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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사진

제주 구석구석 골목길 답사 ㅡ(최익현/송시열 /광해군) 유배지

작성자압록강|작성시간26.06.20|조회수15 목록 댓글 0

일제강점기 제주성내 전경

 

제주가 유배지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원나라 때 부터이다

 

고려 삼별초가 진압된 후 도적과 죄인들을 유배보내 올 뿐 아니라 왕족과 관리 승려까지도 

 

유배를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원나라 뒤를 이어 명나라도 원나라를 정벌한 후

 

왕자들을 비롯한 가족들을 유배시켰다 고려말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주로 유배온 유베객은 

 

300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군주였다가 패주로 몰려 귀양온 광해군을 비롯하여 

 

김정 ,송시열, 최익현 ,이승훈 모두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일제강점기 제주성내 전경

 

그러면 그들의 유배생활은 어떠했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비참했을까

 

유배인들은 서로 가까운 데 거처하며 자유롭게 상종하였다. 이들은 밤낮으로 서로 만나 술을 마시고

 

 시도 지으며 섬에 갇힌 적적함을 달랬다. 이들 주위에는 제주도내 여러 유지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각종 술과 음식이 그칠 줄 몰랐고, 기생들도 처소에 자주 출입하였다. 이들은 한결같이

 

제주의 여인들을 첩으로 맞이하여 자식을 낳기도 하였다. <음청사>를 쓴 김윤식은 제주에서의

 

유배생활이 '번화한 서울의 재미와 다를 게 없어 유배인이라는 신분을 돌아볼 때 너무 분에 넘친다'

 

고 할 정도였다

제주인은 원주민인 고·양·부 3성(姓)을 제외하면 대부분 유배인의 자손이거나 육지에서 유입된

 

사람들이다. 그런데 출륙금지령(1629년)이 내려지고 100년 넘게 섬에 갇혀 있었던 제주인들

 

모두가 사실은 유배인이었다

이형상 제주목사『탐라순력도』ㅡ화북성조(禾北城操)

제주도의 화북진성ㅡ 군대의 방어태세를 점검하는 모습

화북포구

 

그러면 그들은 제주  어디로 입도했을까?

 

로 이곳 ㅡ제주의 2대 관문인 화북포구와 조천포구이다

 

화북포구는 전남 강진과 영암, 해남 등과 제주를 잇는 중요한 관문이기도 했다.

 

화북포구가 유배인을 제주목에 인계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하기 때문에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면암 최익현 등 유배인들도 이 포구로 들어왔다  송시열은 화북포구에  도착하여 

 

제주시 동쪽 10Km에 위치한 목관아까지 압송되어  입도 신고를 하고 제주 목관아에서 가까운

 

제주시 칠성동으로 유배를 갔다면 추사 김정희는 목관아에서 입도신고 받고 100리나 떨어진

 

대정현까지 산길을 걸어가야 했다

화북포구

제주성 동문 터

 

일제강점기 1910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읍성 훼철령에 따라 철거돼 대부분 제 모습을 잃었다

 

일제는 읍성을 한민족의 단합된 힘과 항전의 상징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가 만든 제주성

 

지적도에는 성안에는 동서를 가로 지르는 넓은 도로가 있었고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는

 

21개의 치성이 표시됐다 또한 현재 우석목2로 길의 모양으로 옹성 터를 확인할 수 있

동문이 있었던 터인 연상루지(延祥樓址)

 

명종 1566년 곽흘 목사가 동성을 확장하면서 창건하였다

 

성밖 동쪽에서 제주읍내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동문을 거쳐야 했다

 

제주에 살던 백성은 물론 화북포구와 조천포구에 내린 수많은 관리들과 유배객들은

 

동문으로 이어진 유일한 통로였던 이 좁은 길을 들어오고 나갔을 것입니다

1914년 제주성 동문 밖에 서 있었던 돌하르방

 

동문의 성문인 연상루 입구에는 돌하루방 8기와 목사들의 선정비 10여 기가 서 있었다

관덕정

이익 적거터

.

간옹 이익의 유배지는 제주목 관아 담벼락, 무근성(옛날 성)으로 들어가는 골목어귀에 있다

 

임진왜란 와중에 세자로 책봉돼 왕좌에 오른 광해군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증살(뜨거운 증기로 쪄서 죽임)하고, 영창대군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비한 것을 상소를 올려   

 

간하였다가 광해군의 미움을 사 1618년 제주목으로 유배되었다

동양여관은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에 와서 묵었던 역사적인 여관이다

 

제주 최초의 근대식 호텔로 유명했다고 한다

일제가 허물기 전 서문인 ㅡ진서루 모습.

서문터 표지석이 위치한 여인궁

탐라시대 고성터

 

'탐라지' 등 옛 기록에 '주성 서북쪽에 옛 성터가 남아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는 조선시대 이전의

 

성터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성은 대체로 병문천 동안에서부터 산지천 서안에 걸쳐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일대를 '묵은성'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성터에서 유래한 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무근성

 

탐라국 시절의 성터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 들어와 제주가 팽창하면서 제주성을 더 바같쪽에사 축조하면서 탐라국 성터는 성 안쪽으로

 

편입되어 <무근성>이 된 것이다 .무근성. 본래는 '묵은성(陳城)'이었다고 했다  소리나는 대로

 

적다보니  명칭이  지금처럼 굳어졌다는 말이다조선시대 이전 성터있던 '묵은성'에서 마을 이름

 

 유래되었다

탐라시대 고성터'

 

제주 4·3 이후 무근성 북쪽 빈터에 제주 서쪽마을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동네를 이뤘는데 

 

한국전쟁기에도 피난민들이 이곳에 찾아들었다. 마을 노인들은 무근성 경로당 동북쪽에 있는

 

 공업사 자리에 피난민 천막이 즐비했다. 강만호 집안 소유의 밭이 있던 곳으로 식수원 등이 되는

 

 통물이 가까워 자연스레 피난민촌이 만들어졌다

무근성 사람들은 몇몇 이들을 '갑부'로 기억한다. 강만호와 고만호 집안이 그런 경우다. 벼슬 이름을

 

 따 그렇게 불렀다. 만호(萬戶)는 고려시대에 지방의 여러 만호부에 속한 무관 벼슬이나 조선시대

 

각 도(道)의 여러 진(鎭)에 배치한 종사품의 무관 벼슬을 일컫는다

원제국의 총관부 터

원제국의 제주 지배시대의 총관부터. 1273년(원종) 여.몽 연합군의 일원으로 제주에 상륙한

 

몽골군은 삼별초를 전멸시킨 뒤에도 그대로 주둔하면서 다음해 제주를 원의 직속령으로 삼는다

 

. 이때부터 1374년(공민왕) 목호의 난이 진압 될 때까지 100년간 제주는 원의 지배를 받는다.

 

다루가치 총관부를 설치하고 나중에 군민안무사로 개칭하였다

객사대청 ㅡ 영주관 터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며 1689년(숙종) 이우항목사가 개건하고 그 뒤 여러차례 중수하였다.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 놓고 왕명을 받들고 오는 관리들을 접대하고 묵게 하였다. 1907년 윤원구 군수가

 

객사골에 사립 의신학교와 공립제주 보통학교를 창설하면서 폐쇄되었다.1670년(영조) 김정 목사가

 

 어진을 모신 상(床)과 향을 피우는 탁자 등을 보관하기 위한 전각인 존경가을 새로 세웠다

위의 사진은 제주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조회하는 모습이다. 제주공립보통학교는

 

제주 최초의 초등교육기관으로 1907년  당시 제주군수 윤원구에 의해 설치되어 같은 해 5월 19일

 

제주목관아 건물 총물당(옛 제주대학교 병원 앞)에서 개교해 2년 후인 1909년 현재 제주북초등학교

 

 자리인 영주관으로 옮겼다. 개교 당시의 학제는 3년제였으나 1911년 조선교육령에 의해 4년제로,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6년제로 개편되었다

면암 최익현 선생

 

면암 최익현은 조선 후기의 위정척사 운동가이자 항일운동가이다. 그는 대원군의 실정을 낱낱이

 

 열거해 왕의 친정과 대원군 퇴출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죄목으로 제주목 관아에서 멀지 않은

 

 윤규환의 집에 위리안치 된다

최익현 선생 유배지로 추정되는 중앙로타리 북쪽 칠성통 사거리

 

한말 위정척사운동의 상징인물로 꼽히는 면암 최익현은 이 곳 윤규환의 집에서 적거생활을 했다

 

유배인들은 제주사람들에게 새로운 문화를 전달해 주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또한 저명한 학자들도

 

 적지 않아서 제주사람들은 그들로부터 깊은 학문적 영향을 받기도 했다

최익현 적거 유허지

우암 ㅡ송시열

 

1689년,숙종은 후궁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자 송시열은 중전이 아들을 낳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83세에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노론의 영수이며 '송자'라 불리는 송시열은 100여 일밖에 지나지 않는

 

제주유배생활을 했음에도 귤림서원에 배향되어 제주오현으로 추앙받고 있다

송시열 적거지로 추정되는 칠성로 골목

조천석(朝天石) 제사터

한라산에서  발원하여 아라동, 이도동,일도동 등 제주 중심을 흐르는 하천으로, 비가 내리면 범람해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입혔다  조천석과 경천암은 홍수의 재앙을 막아주도록 하늘에 제사하던

 

곳이다

산지천

 

경천(擎天)"은 하늘을 받친다는 의미로  하늘을 받쳐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재앙을 막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신앙석의 앞면에는 '조천(朝天)', 뒷면에는 '경자춘우산서(庚子春牛山書)'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데 경자년(庚子年) 봄(春)에 우산(牛山)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글을 ​썼다는

 

 내용으로 보인다.1736년 목사 김정은 이 바위를  지주암(砥柱岩)이라고 명명하였다

 

지주란 황하강 가운데 있는 석산으로, 황하의 탁류에도 흔들리지 않은 산에서 가져온 고사이다

조천이라 쓴 조두석이 산지천을 지키고 있다

 

조두석은 하천의 홍수예보용 석상으로 물에 잠기면 산지천 일대는 홍수범람으로 큰 피해가 발생한다

조선시대 방어유적 운주당(運籌堂) 터

 

운주당의 "운주"는 운주유악지중(運籌帷幄之中)에서 나온 말인 운주는 군막 속에서 전략을 세운다는

 

뜻이다. 운주당 일대는 조선시대에는 무기를 보관하던 청상고(淸箱庫) 등 제주성의 작전참모부가 있던

 

자리로 제주의 장대(將臺)였다. 장대는 전쟁 시 군사 지휘에 용이한 곳에 두는 장군의 지휘소이다.

 

규모가 큰 성곽에 두었으며, 평상시에는 성의 관리와 행정기능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조 1568년 곽흘 목사가 동성을 뒤로 물려 지우면서 적의 침입을 잘 관찰할 수 있는 높은 언덕에

 

운주당을 창건했다 그 뒤 여러 차례 중수 보존돼 왔으나, 1892년(고종) 실화로 소실되자

 

찰리사 이규원이 재건하였다. 당초 제주성은 산지천 서쪽 언덕을 끼고 축조됨으로써 유사시 물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따라 곽흘 목사는 당초의 동성을 산지천동쪽 언덕으로까지 늘려

 

축조했다

원래 운주당은 관아의 건물이었으나 후에는 마을 수호신을 모신 일도동 본향당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당이 있었던 이 집의 북벽에는 지금도 큰 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를 신목으로 하여 제단과

 

 울타리가 있다. 이 운주당으로 올라오는 길 주변 마을을 ‘운주당골’, ‘주위의 들판을 ’운주당드르‘

 

라고 했으나 지금은 건물들이 들어서 옛 자취를 찾기 힘들다

 

 발굴 중인 운주당 터

장수당 터

 

조선시대 학당으로  향교 다음으로 오랜 전통을 지닌 장수당 터이다

장수당은 현종 1660년 제주목사 이괴가  진사 김진용의 건의로 세종 때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의 옛 터에 세웠던 10칸의 강당이다.1667년에는 제주판관 최진남이 김정의 사묘를 장수당

 

 남쪽인 현재의 오현단 안에 옮겨 짓고, 이를  제사를 지내고  장수당을 교학 기능으로 하여

 

 귤림서원이라 현액하였다

현재 오현단 내의 ㅡ장수당

김정 적거터

 

적거(謫居)에 적(謫)이란 유배를 말하고 거(居)란 집을 말한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은 그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를 조카에게 보낸 것이다

김정 적거터ㅡ제주 동문시장

 

김정은 조선 전기 제주에 유배된 문신이다  김종직의 문인으로 중종 때에 조광조와 더불어

 

왕도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다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과 함께 탄핵당해 금산으로 유배됐다

 

 뒤에 제주로 오게 되는 인물이다 그는 제주읍성의 동문밖 금강사지에 살다가

 

 결국  신사무옥(1521)에 연루되어 1521년(중종)에 사약을 받고 제주에서 사망하였다

동문시장 제주은행 앞에 있는 제주향교창건 터

조선 태조 1392년  조선의 새로운 교육 문화의 창업을 위하여 이곳에 향교를 창설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중수와 이전을  거쳐  지금의 제주시 용담으로 옮겨졌다.

 

<동국여지승람> 제주목 향교조의 김처례가 지은 비문에 ‘우리 태조 원년에 학교가 이루어지고

 

세종 (1435) 을묘에 향교가 다시 지어졌다.’는 기록이 보인다

현재 제주시 용담1동에 있는 제주향교(사진 촬영 2019년 7월)

김윤식

 

김윤식은 조선말기 대신으로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이승오와 함께 제주에 유배되었다. 그는  산지포구로

 

증기운선을 타고 들어와 . 제주성 내 김응빈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그의 저서 <속음청사>는

 

 제주 귀양살이 때의 두 차례의 민란인 방성칠 난과 이재수 난과

 

 카돌릭교도와의 관계를 기록한 글로써 제주 근대사의 귀중한 자료로 그 활용가치가 크다

동문로터리 방향 농협은행 바로 앞 김윤식 적거 유허지

김윤식 적거 유허지

 

그는 유배생활 10년만인 1907년 송병준의 탄원으로 풀려나 중추원의장으로 발탁되고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한일합방 조인에 가담하여 일본황실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는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의 폭압정치를 규탄하고 조선의 독립승인을 요구하는


'대일본장서'를 총독부와 일본정부에 전달하여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아 작위를

 

삭탈당하고 1922년 1월 8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면암 최익현과는 비교되는 인물이다

제주성 남문이 있었던 자리

중종 1512년 목사 김석철이 이 성을 개축하면서 이곳에 문루를 세워 정원루라 명명하였다

 

이곳에는 초루가 있었으며 북을 걸어두고 망루의 역활을 수행하였다

 

일제강점기 동부두와 서부두를 축조하고 산지천을 매립하면서 성의 대부분이 헐렸다

제주 읍성 남문 터  정원루

제주에 유배온 조선의 유일한 15대 왕 광해군

 

광해군은 조선 제14대 임금인 선조와 후궁인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두 살 때 세상을 떠났고 왕비인 의인왕후 사이에서 아들이 없자 장자 임해군은 포악스러워 왕실의

 

골칫거리로  세자로 앉히기에는 나무 부담이 컸기에  후궁들의 아들 가운데  가장 영특한 광해군을 17세 때

 

세자로 책봉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세자인 광해군에게 조선의 "분소"인 "분조"를 맡겼다

 

일종의 임시정부였다

광해군 제주 첫 기착지, 행원포구(사진 촬영 2020년 2월)

 

임진왜란 7개월 동안 강원도와 함경도 등에서 의병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전라도에서 모병과 군량 조달 등의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왜란  평정에 공헌하였다 임진왜란 동안

 

평안도와 황해도 등지를 다니면서 북방의 정세에 밝아진 광해군은 선조 1608년 왕위에 오르자 마자 

 

사대주의 명분론에 시로잡힌 서인세력의 명분과 의리가 아니라 실리주의 노선을 택했다

 

그러나  이후 형인 임해군과 후일 인조가 되는 능양군의  아우인 능창군을 제거히였다 1613년 김제남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이복동생인 영장대군을 강화에 유배시켰다가 1614년 살해하였다 1623년 서인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청이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1637년  혹시라도

 

청나라가 폐주를  복위시킬까 두려워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1641년 제주도 귀양살이 중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 적소 터(제주시 중앙로 82국민은행 옆)

 

당시 조정에서는 광해군에게 유배 지역을 알리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를 건널 때는

 

배의 사방을 모두 가리어 밖을 보지 못하도록 하여 제주에 유배시키는 것을 비밀리에 행하였다

광해군 적소 터 표지석

 

당시 제주와 육지를 잇는 해상 관문은 화북포구나 조천포구였으나 광해군은 1637년 6월 6일

 

주요 관문에서 동쪽으로  훨씬 멀리 떨어진 구좌읍 행원포구에 도착했다

위리안치

 

광해군은 위리안치 형벌로 살고 있는 집 울타리에

 

가시를 두르고, 그 울타리 안에서만 생활해야 했다

제주에 유배된 광해군은 당시 일화를 보면  주변에서 참을 수 없는 모욕을 자주 당했던 듯하다

 

제주 유배지에서 자신을 감시하는 별장들이 상방을 차지하고 그를 아래채에 재웠으며,시중을

 

드는 개집종이 광해군에게 영감이라 낮춰 부르면 광해군을 몹시 천대 하였다고 한다

 

광해군을 비판해 제주에 유배온 동계 정온과  간옹 이익

 

 그러나 광해군  자신 역시 인조 반정으로 제주도 유배인이 되는 처지가 될 줄이야

 

역사란 그래서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국립제주박물관에 전시하는 광해군일기 (국립제주박물관)ㅡ2019년 11월 촬영

국립제주박물관

광해군은 1641년  67세로 제주에서 사망했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자리한 조선 제15대 국왕 광해군과 문성군부인의 묘(자료사진)

.

제주도에서 사망한 후 그곳에 안장했으나, 유언으로 어머니인 공빈 김씨의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는 말을 한 관계로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 어머니인 공빈 김씨의 성묘(成墓)와 동복형인 임해군의 묘도 근처에 있다 

화북 거로마을에 유배와 살았던 광해군의 어머니-계모이긴 하지만- 인목대비의 친정어머니

 

노씨부인도 제주로 유배를 왔는데, 그녀는 살기 위해 술지게미를 재탕한 막걸리를 만들어

 

 섬사람들에게 값싸게 팔아 연명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대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이라 하여

 

 대비모주라 불렀고 이를 다시 줄여 ‘모주’라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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