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곡관(函谷關)을 찾아서
1.
함곡관(函谷關)
험한 지형 십이제를 편편하게 보며 / 形勝平看十二齊
내려갈 길도 없고 올라갈 사다리도 없네 / 下臨無路上無梯
토낭은 모두 황하 북쪽에 머물러 있고 / 土囊約住黃河北
지축은 서편으로 이어졌구나 / 地軸句連白日西
천명은 벌써 삼척검으로 돌아갔는데 / 天意已歸三尺劍
인심은 어찌 한 덩이의 진흙을 믿었던가 / 人心豈恃一丸泥
이랑에 익은 벼 가득하고 바람도 고요하니 / 秋禾滿畝風塵靜
안장에 걸터앉아 낮닭 우는 소리 듣노라 / 穩跨征鞍聽午鷄
위 시는 고려말의 학자인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이 지은 시로,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실려있는 작품이다. 함곡관(函谷關)을 바라보며 그 모습과 회한(悔恨)을 그려내고 있는데, 이는 익재(益齋)선생이 원(元)나라의 수도로 가던 중 현 난주(蘭州)에서 서녕(西寧)으로 들어가는 물길인 위수(渭水)가에 세워진 천혜의 요새 함곡관(函谷關)을 보고 읊은 감회의 시(詩)다.
함곡관(函谷關)은 전국시대 진(秦)나라에서 산동(山東) 6국으로 통하던 관문으로 낙양(洛陽)의 서쪽에 있으며 험하기로 유명해 천하제일험관(天下第一險關)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한 명이 지키면 만 명도 통과하지 못한다는 말이 이를 통해 생겼으며함곡관만 막으면 난공불락(難攻不落)이 된다는 것이었다.
이 관(關)은 전국시대 진효공(秦孝公, BC361-BC338)때 세워진 것으로 관재곡중 탐험여함(關在谷中 探險如函)이란 말에서 생겨난 지명이며,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항우군을 막고 전진기지로 사용했던 요새이기도 한 곳인데, 유방은 항우와의 전쟁에서 전세(戰勢)가 유리하면 함곡관을 나가고 불리하면 일단 함곡관으로 피했다가 재차 병력을 모은 뒤 동쪽으로 나아가는 전략을 구사하여 결국 승리하게 되었다고 역사기록은 전한다.
함곡관이 함락되었을 경우를 고려해 또 하나의 전략적 성채(城砦)를 쌓아 놓았는데 이를 동관(潼關)이라 부르고 있는데, 현재 중국공산당은 난주(蘭州)의 서쪽에 존재했던 함곡관과 동관을 현 황하 만곡부 아래쪽으로 지명이동시켜 약 60km의 거리차를 두고 만들어 역사를 농락하고 있다.
그러나 섬서(陝西)라는 말의 섬(陝)자의 원래 의미만 알아도 지금의 섬서성(陝西省)이 가짜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데, 즉 섬(陝)이란 언덕과 언덕 사이에 끼어 있는 골짜기 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지도를 통해 1950년 이전 한족(漢族)의 강역이면서 역사적인 낙양(洛陽)과 장안(長安) 즉 서안(西安)이 있었고, 함곡관(函谷關)이 존재했던 언덕과 언덕사이에 끼어 있는 골짜기 속의 섬서(陝西)를 명확히 볼 수 있다.
위 지도에서 위수(渭水)와 황하(黃河)가 만나는 지점으로부터 서쪽으로 서안(西安)에 이르게 되는데 좁은 협곡은 강(渭水)를 따라 약 1-2km정도의 폭을 형성하면서 이어지고 좁은 곳은 100-200m의 아주 협소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를 건설할 수 있는 곳이며, 북경에서 도망친 서태후(西太后)가 당시 서안(西安)이었던 현 서녕(西寧)으로 온 것은 이곳이 난공불락의 요새였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2.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벌어졌던 1944년 5월말에서 6월초에 걸쳐 일본군은 함곡관(函谷關)을 돌파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세를 가했으나, 중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히게 되었고, 당시 중국군과 일본군 양측이 수십만 명의 병사를 동원하여 화력을 집중시켜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으나 결국 일제(日帝)는 함곡관 점령에 실패하게 되고 이로인해 중국 서북부 지역이 일본군에 점령되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이전의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일제(日帝)는 기동성을 앞세운 전략으로 평지나 개활지의 전투에는 우월했으나, 요새와 같은 험한 지역에서는 그들이 자랑으로 내세우는 기동력이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즉 대륙의 한복판에 존재한 조선(朝鮮)은 거대한 수로(水路)가 정밀하게 발달하여 일본군은 이를 이용하여 군사이동과 전략물자의 원활한 공급을 통해 조선점령을 손쉽게 이루었으나, 현 난주(蘭州)서쪽의 협곡지역에 위치한 역사속의 서안(西安)과 현 운남성(雲南省)위쪽 암반지역에 위치한 사천성(四川省)에 대한 공략은 쉽지 않았고, 이런 지형적 특징이 한족(漢族)의 중국국민당과 공산당이 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3.
안록산(安祿山,703-757)은 당(唐)황제곁의 간신을 제거한다는 기치를 내세우며 20만 대군을 휘몰아 낙양(洛陽)을 점령하는데, 이때 당나라는 서역정벌로 이름을 떨친 고선지(高仙芝)를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여 안록산을 격퇴하게 하였으나, 고선지는 안록산 대군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군대를 하남성(河南省) 섬현(陝縣)에서 동관(潼關)으로 이동시켜 전열을 재정비했고 하지만 임의로 주둔지를 떠나 군(軍)을 이동시켰다는 모함을 받아 진중(陣中)에서 참형되는데 이후 그 뒤를 이어 부원수가 된 가서한(哥舒翰)이 동관(潼關) 방어에 실패해 함락되면서 당현종(唐玄宗)은 결국 사천(四川)지방으로 황제의 길을 통해 양귀비(楊貴妃)와 함께 피난에 나서게 된다.
고선지(高仙芝, ?-756)장군이 전투에 임했던 섬현(陝縣)과 동관(潼關)이 바로 위 지도에서 보여주는 현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 서쪽에서의 일들이며, 당현종(唐玄宗)은 당시 서안이었던 현 서녕(西寧)에서 현 운남성으로어 이어진 티벳고원의 우측에 형성되었던 황제의 길을 통해 촉(蜀)의 수도인 성도(成都) 즉 현재의 사천성 염원현(盐源县) 고원지대로 피난을 한 것이 되겠다.
아래의 사진은 현 중국공산당이 지명이동을 해 만들어놓은 함곡관의 사진들이다.
현재의 함곡관은 진(秦)나라때의 함곡관과 이후 한무제(漢武帝)가 옮긴 한관(漢關)이라 불리는 함곡관 두 개가 존재하고 있다.
2023.06.13.松溪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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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송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6.15 그럴 공산이 매우 크다고 저 또한 생각합니다..항상 건강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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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흑괭이 작성시간 2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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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avansor 작성시간 23.06.15 구글어스로 검색해 보면 현재 함곡관 주변은 험지라곤 찾아볼 수 없는 평지입니다. 구라도 어느 정도라야 믿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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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송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3.06.15 네 그렇습니다. 알고나면 거짓이란것이 훤히 보이는데.. 이 심미안을 찾기가 그리 어려웠습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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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흑괭이 작성시간 23.06.15 엄청 배우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