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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연 행사후기

12월 18~19일 1박2일 영주 순흥 한동연 걷기여행 (영주 소수서원, 축서사, 부석사, 선비촌 숙박, 소백산자락길) 후기 (상)

작성자발견이(발도행)|작성시간14.12.21|조회수312 목록 댓글 2

지난 이틀 간(12/18~19) 영주 순흥의 아름다운 문화여행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소백산자락길을 관리하는 영주문화연구회와 영주시의 후원으로 다녀왔습니다.

 

부석사와 소수서원으로 대변되는 유교와 불교의 명소 순흥을 1박2일 여행의 후기로 안내합니다.

 

*이번 여행은 한국걷기동호회연합의 회원단체인

 (금수강산, 발도행, 산들걷기, 세상걷기, 유유자적 등 다섯 동호회가 함께 했습니다.)



영주문화연구회의 배용호 위원장님께서 1박2일간 직접 동행하시며

영주 순흥의 찬란하고, 장엄하고, 때론 가슴 아픈 역사에 대해 알려주셨습니다.

45년간 교직에 계시며 후학을 양성하셨으며, 지금은 고향을 위해 이렇게 봉사해주고 계십니다.

덕분에 이번 여행에 참가한 40명은 순흥의 진면목과 핵심들을 짧은 기간에 효율적으로

보고 체험하고 갈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처음 간 곳은 순흥 읍내리 고분벽화를 보러 가는 길입니다.

 

 

 

이 순흥 일대에는 이러한 고분이 약 2천기 정도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만,

거의 대부분이 다 도굴되어서 아쉬움이 크다고 합니다.

 

 

 

좁은 문을 통해 고분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물론 이 고분은 모형입니다. 대개의 고분들은 보존을 위해 보존처리를 한 후 묻어두고,

이렇게 똑같은 모형을 만들어서 공개관람한다고 합니다.

 

 

 

고분 입구의 그림들은 수호신의 개념인 신장 그림인 듯합니다.

 

 

 

배 위원장님께서 자세하게 7~8명씩 들어오게 하여 설명해주십니다.

이런 고분 문화는 고구려 문화로써 당시 순흥이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이어서

각 나라의 세력이 커질 때마다 이곳 순흥은 고구려 땅이기도 했고, 신라땅이도 했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겠습니다.

나라가 바뀌는 일을 자주 경험했던 당시 이곳 민초들의 삶이 그다지 순탄치는 않았을 것 같네요. T.T

 

 

 

 

기미년이라는 갑자를 통해 진평왕 연간인 599년으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는 모양인데,

갑자라는 것이 60년마다 한번씩 돌아오기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글씨 하단 우측의 깃발 모양을 두고, 일본에서 남자어린이날(5월5일)에 집 밖에 아이의 장수와 발전을 기원하는

잉어깃발(고이노보리)의 시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윤곽은 엇비슷한 면이 있습니다만

디테일하게는 다른 것 같다고도 보여집니다.(개인견해) ^^;

 

 

 

실제 고분에는 이런 벽화가 남아 있지 않아 적외선 등의 특수 촬영을 통해 지워진 그림을 찾아내

복재하며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즉, 실제 고분에는 설령 들어가도 이런 그림을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는 뜻이지요.

연꽃 모양의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문화와 연관되어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역시 발빠른 네엔스님은 고분 원형이 있는 언덕을 오르십니다.

하지만 250M나 떨어져 있어서 곧 내려오셨답니다.

 

 

 

위에서 내려본 고분군

 

 

산들걷기에서 가장 많은 열 분이 오셨습니다. ^^

 

 

발견이의 도보여행은 아홉 명이 참가했습니다. 짱구삼춘님은 어디로?

 

 

발굴된 순흥지역의 고분 중에 가장 큰 태장리1호분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6세기 전후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상걷기에서 다섯 분이 오셨습니다. ^^

 

 

 

맛나는 점심시간, 순흥에 오면 빼먹지 말고 먹어주어야 하는 순흥묵밥집입니다.

 

 

겨울이어서 따듯한 국물에 묵밥이 제공되더군요.

여러번 먹어봤는데, 역시 맛납니다. ^^

 

 

 

 

 

순흥 읍성의 흔적들.

 

 

 

옛 순흥도호부 시절 관청건물이 있던 곳에 읍사무소가 있고 여러 유물들이 있습니다.

배 위원장님께서 우리나라 문화마을 1호인 '읍내리 문화마을'에 대해 설명중이십니다.

 

 

 

순흥 읍내리가 문화마을 1호로 지정된 것에는 여러 마을전통민속행사가 있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두례골 성황제, 읍내리 농악, 동서부줄다리기 등이 그런 것입니다.

이런 민속문화의 발달은 양반문화가 아닌 평민문화가 고도화 된 지역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답니다.

 

서민문화가 커지게 된 이유는 2차 단종복위운동이었던 정축지변(1457, 세조3년) 당시 이곳으로

위리안치된 금성대군과 뜻을 같이한 부사 이보흠, 그리고 이 지역의 토호였던 순흥 안 씨 등등의

양반 가문을 완전히 발본색원하고, 도호부를 폐쇄한 일에 기인한다고 합니다.

이때 양반 가문들이 완전히 몰락하여 서민문화가 발달되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후에 소수서원을 통해 다시 유교문화가 순흥에 뿌리를 내리지만 정축지변의 영향은 이리도 컸던 모양입니다.

 

※위리안치는 유배의 한 종류로 자신의 연고가 있는 지역으로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가시덤불을 친

   담벼락 안의 집에 갇히는 벌입니다. 지금도 소백산자락길 1코스를 걷다보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 된 집을  복원해 놓은 곳을 볼 수 있습니다.

※금성대군이 이곳으로 위리안치된 이유는 외조모, 즉 세종의 장모 되는 분의 고향이라는 이유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왜 금성대군을 이쪽으로 귀양보냈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곳은 단종이

  유배된 청룡포와 불과 80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거든요.

  당시 걸음으로 밤을 새워 다녀올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소백산자락길 12코스의 길은 금성대군 내통길이라는 별칭이 있다고 합니다.

 

 

 

 

 

오랜 역사가 서린 지역의 읍, 면, 동, 군, 시 사무소 앞에 보면

늘 이런 늠름한 노거수들이 위엄을 세워줍니다. 오른쪽의 소나무는 연리지입니다. ^^

 

 

 

면사무소 한쪽에 남아 있는 옛 순흥도호보 시적의 관아건물 주초석과 비석좌대 등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도에 해당되는 도호부였으니 순흥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을 지 짐작해봅니다.

 

 

 

옛 도호부 자리 옆에는 멋진 한국식 정원이 자리합니다.

천원지방(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원칙에 따라 둥글고 네모난 연못을 이어 만든 이곳 너머로

지금의 경로당 같은 역할을 했던 조선시대의 경로소 건물이 보입니다.

 

 

 

 

인공인 듯 인공이지 않은 듯한 한국식 원림입니다.

 

 

 

 

 

팔작지붕에 간결한 공포로 단정한 느낌을 주는 건물입니다.

긴 부연을 통해 노인들이 쉴만한 그늘과 겨울의 채광을 돕는 구조입니다.

 

 

 

안에서 어느분이 전화통화를 하고 계시네요.

지금도 실제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지요. 역시 집은 사람이 살면서 관리해야... ^^;

 

 

함께 하신 분들 단체사진 찰칵! ^^

 

 

 

 

차를 잠시 타고 이동하여 소수서원에 도착합니다.

소수서원은 진입로의 솔숲이 아주 근사하지요.

 

 

소수서원에 들기 전에 만나는 숙수사지 당간지주 입니다.

당간지주란 절 입구에서 절의 영역을 알려주는 높은 깃발(당)을 세우던 깃대를 고정하는 역할을

한 석조물입니다.

당간지주의 크기를 갖고도 가람의 크기와 위세를 짐작하곤 하는데요.

숙수사지 당간지주의 크기나 위용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크기로 치면 강릉의 굴산사터 당간지주가 가장 크지만 조형미로 보자면

미끈한 멋을 간직한 숙수사지 당간지주의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소수서원과 소백산 초암사 계곡을 잇는 물줄기인 죽계천을 두고 죽계구곡이라고 합니다.

고려 때 문장가인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의 배경이 된 곳이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퇴계 이황 선생은 이곳부터 1곡을 쳐서 상류로 향했으나, 순흥 부사 신필하가 상류부터 바위에

1곡을 새겨 놓은 탓에 그것이 굳어져서 지금에 이른다고 합니다.

 

 

 

죽계천 앞에서 이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다른 서원에 비해 매우 개성적인 건물배치를 하고 있는 소수서원으로 입장합니다.

1543년 지어져 강당으로 쓰이는 명륜당은 대규모 공사중이네요.

 

 

 

선생님들이 기거하시던 직방제 건물의 처마선이 참 곱습니다.

직방제 마루에 난간이 있는 것은 선생님 방에서 뒷걸음질로 나오는 학생들이

마당으로 자칫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의 뜻도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으셨습니다. ^^

 

 

 

영정각의 고운 처마선을 배경으로 소수서원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소수서원은 중종37년인 1542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고려 때 주자학을 조선에 받아들인

안향을 기리면서 세운 백운동서원이 그 시초라고 합니다.

백운동서원을 처음 세울 당시 기근이 심했음에도 서원 건립을 추진했다는 말을 보면 서민을 위한 정책에는

무관심한 관리이지 않나 싶다가도 당시 중국으로 보내던 산삼공출의 어려움을 줄이기 위해 인삼 재배를

통해 서민의 고통을 줄인 공로도 있다니 판단은 유배해야 할 듯 합니다. 

인삼재배를 통해 서민고통이 진짜로 줄었는지 아니면 그로 인해 공납 과정에서 이득을 챙기던

상인과 관료의 배만 더 불러졌는지는 알수 없으나, 아무튼 기록에 의한 것은 그렇다고 합니다.

 

백운동서원 건립 이후 이곳에 부임한 퇴계 이황 군수가 명종 때 상소를 올려 소수서원이라는

명종 친필의  편액을 받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됩니다.

'사액서원'이란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을 나라에서 공식 인정한다는 뜻으로 보통 임금의 친필 편액이

하사되곤 했답니다.

소수서원은 고종8년인 1871년 붕당정치의 온상이자 온갖 폐해의 온상으로 지목된 서원들을 없애기

위해 대원군이 실시한 서원 철폐령에서 살아남은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이름이 높습니다.

당시 훼철되어 문을 닫은 서원이 600여곳 정도 된다고 하니, 소수서원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직방재 뒤쪽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자연스럽게 놓인 듯한 추춧돌 위에 올라선 기둥과 단순하지만 단단함이 느껴지는

공포부의 짜임에서 단아한 선비의 기품이 보입니다.

 

 

 

 

학생들이 기거했던 곳인가 봅니다. 지락재입니다.

 

 

 

소수서원 박물관 가는 길

 

 

소수서원을 있게 한 다섯 분의 흉상입니다. 이 다섯 분을 아는 것은 소수서원의 맥을 짚는 일이기도 합니다.

 

왼쪽부터 공자입니다.

기원전 6세기 경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정치사상가로 유교를 처음 연 개조입니다.

두번째가 주자로 역시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12세기 경 유교의 성리학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창시합니다. 그의 우주론은 정신정인 이와 현실적인 기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고려말, 조선의 유교정신에 근간을 이룹니다.

세번째, 즉 중앙에 계신 안양 선생은 고려말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원나라에서

성리학(주자학)을 배워 고려에 전파하여 크게 유행을 시킵니다.

그 결과 주자학(성리학)은 조선 개국의 사상적 기반이 되게 됩니다.

네번째 주세붕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소수서원의 전신인 백운동서원을 세워 안향 선생을

기리는 교육기관으로 세웁니다.

마지막 이황 선생은 백운동서원이 사액을 받아 공식적인 서원으로 자리하도록 만든 분입니다.

 

 

 

 

관람을 모두 마치고 다시 주차장으로 가는 일행을 아름다운 수형의 소나무 한그루가 배웅해줍니다. 

 

 

 

 

 

주차장의 기이하게 잘 생긴 소나무 한그루

저 쉽지 않는 휨새의 시작은 아픈 상처가 아니었을지...

 

 

이곳은 봉화군 물아면의 문수산 축서사입니다.

순흥도호부 시절에는 이곳도 도호부 관할이어서 순흥문화권 안에 있는 곳이지요.

부석사 개창 3년 전인 673년 의상대사에 의해 세워진 절이었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폐사되다 시피 한 것을

1988년부터 이곳에 머무시던 금곡 무여 큰스님께서 중창불사를 하시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영주 부석사의 느낌을 일부 받을 수 있습니다. 

배 위원장님의 설명처럼 의상대사께서 부석사를 세우기 전 연습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축서사란 이름은 부처님이 화엄경을 설법하셨다고 하는 고대 인도 영축산의 '취(鷲)'자를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 글자는 축 혹은 취로도 읽는다고 하네요.

서는 깃들 서(棲)를 씁니다. 즉, 부처님의 화엄경 설법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겠네요.

 

멀리 사리탑을 향해 기도를 하는 기도처인 보탑성전이 보입니다.

 

 

 

보탑성전 계단을 등지고 바라본 모습 멀리 소백산맥의 연봉들이 줄지어 갑니다.

 

 

 

여기서도 찰칵!

 

 

 

 

 


보탑성전이란 편액에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사리탑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5층 석탑입니다.

지금부터 딱 10년전인 2005년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기단의 길이 7.3m에 높이 15.5m라고 합니다.

충남 논산의 자광불교연구소 김광열 님이 조성했다고 하는데요.

신라시대 때도 수준 높은 석조물은 백제로부터 기술자 지원을 받았다고 하는 전통이 생각나네요.

불국사 창건 강시 석가탑을 만든 백제의 석공 아사달처럼 말이지요.

 

 

 

 

무여수님의 축서사 중창불사는 1994년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때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시는 석탑조성을 발원하였다고 합니다.

먼저 축서사에 있던 괴불탱화 복장낭에서 적사리 2과를 발견(2003)하였고,

석탑에 모시기 위해 2과를 더 구했는데, 마침 인연이 닿아 경주시 진여심 보살이

2005년 6월 미얀마의 사리박물관 관장으로부터 108과의 정골사리기증받아

이곳으로 이운하여 사리탑 안에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지어진 지 20년 정도 밖에 안되어서 세월이 좀더 지나야 그에 따른 품격이 올라가지 않을런지요.

무척 정성스럽게 지워진 것을 화려한 다포방식의 공포들이 보여줍니다.

시간이 많았으면, 평방과 장방에 새겨진 별지화를 하나하나 새겨보고 싶었으나 일단 전체컷만  찰칵!

 

 

 

대웅전과 곳곳의 기둥에 주련이 걸려 있던데요.

해석할 능력이 없어서 주석서를 붙입니다. ^^

 

 

 

그래도 하나하나 정성이 가득 들어간 창살문양 한컷 안남길 수 없지요.

 

 

독경을 너무나도 열심히 하시는 스님이 계셔서 조용히 들어가서 가볍게 참배하고 사진 몇 컷 남깁니다.

 

 

 

단청과 천개의 화려한 양식이 경건함을 갖게 합니다.

대웅전이라는 전각 답게 중앙에 석가모니불이 항마촉지인을 하고 계시고,

우리가 바라볼 때 오른쪽에 문수보살, 왼쪽에 보현보살님이 자리하고 계십니다.

부천님 위의 천개에는 부처님의 머물고 계시는 '적멸궁'과 도솔천의 미륵보살 궁인 '내원궁'

세로 편액이 붙어 있습니다. 내원궁이 있다는 것은 미륵신앙이 일부 함께 한다는 뜻으로 저는 해석합니다.

 

 

 

 

대웅전을 등지고 바라본 5층석탑과 보탑성전

 

 

보탑성전 유리에 비친 5층 석탑. 저 유리창 안쪽에서 이 사리탑을 보면서 기도를 올린다는 뜻이겠지요.

일종의 적멸보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걷기 팀원들이 게시기에 찰칵! 얼굴이 너무 작다구요?

 

 

 

쬐금만 더 크게 요렇게 찍어봅니다. ^^

 

 

다시 대웅전으로 으로 올라갑니다.

축서사의 원래 본전 건물인 보광전을 가기 위해서이지요.

현장에서는 몰랐는데, 사진으로 사자상을 보니 아, 흠의 형식을 하고 있네요.

입모양이 한쪽을 벌러서 '아'하고 있고, 오른쪽 사자는 입을 다물고 '훔'하고 있는 것이지요.

산스크리트어의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단어로 음양의 이치와 시작과 끝을 나타내는 상징이랍니다.

이밖에도 곳곳에 숨은 갖가지 상징들을 찬찬히 찾으면서 사찰을 찾으면 재미가 몇배 더 난답니다. ^^

 

 

 

본래 축서사의 본전인 광명전으로 대웅전(을 등지고 봤을 때) 왼쪽에 자리합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곳입니다.

 

 

 

 

의상대사가 중국에서 들어온 불교는 화엄종이기에 화엄경의 주존불인 비나자나불을

주존불로 모시는 것이 형식에는 맞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우리나라는 여러가지 불교의 형식들이 뒤섞인 통불교적인 성격이므로 이러한 형식들이

상당부분 해체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제작연대는 9세기 후반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때는 석불사(석굴암)가 8세기 중반

우리나라 불상의 예술적 정점을 찍고 하강하던 시기라고 학자들이 말하던 시기와 대체로 일치됩니다.   

 

불상 뒤의 광배가 참으로 이채롭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거의 없어서 일본에 가야만 볼 수 있는 

비로자나불의 화가 난 화신인 부동명왕의 불타는 광배를 보는 듯합니다.   

 

 

 

축서사의 가람배치 기본은 서쪽을 보고 있습니다.

해서 전각 오른쪽에서 왼쪽을 바라보고 계시는 이 불상은 결국 남쪽을 보고 앉아계시는 것이군요.

 

 

 

수미산의 33천을 관장하는 제석천을 중심으로 한 신중탱화가 한쪽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러한 신중은 인도의 브라만교와 힌드교의 신들을 불교로 유입시킨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석천은 번개 등을 이용해 천상을 다스리는 인드라 신을 불교로 스카웃한 사례이지요.

제석천 뒤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보이시네요. ^^

 

 

천개에서 용이 굽어보는 모습은 정교함에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목조건물에 용이 많이 그려진 이유 중의 하나는 용은 물과 가까운 수신이기에

목재로 된 건물들이 화재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게 해달라는 비보의 의미도 지닙니다.

일본의 경우도 용을 그리거나 물이 회오리 치는 모양의 문양을 그려 이러한 비보를 행하고 있지요.

 

 

 

천정의 그림도 하나하나 살펴보면 정말 재미날 것 같은데, 시간상 조용히 물러나옵니다.

 

 

 

발도행에서 함께 하신 마스님과 세린님. 찰칵!

 

 

왼쪽의 석등은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문화재로 지정된 석조물이랍니다.

 

 

축서사의 진정한 가치는 광대한 저 앞 산의 능선들을 차경으로 활용한 것에 있을 것입니다.

 

 

 

 

 

일망무제로 펼쳐진 축서사의 앞산 풍경은 부석사 무량수전에 기대어 보는 풍광과는

또 다른 느낌의 장쾌함을 풀어냅니다.

 

소백산맥을 향하는 시선을 가로막는 첩첩의 물결 능선은

인간의 삶 곳곳에 포진한 고난과 같아 보여요.

 

평탄가도의 삶보다 저렇게 주름진 모습도 포용할 수 있을 때 더 아름다울 수 있겠다 싶습니다.

삶의 고난 조차 아름답게 흔적될 수 있는 스케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이런 곳에서는 사진기 든 분들이 손이 바빠집니다.

저 분의 앵글 속에 포착된 축서사는 어떤 모습일까요.

 

 

 

마지막으로 시선 한 자락 진신사리탑에 공양하고 주차장을 향합니다.

 

 

 

 

안거에 들어가시는 스님들의 선방이랍니다.

 

 

 

자, 차를 다고 20분 정도 이동하여 부석사로 왔습니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아, 부석사!

 

 

 

배 위원장님께서 부석사의 가람배치가 빛날 화(華)자와 닮았다는 등의 다양한 부석사 사전지식을

알려주십니다.  부석사는 가람배치부터 시작하여 선묘아가씨 전설과 화엄종찰로써

비로자나부처님이 아닌 아미타부처님을 주존으로 모신점 등

다양한 역사문화, 그리고 조형적인 예술미와 자연미가 절묘하게 응축된 화엄종찰입니다.

 

 

 

일주문을 향하는 길.

20년전 이 길이 흙길, 돌길이었을 때 명상하기 가장 좋은 길로 꼽혔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포장된 상태네요.

 

 

 

부석사를 소백산 자락에 있는 것으로 알고 계셨던 분들에게는 다소 의아한 부석사 일주문 편액입니다.

부석사의 위치를 산을 기준하여 정확히 말하자만 양백지간의 최고 명당에 자리라는 것이 맞습니다.

양백, 즉,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지요.

 

 

 

 

부석사 당간지주입니다.

이 지역 당간지주의 특징인지 모르겠으나 숙수사지 당간지주처럼 늘씬합니다.

 

 

 

문 너머 보이는 법종각과 부석사 가람배치에 앞서 걷던 분들이 다들 멈춰 버렸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화엄사상과 정토사상이 극적으로 만난 가람배치를 보여주는 부석사

 

 

 

우측 멀리 보이는 안양루 내측 공포 사이로 부처님 여섯 분이 보인다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법종각의 앞모습은 팔작지붕입니다만..

 

 

 

범종각의 뒤쪽은 맞배지붕을 구현하면서 시야를 가릴 수 있는 풍벽을 대지 않아

삼각 액자의 구도를 그려내는 절묘함을 보여줍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에 의상대사를 도와 부석사를 기획한 장인의 안목과 예술적인 경지와 기술은

감탄에 감탄을 얹어도 모자랄 것입니다.

 

 

 

안양루와 안양문.

저 사이를 통과하면 극락에 든다는 뜻입니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경기도 안양시의 어원도 여기에 기인한답니다.

즉, 저 안양문을 통과하면 구품으로 구성된 부석사 석축 가람배치의 완성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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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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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숲속의공터(발견이의도보여행) | 작성시간 14.12.21 즐감하고 갑니다
  • 작성자윈마미 | 작성시간 14.12.24 얼마 전에 다녀온 부석사와 소수서원... 어쩌다 보니 시간이 늦어 순흥고분에는 못 들르고 왔는데 사진을 보니 아쉽네요. 다음에 이 길 그대로 진행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만사 제쳐놓고 따라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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