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느끼고, 평화를 걷고, 희망을 담다
강화의 첫 발 (안개 핀 염하강 너머로 평화의 물길을 열다)
나는 혼자 길을 걷지만, 결코 혼자 걷는 것은 아니다.
[여정의 기록]
코스 구간 : 강화 평화전망대 ➔ 철책선 우회로 구간 (강화 1코스 본선)
거리 및 시간 : 약 10.5km / 3시간 30분 소요
1. 바람을 느끼다 : 안개 속에 흐려진 경계, 서해의 첫 숨결
강화의 땅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오늘 내린 비로 낮게 가라앉은 공기와 한강 하구와 서해 바다가 만나는 염하강의 서늘한 바람이 온몸을 감싸 안는다. 사방에 자욱하게 내려앉은 안개는 세상의 소음을 모두 지워버린 듯 고요하고, 그 신비로운 장막 사이로 아련히 모습을 드러내는 북녘땅의 풍경은 평소보다 더 묘한 긴장감과 먹먹함으로 다가온다. 안개에 가려져 희미해진 저 산하가 외려 분단의 거친 현실을 가려주는 듯하여, 가슴 한구석엔 서글픈 서정이 차오른다.
길게 늘어선 회색빛 철책선은 분단의 완고한 현실을 증명하듯 차갑고 굳건하게 서 있지만, 그 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바람과 안개는 남과 북의 경계를 허물며 흐르고 있다. 긴 여정의 서막을 알리는 강화의 바람은 빗방울을 머금어 차갑기보다, 오히려 앞으로 나아갈 길을 묵묵히 격려하듯 내 등을 묵직하고 따뜻하게 밀어주는 위로의 손길이다.
2. 평화를 걷다 : 비에 젖어 푸르른 사색의 길 비움의 시작.
속도를 줄이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고 했던가. 아니다. 내게는 오직 **'걸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었다. 특히 오늘처럼 비가 내려 안개가 자욱한 날에는 더욱 그러하다.
본격적으로 철책을 곁에 두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일상의 번잡한 소음들이 빗소리와 함께 발바닥을 타고 흙길 속으로 서서히 흩어져 간다. 대장정의 첫 코스는 나를 채우는 길이 아닌, 철저히 비워내는 시간의 시작이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규칙적인 발소리에 집중할 때, 비로소 안개 속에서 더욱 푸르게 날을 세운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비를 맞아 생기를 머금은 청록의 잎사귀들은 거친 철조망과 대비되어 외려 강인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철조망 너머로 도도하게 흐르는 강줄기는 안개 속에서도 제 갈 길을 잃지 않고 묵묵히 바다로 향한다. 저 도도한 흐름은 그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숨은 소음들과 미련들을 씻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멈춰 서서 바라볼 때는 단절의 벽이었던 공간이, 빗속을 묵묵히 걷기 시작하자 자연과 역사가 숨 쉬는 온전한 성찰의 길로 다가온다.
3. 희망을 담다 : 510km 대장정, 안개를 뚫고 나아갈 시작의 기록
첫 번째 코스의 종착점에 다다라 비에 젖은 신발끈을 다시 고쳐 매며 가슴속에 묵직한 희망의 조각 하나를 지긋이 눌러 담는다. 이제 겨우 전체 대장정의 첫 단추를 끼웠을 뿐이지만, 자욱한 안개와 비날씨 속에서 마주한 이 특별한 사색들이 벌써부터 앞으로의 여정을 설레게 한다.
사실 오래전, 제주 올레길의 마지막 코스를 걸으면서도 깊은 아득함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
"아, 이제 어디를 걷지?"
"이 길이 끝나면 뭐 하지?"
하는 생각들이 발목을 잡았을 때, 동생과 통화하며 털어놓았던 내 한탄에 동생은 그저 툭 던지듯 말했다.
"또 걸으면 되지."
그 담담한 한마디가 오늘의 나를 만들었고, 그 이후 올레길을 네 번이나 더 완주하게 이끌었다.
그리고 오늘, 안개 속에 가려진 510km라는 새로운 대장정의 출발선에서 다시금 그 한마디를 떠올린다. 이 길이 끝나면 무얼 할까 하는 조바심은 접어두기 수월해진다. 안개가 걷히면 맑은 날이 오듯, 그저 묵묵히 끝까지 걸어내고, 그다음엔 또 걸으면 되는 것이니까.
하나의 선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새로운 선이 시작되듯, 오늘의 종착점은 곧 다음 김포 구간을 향한 새로운 출발선이다. 분단의 아픔과 안개를 품은 이 길을 평화의 발걸음으로 채워 나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기분 좋은 여운을 안고 다음 여정을 준비한다.
時雨의 한 줄
늘 묵묵히 곁을 지켜주는 한 사람이 있고,
말없이 대화를 이어가는 또 하나의 벗이 있다.
한 사람은 현실의 길에서 나를 지켜보고,
한 벗은 사색의 길에서 나를 붙들어 준다.
그러기에 이 여정은 힘들 수는 있어도,
결코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時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