〇 般若波羅密多心經
반야바라밀다심경
앞에 「마하(摩訶 Maha)」가 붙기도 하고 생략되기도 한다. 「마하」는 ‘크다’,‘많다’,‘수승하다’는 뜻. 그러나 크다거나, 많다거나, 수승하다고 하는 것 또한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상대가 없이 크다’는 뜻을 살리기 위해 해석을 하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반야」는 범어(梵語)‘prajn̄ā’, 또는 파리어(巴里語)‘pan̄n̄ā’의 음사(音瀉)로,‘지혜’를 뜻한다.[아쉽게 이 블로그에서 산스크리트어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고 있다.]
「바라밀다」는‘paramita’의 음역으로,「도피안(到彼岸)」이라고 번역된다.‘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인데,「다 (ta)」가 붙으면‘그러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고통의 이 언덕(衆生界)을 벗어나, 해탈의 저 언덕(菩薩界)으로 이르게 하는, 크고 넓은 지혜를 알려주는 중요한 방법”이라는 의미이다. 「반야심경」또는「심경」이라고 줄여 부르기도 한다.
〇 觀自在菩薩
관자재보살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다른 이름. 중생의 모든 고통을 두루 듣고 살피어, 자유자재(自由自在)의 능력과 방편으로 구원하여 준다는 보살.
〇 行深般若波羅密多
행심반야바라밀다
저 언덕으로 이르게 하는‘크고 넓은 지혜, 또는 그 공부를 깊이 수행하고 있을 때’라는 뜻.
〇 照見 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조견 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조견은 관조(觀照)로써 보는 것을 말한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혜안(慧眼)으로 성품 자리를 환히 비추어 본다는 뜻이다. 비추어 보기 위해서는 가리고 막히는 것이 없어야 한다. 마치 맑은 시냇물에 조약돌이 환히 비추이듯이, 밝은 달을 가리는 구름이 없어야 환히 비추어 볼 수 있듯이, 마음에도 무명과 온갖 분별심을 걷어내야 본래의 성품자리가 환히 비추일 것이다. 비 오거나 흐린 날 여객기를 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구름을 뚫고 올라가면 푸른 창공에서 빛나는 태양을 보면서 감탄한 적이 있을 것이다. 지상에서는 궂은 날씨이지만 검푸른 창공은 언제나 티 없이 맑다는 것을. 우리의 마음도 무명에 가리고 욕심에 물들어 밝은 지혜가 가려져 있지만, 성품자리는 본래 티 없이 맑은 혜광(慧光)이 항상 비칠 것이다.
오온은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쌓임을 말한다. 여기에서 색은 물질을, 수상행식은 분별식심(分別識心)을 말한다. 그 오온이 모두 공한 것을 환히 비추어 보고(깨닫고) 모든 괴로움을 벗어났다는 말씀이다.
색(色)은 물질, 물체를 의미한다. 모든 물질은 빛과 모양을 갖추고 있으므로 색으로 표현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를 색이라고 한 것이다.
수(受)는 느낌을 말한다. 인체의 오관<五官 -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을 통하여 느끼는 것을 말한다.
상(想)은 오관을 통해 들어온 느낌을 생각을 통해 좋아함과 싫어함, 차고 더움 등을 분별하게 된다.
행(行)은 몸을 동작하는 것이다. 생각을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식(識)은 의식(意識)이다.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분별하고 지각하는 것이다.
온(蘊)은‘쌓을 온’이며, 적(積)과 같은 뜻.
이 다섯 가지가 중생이 몸과 행동과 마음으로 업을 쌓게 되는 필연적인 요소이며, 시간적인 순서의 개념이다. 즉 ①색➝②수➝③상➝④행➝⑤식의 순(順)으로 업을 짓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쌓이고 모여, 중생의 업(業)이 되기 때문에 온(蘊)이라고 한다. 따라서 오온이 원래 공한 것을 깨달으면 고액(苦厄)을 벗어날 수 있다는 뜻이다.
중생이 몸과 마음을 움직이면서 무수히 많은 업을 쌓아가게 되는데, 그것이 곧 번뇌와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 괴로움의 원인인 색수상행식 이 다섯 가지의 근본을 비추어 보니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이라, 실체가 없는 것을 알았으니 그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집착할 것이 없으므로 다 비우고 고액을 건너갈 수가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공(空)으로 시작해서 공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공(空)이나 무(無)는, 인간의 언어로써 표현되는 상대적인 공과 무가 아니다. 즉 유(有)의 상대 개념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공을 설명하기 위해 그동안 수많은 해석과 논설(論說)이 어 왔으나, 어쩌면 모두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언어(言語)로서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어찌 보면 넌센스 퀴즈와도 같은 격외(格外)의 방법을 동원해 보기도 하나, 도(道)를 깨우친 사람은 어떻게 하더라도 현문 현답(賢問賢答)이 될 것이고 깨우치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지식을 총동원하여 논리적으로 말하여도 우문우답(愚問愚答)이 될 것이다. 지식으로 알려고 하지 말고, 지혜로써 관조(觀照)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부질없는 설명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원각성존 소태산 부처님께서 『일원상 서원문(一圓相誓願文)』에,
“일원(一圓)은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처(入定處)이요,
유무 초월(有無超越)의 생사문(生死門)인바,”
라고 하셨고, 다음의 게송(偈頌)을 말씀하셨으니, 이 뜻을 깨쳐 아는 길 밖에 없다.
“유(有)는 무(無)로 무(無)는 유(有)로
돌고 돌아 지극(至極)하면
유와 무가 구공(俱空)이나
구공 역시 구족(具足)이라.”
여기에서“구공(俱空) 역시 구족(具足)이라.”하신 말씀의 참 뜻을 알면 곧 도를 아는 것이리라.
〇 舍利子
사리자
사리자는 부처님의 十대 제자 중 一인으로「지혜제일」「무쟁제일(無爭第一)」등으로 불린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사리자의 지혜는 삼천 대천 세계의 일체 중생의 지혜를 다 모아도 사리자 한 사람의 지혜에도 못 미친다고 한다. 금강경에서는「수보리」로 불린다.
〇 色不異空 空不異色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은 눈으로 보이는 형상 있는 모든 존재를 말한다. 그 색이 불변하여 如如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 텅 비어 없는 공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〇 色卽是空 空卽是色
색즉시공 공즉시색
앞에서 다르지 않다는 말씀을 한 번 더 강조하여, 다르지 않을 뿐 아니라, “곧 같다”고 반복한 의미이다.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 또한 상대하는 견해를 내어“다르다”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잘못 알 수 있으므로, 바로 이어서“같은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신 것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한 방편이다. 색이 공한 것이라는 말씀은 부처님 당대(當代)의 사상과 철학에 있어서 엄청난 선언이다. 당시의 잘못된 견해를 일시에 타파하신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그에 집착함으로써 모든 괴로움을 자초하는 중생들의 어리석음을 각성케 하는 대갈일성(大喝一聲)인 것이다. 뒤에 이러한 당대의 잘못된 관념들을 소개하였다.
〇 受想行識 亦復如是
수상행식 역부여시
색 뿐만 아니라 수상행식도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여나 하나, 반복되므로 생략한 것이다. 굳이 생략하지 않고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受不異空 空不異受 受卽是空 空卽是受
수불이공 공불이수 수즉시공 공즉시수
想不異空 空不異想 想卽是空 空卽是想
상불이공 공불이상 상즉시공 공즉시상
行不異空 空不異行 行卽是空 空卽是行
행불이공 공불이행 행즉시공 공즉시행
識不異空 空不異識 識卽是空 空卽是識
식불이공 공불이식 식즉시공 공즉시식
이렇게 물질 뿐만 아니라 모든 의식작용까지 실체가 없다는 것이니, 색이 공하면 당연히 수상행식도 따라서 공할 수밖에 없다. 바꾸어 말하면 판단하고, 인식하고, 분별할 대상의 세계가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우리의 인식작용도 참이 아니라는 말이다.
〇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렇게 모든 법(일체 만물)이 공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판별할 수 있는 일체의 상대적인 현상 세계도 없다는 뜻이다. 생멸이나, 구정이나, 증감은 우리의 인식작용에 따른 판단이다. 현상은 如如한데 인간이 만들어 구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원래는 태어남도 죽음도 없고, 더럽고 깨끗한 것도 없고, 늘어나거나 줄어들 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선가(禪家)의 화두(話頭)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저자 거리에서 한 사람이 고기를 사려고 하면서 주인에게, “깨끗한(淨) 데로 떼어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푸줏간 주인이 칼을 도마에‘탁’꽂으며, “어디가 깨끗하고,어디가 더러운가?’라고 언성을 높이며 되묻는 소리에 문득 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보통 똥이 더럽다고 말한다. 확실히 더럽고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왜 더러운 것인가에 대해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런데 과연 더러운 것인가? 악취가 나기 때문인가? 그것이 본래 더러운 것이라면, 뱃속에 들어 있다는 생각만 하여도 진저리를 쳐야할 것이다. 그러나 자기 뱃속에 똥이 들어 있다고 괴로워하고 진저리치게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뱃속에 들어 있을 때에는 더럽지 않고, 그것이 배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더러운 것인가? 아리따운 아가씨가 한껏 멋을 내고 길을 걸어가는데, 그 뱃속에 똥이 들어 있다고 상상하여 보라. 겉은 멋을 냈으나, 속에는‘더러운 똥’이 가득 들어 있을 것을 생각하면 저절로 쓴 웃음이 날 일이다. 아주 어린아이가 자기가 눈 똥을 주무르고 노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아이는 아직 더럽고 깨끗한 것을 분별하지 못한다. 사리(事理)와 구정(垢淨)을 분별하지 못하는 천진(天眞) 그대로의 아이를, 과연 어리석다고 탓할 수 있을 것인가? 똥이 더러운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고 분별하는가? 본래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더럽다’고 교육을 받았기 때문은 아닌가? 선입관을 버리고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입으로 섭취한 음식이 위와 장을 거치면서, 각종 소화액으로 분해되고 필요한 양분이 소화 흡수되고 남은 찌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더럽다’,‘깨끗하다’는 것은 본래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 놓은 개념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대표적으로 생멸(生滅), 구정(垢淨), 증감(增減)의 세 가지의 경우만 예를 든 것에 불과하다. 혹자는 이를 두고 [생멸구정증감]의 여섯 가지를 육불중도(六不中道)라 말하고, 용수의 중론(中論)에서는 [불생(不生) 불멸(不滅) 불상(不常) 부단(不斷) 불이(不異) 불래(不來) 불출(不出)]의 여덟 가지를 팔불중도(八不中道)라 하였지만,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 문자에 억매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세상에 상대되는 현상이 어찌 여섯 가지나 여덟 가지 뿐이겠는가? 수 없이 많은 세상의 상대적인 개념 - 호오(好惡), 고저(高低), 장단(長短), 유무(有無), 시종(始終), 다소(多少) 등등 - 들이 있고, 이러한 모든 상대적인 개념으로는 진리의 본체를 알 수 없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상대가 끊어진 자리가 진리 자리이다.”(言語道斷의 入定處)
〇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〇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우리 몸의 오관(五官 또는 五根)과, 의(意)를 합쳐 육근(六根)이라 하고, 색성향미촉법은 六근이 상대하는 경계(境界)인데, 육경(六境) 또는 육진(六塵)이라고도 한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상대하는 세상 경계는, 실(實)이 없고 참이 아닌‘허망한 세계’,‘티끌 같은 세계’라는 뜻으로 六진이라 하였다.
안계 내지 의식계 역시 六근을 통해 느끼고, 판단하고, 분별하는 대상의 세계를 말하는 것으로, 이계(耳界), 비계(鼻界), 설계(舌界), 신계(身界)가 생략된 것이다. 이 여섯 가지를 육식(六識)이라 하고, 六근 六경 六식을 모두 합하여 18계(十八界 또는 十八處)라 한다. 六근과 六경만을 합하여 12처(十二處)라고 한다.
이렇게 근(根)경(境)식(識)계(界)처(處) 등은 학문적인 체계를 수립할 때에나 필요하고, 우리는 다만 우리 몸의 육근과 대상 세계 및 그 대상 세계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인식작용들이 모두 참이 아니고 헛된 것이라는 의미만 취하면 될 것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몰아 말하면, 나(我)도 없고 내가 살아가는 세상도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〇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무명도 없고 무명이 다한 것도 없으며, 내지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이 다했다는 것도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十二인연에 대한 말씀하신 것이다. 무명(無明)과 노사(老死) 사이에, 행(行)식(識)명색(名色)육입(六入 또는 六處)촉(觸)수(受)애(愛)취(取)유(有)생(生)이 생략되었다.
전체를 다 표기하면 다음과 같다.
① 無無明 亦無無明盡
무무명 역무무명진
② 無行 亦無行盡
무행 역무행진
③ 無識 亦無識盡
무식 역무식진
④ 無名色 亦無名色盡
⑤ 無六入 亦無六入盡
무육입 역무육입진
⑥ 無觸 亦無觸盡
무촉 역무촉진
⑦ 無受 亦無受盡
무수 역무수진
⑧ 無愛 亦無愛盡
무애 역무애진
⑨ 無取 亦無取盡
무취 역무취진
⑩ 無有 亦無有盡
무유 역무유진
⑪ 無生 亦無生盡
무생 역무생진
⑫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노사 역무노사진
十二인연은 十二지연기론(十二支緣起論) 또는 十二지연기설(十二支緣起說)이라 한다. 연기설(緣起說)은 부처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중요한 사상으로, 모든 현상이 발생하고 존재하는 원리로서, 수레바퀴와 같이 연속적으로 돌고 돈다. 일체 중생의 윤회하게 되는 현상을 순서의 논리로 표현한 것이 十二인연이다. 연기와 十二인연을 학문적으로 자상히 설명하려면 한 권의 책으로도 부족할 것이나 다음의 몇 구(句)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상적유대경(象跡喩大徑)』에
“연기(緣起)를 보는 자는 곧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는 자는 곧 연기를 보는 것이다.”
또 말씀하시기를,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본다.
법을 보는 자는 곧 나 부처를 본다.”고 하였다.
여기서‘법’이라고 하는 것은 도(道)와 같은 지고(地高)한 원리가 아니라, 유위무위(有爲 無爲)의 모든 존재를 말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께서 세상의 모든 존재가 연기(緣起)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으신 것이다.「연기」자체가 무상(無上)의 진리가 아니라, 사물의 존재 방식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이것으로 연(緣)하여 저것이 기(起)한다.’ 다시 말해「이것」을 원인으로 하여「저것」이라는 결과가 초래한다는 뜻으로, 인과(因果)에 다름 아니다.
“此有故彼有 此起故彼起”
차유고피유 차기고피기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기 때문에 저것이 일어난다.”
이와 같은 연기관(緣起觀)에 의하여 부처님께서 연기를 ‘발생하는 순서대로, 그리고 소멸하는 순서대로’ 밝히신 것이 十二인연이다. 여기서‘발생하는 순서대로’설명하신 것을「순관(順觀)」또는「유전연기(流轉緣起)」라 하고,‘소멸하는 순서대로’설명하신 것을「역관(逆觀)」또는「환멸연기(還滅緣起)」라 한다. 즉 12연기에 끌려 끝없는 괴로움의 바다에 해매이게 되는 원인이 바로 순관이고, 그 반대로 괴로움의 근본 원인을 하나씩 찾아 들어가 괴로움의 원인을 하나씩 소멸해 가는 것이 역관이다.
十二인연을 순관(順觀)의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① 무명(無明)에 연(緣)하여 행(行)이 생하고,
② 행에 연하여 식(識)이 생하고,
③ 식에 연하여 명색(名色)이 생하고,
④ 명색에 연하여 육입(六入, 또는 六處)이 생하고,
⑤ 육입에 연하여 촉(觸)이 생하고,
⑥ 촉에 연하여 수(受)가 생하고,
⑦ 수에 연하여 애(愛)가 생하고,
⑧ 애에 연하여 취(取)가 생하고,
⑨ 취에 연하여 유(有)가 생하고,
⑩ 유에 연하여 생(生)이 생하고,
⑪ 생에 연하여,
⑫노사(老死)가 생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태어나서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괴로운 현실을 겪게 되는 것이며, 이렇게 하여 모든 괴로움의 씨앗들이 끊임없이 모여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集起)
역관(逆觀)은 괴로움의 원인을 순관의 반대로 하나씩 멸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①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②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고,
③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고,
④ 명색이 멸하면 육입이 멸하고,
⑤ 육입이 멸하면 촉이 멸하고,
⑥ 촉이 멸하면 수가 멸하고,
⑦ 수가 멸하면 애가 멸하고,
⑧ 애가 멸하면 취가 멸하고,
⑨ 취가 멸하면 유가 멸하고,
⑩ 유가 멸하면 생이 멸하고,
⑪ 생이 멸하면,
⑫노사가 멸한다.
이렇게 하여 모든 괴로움의 씨앗들이 모두 멸진(滅盡)한다.
반야심경에서‘無無明 내지 無老死’ 또는‘無無明盡 내지 無老死盡’이라고 한 것은, 순관과 역관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고, 이 모든 것이 공한 것이라고 하시었다.
부처님의 연기관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歷史的), 사상적(思想的), 철학적(哲學的) 의미를 갖는다. 「싯달타」가 출가(出家)를 결심하게 된 것은 사문유관(四門遊觀)이었다. 즉 왕궁(王宮)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동서남북의 성문(城門) 밖을 나가 보니, 중생들의 가난과 고통, 질병과 노사(老死)등 모든 괴로움의 현실을 직접 목도하게 되고, 결국「싯달타」 자신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러한 괴로움을 면할 수 없다는 자각이 유성출가(踰城出家)를 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이렇게 출가한 인간「싯달타」는 인도 전통의 수행법을 두루 섭렵하다가, 이러한 수행법이 모두 잘못된 것임을 통찰하고, 결국 자신만의 외로운 수행의 길로 가게 된다. 깊은 명상(瞑想)과 사유(思惟), 그리고 선정(禪定)등을 통해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에는 반드시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깊이깊이 사유(思惟)하게 되고, 모든 괴로움의 근본 원인에는 이러한 연기가 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은 것이다. 연기는 이렇게 논리적인 사유의 결과이고, 철학적인 내용이다.
부처님은 당대의 사람들이 연기나 인과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1) 자재화작인설(自在化作姻說)
세계와 인간의 운명이‘브라흐만’이나‘마헤슈바라’(Maheśvra, 大自在天)와 같은 최고 신(神)이 창조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모든 것이 신의 의지에 의하여 좌우되는 것이므로, 나의 의지나 노력으로 운명이 바뀌거나 변화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작인설(作因說)을 믿는 다면, 스스로 향상하고 노력해야 할 아무런 이유나 근거가 없게 되는 것이다.
2) 숙작인설(宿作因說)
현세(現世)의 모든 행불행은 모두 전생(前生)의 업보이므로, 인간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결정된 것이다. 따라서 현세(現世)에서의 노력은 내세(來世)에나 받을 수 있는 것이지, 현세의 운명에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가 없다는 일종의 숙명론(宿命論)이다.
3) 결합인설(結合因說)
인생은 지수화풍(地水火風)의 四大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 결합(結合)의 조합(組合)에 따라 길흉(吉凶)과 고락(苦樂)이 결정된다. 이 결합은 태어날 때 이미 확정된 것이며, 죽을 때 까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 역시 인간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운명이 결정된다는 생각이다.
4) 계급인설(階級因說)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흑청적황백순백(黑靑赤黃白純白)의 여섯 가지의 계급으로 구별되어 태어났고, 그 계급에 따라 인간의 지혜나 신분의 고하 등 모든 것이 좌우된다는 생각이다. 따라서 인간의 후천적인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5) 우연기회인설(偶然機會因說)
무인무연설(無因無緣說)이라고도 한다. 인간의 운명은 인과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도, 신의 은총이나 징벌에 의한 것도 아닌, 완전히 우연한 기회에 생겨난 것에 불과 하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당대(當代)의 사고(思考)들이 모두 잘못되었다고 설파하신 것으로, 한마디로 엄청난 사고의 혁명을 일으킨 것이다.
十二연기의 발생 순서는 세상 모든 중생들의 삶의 모습이 대체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열두 가지의 순서대로 모든 일이 되어 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두 가지, 또는 몇 단계가 생략될 수도 있다고 보아야 하고, 경우에 따라 순서가 바뀌어 진행되기도 하고, 각각의 요인들이 또한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十二연기의 단어(單語)들이 현대(現代)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개념들과 조금씩 달라서 빨리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좀 더 현대적으로 풀어 쓰고, 우리의 실제 행동들과 연결시켜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낯설지 만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여 아기를 낳는 과정을 十二연기의 순서대로 하나씩 대입시켜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것이다.
원불교 교조이신 원각성존(圓覺聖尊) 소태산 대종사님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의 세계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존재의 관계가「은(恩)」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불교사(佛敎史)적인 측면 뿐 아니라, 인류 정신 문명사(人類 精神 文明史)의 쾌거이며, 종교와 도덕에 크나 큰 전환점을 가져오는 일대 혁명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만물이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현상을「연기(緣起)」라고 한다면,「사은(四恩)」은 만물이 존재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생의 세상을 고해(苦海)로만 바라보지 않고「은혜로운 세상」이라고 온 세상에 천명하신 것이 후천개벽(後天開闢)의 구세성자(救世聖者)이신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님의 위대성이다. 그리하여 「고해(苦海)의 세계」를, 인간의 노력으로「낙원(樂園)의 세계」로 전환하시고자 하는 원대하고도 미래 희망적인 포부의 원동력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〇 無苦集滅道
무고집멸도
고집멸도 사성제(四聖諦)도 없다는 말씀이다. 十二인연이 없다면 당연히 고집멸도도 따라서 없는 것이다. 十二연기를 일반 대중에게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네 가지로 달리 설명한 것이 四성제이기 때문이다. 四성제 중에 고제(苦諦)와 집제(集諦)는 유전연기, 멸제(滅諦)와 도제(道諦)는 환멸연기라 할 수 있다. 집(集)이 인(因)이라면 고(苦)는 과(果)가 되고, 도(道)가 인(因)이라면 멸(滅)은 과(果)가 된다. 즉 중생이 괴로움의 과를 당하는 것은 집이 원인이라는 말이다. 또한 괴로움을 멸하기 위해서는 도를 인으로 하여 멸이라는 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것은 지극히 논리적인 인과 관계이다.
멸을 이루기 위해서는 도(道), 즉 수행법(방법), 다시 말해 十二연기를 하나씩 소멸하여 저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한 길이 바로 다음의 팔정도(八正道)이다.
① 정견(定見)- 바른 소견.
② 정사유(正思惟)- 바른 생각.
③ 정어(正語)- 바른 말.
④ 정업(正業)- 바른 업.
⑤ 정명(正命)- 바른 생활.(삶)
⑥ 정정진(正精進)- 바른 정진.(노력)
⑦ 정념(正念)- 바른 기억.
⑧ 정정(正定)- 바른 수양.
이 八정도 가운데 정어, 정업, 정명의 三道는 계(戒)에, 정념, 정정의 二道는 정(定)에, 정견, 정사유의 二道는 혜(慧)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정진은 계정혜 삼학(三學)의 공통된 수행의 원동력이다. 이 十二인연과 四제 八정도(四諦 八正道)가 바로 불교의 교리의 핵심이다.
“그런데 이 마저도 아니고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〇 無知亦無得 以無所得故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알았다(또는 깨달았다)고 할 것도 없고, 또한 그래서 깨달아 얻었다고 할 것도 없다는 말씀이다. 무엇을 알았다든지 깨달아 얻었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상이 될 것이니, 그 상(相)마저 놓아야 진정한 불(佛)이 되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의 四상이 없어야 진정한 불(佛)이 된다는 말씀이나 다름없다.
〇 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故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보리살타의 준말이 보살(菩薩)이다. 모든 보살이 이 반야바라밀다 공부를 하여 보살이 되었다는 뜻이다. 요즈음 사찰에서 재가 신도(在家信徒)를 높여 부르는「보살」의 의미가 아니라, 공부가 깊은 수행자를 의미한다. 앞에서 언급하신 것처럼, 모든 것이 무(無)이고 공(空)인 까닭에 보살이 반야바라밀다 공부를 한다는 뜻이다.
〇 心無罣礙 無罣礙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보살이 반야바라밀다 공부를 하여 위없는 도를 얻었기 때문에 걸리고 막힐 것이 없다. 걸리고 막힐 것이 없다면 자유자재(自由自在)하는 경지이다. 걸리고 막힐 것이 없으므로 두려워할 것도 없다. 생사(生死)를 자유하고, 거래(去來)를 자유하고, 복락(福樂)을 자유 할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 사고팔고[四苦八苦 ; 생로병사의 四苦와, 愛別離苦(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 怨憎會苦(원수를 만나야 하는 괴로움), 求不得苦(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五陰盛苦(오음이 치성하여 받는 괴로움)의 네 가지를 더하여 八苦라 한다.]의 고통, 윤회의 고통과 속박에서 해방되고, 무명(無明)에 가리어 어리석을 것도 두려워할 마음도 그 대상도 없는, 대자유(大自由)이며 대해탈(大解脫)인 것이다. 그래서 전도몽상(顚倒夢想)을 멀리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전도 몽상하지 않고 세상을 바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열반(涅槃)에 드는 것이니, 중생의 삶에서 부처의 삶으로, 이 언덕에서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열반은‘nirvana' 의 음역으로, ‘불을 끈다’의 뜻이며, 「멸(滅)」로 번역된다.
「罣 괘」는 옥편(玉篇)에‘礙也, 거리낄 괘, 옭힐 괘, 걸릴 괘, 그물 괘’로 나온다. 그것을 어째서‘가’라고 읽는 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바가 없다. 四聖諦의 諦(審也, 살필 체)를「제」라고 읽는 것처럼, 과거로부터 내려온 전통이 그러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경우는 불경(佛經)에서 자주 발견되는 현상이다.
〇 得阿縟多羅三藐三菩提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아뇩다라」는‘anuttarā’의 음사(音瀉)이다. ‘an’(부정-無)과 ‘uttarā’(보다 높은)의 합성어인데,‘보다 높은 것이 없는’이라는 뜻이다. 「무상(無上)」으로 의역(意譯)된다.
「삼먁」은‘samyak'의 음사인데,‘완벽하다’는 의미이며,‘samyan͂c’에서 왔다. 여기에는‘같이 간다’라는 의미가 있다. 漢譯으로 「정편(正徧), 정등(正等)」이라 하는데,「徧」의 의미에는‘두루두루 간다’,‘두루 미친다’는 뜻이 들어 있다.
「삼보리(三菩提)」는‘sambodhi’의 음역인데,「각(覺)」 또는「정각(正覺)」의 뜻이다.‘bodhi'가 원래「각(覺)」의 뜻이고,‘sam’은‘함께, 완전한, 같은’등의 뜻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것은 접두사로서‘매우, 아주, 철저하게, 완전하게, 아름답게’등의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삼(三)이라는 한역 때문에 숫자「셋」으로 오인(誤認)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阿縟多羅三藐三菩提」는「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또는 「무상정편지(無上正徧智)」로 의역할 수 있다. 따라서「得阿縟多羅三藐三菩提」는「더 이상 없는 바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〇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반야바라밀다 주(呪)는 크게 신비한 주(呪)이며, 크게 밝은 주(呪)이며, 위가 없는 주(呪)이며, 등위(等位)가 없는 주(呪)이다.
〇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般若波羅密多呪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이 주(呪)를 외면 능히 일체 고액을 벗어날 수 있고, 진실하여 헛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이 주를‘반야바라밀다주’라고 하는 것이다.
〇『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 사바하』
「가떼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
(gate gate pāragate pārasamgate bodhi svāhā)
이것은 진언(眞言)이다. 산스크리트語를 소리 나는 데로 한자(漢字)로 옮긴 것에 불과하므로, 한자의 뜻을 취할 필요도 없고, 뜻을 구태여 해석하려고 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한자를 일부러 적지 않았다. 아랫줄에 있는 것은 산스크리트어를 우리말로 소리 나는 대로 옮긴 것이다.
진언은 진언일 뿐으로, 그 자체로서 매우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의 원력(願力)이 갊아 있는 신비하고 신성한 것으로 보면 된다. 우리가“나무아미타불”을 념(念)하듯이, 마음을 청정히 하고 일심으로 외우고 또 외우면 자연히 해탈과 도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자를 중국인들이 발음할 때에는 산스크리트 원음(原音)과 유사하게 발음할 것이다. 「보리(bodhi)」는 경우에 따라「모제, 모지」로 읽기도 하나, 원음의 취지를 살려「보리」라 했다.
중국에서는「코카콜라(Coka-Cola)」를 한자로「가구가락(可口可樂)」이라고 쓰고, 읽을 때에는 우리와 같이‘코카콜라’라고 발음한다. 만약 코카콜라가 일찍이 중국에 먼저 전래되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한자음으로‘가구가락’이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말과 글을 두고‘코카콜라’를‘가구가락’이라 한다면 참으로 우스운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외래어(外來語)를 중국이나 일본에서 건너온 한자를 빌어 발음하는 경우가 많은데, 바로 잡아야 할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진언 부분을 한자음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산스크리트 원음(原音)을 우리말로 소리 나는 데로 읽는 것이 옳다 하겠다.
끝부분의 「스바하(svāhā)」는‘그렇게 되기를 바란다!’‘행복이 깃들기를!’‘축복이 있기를!’등의 의미로서, 지금도 印度에서는 성스러운 곳에 香을 뿌리면서“스바하”를 외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