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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교단일기

3월에 있었던 일

작성자다인|작성시간23.05.12|조회수223 목록 댓글 5
햇님이 환하게 빛나며 내 하루를 열어줍니다 - 저학년 아침시


여느 아이들처럼 입학 후 1학년들도 칠판그림에 대한 관심이 컸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그 열망이 바로 행동(!)으로 이어지곤 했는데,
나에게 많은 것들을 숙고해보게되는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한 아이가 청소시간에 빗자루로 칠판그림을 쓸어버렸다. (그 아이 뿐만 아니라 몇 아이들도 분필로 그리고 지우개로 지우며 칠판에 많은 관심을 표현해왔다ㅎ)
칠판은 선생님의 공간이고, 그러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음에도 다른 날 다시 빗자루로 그림을 지워버리자 나는 지워진 채로 그냥 두기로 했다.

아이들은 지워진 곳을 보며 언제 다시 그리냐고 물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림이 이제 떠나버렸다고 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동안은 그대로 둘 작정이었다. (사실 이때부터 화가 점차 돋기 시작했다ㅎ)

그러던 일요일, 수업준비를 하러 학교에 왔다가 깜짝 놀랐다.
전날 부모님들이 학교에서 작업하실 때 따라왔던 다른 아이가 칠판그림에 자기 나름대로 수정을 해놓은 것이었다.
이것을 보자마자 나는 매우 화가 났다.

아이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칠판 공간에 선생님이 없을 때 손을 댄 것과, 자기가 그림을 고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덧칠을 한 그 맹랑함(!)이 나를 제대로 도발시켰다.
게다가 1학년 답지않게 얼추 비슷하게 그려 놓기도 했다. 참나.

왜 그렇게 내가 흥분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전직 미술학도로써 나에게는 누군가 정성으로 그린 그림을 마음대로 수정한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인 듯하다ㅎㅎ

화난 감정을 추스리고 정신을 차리고 교육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고민하다가 문득 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스페인의 한 성당에서 예수 벽화를 어떤 할머니가 복원하려 했는데 완전히 그림을 망쳐버렸던 실제 사건이었다.

이 일을 각색하여 '이 원숭이를 보라'라는 이야기로 다음날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는데,
예상밖에도(?) 아이들이(심지어 덧칠을 한 아이까지도) 그 이야기를 정말 좋아했다.
할머니의 행동을 이후에 다른 일에서 언급하기도 하고 예수님 그림이 원숭이 그림으로 바뀐 순간을 말하며 키득키득 거리기도 했다.
여러번 이야기 앵콜요청이 있어서 최근에 다시 들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는 들려주지 않은 이 스페인 벽화 복원 사건의 뒷 이야기도 있다.

이 사건이 세간의 유명세를 타고 결국 그 그림 덕분에 침체되었던 지역과 성당이 유명 관광지가 되어 많은 수익을 벌게되었다는 것이다.
할머니를 소송했던 관계자들도 돈을 벌게되자 태세가 돌변했다는 것.

대중에게 최악의 복원으로 조롱 받다가 다시 지역경제의 영웅(?)이 되리라고 그 할머니는 예측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할머니는 선의의 마음으로 그 일을 시작했겠지만,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한 것은 분명한 듯 하다.

이 사건 뿐만 아니라 스페인에는 이와 비슷한, 아마추어 복원가들이 엉뚱하게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것은 또 스페인 정부의 정책과도 연관되어 있는 듯하다.


한 사건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인지, 그것에 어떤 평가가 내려질 것인지는 정말 예측할 수가 없다.
그러나 대중의 평가는 유행 같은 것이 아닐까.
결국 각자가 그것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가 중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어떤 것을 진실로 배우고 삶으로 가져가야 할까.

우리 반의 칠판그림 사건(?)에서 나는 어떤 것들을 배움으로 가져가고 아이들에게 가르칠 것인가

깊이 숙고해보게 됩니다.


<관련 글>
https://m.blog.naver.com/allthat_art/22105079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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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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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장승규 | 작성시간 23.05.12 시간이 지나면 다 지워져 사라질 것들이
    우리를 키우기 위해 큰 역할을 했네요.
    작년 우리 반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전 1학년 아이들이 멋져 보이는 걸요? 사랑하는 선생님을 위해 멋진 복원작업까지 하다니... 것도 비슷하게^^

    다들 한 뼘씩 컸겠네요.. 아이들도, 선생님도.

    덕분에 우리도!
  • 답댓글 작성자다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5.12 네, 이 일에서의 진실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다시 마음 속에 받아들여 봅니다.^^
    (비록 저는 매우 화가났지만요 ㅎㅎ)
    미숙한 방식은 앞으로 차차 알려주면 될 일이겠지요.^^
  • 작성자진선희(유단엄마) | 작성시간 23.05.12 스페인 할머니의 행동이 예수의 벽화가 망가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연민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 무엇이고 자신의 힘에 겹고 정도에 넘치는 일을 행하지않도록 해야 한다는 8정도 목요일 말씀이 떠오르네요. 돈이 벌리니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한 부끄러움이나 뉘우침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선생님의 전공 미술에서 이야기를 끌어와 선생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시는 지혜.
    박수를 보냅니다.^^
  • 답댓글 작성자다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05.12 스페인 벽화 복원 해프닝은 참 여러 각도에서 곱씹어보게 만드는 사건인 것 같습니다.^^
    8정도 말씀으로 연결해주시니 또 새롭네요.
  • 작성자정효(해운솔) | 작성시간 23.05.16 아… 깨달음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글로 읽을 수 있게 해 주셔서 더욱 감사드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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