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국내여행사진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작성자설리|작성시간26.06.19|조회수188 목록 댓글 6

 

전날에 장장 열두 시간 지리산 산행을 한 데다가 저녁에는 와인을 마시고는 꽐라 되어 쓰러졌더니 아침에도 개운하지 못한 컨디션으로 일어나 나선 길이었다.

 

섬진강 여행.

집을 나설 때의 설렘은 없고 자꾸만 몸이 까라지는 노곤한 상태였다.

날은 몹시 무더웠다.

 

 

 

길고 긴 겨울이 끝날 무렵이면 늘 가방 메고 떠나게 유혹하는 것.

섬진강의 매화가 보고 싶어. 산수유가 보고 싶어. 은빛 강물에 팔을 박고 재첩을 잡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 아니 다 그만두고 어서 이 지긋지긋한 겨울에서 벗어나 파랗게 물오른 그곳으로 가고 싶어.

 

그해 봄 꽃잎이 비처럼 떨어지는 벚나무 길을, 완성하지 못하고 사라져 간 사람과 처음으로 걸었었다. 사랑은 내게서 멀리 있다. 섬진강이 내게서 멀리 있어 언제나 아련하게 갈망하는 존재인 것처럼.

 

어느 때 그녀가 문자를 보내왔다.

가슴이 미어질 것같이 속상하고 울컥 눈물이 나온다며 섬진강엘 가고 있노라고. 그냥 사는 게 다 그렇지 않을까. 누구는 일상이 행복하고 핑크빛 일색일까. 그렇지만 내가 해준 말은 게서 그냥 펑펑 울라 한 게 고작이었다.

밖에는 가을비가 흩뿌리고 몹시 을씨년스러웠다. 낙엽 지는 깊은 가을이었다. 하동과 섬진강이 너무 맘에 들어 몇 년 후에는 그곳에서 살고 싶다고 그녀가 그런다. 우울과 외로움이 전해져 온다. 아마 계절 탓이리라. 이런 계절에 정신이 온전할 수가 없다. 나도 가을을 탄다. 그것도 무지 심하게.

 

 

 

하동과 섬진강.

어느 때 섬진강을 따라 여행한 적이 있었다. 그때 문득 떠오른 게 윤후명이었다. 늘 그렇듯이 소설 내용은 하나도 기억 안 나지만 뇌리에 박힌 구절이 하나 있었다.

- 외롭게 살고 싶다 -

섬진강가에서 불현듯 떠오른 그 구절. 아 이런 곳에서 평생 고독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그곳이 풍광이 절경이거나 무슨 감흥을 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내 안에 생래 내재하고 있던 것이 아마 그때 분출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언제든 밖으로 나오려고 잔뜩 벼르고 있다가 기회만 되면 슬그머니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고독을 진 운명.

 

그런고로 나도 하동에서 한 해를 산 적이 있었다.

고독하게 살기 위해 처음 한 일이 하동으로 가는 거였다. 그러나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이상과 현실은 괴리가 있다. 동화 속 아름다운 마을이던 그곳도 역시 사람이 산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모자란 사람 교활한 사람. 핸드폰가게가 있고 피시방이 있고 호객하는 택시기사가 있고 조금이라도 전세금을 더 받으려는 집주인이 있고 장날이면 집 뒤란에서 자른 죽순을 가지고 나와 장터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할머니가 있었다. 세상사는 건 다 거기서 거기더라

 

 

 

외롭고 싶다고 외로워지는 건 아니다. 연애해야지 맘먹었다고 금방 애인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세상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맞춰 사는 것이다.

어쨌든 난 평생을 고독하기 위해서 하동과 섬진강을 택했다. 그게 다였다.그리고 나는 고독했다. 섬진강이 아니어도 나는 지금 충분히 외롭고 앞날도 그럴 것이다.

그가 보낸 문자에 그래서 이 사람도 나처럼 외롭고 싶은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아니면 지금 현재 너무나 외롭고 힘들지도 모른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칠 일이 아니다. 망망대해 조각배처럼 그냥 파고에 얹혀 있으면 그만이다. 설사 물결 속에 휩쓸려 들어가 버린대도 그것 또한 삶의 일부이다. 조각배 위에서 살아나려고 버둥거린들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 아니겠는가.

 

 

 

한번 간 사랑은 그것으로 완성된 것이다. 애틋함이나 그리움은 저 세상에 가는 날까지 가슴에 묻어두어야 한다.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거들랑 그 풍경 속에 설정되어 있는 그 사람의 그림자와 홀로 만나라. 진실로 그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그 풍경 속의 가장 쓸쓸한 곳에 가 있을 필요가 있다.

진실한 사랑을 위해서는 인간은 고독해질 필요가 있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나는 그 포구의 가장 쓸쓸한 내 장소로 간다.

          - 윤후명 <협궤열차에 관한 한 보고서> 중에서-

 

 

 

 

 

다시 오랜만에 섬진강을 걸었다. 지금은 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니고 여름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강, 그 물줄기.

그래도 역시 강산은 변해 주위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찻길이 넓어졌고 강변으로 트레킹길이 나 있다. 그 길을 걸어 이틀간의 여정을 떠난 길이었다.

 

고독도 이골이 나는 건지 이젠 그런 감성조차 모르겠다. 그저 내리쏟는 햇빛이 싫어 자꾸 그늘만 찾게 되는 무덤덤이다. 섬진강 트레킹은 그늘이 많아서 좋다.

 

 

축축이 젖은 모래는 여인네 살갗처럼 부드러웠다. 섬진강의 모래는 순백색이며 가루같이 부드러웠다.

 - 박경리 <토지> 중에서

 

 

 

굽이굽이 푸른 개천이던 강줄기는 하류가 가까워지면서 비로소 대하의 풍모가 느껴진다.

잘도 흘러왔다. 한 해 두 해가 쌓여 서른 해 마흔 해의 세월을 겹겹이 살아온 내 인생처럼 강도 참 대견하게 흘러 바다까지 왔다.

강은 저렇듯 위대한 대하가 되었는데 나의 삶은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경박하기 그지없는 초라니가 된듯해 그게 씁쓸할 뿐이다.

 

 

 

 

강을 다시 거슬러 악양을 지나 화개로 올라왔다.

화개장은 김동리의 <역마>에 나오는 예전의 그런 레트로 정경이 아니다. 별로 볼 것도 없네. 몇몇 관광객들의 실망스러워하는 말들이 지나간다.

그래도 어쨌든 유장하게 섬진강이 흐르면서 만들고, 숱한 사연과 이야기를 얽어 놓은 정다운 부락이다.

 

 

강상에는 어김없이 삶을 건져내는 사람들이 있다.

재첩은 오뉴월이 제철이다. 이 뜨거운 햇살을 고스란히 받고 사람들은 오늘도 강물을 헤적이고 있었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내게도 피로가 몰려왔다.

쌍계사 입구 식당에서 재첩국을 먹는다. 손님이 없는 평일이라 일찍 문을 닫으려는 식당을 억지로 붙잡아두고 성가시게 밥을 시켜 먹었다.

 

해가 길어 어두워지려면 아직 멀었는데 화개골은 인적도 없이 진작에 잠들고 있었다.

절 쪽에서 범종 소리가 들려왔다.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정희성

 

 

 

 

 

 

정희성 시 정봉현 노래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숲인애 | 작성시간 26.06.19 new 어릴적 이른아침
    재첩국 사이소~ 재첩국 사이소~
    창밖으로 들려오던
    그 시절에도 애절하게 들리던.
    뽀오얀 재첩국 밥상에 오른 아침밥은 참말로 맛있었어요
  • 작성자아마폴라 | 작성시간 26.06.19 new 섬진강에 가면~
    모두 시인이 되는가 봅니다.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답댓글 작성자아마폴라 | 작성시간 26.06.19 new 섬진강 시인 박용택의 시~~
  • 작성자뱅기 | 작성시간 26.06.19 new 정희성시인의 시를 읽고 뜨거운 피를 느끼던 게 버얼써 반세기가 다
    되었습니다
    저문강에 삽을 씻고 제목을 보고
    들어와 보고 갑니다
  • 작성자아그녜스 | 작성시간 26.06.19 new 진도 가는 버스안에서
    TV에선 축구열기
    긴 후기
    흐뭇하게 끝까지~~
    바다에서 만나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