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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제달마 조사. | ||
'육바라밀'을 육도(六度)라고도 한다. 도(度)란 자기를 홀로 도(度)한다는 의미에서 이를 소승(小乘)이라 하고 대중과 더불어 도(度)하는 것을 대승(大乘)이라 한다. 결국 어느 시대, 어느 지방, 어느 인물을 막론하고 자사자리(自私自利)를 싫어했고 여중동락(與衆同樂)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것이 바로 불교의 기본정신이요 나아가 '자기도 제도하고 남도 제도하며, 자기도 이롭고 남도 이로운 것(自度度人 自利利他)'이 바로 대승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실천조항을 여섯 가지로 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육바라밀에 대하여 일일이 해석을 붙여보면 다음과 같다.
육바라밀의 첫째는 '단월바라밀(檀越波羅蜜)'로 곧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이다. 범어로 단월(檀越)이며 또는 단나(檀那)라고도 한다. 이를 번역하여 보시(布施)라고 하는데 '마음 운전을 넓고 두루 하는 것을 보(布)라 이르고 자기는 그치고 남에게 은혜롭게하는 것을 시(施)라 이른다(運心普周名布 輟己惠人名施)'고 했다.
이는 일종의 어질고 자비로운 구제이요(仁慈救濟) 자기를 놓고 남을 위하는(捨己爲人) 정신으로 보살의 강렬한 자비심이요 정의감이라 할 수 있다.
대개 보시를 세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 한다.
첫째, '재시(財施)'이다. 재시란 빈한(貧寒)하고 고뇌하는 무리를 대하여 부모같이 보고 형제 자매같이 여겨 자기가 가진 금전이나 능력이나 정신이나 시간이나 지식이나 의약 등을 진정을 다해 나눈다는 의미로 아낌없이 베풀어 구제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법시(法施)'이다. 법시란 생각이나 사상이나 신념이 바르지 못하고 흐트러진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도덕을 가르쳐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는 것을 말한다.
셋째, '무외시(無畏施)'이다. 무외시란 생명이나 재산이나 마음이나 생사 등에 두려움과 위협을 느끼고 있을 때 두려움이 없다는 방법을 일러 주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해주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 진정한 불교도란 바로 대승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재물을 베풀어서 사람의 생활에 곤액(困厄)을 구제하는 것이고, 또한 법을 베풀어서 사람들의 정신적 고민(苦悶)을 해제시키는 것이며, 또한 두려움을 느끼거나 갖지 않도록 정신적인 보장이나 안전장치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강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보살은 법에 응당 머무는 바가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한다(菩薩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고 하여 보시를 할 때 주착이나 인색(吝嗇)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보시의 반대는 간탐( 貪)이다. 간탐이란 '자기만을 위하는 사사이요 자기만을 챙기는 이익이라(自私自利)'는 것으로 사리(私利)의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육바라밀경〉에 말하기를 '모든 아끼고 탐하는 것이란 항상 근심과 고뇌를 품은 것이니 현재 세상 가운데 모든 고통의 근본이다(諸 貪者 常懷憂惱 現在世衆 諸苦根本)'고 하여 간탐 자체가 바로 고통의 주모(主母)가 된다고 했다.
또 나장원(羅狀元) 〈선세시사선〉에 '황금은 이에 천년의 업이 아니라(黃金不是千年業)'고 했고, 또 신기질(辛棄疾)의 〈최고루〉에 '천년의 밭은 팔백의 주인이 바뀌었다(千年田換八百主)'라 하였으니 황금이 되었든 전답이 되었든 간에 한 인간이 사는 동안 간직할 뿐이지 영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분수에 편안하고 자기를 지키며(安分守己)' 또한 '선을 즐겨하고 베풀기를 좋아해야 한다(樂善好施)' 또 '살아서는 세상에 이익이 있어야 하고 죽어서는 후대에 이로움이 있어야 한다(生有益於世 死有利於後)'했으니 보시가 바로 미덕이요 인류의 간탐을 개조시킬 수 있는 묘방이 된다.
우리가 보시를 실행하자는 것은 '남이 빠지면 나도 빠지고 남이 줄이면 나도 줄여야 한다(人溺己溺 人饑己饑)'는 동정심(同情心)을 격발(激發)시키자는 것이요 또한 '사람을 사람으로 여김이 나를 위함이요 나를 위하려면 사람을 사람으로 여겨야 한다(人人爲我 爲我人人)'는 정신을 배양해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보조하는(互愛互助) 아름다운 가정·사회·국가·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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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마 면벽. | ||
육바라밀의 두번째는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로 곧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이다. '시라(尸羅)'를 번역해서 '계(戒)'라 하고 또한 방지(防止)라고도 한다. 계란 계조(戒條)요, 규율(規律)로 나라에는 국법이 있고 가정에는 가규(家規)가 있으며 단체에는 기율(紀律)이 있고 사회에는 질서가 있는 것과 같이 불문(佛門)에는 '계율(戒律)'이 있다.
불가에서 부처님은 비구(比丘)에게는 250계를 주고 비구니(比丘尼)에게는 348계(혹은 500계)를 준 뒤에 비구니에게 비구를 공경해야 한다는 8경법(八敬法)을 더 말했다. 8경법이란,
1) 비구니는 보름마다 비구의 지도를 받으라.
2) 비구를 따라 안거(安居)하라.
3) 안거가 끝나면 자자(自恣:자신이 범한 죄를 대중 앞에서 고백하고 참회하는 것)하는 상대를 비구로 하라.
4) 비구에게 구족계를 받으라.
5) 비구를 비방하지 말라.
6) 비구의 죄를 들어 잘못을 말하지 말라.
7) 가벼운 죄를 범했을 때는 비구에게 가서 참회하라.
8) 출가수계(出家受戒)를 받고 100년이 지난 비구니라 할지라도 새로 수계 받은 비구를 예우하라 등이다.
뿐만 아니라 보살에게 십중사십팔경계(十重四十八輕戒)와 아울러 삼취계(三聚戒)를 내렸고 또한 재가 신도에게도 오계(五戒)와 팔계(八戒)와 보살계(菩薩戒)를 내렸다.
'지계바라밀'이란 계율을 지키는 수행이다.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곧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청정하게 가져야 한다는 말로 몸(身)으로 짓는 세 가지, 말(口)로 짓는 네 가지, 마음(意)으로 짓는 세 가지를 잘 다스려야 한다. 이것을 십업(十業)이라 한다. 이 십업(十業)은 신업(身業)으로 살생(殺生; 산 목숨을 죽이는 것), 투도(偸盜; 도둑질하는 것), 사음(邪淫; 청정하지 못한 남녀관계를 갖는 것)의 세 가지이요, 구업(口業)으로 망어(妄語; 망령된 말을 하는 것), 기어(綺語; 꾸미는 말을 하는 것), 양설(兩舌; 이간질하는 것), 악구(惡口; 거친 말을 하는 것)의 네 가지이며, 의업(意業)으로 탐(貪; 탐욕스러운 것), 진(瞋; 성내는 것), 치(癡; 어리석은 것)의 세 가지를 말한다.
계율이라는 것이 어떤 종교의 특정한 규칙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세상을 비롯한 만물의 상층계(上層界)에 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으로서 사람 행위의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사람의 고매한 인격을 단련하며 사람과 어울리는 공공의 도덕을 배양하고 사람의 마음과 행동의 출입 등을 바르게 하여 탈선됨이 없어야 한다. 그러므로 서로간에 암묵의 규율(規律)과 성문(成文)의 기율(紀律)을 잘 준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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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마귀서. | ||
찬제(羼提)를 번역하여 인욕(忍辱)이라 하는데 인욕을 '다른 사람이 무고하게 괴로움을 가하는 것을 욕이라 하고 욕됨을 편안하게 받는 것을 인이라 한다(他人無故加惱爲辱 於辱安受名忍)'고 했다.
'인욕바라밀'은 참고 견디는 실천행이다. 탐 진 치(貪瞋癡)의 삼독(三毒) 중에서 성내고 화내는 진심(瞋心)을 없애는 실천수행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연기(緣起)라는 존재의 실상을 알지 못한다. 즉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겨남으로 저것이 생겨나며 이것이 없음으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함으로 저것이 소멸한다(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는 비범한 것 같지만 지극히 평범한 진리를 모르고 산다. 그리하여 '나(我)'에 대한 강력한 집착 때문에 인연화합(因緣和合)으로 연기되어짐을 간과하고 살고 있다.
이에 따라 내 뜻대로 되어 지지 않을 때 먼저 화(瞋)를 낸다. 원래 무아(無我)인 나를 내려놓지 못하고 가슴에 품어서 나를 조금이라도 건드리고 거슬리면 성질을 부리는데 이 때에 인욕(忍辱)을 무기로 삼아 참아내고 비워내며 견뎌내야 한다.
홍일법사어록잡담(弘一法師語錄雜談)에 '반드시 관용이 있어야 덕이 이에 커지고, 반드시 참음이 있어야 일이 이에 다스려진다(必有容 德乃大 必有忍 事乃濟)'고 했다. 또 〈논어〉에 '작은 것을 참지 못하면 큰 계획이 어지러워지나니 반드시 참은 바가 있은 뒤에 능히 다스릴 바가 있는 것이라(小不忍則亂大謀 必有所忍而後 能有所濟)'고 했다.
또한 〈명심보감〉에서는 '한 때의 성냄을 참으면 백일의 근심을 면한다(忍一時之忿 免百日之憂)'는 등의 글귀에서 보듯이 참는 그 자체가 자기의 수행이요 인품을 성장시키는 동력(動力)이라 할 수 있다.
수행자는 참는 것이 중요하다. 무조건 참는 것이 중요하다. 그 가운데서도 나에게 욕(辱)이 되고 불이익(不利益)이 되며 사지(死地)가 되고 구학(溝壑)이 되는 상황에서 참아내는 그 것이 심력(心力)이요 도력(道力)이며 법력(法力)이요 원력(願力)이다.
어설픈 참음은 자칫 상(相)을 불러오고 지탄(指彈)을 받을 수가 있지만 인불인(忍不忍)을 뛰어넘고 내불내(耐不耐)를 초월한 참음은 그대로가 깊은 수행이요 바라밀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오대(五代)의 양(梁)나라에 포대화상(布袋和尙)이 있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미륵보살의 화신이라고 불리는 큰 스님이다. 배는 크고 키는 작아 반쪽만 하며 입을 벌리고 잘 웃지만 개성은 유묵(幽墨)하였으며 항상 포대를 가지고 곳에 따라 누워 자며 말이 많아 멈춤이 없었다. 늘 일반 사람들의 욕매(辱罵)를 받지만 성내거나 거역하지 않으면서 한산시(寒山詩)를 들어 말하기를 '사람이 나를 꾸짖음이 있어도 나는 그저 좋다고 말하고, 사람이 나를 때림이 있어도 나는 그냥 엎드려 자며, 침을 얼굴위에 뱉어도 따라서 저절로 말라서 나는 힘쓰는 기운을 덜고 저들은 번뇌가 없으리니 이것이 바라밀이라(有人罵老拙 老拙只說好 有人打老拙 老拙自睡倒 涕唾在面上 隨他自乾了 我也省力氣 他也無煩惱 這樣波羅蜜)'고 하여 조금도 성을 내는 바가 없었다 한다.
세상 사람들은 전도(顚倒)된 생각이 있기 때문에 왕왕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싫어하며 좋은 것은 받아드리고 나쁜 것은 퉁기지만 사실 사랑이 어디 있고 미움이 어디 있으며 좋은 것이 어디 있고 나쁜 것이 어디 있겠는가? 포대화상처럼 늙은이를 꾸짖는 것도 포용하고 때리는 것도 포용하여 진에(瞋恚)를 진한으로 여기지 않고 인욕(忍辱)을 인욕으로 여기지 않는 노련한 경지에 이른다면 바로 바라밀이 될 수 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성냄은 마음 가운데 불로 능히 공덕의 수풀을 태움이라 윤회의 고통을 면하고자 할진대 스스로 성내는 마음을 잘 보호할지니라(瞋是心中火 能燒功德林 欲免輪回苦 善自護瞋心)'고 했다.
즉 성내는 그 마음을 잘 다스려서 자신과 아울러 쌓은 공덕을 태워먹지 않도록 하고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사람이 일생을 지내면서 때로는 역경(逆境)도 참아내야 하고 순경(順境)도 또한 참아내야 하며, 물(物)이 오는 것도 참아내야 하고 또한 물이 가는 것도 참아내며, 나를 칭찬하는 것도 참아내고 또한 나를 비방하는 것도 참아내며, 나에게 기쁜 것도 참아내고 또한 나에게 슬픈 것도 참아내는 등 이러한 것들이 바로 인욕(忍辱)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개개인으로서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고 했지만 이 말이 꼭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의 도덕적 규율을 세워줌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인과가 정율(定律)이다. 자기가 하고, 자기가 짓고, 자기가 만든 만큼 결과가 주어지게 되며 받는 것도 남에게 전가되거나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수자득(自受自得)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자신이 계율의 가르침에 반(反)하는 모든 행위는 그 만큼의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이를 미연(未然)에 방지하기 위하여 행위를 잘 쌓아야 한다고 미리 가르침을 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계율이라는 것이 불문의 제자들을 엄격하게 훈련시켜 몸으로 죄를 범하지 아니하고 또한 마음으로 죄를 범하지 아니하여 행하고(行) 머물고(住) 앉고(坐) 눕는(臥) 일거일동과 일진일퇴에, 부처님의 법을 믿어 받고 부처님의 제도를 받들어 가져서 중인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가정이나 사회 국가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미쳐서 가정 사회 국가가 다스리지 않아도 편안하고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지며, 인도하지 않아도 선해지고 권하지 않아도 지켜가는 지선(至善)의 피안을 만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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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혜가대사 | ||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을 번역해서 정진(精進)이라 한다. '정은 섞임이 없는 것이요(精而無雜) 진은 물러남이 없는 것(進而不退)'이다. 또한 '정은 면밀하고 순수하여 추한 것이 섞임이 없음을 이름이요, 진은 오르고 나아가 게으르지 않음을 이름이라(精謂精純無惡雜 進謂昇進不懈怠)' 했다.
그러므로 이는 순수하고 섞임이 없이 게으르지 않아서 도덕을 실현하는 것이요, 불법(佛法)을 닦는 것이며 학업을 성취하는 것이요, 사업을 성공하는 것이며 자기를 계발하는 것이요, 사람들과 화합하는 등등 모두가 정진을 근본으로 삼지 않으면 이룰 수가 없다.
만일 매사에 정진하지 않으면 하루쯤은 볕이 쪼이고 열흘쯤은 추운 것[一曝十寒]과 같아서 목표에 도달하고 목적을 이루기가 어렵다.
또한 〈불설무량수경(佛說無量壽經)〉에서 이렇게 말한다. '지극한 마음으로 정진하고 도를 구하되 그치지 않으며, 만남에 마땅히 결과를 이긴다면 무엇을 원한들 얻지 못 하리요(至心精進 求道不止 會當剋果 何願不得)'했다.
〈초각박안경기(初刻拍案驚奇)〉에 '도가 한자 높아지면 마는 한 길 높아진다(道高一尺 魔高一丈)'했다. 이에 마(魔)란 악귀(惡鬼)를 이르는 것으로 불가에서 수행을 파괴하는 악마요. 방해하는 번뇌(煩惱)이며 의혹(疑惑)이나 미련(迷戀) 등의 심리활동이다.
또한 도(道)는 도행(道行)이요 도법(道法)으로 불가의 수행 공부이며 정의(正義)로 사악(邪惡)을 압도(壓倒)하는 무기이다.
사람이 공부를 하는데 형체에 그림자처럼 마장이 따른다. 이것이 모두 마왕파순(魔王波旬,Ma^ra -pa^pman)의 졸개들이 부리는 장난이다. 즉 천마(天魔), 번뇌마(煩惱魔), 생사마(生死魔), 오음마(五陰魔) 등등이 끊임없이 수행자를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여기에 당당하게 맞서서 도업을 성취하는데 불굴불요(不屈不撓)의 용맹정진을 하지 않으면 정말 이룰 수가 없다.
세상에 편안하게 도를 닦는 사람은 없고 닦은 사람도 없다.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면 잠자듯이 수월스럽게 도는 닦아지지 않는다.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는 사지(死地)의 고행을 통해서 서원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노력하는 것, 되어 지지 않을 것이 되어 질 때까지 고심하는 것, 깨쳐지지 않을 것이 깨쳐질 때까지 초사(焦思)하는 것이 바로 정진이다. 이 정진은 독선기신(獨善其身)일 정도로 용맹스럽게 수행을 해야만 대가가 지불되어 우리가 바라는 불보살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나은(羅隱)의 〈자견(自遣)〉시에 '오늘 아침 술이 있으면 오늘 아침 취하고(今朝有酒今朝醉), 기쁘고 즐거운 곳을 얻으면 또한 기쁘고 즐겨한다(得歡樂處且歡樂)'는 것은 득의(得意)의 의미도 있지만 자칫 방종의 자세는 인생의 보람과 가치를 상실하여 공익이나 국가나 사회에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아니면 간접적으로 불선불량(不善不良)의 영향을 끼치게 되기 때문에 삼가야 한다고 일러준다.
수행하는 사람에게 용맹정진을 방해하는 마장으로 '게으름(懈怠)'을 들고 있다. 이 게으름은 만사를 이루어 가는데 있어서 하기 싫어하는 것으로 경계(警戒)를 삼아서 밀쳐내야 한다고 가르친다.
〈해혜청문경(海慧請問經)〉에서 이르기를 '게으름이 있음은 깨달음이 요원하지만 가장 극히 요원함이라 모든 게으름은 보시도 없고 내지 지혜도 없으며 모든 게으름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위도 없다(有懈怠者 菩提遙遠 最極遙遠 諸懈怠者 無有布施 乃至無慧 諸懈怠者 無利他行)'라 했다.
또한 〈염주경(念住經)〉에 이르기를 '누구나 모든 번뇌가 있지만 유독 게으름이 근본이라 만일 한번 게으름이 있으면 여기에는 일체의 법도 없어진다(誰有諸煩惱 獨本謂懈怠 若有一懈怠 此無一切法)'고 했다.
〈대지도론(大智度論)〉 80권에 '정진이란 마음을 법에 익혀서 게으르지 않음을 이름이라. 여법한 재물을 이루어 보시 등에 쓰는 것이 몸으로 정진하는 것이라 한다면 아끼고 탐하는 등 악한 마음을 끊어 얻어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마음으로 정진하는 것이라(精進者 謂心練于法而不간懈怠. 如法致財而用于布施等 爲身精進 斷貪等惡心 使不得入者 爲心精進)'고 했다.
정진바라밀은 게으르지 말고, 근면하게 부지런히 닦아 나아가는 것이니 일차적으로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선정'과 '지혜바라밀'을 끊임없이 계속해서 닦아 나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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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찬대사 | ||
'선(禪)'은 산스크리트어 '드야나(Dhyana)'의 음역인 '선나(禪那)'로 삼매(三昧)라고도 한다. 번역해서 정(定), 정려(靜慮), 사유수(思惟修)라 하는데 '정'은 마음을 한 곳에 주시하여 흐트러뜨리지 않는 것이며, '정려'는 정신을 통일하여 고요히 관조하는 것이며, '사유수'는 마음을 전일케 하여 사유하는 수행으로 사람의 산만(散漫)하고 잡란(雜亂)한 마음을 일경(一境)에 집주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일반의 사람들은 망상으로 분비(紛飛)하기 때문에 '심원의마(心猿意馬)'라 하는데 이는 '마음은 원숭이요 뜻은 말이다'라는 뜻으로 원숭이나 망아지처럼 일분일각을 쉼 없이 분별망념으로 오두방정을 떤다는 뜻이다.
사람은 때로 인자한 천사 같은 때가 있는가하면 때로는 포악한 마귀 같은 때가 있으니 이는 각자의 본심과 달리 마군이가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이러한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부처님께서 선정(禪定)을 익혀서 망상을 제어하고 진여를 바로 세우며 잡념을 맑히고 사념을 그치게 하여 몸과 마음의 영정(寧靜)을 회복하도록 했다.
영가선사(永嘉禪師)의 〈증도가(證道歌)〉에 보면 '걸어도 선이요 앉아도 선이니 말하든 묵묵하든 움직이든 고요하든 바탕은 평안하다(行亦禪 坐亦禪 語默動靜體安然)'했다
또한 고인(古人)은 '물을 운반하고 나무를 옮기는 것이 삼매를 여의지 않는다(運水搬柴 不離三昧)'고 했다.
또한 옛 성인은 선에 대한 대략을 밝히기를 '밖으로 천만 경계를 대하되 부동(不動)함은 태산과 같고 안으로 마음을 지키되 청정함은 허공과 같아서 동(動)하여도 동하는 바가 없고 정(靜)하여도 정하는 바가 없이 그 마음을 작용하라'고 일러 주었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성인의 말씀을 빌려 말하자면 '육근(六根)이 무사(無事)하면 잡념(雜念)을 제거하고 일심을 양성하며, 육근이 유사하면 불의(不義)를 제거하고 정의(正義)를 양성하라'고 가르쳐 시처(時處)를 가릴 것 없이 대승적(大乘的)인 수행 방법을 제시했다.
선은 불교 계정혜(戒定慧) 삼무루학(三無漏學)의 하나로 불법을 배우는데 반드시 닦아야할 가장 요긴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선의 종류가 많은데 세간선(世間禪)이 있고 출세간선(出世間禪)이 있으며 범부선(凡夫禪)이 있고 외도선(外道禪)이 있으며 이승선(二乘禪)이 있고 보살선(菩薩禪)이 있으며 최상승의 여래선(如來禪)이 있다. 또한 조사선(祖師禪) 등이 있어서 명칭은 서로 다르고 심천(深淺)은 서로 같지 않을지라도 선정(禪定)을 수습(修習)하는 데는 같다.
이 가운데서 여래선과 조사선이 중요하다.
여래선이란 '여래의 말씀' 즉 '부처님께서 설한 경전에 의거, 수행하여 깨닫는 선'이라는 뜻이다. 또한 여래가 깨달은 경지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다른 말로는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 '최상승선(最上乘禪 : 최고의 선)'이라고도 한다.
여래선에 대하여 〈능가경(楞伽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무엇을 여래선이라고 하는가?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들어 스스로 깨달은 성스러운 지혜 모습으로 '삼종락 : 천상락(天上樂), 선락(禪樂), 열반락(涅槃樂)'에 머물러 모든 중생을 위해 불가사의(不思議)한 많은 일을 이루나니 이를 이름하여 여래선이라 한다(云何如來禪謂入如來地 得自覺聖智相三種樂住 成辦衆生不思議事 是名如來禪)'고 했다.
조사선은 동래조사(東來祖師)인 달마(達磨)가 바로 전한 선(禪)이라는 의미로 '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교의 밖에 따로 전하며(敎外別傳), 바로 마음을 가리켜(直指人心), 성품을 보고 부처를 이룬다(見性成佛)'고 표방한 선으로 육조혜능(六祖慧能, 639-713) 이후의 남종계의 선, 곧 남종선(南宗禪)을 말한다.
이 조사선은 일반적으로 중국선(中國禪)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이고 있는데, 조사(祖師)란 선종에서 부처(佛)에 대신하는 이상적인 인격자로 보고 있다.
따라서 불교의 선종에서 달마계통의 남종선은 인도의 선보다 달마선이 뛰어나다고 하여 여래선이라는 말이 생겼으며, 그 중에서 특히 질적으로 높은 것을 조사선이라 부른다.
이 명칭은 당나라 후기에 나타났지만, 기초를 만든 것은 하택신회(荷澤神會; 684~758)와 마조도일(馬祖道一 ; 709-788) 계통의 선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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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신대사 | ||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은 산스크리트어로 '지혜의 완성'이라는 뜻으로 최고의 지혜를 뜻하며 분별심을 여읜 지혜로써(無分別智) 앞에서 말한 다섯 바라밀을 이끄는 기둥과 같다. 따라서 존재론적인 공(空 sunyata)의 본질적인 개념을 극(極)에까지 확장시킨 초기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경전들과 그 주석서들의 주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진리의 지혜'요, '자성의 지혜'이며, '불조의 지혜'로 가장 근본 되고 원천이 되는 지혜이며, 닦아서 이루는 지혜가 아니라 본유(本有)한 지혜를 말한다.
특히 '반야'의 뒤에다가 '바라밀(波羅蜜)'을 더함은 '진리의 지혜'라는 것을 확실하게 표시한 것으로 오로지 진리의 지혜라야 피안(彼岸)에 도달할 수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부처님의 지혜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지만 그 근본에 있어서는 한 지혜이다.
하나는 '일체지(一切智)'이다. 일체란 철학적인 명사로 볼 때 '우주만유의 본체'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만유의 본체를 철저하고 명료하게 통달하고 정확하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또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 바로 부처님', 또 '완전한 지혜를 갖고 있는 선지자(先知者)' 등을 말하기도 한다. 또 천태(天台)에서는 '이승소득(二乘所得)의 지혜'라 했고, 구사(俱舍)에서는 '불지(佛智)라'하였으며, 사교의주(四敎儀註)에서는 '일체를 공(空)이라고 아는 지혜'를 말한다고 했다.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권하(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卷下)〉에 '원만 구족하여 새어나감이 없는 경계로 항상 맑아서 해탈한 몸이며, 적멸하여 사유를 초월하였음을 일체지라 이름 한다(滿足無漏界 常淨解脫身 寂滅不思議 名爲一切智)고 했다.
둘은 '도종지(道種智)' 즉 '종지(種智)'이다. '도종지'란 우주의 일체 현상을 아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동물이나 식물, 광물 등 삼라만상이 무량무변하게 벌려있지만 그것들이 이뤄지는 이치, 소멸되는 도리를 빠짐이 없이 다 알고 더 나아가 현재의 변화과정은 물론이고 미래의 변화과정까지도 완전하고 명료하게 아는 지혜이다.
또한 일체의 실천을 배워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의 지(智)'를 말한다. 또 현실의 차별, 다양한 여러 사상에 대하여 적확자재(的確自在)하게 판단, 대처하는 지혜이다. 따라서 천태종에서 별교자(別敎者)는 이 지를 '몸에 익히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셋은 '일체종지(一切種智)'이다. 이는 본체와 현상이 하나요 둘이 아님(是一不是二)을 아는 지혜로 바로 최고 구경(究竟)의 최고로 원만한 지혜이니 이 지혜는 어느 한편으로 치우친 것이 아니라 전체에 두렷하게 두루한 완전하고 명료한 통달의 지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일체를 그 구체적인 특수상(特殊相)에 있어서 아는 지혜. 모든 것의 개별성(個別性)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또 최고의 완전무결한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의 지혜요 모든 존재에 관해 평등의 상(相)에 즉(卽)하여 차별의 상(相)을 상세하게 아는 지혜이다.
위에서 세 가지 지혜를 들어서 설명을 했지만 근원에 있어서는 셋이 아닌 하나로(非三是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갈무려 있는 가장 근본된 본지(本智)요 원지(原智)라고 할 수 있다.
이 '반야바라밀'은 우주 모든 존재의 근원적 실상(實相)이 환히 밝혀져서 일체의 모든 실상을 투철히 깨달아 알고 보는 것을 말한다.
즉 반야라고 하는 지혜는 분별(分別)하고 사량(思量)하는 지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올바로 관찰했을 때 나타나는 존재 근원의 깨쳐진 지혜로 일체의 모든 분별사량을 여읜 지혜이다.
또한 반야의 지혜는 연기(緣起), 공(空), 무아(無我)를 밝게 깨쳐보는 지혜이다. 다시 말해서 일체 존재의 실상(實相)이 연기(緣起)로 이루어진 인연가합(因緣加合)의 존재로 고정된 실체가 없는 텅 빈 것이며, 내가 없는 것이라는 것을 밝게 깨우쳐 아는 지혜라고 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