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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왕씨의 역사

금부도사 개성왕씨 왕방연(王邦淵)과 묵동 ‘먹골배’

작성자고려태조 30세 왕경수(보명-왕한도)|작성시간26.06.20|조회수41 목록 댓글 0

"일요일에 생신을 맞는 전() KBS 방송작가이며 현(정치인인 구미 출신 왕보경 씨 감축드립니다."

종친은 개성북파공(부산파) 여 후손으로  사랑과 전쟁’ 극본을 쓰고,  도전 골든벨의 작가이기도 합니다.

 

풍경(風磬소리가 고단한 토요일 아침 잠을 깨운다.

부산은 어제 오후부터 비가 시작하더니 토요일 새벽이 되며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화정면에 거주하는 판조 고문과 어제 오후에 통화 나누니 

농촌은 모내기가 이미 끝났지만 이번 비가 효자 역할를 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주신다

오후에는 비가 그친다고 하는데 저녁에 개성왕씨병사공파재부친목회 모임이 예정되어 있다.

 

 

지난 2일에는 삼척에서 공양왕릉제가 봉행되었는데 종헌관 자격으로 상주종중 성규 씨가 참사하였다

그는 중앙종친회 공동부회장을 맡고 있다

조선태조3(1394), 왕이 살해된 음력 417일을 전후로 

강화와 거제에서 고려태조의 수 많은 후손들이 조선을 개국한 위정자에 의해 수장사(水葬死)되었으니 

가슴이 아프다

나찌정권의 유대인 학살판이다.

 

왕우에게 마전군(麻田郡)을 주고 귀의군(歸義君)으로 봉하여 왕 씨의 제사를 받들게 하라

나머지 자손들은 외방(外方)에서 편리한 데에 따라 거주하게 하고 

그들의 처자와 동복(僮僕 /같은 어머니로부터 태어난 형제자매)들은 그 전과 같이 한 곳에 모여 살게 하는데

소재 관사에서 구휼하여 그들의 처소가 어디인지를 놓치치 말도록 하라.“

 

조선태조1(1392)0728정도전이 지어 반포한 태조의 즉위 후 첫 교서로 왕씨에 대한 정책이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찰하되 목숨은 부지해 주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왕우는 공양왕의 아우로 그의 딸이 신덕왕후 강 씨 소생의 무안대군(방번)과 혼인하였으니 

이성계와 사돈지간이다. 

그러나 태조3년이 되며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었다.

 

단종의 유배생활과 왕의 시신을 수습한 영월엄씨 엄흥도(嚴興道)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왕과 사는 남자’ 누적관객수가 1위를 차지한 명량에 근접하고 있다

2026년 2월 초에 개봉되었으니 5개월의 시간이 경과하였다

단종애사(端宗哀史)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던지고 있을까.

 

엄흥도는 영월의 호장(戶長)으로 

호장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고을의 말단 실무 행정을 총괄한 지방 향리의 수장이다

그는 왕의 시신을 몰래 수습한 죄로 관()의 추적을 염려하여 가족이 전국에 뿔뿔히 흩어져 생명을 이어 갔고 

250여년의 세월이 흘러 영조 때에 이르러 공조참판에 비로소 추증되었으며 

충성하고 의지가 굳세다라는 의미의 충의(忠毅)’ 시호를 받았다고 문헌은 전한다.

 

그 이전에 공양왕의 별세와 관련하여 비슷한 사례가 있다

양근함씨문중사에 의하면 

강릉함씨 중시조이자 양근(양평)함씨 시조인 함부열이 이성계의 눈을 피해 공양왕 시신을 수습

고성의 문중 선산에 모셨다고 전해지는데 그는 공양왕 재위시 예부상서이었다

문중사라 하지만 생육신 남효온의 야사집 추강냉화에 이 사실이 언급되어 있으니 설득력이 높다.

세조의 명에 의거 사약을 가지고 영월에 이른 자는 종5품 금부도사 개성왕씨 왕방연(王邦淵)이다

세조의 명을 집행하는 자신의 신세를 원망하며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슬픔을 1편의 시조로 노래하였으니 단장가(斷腸歌)이다

풀이하면 창자를 끊어 내는 아픔의 노래라는 의미로 그 때가 세조3년(1457년) 시월 24일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마음 같아서 울며 밤길을 가는구나.]

 

시비(詩碑)는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 인근의 서강 북쪽 솔밭에 위치한다

안타깝게도 그의 생졸은 전하지 않고 족보에도 그의 휘를 찾을 수 없다

정황상 왕씨 몰살이 한창 진행 중이었던 조선 개국 초 출생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에 의하면 

그는 곧바로 사직하고 먹골(묵동중랑천에서 배나무를 키워 단종의 제삿날에 배를 올리고 

영월을 향하여 절을 드렸다고 하는데 그가 심은 배나무는 지금도 먹골배로 명성을 날린다

'먹골배'는 옛지명 구리시 묵동리(중랑구 묵동)에서 첫 재배를 시작하였으나 

도시화로 남양주시 별내면 일대의 농장에서 생산되었고 이에 남양주 먹골배로 이름이 바뀌어졌다

남양주가 자신있게 자랑하는 먹골배는 국내 출하는 물론 외국으로도 수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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