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바로키테시바라(avalokitesvara)'는 범어로 '지킨다'는 뜻의 '아바'와 '본다'는 뜻의 '로키타'와 '자재롭다'는 뜻의 '이스바라'가 합쳐져서 된 말이고, 자유자재(自由自在)로 지켜본다는 뜻이다. 그러니, 구마라습이 말한 '관세음보살'보다는 현장법사의 '관자재보살'이 더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본다는 것에는 육안(肉眼)으로 사물을 보는 것과(見) 심안(心眼)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있는데(觀) 자재보살이 보는 것은 심안으로 보는 것이어서, 관(觀)이라는 해석이 맞다. 그래서 한문을 쓰는 본 고장에 살았던 현장법사가 '관자재보살' 이라고 해석한 것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누구일까? 바로 자성(自性)을 말한다. 이는 부처나 조사나 남의 자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자기의 자성을 말하는 것으로 나는 나의 자성을 간직하였기 때문에 내가 바로 '관자재보살'이라고 할 수 있다.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은 〈화엄경(華嚴經)〉의 입법계품(入法界品)에 의거할 것 같으면 왼손에는 봉오리 상태의 연꽃을 들고 오른손에는 감로병(甘露甁)을 든 모습으로 조성이 된다. 왼손에 든 연꽃은 중생들이 본래부터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상징하는 것이며, 감로병에는 '불사(不死)의 물'인 감로수가 들어있다. 쇄수게(灑水偈)에 "관음보살 대의왕! 감로병 중에 가득한 법수(法水)의 향기로, 마(魔)의 구름을 세탁하여 서기를 일으키고, 열과 번뇌를 소제하여 청량을 얻게 하네" 라는 내용을 보면 감로병과 감로수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다.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은 중생을 위하여 33가지 모습으로 화현한다. 인간이나 생령이 살아가는 사바의 대지에는 언제나 괴로움이 가득 차 있다.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生老病死)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살아가는 순간순간이 번뇌나 마군의 연속이다. 때에 따라 자그마한 행복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것은 더 큰 고통이 올 수도 있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관자재보살(관세음보살)은 영험(靈驗)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대개 중생들은 한평생을 고해(苦海)에서 허덕이다가 고해를 떠나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헤매다가 세연(世緣)을 마감한다면 부처님 가르침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고통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때, 그때 관세음보살 이 나타난다. 감로수를 담은 정병을 한 손에 쥐고, 흰옷 입고 연꽃 위에 서서 우리가 사는 이 사바세계에 거룩한 모습을 나투신다. '대자비의 서원자(誓願者)'인 관세음보살(관자재보살)! 일체중생의 섭수(攝受)를 본원(本願)으로 하여 현실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중생교화의 자비행을 실천하는 관세음보살, 천 개의 손과 천 개의 눈으로 중생의 고통을 살피고 구제해줄 관세음보살은 그렇게 우리 곁에 가까이 오신다. 우리가 긴급할 때 "어머니!"하고 부름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면 이 말 다음으로 많이 찾았던 것이 "아이고! 관세음보살님"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를 믿든 안 믿든 간에 우리 선조들은 위기에 직면하거나 놀라운 일을 당하게 되면 숨을 몰아쉬며 '관세음보살'을 되풀이했다. 이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끊임없이 전파된 관음신앙에 의해, 모든 이의 마음 한 구석에, 관세음보살이 어머니 이상으로 자비를 베푸는 최후의 구원자요 귀의처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서민들에게 관세음보살은 불교를 대표한 보살이다. 모든 사람들이 귀의할 만큼 관음의 대자비는 어떤 불보살의 자비보다 넓고 깊다. 관세음보살이 대비성자(大悲聖者 큰 자비를 가진 성자), 구호고난자(救護苦難者 고난을 벗어나게 해주는 성자), 시무외자(施無畏者 두려움을 없애 주는 성자), 원통대사(圓通大士 원만하여 통하지 않음이 없는 큰 선비), 관음여래 등으로 불려지는 것도 이것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우리를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관세음보살은 부처님의 자비와 중생교화의 측면이 상징화된 존재(存在)라고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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