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주체, 시니시즘
―보들레르의 「웃음의 본질」을 중심으로
윤혜준
들어가는 말, 또는 구두점에 대한 명상
세상의 모든 글 중에 웃음에 대한 글처럼 재미없는 글도 없을지 모른다. 웃음의 특징이자 조건 중 큰 몫을 차지하는 것이 순간일진대, 한없이 이어지는 산문의 풀어쓰기 속에 웃음에 대해 우리 모두가 갖는 애정은 물론, 웃음에 대한 흥미조차 사라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웃음은 간단한 문제인 듯 보인다. 그냥 웃으면 그것으로 끝날 것을 복잡하게 이런저런 말로 분석을 하는 일은 웃음의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웃음에 대한 글을 쓰는 필자는 “웃음” 뒤에다 “주체”라는 덜 ‘웃기는’ 문제를 쉼표 하나의 미약한 힘에 기대어 붙여놓았고, 그뿐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서 “시니시즘”이라는 외래어 표현을 또 이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런 대로 넘어가더라도 줄을 그어놓은 다음, “보들레르의 「웃음의 본질」을 중심으로”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니 도대체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풀어쓰는 산문에 중심이라는 것이 있는지도 의문이려니와, 마치 “보들레르의 「웃음의 본질」”이라고만 하면, 워낙 낫표 속에 집어넣은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의 글이 한국 독자들에게 매우 친숙한 텍스트여서 그냥 이름만 대도 이내 이 글을 대할 자세의 ‘중심’이 잡힌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안 그렇다면 이것은 참으로 외국어 좀 읽는다고 젠체하는 외국문학자의 고질적인 추태가 아닌가?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굳이 보들레르가 여기에 낄 이유는 또 무엇이며, 또한 제목과 부제 사이에 그어놓은 선은 무슨 의미인가, 정확하게 말해서? 앞에 먼저 써놓은 제목의 주제어들, “웃음” “주체” “시니시즘” 은 모두 “보들레르의 「웃음의 본질」을 중심으로” 다시 재편되면서 부차적인 문제로 변하게 된다는 말인가? 말하자면 부제가 원제목을 전복하는 음모를, 뭐라 이름하기 어려운 그 부호, 작대기 하나(―)가 암시하는가?
이런 반문을 던지는 주체는, 물론, 다름 아닌 바로 이 글을 쓰는 주체이다. 자기가 쓰는 글을 두고 이렇게 시비를 걸며 글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 캐묻는 주체가 더 있을 수도 있으나 적어도 제목을 워드 화면에 쳐놓자마자 당장 앞길을 막아서는 또다른 주체가 있으니 그것은 내 안에 있는 남이다. 이러한 주체의 분열이 바로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이다. 아니 어쩌면 이 글의 주제, 또는 주체는 바로 제목과 부제를 갈라놓는 “―”, ‘대시dash’라고 영어 이름을 그대로 옮겨놓을 수밖에 없는 매우 우스꽝스런 모양의 이 구두점인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제목이 나타내는 웃음에 대한 일반론의 세계와 부제가 말해주는 특정 글을 설명하는 문헌학의 세계를 연결하면서도 갈라놓는 이 기호 속에서 웃음과 시니시즘, 주체의 불가피한 분열 따위를 한꺼번에 명상하는 것은 아마도 무리한 일이다. 이러한 무리함과 지나침이 웃음의 본질과 친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이 글을 애초에 쓸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웃음과 주체의 분열
지나침과 과장의 정신이 이 글을 보호하기에, 보들레르의 글을 소개하는 정직한 문헌학은 잠시 미뤄두고 먼저 제목에 등장한 말들을 갖고 논의를 시작하겠다. 그런데 소제목으로 내건 “웃음과 주체의 분열”이란 말도 어딘가 수상쩍다. “웃음과”의 “과”가 문제다. 웃음이 주체의 분열과, 말하자면 “술과 안주”처럼, 그냥 “과”로 연결하면 될 정도의 친숙한 사이라는 말인가? 아니라면 무슨 뜻으로 “과”를 달았는가? 이렇게 막상 자기 글은 못 쓰면서 남의 글을 놓고는 시시콜콜 따지는 또다른 필자의 주체가 다시 질문을 던진다. 이대로 가다가는 글을 완성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고 판단한 필자의 보다 생산적 주체는 대답한다. “그래, 좋다. 내 주장은 한마디로, 웃음의 본질은 주체의 분열에 있다는 것이다, 됐냐? 그래서 ‘웃음과 주체의 분열’이라고 묶어놓았다.” 하지만 친절한 독자마저 이렇게 무례하게 대접할 수는 없는 법이니, 먼저 문헌적 자료들을 갖다놓고 보다 차분하게 논의를 펴고자 한다.
저자의 다른 글을 보아서는 별로 웃기는 사람같이 보이지는 않는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에 대한 명제들은 주장이 명료하고 간단한 만큼, 먼저 거론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왜 웃는가? 뭘 보고 웃는가? 이 질문에 대해, 베르그송은 허망할 정도로 분명하고도 간결한 대답을 한다. 베르그송에 의하면 세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째로는 인간이기 때문에 웃고(다시 말해서 개나 고양이가 웃는 법이 없고), 둘째로는 웃음은 동정심 따위의 감정이 배제되었기에 일어나는 현상이며, 셋째로는, 웃음은 같이 웃는 집단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한다.1) 보다 자세히 말하면, 웃음은 자신은 멀쩡한 인간들의 집단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다른 인간이 인간보다는 인간 이하의 모습(예를 들면 기계나 무생물의 모습)을 보일 때 웃는다는 것이다.2) 이때 동정 등의 감정이 일체 개입하지 않기 때문에 웃음은 그 자체로 ‘차가운’ 웃음, 즉 냉소이며 비웃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남들 앞에서 실수를 하다가 집단적 웃음의 대상이 되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긍을 할 만한 주장이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남이 같은 실수를 했을 때 얼마나 우리는 껄껄대며 웃음보를 신나게 터뜨리는가? 동정은 눈물로 표현된다면 조롱이 웃음의 ‘본질’인 듯하다. 그렇다면 웃음과 시니시즘, 즉 냉소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친한 사이인 것 같다. 이 글의 제목도 ‘웃음과 시니시즘’이었다면 더 글쓰는 일이 쉬웠을지 모른다.
그러나 보다 흥미로운 문제는 주체가 웃음이 터지는 상황에서 어떤 모양이 되는가에 있다. 왜냐하면 내가 남들 앞에서 실수를 해서 내가 웃음의 대상이 되었을 때 얼굴을 붉히며 창피해할 수도 있으나 나도 따라 웃어버리는 것도 좋은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일부러 남들을 웃기기 위해 자신이 우스꽝스런 짓을 하며 함께 웃음을 나누는 경우도 흔하다. 실제로 이것은 사회생활을 오래 하지 않은 어린 인간들, 즉 어린아이들에게도 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어른들이 자신의 어눌한 언행을 보고 웃는 모습을 보고는 일부러 그 행동을 반복해서 웃음을 다시 유발하는 경우를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자주 본다. 이런 경우에 웃기는 행동을 한 ‘나’와 ‘나’의 웃기는 행동을 보고 웃는 ‘나’는 같지 않다. 둘은 배우와 관객처럼 극과 극에 서 있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웃음으로 자신을 분열시킬 수 없는 ‘나’들도 많이 있다. 엄숙한 권력자나 종교 지도자, 또는 기타 각종 권위의 주체로만 자신을 내세우는 몸들은 웃음 속에 자신을 일순간 분열시키는 재미를 모른다. 그들은 오직 남들의 우스운 모습만을 비웃을 뿐이다. 또한 서구인들이 근대시대에 줄곧 전제로 삼아온 ‘개인 주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생각하는 행위’(cogito) 속에서 단일한 한 개의 단위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인도하는 거래 속에서 나의 돈, 나의 이익을 대변하는 한 개의 단위로만 존재할 때, 나는 나와 분열되거나 분리될 수 없다. 그런데 웃음은 바로 이러한 엄숙한 개인 주체들을 분열시키고자 한다. 웃음의 파괴적 힘은 그 어떤 신앙이나 이데올로기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다. 웃음과 농담은 꼭 같지는 않으나, 농담에 대한 프로이트가 말한 바, “이성, 비판적 판단, 억압―이것들은 농담이 차례로 맞서 싸우는 대상들”3)이라는 말은 웃음의 정치성향을 잘 요약해준다. 웃음은 서양의 이성 중심주의, 단일한 개인 주체에 대한 신념들에 맞서는 힘이다. 웃음이 분열시키는 주체는 스스로 단일한 한 가지 속성으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주체이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다. 인간은 생각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살고, 정서로도 살기 때문이요, 경제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성생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체가 웃음으로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것은 살기 위한, 보다 즐겁게 살기 위한 적절한 조치이다. 웃음은 프로이트가 말한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의 가장 소란하고도 가시적인 표현이다. 철학자 데카르트가 라틴어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하고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라고 했을 때, 거의 동시에 데카르트의 또다른, 보다 세속적인 주체는 불어로 “je ris, donc je vis”(나는 웃는다, 그래서 나는 산다)고 했을 법하다.
타락의 징표로서 웃음
위와 같은 연유에서 보들레르는 「웃음의 본질De l’essence du rire」을 ‘철학자 또는 현자는 웃지 않는다’는 명제로 시작한다. 예컨대 데카르트 같은 현자(Le Sage)가 혹시 웃는 경우가 있다 해도 그 사실을 겁낸다. “현자는 웃음을 두려워한다, 그가 이 세상의 탐욕스런 외관들을 두려워하듯이.” 왜 그런가? 보들레르에 의하면, 현자 또는 철학자와 웃음의 “원초적 속성” 간에는 직접적인 모순관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자의 대표로 데카르트를 들었지만 보들레르는 웃음의 정신이 허용하는 특유의 과장법에 힘입어서 현자 중의 현자인 “말씀이 육화된” 예수의 경우를 들면서, “모든 지식과 모든 권력을 가진 그분의 눈으로 보면 희극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말씀이 육화된 이는 분노한 적도 있고, 심지어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4)고 한다. 이 말을 다시 하면, 오직 타락한 인간들만이 웃을 수 있고, 희극은 절대자가 아닌 상대자들의 예술이라는 말이다. 보들레르의 웃음론은 사뭇 신학적 구도 속에서 전개된다. 웃음이 인간의 특징이라면 그것은 웃음이 “먼 옛날의 타락이라는 우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527∼528) 즉, 웃음은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과 이브의 ‘타락’에 기원이 있고, 이 타락이 악마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볼 때, 웃음은 “악마적 기원”(528)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웃음은 “인간이 갖고 있는 악마성의 가장 명백한 징표”(530)라고 보들레르는 말한다.
이쯤 되면 웃음을 인간이 보다 재미있고 즐겁게 살고자 하는 쾌락원리의 표현이라고 한 필자의 주장과 정반대로 논의가 흘러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웃음 속에 담긴 분열의 논리로 보면 두 가지가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너무도 편하고 행복해서 웃을 일도 없던 에덴 동산에서 과연 쾌락이라고 할 것이 있었겠는가? 첫번째 쾌락은 「창세기」가 분명히 증언하듯이 금기를 깨고 과일을 따먹었을 때 얻어졌다. 과일을 먹고 눈을 떠서 무화과 잎으로 자신들의 성기를 가리게 된 것을 보면 아마도 쾌락 중의 쾌락인 섹스를 이때 처음 한 모양이기 때문이다. 아무런 결핍이나 모순이 없는 낙원에서는 쾌락도 없고 웃음도 없다. 이 두 가지는 다 굳이 뱀으로 변신하는 수고까지 해준 사탄 덕에 우리 인간들이 얻은 것이다.
보들레르는 같은 논지를 순수한 자연 속에 사는 두 남녀를 그린 베르나르 드 생피에르(Bernard de Saint-Pierre)의 『폴과 비르지니Paul et Virginie』 (1787)를 거론하며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루소를 의식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루소는 주지하다시피 원초적 자연 속에서 인간은 선했다는 주장을 폈다. 보들레르식으로 말하면 이것은 원초적 자연 속에서 인간은 웃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그는 실제로 “원시적 민족들”(532) 간에는 웃음을 발견할 수 없고, 오직 발전한 근대 기독교 국가들에서만 웃음이 하나의 문화이자 예술로 발전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여부는 실제로 이러한 “원시적 민족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이 사는 땅을 탐험한 제임스 쿡의 말을 들어본 후 판단할 일이다. 쿡은 오늘의 호주 땅을 둘러본 후 돌아와서 출판한 여행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들은 어떻게 보면 지구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처럼 보이겠지만 실제로 이들은 우리 유럽인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다. 유럽에서 그렇게들 원하는 사치품들은 물론 생필품들과도 전혀 인연이 없는 이들은 이것들을 사용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행복한 것이다. 그들은 사회적 조건의 편차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 평안한 상태 속에 산다.5)
일체의 세상만사에 동요되지 않는 “평안한 상태”에 사는 이들은 그야말로 하나의 집단으로서 보들레르가 말한 “현자”에 해당된다. 단, 예수와는 달리,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권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는 것이 없고 가진 힘이 없기 때문에 이들은 평안할 수 있다. 하긴 실제의 예수도 소유한 것 없이 떠돌아다닌 처지이니 이 점에서는 양쪽이 서로 통하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웃음은 문명의 사치와 과잉 욕구,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사회적 조건의 편차”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위에 베르그송이 지적한 웃음의 특징 중 세번째는 웃음의 집단성이었다. 사회적 편차가 구조화되어 있는 계급사회에서 웃음은 계급의식이나 기타 집단적 편견의 가시적인 표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쿡 선장과는 달리 유럽의 섬세한 문명에 깊이 젖어 있는 집단의 구성원은 이들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릴 수 있고, 그 웃음을 통해 쿡에 대한 반박을 표현할 것이다. 이러한 웃음은 현자들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컨대 쿡처럼 원시인들을 좋게 보는 루소를 비판하는 보수적 기독교 사상가 조제프 드 메스트르는 루소가 “인간은 자연 속에서는 선하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모습이 “웃음보를 터뜨리게 만든다”6)고 한다. 인간의 원초적 선함을 비웃는 드 메스트르의 웃음은―비록 보들레르가 그를 “성령이 활기를 주는 병사”(526)라고 「웃음의 본질」에서 칭송했더라도―웃음의 악마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 수 없다.
웃음을 두고 하나의 거대한 신학적 내지는 역사철학적 인간학을 펼치는 보들레르의 허풍은 가히 웃음과 광대정신 그 자체를 보여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역사를 순수했던 원초적 자연과 타락했거나 아니면 보다 더 섬세하게 발전한 근대 문명으로 크게 나누는 시각은 꼭 보들레르의 전유물은 아니다. 오히려 선명하게 양자를 나누기는 전혀 허풍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쉴러의 예술론이 더 심해 보인다. 쉴러는 모든 문학이 “순진naive”하거나 아니면 “감상적sentimental”인 것으로 본다. 순진한 예술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창작 주체가 객체로서 자연의 순리를 그대로 따라가는 예술이고, “감상적” 예술은 문자 그대로 감상할 대상과 창작하는 주체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 경우이다. 이때 예술가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이 거리를 좁히고자 하는데, 하나는 현실의 한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과 다른 하나는 자신이 갖고 있는 “무한성의 관념”을 견지하는 것이다. 후자에 집착하면 그 결과는 우울한 비가를 낳게 되고, 전자는 풍자를 낳게 된다고 쉴러는 주장한다.7) 순수한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타락한 현실을 보고 순수함을 그리워하며 우울해하는 것도 한 가지 사는 방법이요 예술을 하는 기법이다. 이 경우 얻어지는 이점 중에 가장 큰 것은 주체가 자신의 관념과 이상 속에 매달린 채 자신의 단일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예술가는 ‘세상은 다 타락해도 오직 나는 나의 이상 속에 침잠해 있겠다’라는 태도를 보인다. 반대로 타락한 현실의 한계를 모두 인정하고 나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을 비웃고 풍자하는 일이다. 이때 웃음은 한편으로는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기도 하나 동시에 현실과 이상 간의 괴리를 인정하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풍자의 주체는 현실보다 이상을 아는 자신이 더 우월함을 웃음으로 확인하지만 동시에 현실이 겨우 풍자나 하고 있는 자신보다 우월함도 인정하는 것이다. 이 양자 사이에서 주체는 분열된다. 그러나 웃음에서 파생되는 쾌감은 분열된 주체를 치유하는 봉합의 방법이 되기도 한다. 주체는 관념 속에 존재할지 모르나 주체의 생존은 오직 웃음에 달려 있다.
그러나 웃음을 통한 생존은 대가를 요구한다. 웃음은 일단 불행을 당한 대상이나 실수를 한 사람보다 자신이 우월하다는 인식의 확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은 웃음의 대상이 되는 인간과의 절대적 거리를 전제한다. 보들레르가 드는 예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 갑자기 넘어졌을 때, 그것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는 경우이다. “가엾은 그자가 최소한 얼굴이 상처로 망가지고, 심지어 사지가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웃음은 이미 터져버린 것이다, 억제할 수 없이 일순간에 말이다.”(531) 이때 불쌍한 사람은 넘어진 사람뿐만 아니라 바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는 쪽도 포함된다. 왜 그런지는 프로이트가 말한 “상황의 희극”이 대답해준다. “상황의 희극”이란 상대방의 실수를 보고 웃으나 웃음의 대상이 되는 사람처럼 웃는 사람도 같은 실수를 할 수 있는 상황에 있을 뿐이지, 꼭 자신이 상대방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경우이다. 이때, 웃음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자기자신의 이전 자아와 비교할 때만 열등한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도 같은 여건에서는 달리 행동하지 못했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8) 이렇다면 문제는 보다 복잡해진다. 실수를 한 사람이 실수하기 전의 자신과 비교할 때 실수로 인해 열등해진 것이라면 여기서 한 차례의 주체분열이 일어난 셈이고, 웃는 쪽에서도 자신이 실수를 할 수 있는 상황에 스스로를 투사해놓고 웃는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분열을 체험한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보편적인 상황이라면, 마치 20세기의 부조리극들이 주는 웃음처럼, 웃음은 바로 늘 실수와 우연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모습 그 자체를 두고 보이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부조리 연극을 본 적이 없는 보들레르는 다른 예를 통해 웃음을 존재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영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보들레르가 좋아하던 책 중에는 찰스 매튜린(Charles Maturin)의 고딕 소설 『방랑자 멜모스Melmoth the Wanderer』(1820)가 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 멜모스는 수명을 늘리기 위해 악마와 약조를 맺고 나서 죽지 못한 채 영원히 방황을 한다. 단 그가 이 방황에 종지부를 찍으려면 다른 사람에게 이 약조를 떠넘겨야 하는데 아무도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멜모스는 다른 인간들보다는 한편으로는 우월한 처지이기도 하나 동시에 더 불쌍한 처지이기도 하다. 이 두꺼운 소설에서 반복적으로 독자에게 들리는 것은 멜모스의 귀를 찢는 듯한 너털웃음소리이다. 보들레르는 이 웃음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그는 삶의 근본 조건들과 완전히 결별했다. 그래서 그의 신체적 기관들은 더이상 그의 생각을 지탱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그의 웃음이 자신의 오장육부를 꽁꽁 얼어붙게 한 후 뒤틀어놓는 이유인 것이다.”(531) 육체와 정신의 완전한 괴리에 시달리는 멜모스, 그러나 역으로 말하면 자신의 실존적 처지를 한탄하는 정신의 세계에서 기인한 그의 웃음은 오장육부, 즉 육체의 반응까지 유도해내기에, 그것은 정신과 육체를 연결하고 봉합하는 생존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이 생존법은 분명히 고통스럽다. 기쁨이 단일함의 체험이라면, 웃음은 “이중의 모순적 감성의 표현”(534)이며 그것은 오장육부를 뒤틀어놓는 경련을 수반한다.
방랑자 멜모스는 누구를 보고 웃는가? 그의 웃음의 대상은 결국 자기자신이다. 다른 인간들이 자신보다 더 열등해 보이나, 심지어 굶어죽는 아이들조차 악마와의 거래를 떠넘기려는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다. 결국 멜모스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을 수 없다. 그는 영원히 살아야 한다. 그가 사는 법은 스스로를 비웃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를 비웃을 수 있는 능력을 보들레르는 “철학자”나 광대, 또는 희극 예술가의 장기라고 본다.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사람이 자신의 넘어지는 꼴을 보고 웃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그가 우연히 하나의 철학자로서, 습성에 의해 빠른 속도로 자아를 분열시켜서(d?oubler) 자기자신(moi)의 모습을 냉정히 관찰하며 그 상황에 개입할 수 있는 경우는 예외일 것이다.(532)
넘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넘어지는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스스로를 냉담하게 구경하며 웃는 철학자의 예는 처음에 논의를 시작한 “현자는 웃음을 두려워한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폐기하는 듯하다. 아니면 “철학자”와 “현자”는 서로 다른 질서 속에 존재하는 셈일 텐데, 비유컨대 쉴러의 ‘순진’과 ‘감상’의 이분법처럼, 현자가 순진이라면 자기분열의 능력을 습득한 철학자는 ‘감상’의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이 될 것이고, 감상적 예술가처럼 이 후자의 철학자는 대상과 자신 간에 명백한 거리를 둘 뿐 아니라 바로 자기자신을 대상으로 삼는 기술까지 연마한 것이다. 이러한 기술은 “철학자”뿐 아니라 “희극적 감각을 개발시켜서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데 사용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도 발견되는데, 이때 웃음과 희극성은 “인간 속에 영속적인 이중성, 즉 같은 순간에 자기자신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이 되는 힘이 존재함을”(543) 나타낸다고 한다. 신학적 내지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웃음이 타락의 징표라면, 그리고 웃음은 인간의 본원적 이중성과 분열상을 드러낸다면, 웃음은 근대성의 기초를 이루는 개인 주체의 단일함과 유일함에 대한 신념들이 이미 와해되고 있음을, 또는 본질적으로 와해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웃음은 근대를 해체하며 근대를 문자 그대로 ‘탈근대화’하는 파괴적 힘인 것이다. 웃음은 그러한 의미에서 근대가 예컨대 루소주의적인 순진한 인간관에서부터 일탈하고 ‘타락’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그러나 반대로 근대가 하나의 경직된 환상일 뿐이라면, 또는 애초에 불가능하고, 따라서 위험한 집착이라면, 근대를 일탈시키는 웃음은 오히려 근대를 치유하는 처방이요, 근대의 폐해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가 여전히 살아남는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9)
시니시즘
물론 자신을 둘로 분열시키는 웃음이 삶을 사는 최선의 방법일 수는 없다. 특히 이러한 분열적 관조가 하나의 보편적 삶의 양식이 되어버린 탈근대 시대, 후기자본주의 시대에는 이러한 분열이 웃음마저 생산하지 못할 정도로 그 생명력을 상실한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관습화된 주체분열의 양태를 『냉소적 이성 비판Critique of Cynical Reason』을 쓴 페터 슬로터딕은 시니시즘이라고 부른다. 슬로터딕이 그리는 냉소주의, 시닉(cynic)의 모습은 바로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시닉들은 우울증 환자와 멀쩡한 사람 사이의 경계선에 있는 자들로, 이들은 우울증의 증상들을 조절할 능력이 있고 업무능력은 대체로 유지한다 (……) 이들의 활동의 근저에는 일종의 세련된 슬픔이 깔려 있다. 왜냐하면 시닉들은 바보가 아니어서 만사가 늘 귀착되는 허망함을 이따금씩 분명히 목도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심리적 장치는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영속적인 의구심을 하나의 생존의 요소로서 포용할 정도로 유연하게 변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의 실상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던 대로 사는데, 왜냐하면 단기적으로 보면 상황의 힘과 자기보전의 본능이 똑같은 말을 하고 있으며, 그 말의 내용인즉 사는 것이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10)
말하자면 행동의 주체와 인식과 반성의 주체 간에 선명한 분열이 생겼으면서도 그것이 메워지지 않은 채 그냥 그대로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슬로터딕은 “계몽된 허위의식”이라고 부른다. 계몽이 되어 “바보가 아니”니 자신의 실상을 인식은 하고 있으나, 그것은 인식으로 그칠 뿐 시닉들은 현실의 생존논리에 맹목적으로, 기계적으로 복종한다. 여기서 오장육부를 뒤트는 건강한 웃음이 나올 리 만무하다. 대신 탈근대 시대를 사는 시닉들은 “우울해하고 경멸하는 듯한 미소”(143)를 지을 뿐이다. 아니면 찰스 젱크스가 펠리니(Federico Fellini)의 영화를 놓고 쓴 표현대로, “웃기는 슬픔의 우울한 광경”11)이 시니시즘이 얻을 수 있는 최대의 미적 경지이다.
슬로터딕의 두꺼운 책은 바로 이러한 분열적 우울증을 그가 “키니시즘”(kynicism)이라고 부르는 건강한 웃음의 세계로 치유하고자 하는 사뭇 계몽적 기도를 깔고 있다. 키니시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관념과 제도의 허망함을 비웃고, 각종 기행을 일삼으며 희랍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e)의 “개철학”(“kynicism”은 희랍어로 개를 의미하는 “kyon”에서 나온 것이므로)을 의미한다. 디오게네스는 유명한 일화대로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라고 했을 뿐 아니라, 아테네의 광장에서 대변을 본다든지, 플라톤의 에로스 철학에 대한 풍자로서 시장 한복판에서 자위행위를 한다든지 함으로써, 신체적 체험과 신체의 “주권을 적극적으로 예시”12)했다고 한다. 그가 모든 사람 앞에서 똥을 눌 때 “철학적 진실이 들어 있는 웃음이 시작된다.”(106) 이 철학적 진실이란 신체적 체험을 무시한 관념론과 거기에 근거한 제도들이 허망한 것임을, 육체적 삶은 무시해도 좋다고 주장하는 “관념론에 대한 평민적 반론”(111)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의 “철학적” 인식이라면 그것은 논리적 담론과 저술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뱃속 깊이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웃음, “우리의 동물적 차원에 뿌리를 두고 일체의 제약 없이”(143) 폭발하는 웃음이다. 이 웃음의 효과는 따라서 관념적 주체와 신체를, 두뇌가 들어 있는 머리와 아랫배를 철저히 분열시키는 것이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체의 주체, 일체의 자아를 없애버리는 해소와 배설의 웃음이기도 하다. “이런 웃음 속에는 아무런 자아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스스로를 기념하는 맘 편한 에너지만 있을 뿐이다.”(144)13)
결국, 시니시즘의 우울증을 키니시즘의 호탕한 웃음으로 치유한다면 그것은 분열된 상태이면서도 행위의 주체에게 묶여 있는 채 우울해하는 시닉의 세계에서 아예 자아와 주체를 폐기해버리는 극단적 단계로 나아가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보들레르에게서도 찾을 수 있다. 보들레르는 희극을 단순한 희극과 그로테스크한 희극으로 나눈다. 전자가 어떠한 명백한 의미, 예컨대 웃는 사람이 웃음의 대상보다 우월하다는 뜻을 전달하는 “의미 전달 희극comique significatif”이라면 후자는 의미 전달의 세계를 초월한 극단적 웃음의 세계로, 하나의 “절대적 희극comique absolu”이라고 할 만하다.(536) 이 후자의 희극성이 만들어내는 웃음은 “어딘가 심오하고, 원초적이며, 자명한 데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행위의 희극성에 의해 빚어진 웃음보다는 순진한 삶과 절대적 기쁨에 보다 가깝다.”(535) 슬로터딕식으로 말하면, 현실에 묶인 시니시즘이 아닌 디오게네스의 건강한 웃음의 심오한 진리와 보다 가까운 “절대적 희극”은 웃음의 자아분열적 속성을 극대화하여 오히려 하나의 통일을 이루는 데까지 이른다고 보들레르는 생각한다.(536) 이러한 ‘절대적 희극’을 예시하기 위해 보들레르는 몇 가지 후보들을 거론하나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한 영국 극단의 판토마임이다. 아무런 대사가 없고, 따라서 언어적 의미전달이 없는 이 세계에서 피에로는 극단적이고 과장된 행동을 계속하는 가운데 “정신을 빼는 과장법의 소용돌이”(539)로 관객들을 몰고 간다. 예를 들어 자신의 목이 단두대에 의해 잘리자 몸만 남은 피에로는 뚜벅뚜벅 걸어가서 목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태연하게 걸어간다.(539) 이러한 절대적 과장의 세계에서 웃음에 개입하는 사회적, 심리적 의미 부여는 일체 산화되며 생각과 관념, 의미가 정지된 채 뱃속에서부터 “동물적 차원에 뿌리를 두고 일체의 제약 없이” 웃음만 터져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시니시즘의 “웃기는 슬픔의 우울한 광경”으로 가득한 우리 시대에 슬로터딕의 디오게네스, 또는 보들레르의 피에로가 보여주는 웃음의 극단적 경지, 키니시즘의 원초적 세계가 하나의 치유책이자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애초에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만약에 디오게네스가 20세기 말에 다시 태어난다면? 만약에 그가 방랑하는 멜모스처럼 죽지 못할 운명이라 지금까지 벌어진 역사의 모든 광경을 그대로 목도해왔다면? 슬로터딕 자신의 말대로, 아마도 오늘날의 디오게네스는 “쓰레기통 위에 앉아서, 술이 잔뜩 취한 채 머리가 멀쩡하지 않은 사람처럼 혼자 키득키득 웃고 있는”14) 모습으로 변해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키니시즘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시니컬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것의 가능성은 알지만, ‘바보가 아니므로’ 또는 단지 미치기가 두려우므로 현실의 우울증과 멀쩡함의 경계선에서 씁쓸한 미소나 짓고, 아니면 마치 흐느끼는 소리와도 비슷하게 키득키득 웃는 것밖에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결국 우리에게 허용된 그림은 늘 “웃기는 슬픔의 우울한 광경” 외에 또 무엇이 있는가? 설마 일순간 키니시즘의 쾌활한 웃음을 즐겼다고 해도, 웃음은 금세 왔다가 또한 즉시 사라지는 것이니 무엇이 우리에게 남는가?
그 대답은 어쩌면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연극들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갈 데 없는 두 부랑자가, 또는 몸이 반쯤 묻힌 두 남녀가, 자신의 녹음 테이프를 혼자 들으며 킥킥 웃는 노인이 베케트의 무대 위에서 의미 없는 웃음, 또는 삶의 의미 없음을 일깨워주는 웃음을 관객들이 터뜨리게 한 후 사라진다. 그러나 연극은 다음날 또 공연되고 또 새로운 웃음이 무대와 객석 사이에서 터져나온다. 베케트는 시니시즘으로 버티는 우리 현대인, 탈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모사(模寫)하거나 묘사하지 않는다. 그러한 ‘의미전달 희극’의 ‘리얼리즘 정신’으로 시니시즘의 거리를 메울 수 있던 시절은 어쩌면 영영 가버렸는지 모른다. 베케트의 인물들은 실제 현실에 못 미치는, 또는 그것을 초월하는 현실 속에서 보들레르가 열광한 영국인 피에로처럼 “절대적 희극”을 과장법의 도가니 속에 전개한다. 의미와 관념, 주체, 역사, 이 모든 것들이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계몽의 변증법’ 속에서 의미의 파편이 쓰레기처럼 쌓여만 가는 이 시대에, ‘근대성의 기획’ 또는 ‘리얼리즘의 권위’를 다시 세우자는 주장 정도로 과연 시니시즘의 비웃는 소리를 잠재울 수 있을까?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 시니시즘의 고질병을 고칠 수 있을까? 오히려 시니시즘에 맞서는 힘은 의미의 세계를 무너뜨리고, 주체를 단순히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폐기하는 절대적 희극, 키니시즘의 미학에서 찾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