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이야기 마당

대종사 초상화

작성자산들바람|작성시간10.09.14|조회수248 목록 댓글 0
소태산의 모습을 담은 사진은 모두 60여 장이다.1) 그러나 모두 흑백 필름이라2) 생시에 스승을 뵌 제자들은 당신님의 진면목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흑백 사진 가지고는 천연 그대로의 스승님의 위용과 자비 덕화의 모습을 뵐 수 없다고 생각한 제자들은 초상화를 통하여 존모의 염을 채우고자 하였다. 제자들의 이러한 염원이 반영되어 시창10년대에 소태산의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었다.

李共珠의 特志: 數年前 本會에셔 朝鮮名畵라 指稱되는 蔡某를 招聘하야 宗師主 影本一件을 奉安코자하얏으나 技術이 拙劣하야 圓滿한 結果를 엇지 못하얏슴이 遺憾이옵더니 今般 京城李共珠氏가 巨額을 捐出하야 技術이 能한 畵家의게 宗師主 影本 四件을 作成하난중 了畵되난대로 靈光, 益山, 鎭安, 京城 各處 會所에 一件式 奉安할 豫定이더라3)

대단히 유감스러운 것은, 자칭 '조선 명화가'가 그린 소태산 영정이 '기술이 졸렬하여' 대중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명화가인 그 '蔡某'는 누구인가. 당시 조선의 명화가라면 단연 채용신을 두고 일컫는다. 임금님의 어진御眞(초상화)을 그려 석강石江이라는 호를 받고 정2품의 벼슬에까지 오른 그를 두고 '졸렬한 기술'이라 일축함은 가당치 않은 평가이다. 그가 그린 고종 임금의 초상화는 현재 원광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어 누구든 한번 가서 보면 그의 화필에 찬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채용신의 화법은 색채의 농염을 입체감이 나도록 그리되 극세필極細筆을 사용하여 얼굴의 육리문肉理文 묘사에 주력한 점과 많은 선을 사용한 요철, 원근, 명암의 정밀한 표현을 특징으로 한다.

조선 명화가 채 모가 그린 소태산의 초상화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필시 대가의 이름을 사칭하여 '졸렬한 기술'을 부려 유감스럽게도 '원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고 만 것으로 보인다.

---------------------------------------------------------------------------------
1) 소태산이 박은 사진은 독판 13, 기념사진 28, 제자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이 20, 열반 뒤 2장 등 모두 60여매가 전해진다.

2) 대종사 사진첩은 유일학림의 1기생의 《졸업 앨범》(1949), 정산종사 추모 《기념사진첩》(1962), 교단 반백년을 기념하여 발간된 《대종사 진영》(1971), 그리고 가장 최근에 간행된
탄백기념 《사진첩 소태산대종사》(1991)가 있는데 필자는 이 기획에 자료 제공과 사진 설명을 맡았다. 이 사진첩의 편집과 발행을 맡은 원광사는 현대 기술을 십분 응용하여 단체사진에서 따로 독사진을 만들고 색깔도 삽입하였다.《사진첩 소태산대종사》는 편집 과정 중에서 소태산 관련 몇 장의 사진은 제외되었다.

3)《월말통신》19호 <광고> 1929. 음9월
시창14년(1929) 가을에, 경성 회원 이공주의 경제적인 지원 아래 다시 소태산 초상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이 초상화도 전하지 못하였다.

시창26년(1941) 5월 박장식의 주선으로 이당 김은호以堂金殷鎬(1892∼1979)의 제자이며 남원 사람인 청호 오주환靑湖 吳周煥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오 화백은 소태산 모습을 사실 그대로 자로 재듯 꼼꼼하게 초상화를 그렸다 한다.4) 이 초상화는 서울 한남동 정각사에 보관되었다.5) 원기76년(1991) 소태산기념관이 준공되면서 전시관에 소장,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오주환화백이 그린 초상화 채경산화백이 그린 초상화
오주환화백이 그린 초상화 채경산화백이 그린 초상화

* 그림을 클릭하시면 큰 초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오주환(1915. 음5.15∼1989.1.2)은 남원 수지면 산정리 산촌 사람으로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4년제 소학교를 수학하고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여 서울로 올라가 이당에게 사사, 일본에 건너가 그림 공부를 하였다 한다. 가족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선전鮮展에 두 차례나 특선이 되고 일본 천황으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고 하나 이 사실을 확인하지 못하였다. 청호는 이당 문하의 후소회後素會6) 회원으로 초상화 산수화 4군자 등을 즐겨 그렸다. 해방 뒤 그는 고향의 중학교에서 미술과 한문을 가르치다가 그만 두고 정미업을 하며 만년을 보내었다. 청호는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으며 75세에 죽었다.7)

---------------------------------------------------------------------------------

4) 박장식 구술자료

5) 해방 뒤, 서울 한남동 소재 正覺寺(일인사찰 약초관음사를 불하받은 것) 불단에 봉안된 관음불과 연화일원상 휘장, 그리고 소태산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에 관한 사진이 원미 24호 특집《원상징의 예술혼전》(1991) 에 실린 졸고 <일원상 조성의 사적 고찰> 244쪽 '그림26'에 실려 있다.

6) 後素會: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미술단체다. 1936년 이당 김은호 화백의 제자 모임으로 탄생해서 한국 화단에서 채색 화맥을 형성해 왔다. 후소회는 이당의 서울 권농동 낙청헌 화실에서 수학하던 백윤문, 김기창, 장우성, 장덕, 한유동, 이유태, 조중현 등이 주축해 열렸다. '후소회'란 이름은 이당과 절친했던 한학자 위당 정인보가 논어에 나오는 '繪事後素'(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뜻)란 글귀에서 따와 지은 것이다. 후소회는 1996년 5월17일 창립 60주년을 맞아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대규모 기념전을 갖으며 이때까지 23회의 회원전, 6회의 신인공모전을 통해 한국 화단에 활력소를 제공하였다.

7) 조영순(청호의 부인) 구술자료
소태산 열반 후, 제자들은 추모의 염을 이기지 못하여 그들의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스승님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형상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소태산 재세시에 수차 초상화를 그린 적이 있으나 만족할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시창26년에 그린 오 화백의 작품은 사실감은 평가되나 전체의 색감이 어두운 감이 있어 신자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였다.

채귀원蔡貴圓은9) 채색화로 유명한 석지 채용신石芝蔡龍臣의 아들이다. 김제 신태인 사람으로 시창25년 1월 한의사 조송광(불법연구회 회장)의 연원으로 입회하고 전무출신하여 영산학원 교무와 총부 외무원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관상을 잘 보아 소태산이 53세에 열반할 것을 예언하였고,10) 열반 뒤 그의 아들 경산竟山을 시켜 소태산의 초상화를 다시 그리게 하였다.

채 화백은 대각전 뒷방에서 그림을 그렸는데11) 40일간 걸렸다. 그의 이름은 '채경산蔡竟山'이라 하나 확인하지 못하였으며,12) 그가 소태산 초상화를 그려놓고 쌀 40가마를 달라고 하자 대중들은 그를 '도둑놈'이라고 욕하였다.

정산 종법사 말하였다.

"주어라. 대성현의 그림을 그렸으니 그 사람 달라는대로 주어라. 죄를 받고 안 받고는 그 사람에게 달렸다"13)

조선의 명화가 채용신의 아들 채귀원씨는 나의 입교 연원인데 태인에서 살았다. 채귀원씨 아들은 이름난 화가는 아니지만 워낙 유명한 채용신의 손자라는 명분 하나 가지고 초상화 잘 그린다는 소문이 났다. 소태산 열반뒤 그는 40일 동안 소태산 초상화를 그렸으나 어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자 이 사람이 "이 정도 그림이면 보통 사람이라면 잘 그렸단 소리 들어요. 하지만 위대한 사람일수록 진영이 나올 수 없는 법이요. 어디 이 이상 잘 그릴 사람 있으면 한번 데리고 와 보시요" 야료를 부리고 서울에 가져가 종로 바닥에 내놓고 따질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리하여 그 사람이 요구하는 대로 그림 값을 하루에 한 가마씩 쳐서 쌀 40가마를 내주었다. 일정 말기 다들 끼니를 잇기 힘들 정도로 몹시 궁핍한 때라 쌀 한 가마라도 실로 엄청난 액수였다.14)

총부 종법실(구조실)에 안치되어 있는 소태산 초상화의 작가가 채경산으로 알려진 것은《원미》3호(1983. 5)가 그 처음이다. 《원미》3호에서는 '蔡竟山 作 소태산대종사(135×88cm)'로 밝혔다가《원미》9호(1986.1.)에는 '芝石 채용신', 10호(1987.1.)에는 '定山 채용신'이라 오기되었다.

오주호 화백은 소태산을 실사측도實寫測圖하여 그린 반면에 채용신의 손자 경산은 오 화백의 그림을 모사模寫하여 밝은 채색에 후광後光을 그렸다는데 두 그림의 차이가 있다. 채경산의 이런 화법이 소태산을 모시고 살았던 제자들의 공감을 싸 현재 구조실 가운데 방에 모셔지게 되었다.

----------------------------------------------------------------------------

8) 채용신의 손자 '채경산'에 대해 그 이름이나 인적 사항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자료를 확인하지 못하였다.

9) 채귀원 : 본명 璟默 1886. 9.13生 부 蔡東憲 모 李龍華 처 白志河. 성격 활발 명랑. 자녀 4남매둠.(이공주 편, 《제1대 유공인역사》3권 420쪽)

10) 蔡貴圓은 관상을 잘 보았다. 김제 보명사에서 만난 김중묵을 불법연구회로 안내하고 전무출신시켰는데 소태산이 쉰셋에 돌아갈 것을 예언하였다.   그는 '耳白만 해도 성인인데 종사님은 耳白項白하신 대성인'이라 하며, "석가는 이백항백하고 공자??예수는 이백만 하였다. 종사님은 목과 귀가 하다, 만날 바깥에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목과 귀가 하얀지 모르겠다. 욕심이 덜 떨어지면 귀가 붉다"고 하였다.(김중묵 구술자료)

11) 朴光振(소태산의 3남) 구술자료

12) 조전권의 이야기. 김효명의 증언. 《1대유공인》의 기록을 보면 채귀원의 본명은 璟默,《전주시사》에 보면 정산의 3남 이름이 尙默, 형제간의 항렬이 '默'인 것으로 보인다. 채용신의 아들과 손자가 다 그림에 소질을 보이고 있다.

13) 앞의 자료

14) 김중묵 구술자료
채경산이 그린 이 초상화가 한때는 그의 조부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잘못 알려졌다.15)

채용신蔡龍臣(1870.음2.4∼1941.음7.)을 아는 사람들은 대개 그를 '채정산'이라고 부른다. 그가 한말에 충청도 정산定山 원을 마지막으로 익산 금마에 은둔하여 살았대서 그렇게 불렀다. 아명은 용덕龍德 자는 동근東根, 39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가 되면서 자를 용신龍臣이라 하였다.

채용신은 1870년 2월4일 서울 삼청동 무장武將 채권영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집안은 궁중에 참빗을 납품하였는데 용신은 화각 그림에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화각畵角이란 목기에 채화彩畵를 그리고 그 위에 쇠뿔을 얇게 오리어 덧붙이는 세공細工인데 참빗에 그린 그의 화각 그림이 궁중에 알려져 20세 때 궁중화원으로 선발되었다. 채용신은 대원군의 초상화를 그려 무과에 등용되었고 고종高宗의 초상화를 그려 크게 인정받았다. 이런 일화가 전해진다.

고종은 왼쪽 수염 옆에 작은 사마귀가 있었는데 이를 민망하게 여긴 각료들은 용신에게 그것을 그리지 못하게 일렀다. 고종의 초상화가 마무리될 때였다. 각료들이 둘러보고 있는데 용신이 마지막으로 수염을 손질한 뒤 너무 긴장한 탓으로 붓을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붓끝이 사마귀가 있는 제 자리에 정확히 찍혔다. 명을 어겨 용신은 황공하여 엎드려 떨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일신되었다. 수염 옆에 사마귀가 찍힘으로 하여 비로소 용안의 미소가 살아나 그림이 훨씬 돋보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용신은 신필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어명을 받아 열성조列聖祖의 어진御眞(초상화)을 그려 창덕궁에 봉안하였다. 그는 고종으로부터 석강石江이라는 호를 받고 칠곡 도호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뒤 의금부도사, 부산진과 돌산군의 수군 첨절제사를 거쳐 금부 도사, 한성부윤(증직) 등 정 2품 벼슬에 올랐다. 채용신은 민비의 신임을 받아 친청파親淸派에 속한다. 채용신은 민비 시해 사건 뒤 신변이 불리하여 공조판서 이봉구16)와 익산 금마에 은신하였다. 채용신은 금마에 사는 동안 차츰 신분이 알려져 정읍군 신태인읍 용궁면(일명 六里)로 옮겨 그곳에서 만년을 보내었다.

용신은 산수, 인물, 영모羚毛 등 정세精細하고 화려한 그림을 그렸다. 그의 고아한 필치는 인물화와 동물화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유작 가운데 고운 최치원, 면암 최익현, 일유제 장태수, 간제 전우, 운랑자 등의 초상화가 있다. 그가 죽은 뒤 1943년 6월4일 화신백화점에서 공개된 유작전에는 한야원희도 족자와 화조도의 앵무 등의 그림이 소개되었다.

그는 단아한 선비의 용모로서 보통 키에 푸른 눈동자가 특징이다. 슬하의 5남 3녀 가운데 3남 상묵尙默이 부친을 닮아 그림을 잘 그렸다. 상묵은 일본어에 능통해 일본에 건너가 사진 기술을 배워 서울에서 경성사진관을 열어 우리나라 사진관 개업의 효시로 알려진다. 채용신은 한때 아들을 따라 일본에서 귀족과 고관들의 초상화를 그린 것으로 전한다.17)

채용신의 그림(초상화)은 원광대 박물관에도 2점(<高宗御眞>18) <호운거사 초상>)이 수장되어 있다.

채용신은 시창26년 1월1일 아들 채귀원의 연원으로 입회하였다. 《원명부》(男)에 1956번으로 등록되어 있는 그의 본명은 동근, 법명은 동헌東憲, 당시 신태인읍 육리 655번지에서 농사짓고 살았다. 72세에 입교하여 그 해에 별세하였다.

---------------------------------------------------------------------------------

15) 《원미》3호(1983. 5)에서는 蔡竟山 作 소태산대종사(135×88cm), 《원미》9호(1986.1.)에는 芝石 채용신, 10호(1987.1.)에는 定山 채용신이라 표기하고 있다.

16) 이봉구는 갑오동학 운동 때 이홍장, 원세개에게 청병을 한 친청파의 한 사람으로 민비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사람이다.

17) 예총전북지회 편,《호남한국화3백년》,《전주시사》

18) 궁중화가 채용신은 고종 어진을 여러 폭그린 것으로 보인다.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수장된 고종어진은 고종의 49세 때 초상화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소태산의 초상화가 한 번도 대중들의 만족을 사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존모의 눈으로 보는 신자들의 눈과 무신자의 입장에서 소태산를 보는 안목이 다르기 때문이다. 소태산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사실적으로 그린 오주환 화백의 그림과 여기에 다시 수정을 가한 채 화백의 그림에 대해서도 제자들은 썩 만족감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채 화백의 불만어린 항변을 되새겨 보아야 한다. "이 정도 그림이면 보통 사람이라면 잘 그렸단 소리 들어요. 하지만 위대한 사람일수록 진영이 나올 수 없는 법이요. 어디 이 이상 잘 그릴 사람 있으면 한번 데리고 와 보시요

그렇다. 위대한 사람, 우리의 대종사는 우리들 가슴에 자리잡고 있다.

원미회圓美會는 1981년 7월 창립 이래 다수한 회원전과 《원미》31집을 간행하는 동안 7점의 소태산 초상화를 발표하였으며 그 외에도 소태산 흉상 2점, 십상도 2점을 발표하였다.

각기 다른 표정과 이미지를 주는 얼굴이지만 어쩐지 비슷한 모습을 안겨주는 소태산 대종사 얼굴. 우리가 그리는 대종사의 얼굴은 우리가 가장 존모하는 이상형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우리들 각자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제 우리의 대종사는 역사적인 인물로 시공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리들 가슴에 지금 여기에 살아있고 미래 구원의 이상적 인물로 떠오르는 얼굴이다. 그러므로 신자 각자가 그리는 소태산의 모습은 자신의 신행의 폭과 깊이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고 감동을 자아내는 얼굴이 우리들의 표준적인 모습으로 떠오를 것이다.

작가명 분야 내용 크기 제작연도 원미 게재호
정승섭
정인범
하실
박준용
김길석
하실
윤호우
김태호
윤호우
정진응
김광재
배형식
한국화
서양화
서양화
서양화
조각
서양화
서양화
서양화
서양화
한국화
조각
조각
십상도 초상
초상
초상
흉상
초상
초상
초상
초상
십상도
흉상
흉상
80호
10호
20호
20호
-
20호
20호
20호
20호
10호
-
-
1980.1.
1982.9.
1983.5.
1983.5.
1983.5.
1984.4.
1985.5.
미상
1985.5.
1986.1.
1983.1.
1988.5.
원미21집
원미2집
원미3집
원미3집
원미3집
원미5집
원미6집
원미7집
원미8집
원미10집
미발표
원미17집

원미 게재 소태산 인물화 현황

40일간의 복제화, 하루에 쌀 한 가마 값어치밖에 안 되는 소태산대종사, 우리가 그리는 대종사의 그림은 세상의 값어치로 한정되는 그런 그림이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우리들 각자의 적공실에서 스스로의 대종사를 조성하자.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