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예를 배우는 아이들>
나중에 치러야 할 대가
요즘 무예를 배우는 아이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헐렁하고 하얀 옷을 입은 아이들이 지역의 레크레이션 센터나 체육관에 가서 한 두 시간 동안 수업을 받는다. 이것은 부모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정서적인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다. 그 폭탄은 청소년기에 폭발할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지속될 후유증을 지니게 될 것이다.
무예는 오래전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무예들은 깊은 비의적인 종교적인 수련들로부터 발달해 왔으며 엄격하고 반복적인 명상, 영성 시, 자아-부정, 금식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은 “마스터”나 자신의 전 존재를 영적인 길에 바친 “수도승”에 의해 감독 되었다. 이런 수련은 수도원에서 비의적인 의식으로 행해졌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한 수련에는 세 가지 핵심적인 측면이 들어 있다.
첫 번째로 학생들은 비밀스럽고 영적인 수련을 통하여 자아개발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로 그들의 목표는 몸 안에 흐르는 에너지와 영적인 차원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세 번째 그 학생은 젊은 성인이었다.
이와는 반대되는 상황이 오늘 날 벌어지고 있다. 아이들은 폭력, 특히 음악과 미디어를 통해 증가되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그리고 핵가족화가 되어가면서 공동체의 구조가 점점 깨져가고 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의 안전을 두려워 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을 키우는데 필요한 안전과 구조를 자신이 제공할 수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무예를 배우러 가게 되고 그런 모습이 ‘꽤 멋져 보인다’고 말한다. 아이는 무예활동에 대해 열광적이지만 반면에 다른 일들은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부모들은 무예를 배우는 것이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할 일 없이 지내는 것 보다 훨씬 낫다고 여긴다. 그래서 아이들이 무예수업을 받도록 허락한다. 부모들은 그러한 훈련이 아이에게 좋은 도움이 될 거라고 여긴다.
하지만 현대의 무예 수업이 어떻게 진행 되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현재 호신술이라고 불리는 무예는 그 자체가 가진 본래의 영감을 주는 목적과 다르며 문화적이고 정신적인 것과는 별개인 것 같다. 무예에 대해서 듣기 좋은 소리를 많이 하지만 현재의 무예 수업은 그 옛날의 본래의 무예모습의 그림자보다도 못하다.
현재 무술은 취미와 스포츠가 되었다. 무예는 또 다른 면에서 인간 존재를 망가뜨리고 있는 것 같다. 무예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이 공부뿐만 아니라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되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무예는 즉석식품처럼 현대인들의 즉각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소비의식의 하나로 도입된 것뿐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것을 샀기 때문에 언젠가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과거 무예수련관에서는 청소년기의 학생들을 무예수업에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다른 수련관에서는 아이들이 십대를 지난 후에야 허락되었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과거에는 학생들을 십대 후반이나 이십대 초반이 되어서야 비로소 무술 형태의 수업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마스터들은 청소년들의 자아가 충분히 키워진 성인이 되기까지 기다렸다. 젊은 성인들은 자신들이 배운 특별한 에너지와 힘을 조절하고 이해할 능력과 자질을 바로 그 때 가지게 된다. 그러한 힘을 다룰 만큼 성숙하지 못한 어린이가 무술의 힘으로 무장하게 만드는 것은 현대 무술의 가장 위험한 측면일 것이다.
언젠가 나는 거리에서 어린 남자아이가 자신보다 나이가 많고 덩치가 큰 아이를 심하게 구타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어린 남자 아이는 자신 안에서 끓어오르는 폭력성을 조절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맞은 아이는 심하게 무릎을 다쳤을 뿐 아니라 턱과 코도 깨졌다. 나중에 그 어린 아이와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4년 동안 무예 수업을 받고 있고 작년에는 열심히 연습해서 시합에서도 좋은 성적을 냈다고 했다. 내가 그 아이에게 지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자 그 아이는 자신에게 맞은 그 형이 자신의 친구 중 한 명을 괴롭혔고 그래서 친구들이 그 형을 ‘정리 해 주기’를 요청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아이는 싸움에서 졌다고 시인했다.
그 의미는 자신을 조절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풀이 죽어서 맞은 아이에게 정말 미안하고 그렇게 심하게 다치게 하 생각은 없었다고 말했다. 계속되는 대화 속에서 그 아이는 비록 친구들 사이에서 영웅이 되었겠지만 스스로는 상당히 움츠러들고 심지어 두려움이 생긴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내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또다시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두렵다고 대답했다. 그 아이는 싸움에서 그 형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일화는 물론, 아이들이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능력을 갖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극단적인 예를 든 것이다.
또한 좀 다른 경우에서도 무술을 배우는 아이들은 친구들로부터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된다. 그 아이들은 다루기 힘들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인물로 보여 진다. 비록 그 아이가 실제로는 대단한 것이 없지만 그가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공격적인 자세를 보이기 때문에 나머지 친구들은 그 아이가 원하는 데로 따라가게 된다. 어느 누구도 아이들의 세계에서 폭력적인 위협을 통해 대장이 되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은 무예를 하고 있는 아이에게 -폭력집단에서 하는 것처럼-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를 대신 혼내줄 것을 부추길 수 있다.
무예를 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위의 경우처럼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아이가 자기방어를 배울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자녀를 무술 수업에 등록시키는 부모들은 이 같은 ‘승자 없는 상황“에 일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과대평가함으로 문제 상황에 끼어든다. 자신을 적절히 방어할 수 있을 때까지 도달하는 것은 집중적으로 수련하여 상당히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단계에 도달하기 전에는 앞서 서술한 싸움의 시나리오와 같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게임이나 스포츠 활동이 아이의 육체적인 면과 내적인 성장의 핵심역할을 하고 있음을 설명해 왔다. 일반적으로 움직임은 사회적 감성적 발달을 도모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이제 무술적인 움직임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는 몸의 위치를 생각해 보라. 무릎은 구부려지고 몸무게의 중심은 아래로 내려간다. 무술과 관련된 모든 움직임들처럼 이러한 움직임도 계속 훈련되고 반복된다. 무게와 무게중심이 계속해서 한 쪽으로만 쏠리게 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해온 것처럼 아이들이 균형 잡힌 교육을 받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아이들의 삶에서 무게중심 외에도 공간에서의 다섯 가지 방향으로 동일하게 개발되어야 하는데 무예는 이것을 하지 못한다. 즉 무예에서는 가벼움( 무게중심과 반대의미), 뒤 공간, 앞 공간, 옆 공간(좌, 우), 을 축소하거나 잘 못 사용하고 있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자면 무예의 서 있는 자세는 아이들이 서는 자연스런 자세가 아니다. 무예는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런닝, 점핑, 스킵핑등과 같이 가볍게 움직이는 활동들과는 반대로만 움직이게 한다. 균형을 이루어 주는 움직임 없이 단지 무게중심만을 계속해서 경험하는 ‘아래로만 쏠린 움직임’은 이 시기의 어린이의 발달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많은 무예형태에서 특별히 어렵다고 알려진 동작들은 손과 발이 마치 단단한 방망이처럼 치거나 차는데 사용되고, 또는 날카로운 칼처럼 두드리거나 내리치는 도구가 된다.
말 할 것도 없이 섬세하게 발달한 우리 몸의 일부를 이런 식으로 다루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손과 발을 반복적으로 다루게 된다면 우리의 삶에서 필요한 섬세함과 부드러운 태도도 키워지지 않게 된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가장 훌륭한 외적 표현도구인 목소리는, 무예에서는 울부짖는데 사용된다.
이런 무예의 모든 움직임은 학생들의 육체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경직되게 한다. 예를 들면 어떤 무예에서는 단단한 나무나 돌을 차거나 치고 또는 이마로 깨는 것을 상당히 높이 평가한다. 더 두껍고 더 강한 재질일수록 더 높은 수준이라 여긴다. 물론 우리같이 훈련받지 않은 일반사람이 시도한다면 심하게 다칠 것이다. 장애물 뛰어넘기에서는 장애물인 물체를 뛰어 넘을 수 있는 강한 에너지가 집중됨으로써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장애물을 뛰어 넘는 의식이 단지 파괴하는 행동으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의식은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개발되어진다. 그리고 목표를 향하는 움직임에 방해하는 물리적인 장애물을 허용하는 것은 ‘당신은 약하다’라고 여기게 된다. 그러나 아직 그러한 힘을 조절할 수 없는 어린이나 청소년에게는 인간관계를 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숙제를 언제까지 해야 한다 거나 밤에 몇 시까지 집에 와야 한다는 말을 들은 것을 예로 들어보자. 하지만 그 시간까지 집에 와 있는 것이 그에게 그의 목표가 아니라면, 그는 자신의 다른 목표에 도달하기위해 부모가 제시한 장애물들을 무시하고 날려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부모님의 제안에 대해 강하게 반항할 것이다. 이것은 지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것은 많은 교사들과 부모에 의해 관찰된 경험에서 나왔다.
무술을 배우는 학생들은, 연습하는 매번 발차기, 던지기, 치기 때마다 상대의 연약하고 예민한 신체부분을 상상할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무릎을 꺾어 버리거나 내장기관을 파열시킬 수도 있는 동작일 수 있다. 그리고 코에 일격을 가해 짓눌러 버리는 동작일 수도 있다. 당연히 실제로 그러한 동작을 하게 되면 사람의 몸을 다치게 한다.
아이는 무예를 연습하는 시간마다 어찌 보면 그러한 그림을 연상하며 하고 있을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아이를 아이답게 두지 않는다. 아이들이 세상에서 상처받은 것처럼 느끼고 세상을 폭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안내자인 우리들은 아동기의 안정감과 아이다움으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아이들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확신을 주어야한다.
출처: 발도르프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움직임 활동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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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고서현엄마 작성시간 22.04.23 선생님, 좋은 글 공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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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리후유나엄마 작성시간 22.04.25 지금에야 읽게 되었습니다. 정신수양과 반복적인 수련동작들로 어린 아이들에게 아이다움과 제대로 된 움직임을 일찍이 어렵게 할 수 있다는 점에 고개가 끄덕여 집니다. 아이가 안전하기를, 즐겁기를, 그리고 인내와 예의를 배우기를 바라는 부모의 선한 마음과 달리, 특히나 이미 스포츠화 되어버린- 정신성이 결여된 현대의 무예활동으로 아이들이 다양한 어려움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을 잘 헤아려야할 것 같아요. 무예활동뿐일까요. 아이들의 일상을 찬찬히 생각해보게됩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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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윤정 경훈경한 작성시간 22.04.25 네^^ 잘 읽었습니다. 아빠와 나눌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