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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의 능과 관련된 승정원일기 기사입니다.

작성자fitfear|작성시간21.04.16|조회수220 목록 댓글 5

승정원일기 고종 37년 경자(1900) 8월 12일(신사, 양력 9월 5일) 맑음
상이 이르기를,
홍릉은 폭이 31척 반이고 높이가 25척인데, 이번에는 몇 척이나 되는가? 과연 조금 높아지겠는가?”

 

> 승정원일기 > 인조 > 인조 8년 경오 > 4월 11일 > 최종정보인조 8년 경오(1630) 4월 11일(경신) 맑음

08-04-11[08] 주강을 행할 때 좌의정 김류가 입시하여 천릉할 때의 역군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DCI]ITKC_ST_P0_A08_04A_11A_00090_2009_020_XML DCI복사 URL복사

주강이 있었다. 이때 입시한 좌의정 김류가 아뢰기를,

“소신이 총호사로서 전후의 등록(謄錄)에 마련한 천릉(遷陵)할 때의 역사(役事)를 상고해 보니, 그중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역군(役軍)에 대한 일로 이것은 대체로 능으로 쓸 산이 정해진 뒤에 알 수 있지만, 또한 거리에 따른 차이도 있습니다. 만약 건원릉(健元陵)의 둘째 능선을 사용한다면 역사가 매우 줄어들 것이지만, 멀리 있는 새로운 산을 사용한다면 공역(功役)이 갑절이나 될 것입니다. 목릉(穆陵)에 대한 국장(國葬) 때에는 역군 9000명을 한 달 동안 부역시켰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통계해 보면 27만 명을 하루 동안 부역시켜야 하니, 이처럼 농번기에 역군을 조발(調發)한다면 농사를 짓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렇지만 농사철이라고 해서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고종 37년 경자(1900) 8월 25일(갑오, 양력 9월 18일) 비

37-08-25[11] 적임자가 아니므로 본직과 겸직을 해임해 주기를 청하는 내부 협판 민경식의 상소

[DCI]ITKC_ST_Z0_A37_08A_25A_00120_2005_185_XML DCI복사 URL복사

○ 내부 협판 민경식(閔景植)이 상소하기를,

“삼가 아룁니다. 해가 바뀌매 홍릉의 기신제를 지내고, 역당이 처단되매 금곡(金谷)의 좋은 묏자리를 정하였으니, 아, 통탄스럽습니다. 황후에 대한 그리움으로 하늘을 향해 부르짖지만 무엇 하나 부여잡을 것이 없으니, 원수를 갚고자 하는 마음이 날로 더욱 깊어갑니다

 

www.youtube.com/watch?v=gz5O_W_YfrE&t=735s    태조고황제의 능높이가 15미터라는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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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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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화야평 | 작성시간 21.04.16 1900년이면 한반도 홍릉에 명성황후묘가 있었을까요?
  • 작성자정혜 | 작성시간 2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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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송계 | 작성시간 21.04.17 엄청난거 발견하셨습니다. 정말 좋은 정보입니다. 그런데 洪陵이 고종의 릉인데, 명성황후가 묘를 이장하는데 이미 홍릉이라 부르니 좀 모호해 보입니다. 황후가 사망하고 릉명을 이미 정해버린것인지. 또한 호러스 알렌의 명성황후능이 14미터였다는 기록과 대조해 보면 이장후 더 크게 만들었다고 보아야 하겠군요. 당시 처음 만들어진 명성황후능이 25척으로 7.5m 였다면 다른 왕릉들도 모두 그만한 크기였을테고 왕의 능묘는 더 컷을 테니 우리 대륙조선사연구회의 고증이 맞았다는 것이 증명되는군요. 감사합니다.
  • 작성자fitfear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5.01 1895년 명성황후 시해된 후 가묘, 고종황제는 아관파천하여 실질적으로 1897년 10월27일 경복궁에서 10리 지점 청량리 부근에 홍릉을 만들고 발인을 한 듯합니다. 1901년 5월-6월경에 양주 묘적산(천장산) 금곡에 다시 이장되고요
  • 작성자테슬라 | 작성시간 21.05.08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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