 내 자식은 해서는 안 된다.
6. 내 자식이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시켜야 한다.
7. 그러다 보니 인간 생활을 위해서 필수적인 육체적인 일, 장인의 일이 사라진다.
8. 9. 10... 끝 없이 나열할 수 있다.
‘댓가가 높은, 잘 버는, 고상한 직업’을 가지기 위해서 너도나도 공부를 엄청나게 하고 학력 인플레가 심해진다.
그러다 보니 그로테스크하게도 ‘구청 청소부 모집’에 박사들도 지원한다고....
이는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도 대학출신이- 독일의 대학출신은 한국에서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다른 격을 지닌다.-
오랫동안 무직자로 실업급여를 받으면 언젠가는 노동성으로부터
그 사람의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예를 들어서 슈퍼에서 돈 계산하는 일.
인간의 노동과 그 대가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그 대가의 양에 따라 그 노동의 가치가 결정 나기 마련이다.
또한 노동이 오늘날 사고파는 상품의 성격을 띠기 때문에,
노동자가 자신이 하는 일과 내적으로 전혀 일치감을 느낄 수 없다.
자기가 원해서,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몸과 마음을 바쳐서 즐겁게 할 것이다.
‘밥벌이’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과는 그 누구도 내적으로 연결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대충 눈치보고 시간 때우기 마련이고,
일의 성과를 위해서 상사가 고압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성과급, 즉 보너스를 지급해야만 한다.
즉 일을 위한 자극이 내면이 아니라 항상 외부에 있고,
인간이 스스로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항상 외부의 권위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만약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이 하도 ‘더러워서’ 때려치우고,
'더런' 청소일을 하러 가야하는 처지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