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국은 빅토리아 여왕(1837~1901) 시대에 '해가지지 않는 해양제국' 을 건설한다.즉 세계 곳곳에 영국의
식민지와 점령지가 있었다.이 당시 영국은 대제국으로 무적이었다.그나마 약간의 위협 상대로 견제했던 세력
이 있었다면 프랑스와 독일이 아니라 '러시아' 였다.이때의 러시아는 '니콜라이 1.2세' 와 '알렉산드르 2.3세'
의 짜르 시대로 예카쩨리나 2세(1762~1796)의 유지를 받들어 제국에 걸맞게 영토를 넒히는 개척활동을 왕
성하게 했다.이때 영국은 러시아가 해양을 통해 세계로 진출하려는 야망을 봉쇄하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현
상트페테르 브르크에서 발트해를 경유해 밖으로 나가려는 러시아의 해양진출을 영국이 도버해협에서 막고
또 훼방을 놓았다.그러자 러시아는 세계를 향한 해양으로의 진출을 다양하고 다방면으로 모색했다.아무튼
궁하면 통하는 것이고 통하면 변하는 것이다.
러시아는 영토의 전지역을 활용해 부동항 학보와 해양진출을 도모했다.도버 해협이 불편하자 러시아는 흑해
의 크림반도를 통해 흑해를 경유해 지중해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세웠으나,그러나 이를 시기한 영국이 프랑스
와 협업하고 터키와 연합해 '크림전쟁(1854~1856)' 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저지를 했다.예나 지금이나 남잘
되는 꼴을 못보는 것이다.잘나가는 사람이나 부자나라 일수록 시셈은 더 크다.
2,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워진 또하나의 러시아의 해양진출 계획은 중앙아시아와 아프카니스탄을 통해 아라
비아 해로 진출하려 했으나,이 계획도 당시의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와 파키스탄,페르샤(이란)지역에서 막았
다.이제 유일하게 남은 해양으로의 통로는 영국과 프랑스,미국이 아직까지 소홀히 취급하는 東시베리아로의
진출이 남았던 것이다.중국을 통한 경로는 '네르친스크 조약' 의 약속으로 시도할수가 없었다.영국이란 선진
산업국가의 세계를 향한 독점영업을 눈치를 챈 러시아는 제1차 아편전쟁으로 맥을 못추고 붕괴한 淸의 실체
를 파악하고는 청나라에 자극을 주지않은 범위 내에서 동시베리아 개척에 박차를 가했다.당시의 짜르인
니콜라이 1세(1825~1855)는 1847년 영국의 방해와 난국을 돌파하기 위해 '뮤라비에프'를 東 시베리아 총독
으로 임명하고는 그에게 전권을 줘 1848년 흑룡강 유역과 하구를 탐험케 하였고,이어 흑룡강 하구의 '니콜
라이 예프스크' 항을 점령하고 도시를 건설케 했다.
총독인 뮤라비예프는 이후 황제의 명을 받들어 3년 간의 동시베리아를 전지역과 흑룡강 북부지역을 탐험해
러시아의 점령지로 만든다.뿐만 아니라 1852년 에는 흑룡강 하구(니콜라이 예프스크)에서 바라다 보이는 아
이누족들의 거주지인 '사할린섬' 을 점령해 러시아 소유로 만든다.사할린(樺太)의 아이누 족이 바다를 건너가
살았던 땅의 일부가 바로 오늘날 일본의 '홋가이도' 다.
3, 이어 흑룡강 하구에서 다시 중류인 내륙으로 들어와 1858년에는 청나라와 경계를 이루는 지금의 '흑하지역
의 애훈' 에서 청나라의 동북장군인 奕山과 '애훈조약' 을 체결한다.청나라가 영불연합군에 의해 2차 아편전쟁
에서 완패하고 북경이 점령 당하고 불타자 러시아는 곧바로 1860년 7월에 부동항으로 생각했던 '동방을 정복
하라' 는 뜻의 지명을 가진 '블라디 보스토크' 지역을 점령해 러시아 항구로 만든다.그러고는 후환을 없에기 위
해 1860년 11월 14일 '북경조약' 을 통해 흑룡강 이북지역의 '동시베리아와 우수리강(烏蘇里江) 동편의 연해주
전지역' 을 러시아 영토로 인정해 주는 선물도 받는다.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바라본 영국과 프랑스는 배아팠고
또 급해졌다.특히 영국은 러시아가 '연해주와 오호츠크해' 를 통해 태평양이란 해양으로 진출할수 있다는 것을
기정 사실화 했고,러시아와 청나라의 관계를 고려할때 청의 동북지역(만주)나 동반도(한반도)의 진출은 시간
문제로 봤다.
만약 러시아가 열도까지 진출한다면 해가지지 않는 해양제국의 체면은 말이 아닌 것이 되고 영업 손실이 커진다
는 것을 생각한 영국은 사전에 방지를 해야 했다.그래서 열도 일본을 산업국가로 개혁(유신)하여 영국을 대신해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해양진출과 남하정책을 막도록 연구를 했다.즉 강자로써 손 안대고 코푸는 '以夷(일본)로
制夷(러시아)' 를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이때 영국이 일본에 해준 선물이 산업화와 군대의 근대화였다.
4, 동아시아에서 영국이 직접 러시아의 남하정책과 해양진출을 막으려면 영국에서 직접군대를 파견해 와야 하는
데 거리가 너무나 멀어 전함과 병사들이 오고가는 데만 몇달이 소요되고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을
거쳐 열도로 오는 긴 항해에 전투도 하기전에 항해독으로 영국군들이 지칠것을 염려해 열도와 열도인들을 개혁
하여(근대화) 영국을 대신한 대항군으로 써먹으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상대적으로 영국인들 희생을 줄이거나
없게 한다는 목적도 있었다.당연히 영국의 비용절감도 들어가 있는 것이다.열도인 역시 이미 서양사람 들을 상대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라 일찌기 열도의 사정을 파악 하는데는 어렵지 않았다.단지 수많은 섬으로
이루워진 지역이라 소통과 통합,단결이 쉽지 않았고,지역간의 언어와 화폐가 달랐다는 점이다.또 최소한 300여명
이상의 지역 藩主(지역의 토호이자 왕들)이자 다이묘(大名: 사들의 우두머리)들이 뭉쳐진 봉건주의가 고착화 되어
중앙집권의 통일국가로의 진행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는 예상했다.
예나 지금이나 번주(제후)나 대명(무사들의 대장)들,大商들,기득권자들은 현재가 천국이고 극락이기 때문에 개혁
이나 유신(혁명)같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이대로 지금이 좋은 것이다.영국은 일본을 중앙집권적 통일국가를 만드
는 것이 급선무였다.그럴려면 시시때때로 적당한 쇼를 해야 했다.이른바 '동방의 근본,중앙' 라는 뜻의 日本이란
국명도 바로 이때 생겨났다.이전엔 300개 이상으로 쪼개지고 토호(번주)들이 통치하는 분열의 군도였을 뿐이다.
또 '에도(江戶)에서 東京' 으로 바뀐수도 명도 '동방의 중심지' 란 뜻으로 새롭게 만들었다.
5, 그래서 영국은 열도의 전근대 동양판을 서양의 첨단인 영국판으로 갈아 엎어야 했다.그러기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한데 당시의 기득권자들(막부)의 지지를 얻기는 힘들었다.따라서 유신(혁명)이란 판갈이에 이용할 전위부대
대상자로 '신분 상승을 노리면서 야망과 혈기 왕성한 젊은 중하급 무사들을 '혁명의 중심' 으로 진영을 짜야만 했
다.그리고 음으로 양으로 엄청난 투자를 한다.한국이 지난날 미국이 돈꿔주고,기술전수 해주고,미국시장을 열어주
어 근대화에 성공했던 것 처럼 말이다.예나 지금이나 혁명과 개혁(유신)으로 기존판을 뒤집는 판갈이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며 때로는 적지 않은 인명의 손실도 따라온다.일본의 개혁가 '후쿠야마 유키치' 가 어떻고,샷쵸(사쓰
마 군벌과 조슈군벌) 양 군벌들의 단합과 협력이 어떻고,등등의 장황한 논설들은 자본주의 근대화 하에서는 모두
가 돈 다음이다.이런 해설들은 성공한 후대의 사가들이 업적을 자랑하기 위해 윤색,화장시킨 내용일 뿐이다.
역사의 전환을 맞는 모든 거사와 혁명에는 충분히 뒷돈을 대주는 錢主와 숨은 호응자가 없으면 허사인 것이다.
명치혁명 錢主의 역할을 당시의 대제국이자 돈이 남아돌아 숨을못쉴 정도의 부자 나라인 영국이 했기에 열도의
기성판을 빨리 손쉽게 뒤집어 엎을수 있었던 것이다.영국은 청나라와의 2차례의 전쟁에서 완승하고도 청나라의
봉건주의 판을 뒤집지 못했고,오히려 원명원을 불지르고 북경을 약탈 함으로서 대륙에서 인기를 상실했다.또한
러시아처럼 광대한 영토를 할양(양도) 받지도 못했다.홍콩과 구룡반도와 각항구의 조차지 정도였다.
6 이미 엎질러진 물을 탓해서 뭘 하겠나.영국이 해양제국을 유지하며 러시아의 남진과 해양진출을 막기 위해서
는 러시아가 만주나 반도를 통해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막아야 했다.때문에 열도와 사람들을 필요로 했다.당시
열도의 대부분 사람들은 유신이 뭔지 개혁이 뭔지를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거의 100%에 가까운 농본주의 사회
였으며 17세기 중반이후 오랫동안 쇄국을 유지했던 폐쇄사회였다.기존의 역사에서 보면 열도의 개방은 오히려
미국의 동인도 함대의 페리제독이 1854년(가나가와 조약)에 했다.그러나 동인도 함대의 사령관인 페리제독이
1858년에 죽어 미국의 동인도 함대를 이끌 지휘관이 부재했고,이후 미국의 국내사정이자 서부개척이 아직 진행
중이라 분주했다.이어 내전인 남북전쟁(1861~1865)이 터지면서 열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와 극동 문제에 관여를
할 입장이나 여력이 없었다.그래서 제반 문제를 영국에 일임 했었다.양국의 은밀하고 끈끈한 협업은,러일전쟁에
서 고전하는 일본에 영국의 금융가들과 미국의 금융가들이 합심해 부족한 전비를 대여해준 것만 보아도 알수가
있다.
아무튼 대자본의 후광을 받은 혁명 세력들은 거의 무혈에 가까울 정도의 저항으로 기존의 정부 역할을 했던 에도
막부를 무너뜨리고 교토의 제사장을 천왕으로 받들어 '尊王攘夷' 를 외쳤다.또 신정부의 수도를 동경으로 정한후
천도를 하고,이어 '版籍奉還(번주들이 소유하던 '領地인 版과,領民인 戶籍' 을 천왕의 소유로 돌려 준다는 쇼->18
69년 7월 25일),廢藩置縣(번을 없에고 현을 설치함->1871년 8월 29일)과 같은 쇼도 해야 했다.물론 아편전쟁으로
동양문명의 대국인 청나라가 영국의 신형대포 앞에 항복한 사항도 참고했다..
7, 지역 왕국인 藩에 縣을 설치하여 천왕하에 둔다는 뜻의 '폐번치현' 이나 번주들이 소유하고 있던 소유지와 번민
들을 왕에게 돌려준다는 '版籍奉還' 이란 모두 서류상의 쇼다.유신후에도 번주들의 영지는 그대로 였고 영민들도
여전히 그자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혁명 이후도 실질적으로 현을 통치하기는 과거 302개 의 縣主(번주가
현주로 바뀜)들로 그대로 했다.후에 수많은 번주들과 일부의 대명은 기득세력으로 인정받아 의회에서 의원으로
활동을 했다.일본이 혁명의 서두에서 '판적봉환과 에도를 동경으로 개칭하고 천도하는 1869년 그해의 11월에 영국
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를 개통한다.결론적으로 일본의 혁명과 개혁을 크게 돕게 된 것이다.반듯이는 아니 였겠
지만 일본이 산업국가로 변모하는 여정에 필요한 선진물품(근대 군수용품과 공업제품,기술전달)의 조달 운송기간
이 남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올때 보다 최소한 30일은 짧아진 것이다.이후 1871년 11월 에는 유럽과 미국을 견문
하는 '이와쿠라 여행단' 도 만들어 서구의 문물을 익히게 하고,1872년 9월에는 동경과 요코하마를 오가는 철도도
개통시켜 준다.
이어 영국의 궁극적 목표인 일본 군대의 근대화를 실현에 옮긴다.러시아를 막기 위해 절대 필요한 서양식 근대국가
의 군대창설 이었다.동시에 이를 통솔할 軍國도 필요해 1873년 1월에 '징병령' 을 서둘러 발동하여 군국주의 일본으
로 첫발을 디딘다.전쟁이 있어야 쓸모가 있고 전적으로 소비만 하는 군부대의 창설(부대와 장병)은 그야말로 생상성
없는 고비용이 드는 분야다.그래서 돈 없으면 못한다.한국군의 근대화도 미국이 돈들여 해준 것 아니냐! 이때의 징
병령에 응한자들 대부분은 '폐번치현과 판적봉환' 으로 실업자가 된 200만 명의 하급 말단 藩士(무사)들 이었다.
8, 일본의 유신이자 혁명(개혁)은 영국을 비롯한 수많은 서구 선진국 인재들이 명치유신 세력들을 도왔다.그래도
개혁은 순조롭지 못했다.이유는 전혀 다른 제도와 접해보지 못했던 과학기술과 문화에 대한 적응에 시간이 필요했
다.1868년 당시 추대된 명치왕은 아직 소년이었고 아는 것이 없었다.단지 왕정복고란 정치적 쇼를 하기위해 선발된
인형이자 존왕양이의 마스코트에 불과했다.명치유신의 주세력들은 '왕정복고,존왕양이,판적봉환,폐번치현' 이란
정치적 쇼를 통해 중앙집권적 제도를 확립하려 했지만 이것 역시 시간을 필요로 했고 쉽지 않았다.더하여 진정한
전국통일은 나라에 통용되는 통화(돈)인데 일본의 단일통화 제도는 1881년에 겨우 수립되고,1882년에 가서야 중앙
은행을 설립할 정도 늦었다.즉 명치유신을 시작한지 15년이 지나서야 단일통화가 이루워진다.따라서 판을 갈아엎는
어떠한 개혁과 혁명이든 '돈,기술,선진조력자,내부협력자,시간' 의 도움이 없다면 성공하기 힘들다.
특히 국내의 기득권자들 도움을 받지 못하면 개혁과 혁명의 성공은 힘들다.청일전쟁 전 개혁의 명치정부와 보수의
의회 와의 극한대립 역시 개혁의 어려움을 말해준다.무엇보다 국내 의견의 평정이 필요하다.명치유신 정부의 주동
세력들은 이것으로도 진정한 전국통일과 국민통합이 어렵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더나은 유신의 성공을 위해 강국과
의 전쟁을 꿈꾼고 실천에 옮긴다.그러면 국내 보수세력들의 저항심 진압과 동시에 신정부의 업적을 홍보하는 여론
통일도 보다 쉽게 이루워 진다.그래서 '청일전쟁' 을 만들수 밖에 없었고,이어 많은 도움을 준 영국을 위해 '러일전쟁'
도 만들어 수많은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이세상에 꽁짜는 없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정혜 작성시간 22.04.27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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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상선거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4.27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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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송계 작성시간 22.04.28 좋은글 감사드립니다. 38세의 무라비에프가 갔던 흑룡강이 지금의 반도위쪽일수 없으며, 1926년에 기존 니콜라예프스크를 노보시비르스크로 만들었다는 역사의 기록은 무라비에프가 탐험하고 설치했던 니콜라 예프스크가 바로 노보시비르스크의 북쪽에 존재했던 역사상의 흑룡강을 말함을 간파해야 하겠습니다. 1868년이후 홋카이도는 메이지정부에 의해 일본에 편입되고 1899년에 홋카이도 구토인 보호법 폐지운동이 비로소 일어나게 됩니다. 현재의 역사는 모두 1945년이후의 강역을 고정시키고 후세에 서술한 가짜임을 알기에 분노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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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상선거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4.28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