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마이투어의 권원담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이법준님의 학생회장및 성치훈님의 부회장 선임된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글쓴이가 마이투어로 되어있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런 사정이 있어서...
아무쪼록 불쾌지수가 높은 요즘에 건강조심하세요..
아래 내용은 조선일보 이메일 클럽에서 보내준 내용이며,
우리가 중국에서 살으면서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심심풀이 보다는 읽어보면 가치가 있을것 같아 겟판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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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메일클럽에서 발송된 메일을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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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범진기자입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6월 30일자로 중국의 조직적 부패에 관한 심층기사를 실었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실감나게 조폭과 관료간의 공생관계를 묘사하고 있는 이 기사는, 그동안 우리가 접했던 평면적 보도를 뛰어넘는 수작이라 생각됩니다. 혼자만 읽기 아까워 회원 여러분들께 번역, 소개해 드립니다.
◆ 파이낸셜 타임스 중국부패 특집
호텔에는 연회가 마련돼 있었다. 사기로 된 (전통) 접시 옆에는 은으로 만든 젓가락이 놓여있었다. 중국 5대 도시의 하나인 선양의 '조직' 대부 류용은 손님을 맞을 채비를 갖추고 주인 자리에 앉았다. 그의 손님은 '상대 조직'의 두목 리준옌이었다.
대화는 매너있게 시작됐다. 하지만 몇가지 요리가 나올 때 쯤, 두 사람간의 해묵은 악감정이 또 다시 튀어나왔다. 쉽게 흥분하는 성격의 류가 먼저 터졌다. 숨겨뒀던 권총을 재빨리 꺼낸 류는 리의 허벅지를 겨냥해 연거푸 7발을 쏘았다. 허연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피냄새가 진동을 했다. 새하얀 테이블보는 검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
리의 부하들이 가만 있을리 없었다. 부상한 보스 리를 에워싸면서 호텔 각층으로 흩어져, 류의 부하들과 전면적인 총격전을 벌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리의 조직이 밀리기 시작했다. 부상당한 리의 부하들은 이 호텔 지하의 병원으로 하나 둘씩 몸을 피했다. 리의 부하들이 어디로 숨었는지 알아낸 류는 그의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형님'은 선양 경찰국의 고위간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의 경관들이 부상당한 리의 조직원들을 찾아냈다. 경찰은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조직원들에게 다가서서,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품속에서 칼을 꺼내 조직원들의 살속으로 깊숙히 박아넣었다. 비명소리가 어두운 밤하늘로 자지러지듯 퍼져나갔다.
◆ 호텔서 대낮 총격전
이것은 1999년의 일이었다. 그때는 중국 남방의 빈털터리 건달이었던 류가 동북방으로 진출, 인구 700만 도시인 선양을 쥐고 흔들던 '권력'의 절정기였다. 1995년만 해도 단순한 깡패에 불과했던 류가 어떻게 4년만에 중국 최대 도시중 하나인 선양을 테러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을까? 그 이면에는 중국 공산당의 어두운 그림자가 놓여 있다.
간간히 흘러나오는 짤막한 보도들, 비공개 인터뷰 등을 종합해 보면 오늘날 중국이 처한 추한 상황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깡패가 조종하는 경찰, 제 욕심만 채우려는 관리, 인민을 외면하는 정치체제의 세가지로 대표된다. 중국 각지의 성공적인 경제발전 모습만이 부각되고 있는 오늘날, 선양의 현재 상황은 과연 중국정부가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구를 수용할 능력을 갖고 있는 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 류와 상대 조직간의 다툼이 없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외부로 흘러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총격전 이후 류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류는 1년이 지나도록 검거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해 7월, 중-러 지역 국경인 흑룡강성 어귀에서였다. 류의 양쪽 주머니는 현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류는 전자화된 여권을 위조하는데 실패했다. 경보기가 울렸고, 300여명의 국경 경찰이 그를 쫓았다. 어둠을 틈타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류는 3시간만에 도주를 포기, 무려 4병분의 수면제를 한번에 삼켜버렸다.
◆ 도망치던 두목, 자살 시도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서는 '대부' 류를 살려야 했다. 대대적인 위세척 수술이 진행됐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극단적으로 잔인했던 그의 행각, 그리고 부패한 관리들의 이름이 하나 둘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잘나가던 전 시장 무쉬신, 그리고 그의 처, 첩, 형, 동생, 누나, 여동생, 딸, 그의 운전사, 그리고 적어도 100개 이상의 도시 공무원들이 부패에 연루됐다는 이달 보도는, 최근 (이 사건을 둘러싸고) 이뤄지는 부패에 대한 조사가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혐의 사실의 거의 대부분은 폭력조직과 모종의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일개 깡패가, 그렇게도 완고한 중국 체제내에서 세력을 키워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한가지 답이 될 수 있는 것은 류가, 다른 모든 나라의 '조폭' 두목들 처럼, 무자비한 폭력을 무기로 타인을 협박하는데 능했다는 사실이다.
류는 그에게 "운이 안좋다"고 말한 점쟁이의 창자를 도려내기도 했고,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여자 사업가의 얼굴을 칼로 난자하기도 했다. 이 여인은 평생 지울수 없는 깊은 흉터를 얼굴에 지고 살아갈 것이다. 류와 그의 부하들은 45명 가량의 사람을 고문-살해했다.
하지만 전부터 그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류가 그렇게까지 잔인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는 유머있고, 겸손했으며 심지어 매력적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고급 관료들이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낮에는 중견 기업 총수
뇌물과 음해 그리고 향응 등의 수단을 통해, 류는 무 시장과 그의 가족들, 부시장, 부시장의 아내 그리고 지방 노동청장까지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얻은 '보호막'을 통해 류는 부동산, 담배회사, 그리고 '자양그룹'이라 불리는 판매회사까지 보유할 수 있었다. 자양그룹은 종업원 2500명에 7억위앤의 자산을 갖춘 중견기업이었다.
류가 이렇게 커나갈 수 있었던 데는 그의 공식적인 '보호자'들 뿐 아니라 중국 정부가 추진한 시장개혁이 큰 배경이 되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선양도 지난 10년간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동안 천지가 뒤바뀐 것 같다"고 말할 정도이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철밥통'이라 불리던 고용 상황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시장의 변화로 수십만명이 해고됐다. 주거지, 일터, 심지어 결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모든 생활을 규제하던 사회주의 원칙들이 이제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무너진 비효율적인 기간산업의 자리로 시장경제라는 냉혹한 물결이 밀고 들어왔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거리에서 물건을 팔러 다닌다. 매춘부들도 그들 틈을 오간다. 정부는 이제 그 매춘부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할 작정이다. 무 시장이 처음 시장에 취임하던 지난 98년, 그는 "인민을 위한 행정,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면서 "형평의 원칙에 입각해 깨끗하고 검소하게 인민을 돌보겠다"고 말했었다. 그는 또 "모든 이익을 인민에게 돌려주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런 무 시장이 입고 다녔던 옷은 외국 유명 디자이너들이 도안한 수입 의류였다. 그는 검은색 벤츠 승용차를 몰고 다녔으며, 출장이라도 갈 때면 5스타급 호텔의 프레지덴셜 룸에 묵었다.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는 해고로 응답했다. 무 시장은 현재 뇌물 수수혐의로 고소돼 있는 상태다.
◆ 개방 경제의 그늘
지난 98년과 99년 두 해 동안 선양은 성공적인 경제개혁의 모델로 꼽혔었다. 그리고 그 개혁을 이끌었던 무 시장은 인민의 영웅이었다. 그는 유럽과 미국 등지로 순방을 하면서 외국 자본 투자를 호소했고, 환경보호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유엔의 표창까지 받았었다. 하지만 그 때 이미 그의 공적인 모습과 사적인 모습간의 격차는 메울 수 없이 벌어져 있었다.
그는 선양의 담배회사, 수송업체, 부동산 회사들로부터 비밀리에 리베이트를 받고 있었다. 한 지역신문은, 99년까지 그를 "큰 형님"이라 부르던 류가 그에게 수십만달러에 달하는 미화를 현금으로 바쳤다고 보도한 바 있다. 공식적인 자료에 따르면 무가 관련된 뇌물의 범위는 도합 7000만위앤에 달한다고 한다. 그의 주변인사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무의 두번째 아내였던 영화배우 출신의 핑샤오팡은 미화 79만달러, 10만 홍콩달러, 그리고 97만위앤의 거액을 환전하려 했었다. 29살인 그녀는 무려 34개의 최고급 시계를 갖고 있었다.
시장 무와, 막대한 노름빚을 지고 있던 부시장 마샹동이 뇌물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달 월급이 1000위앤 가량인 사람들이 이탈리아산 수입 의류를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이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감독 시스템이 없다
선양의 문제, 아니 나아가 중국 전체의 문제는 바로 이들 지방관리들을 감독할 효과적인 시스템이 없다는 데에 있다. 고급 관리들은 거의 예외없이 당 고위직을 겸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있어 당 서열은 법 위에 있다. 그들에게 경찰이나 재판정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사실상, 지방 도시의 시장을 견제할 장치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무 시장이 깡패두목 류를 선양 인민의회의 대표로 뽑았을 때, 의회에는 그의 의사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도덕적인 의무감을 갖고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70세의 공산당 중견간부 저우웨이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저우는 마오쩌둥과 함께 공산 게릴라 운동을 한 사람으로, 아직도 조국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양에서 수년간 벌어진 부정을 알리리라 마음먹고 수차 베이징을 찾았다. 각종 자료를 첨부해 절차를 밟아 청원을 했지만, 그의 요청은 번번이 기각됐다. 2년 전인 1999년, 그는 "2년간 노동 수용소에서 생활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의 죄명은 '대중에게 공지했다'는 것이었다. 저우는 "대중에게 사실을 알렸다는 것이 죄가 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것은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권리이다"라고 말했다. 쾌활한 성격의 저우는 겨울엔 만주의 찬바람에, 여름엔 몸을 갉는 벌레들에 시달렸다. 같이 수감돼 있던 불량배들도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조국을 염려하고 있었다.
"나는 고위관료의 90%는 썩었다고 생각합니다. 깨끗한 사람은 단지 일부일 뿐이지요." 이러한 그의 말은, (중국의) 급격한 변화를 이해하는 암울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범진 드림 bomb@chosun.com
마이투어의 권원담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이법준님의 학생회장및 성치훈님의 부회장 선임된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글쓴이가 마이투어로 되어있어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그런 사정이 있어서...
아무쪼록 불쾌지수가 높은 요즘에 건강조심하세요..
아래 내용은 조선일보 이메일 클럽에서 보내준 내용이며,
우리가 중국에서 살으면서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심심풀이 보다는 읽어보면 가치가 있을것 같아 겟판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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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범진기자입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6월 30일자로 중국의 조직적 부패에 관한 심층기사를 실었습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실감나게 조폭과 관료간의 공생관계를 묘사하고 있는 이 기사는, 그동안 우리가 접했던 평면적 보도를 뛰어넘는 수작이라 생각됩니다. 혼자만 읽기 아까워 회원 여러분들께 번역, 소개해 드립니다.
◆ 파이낸셜 타임스 중국부패 특집
호텔에는 연회가 마련돼 있었다. 사기로 된 (전통) 접시 옆에는 은으로 만든 젓가락이 놓여있었다. 중국 5대 도시의 하나인 선양의 '조직' 대부 류용은 손님을 맞을 채비를 갖추고 주인 자리에 앉았다. 그의 손님은 '상대 조직'의 두목 리준옌이었다.
대화는 매너있게 시작됐다. 하지만 몇가지 요리가 나올 때 쯤, 두 사람간의 해묵은 악감정이 또 다시 튀어나왔다. 쉽게 흥분하는 성격의 류가 먼저 터졌다. 숨겨뒀던 권총을 재빨리 꺼낸 류는 리의 허벅지를 겨냥해 연거푸 7발을 쏘았다. 허연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다. 피냄새가 진동을 했다. 새하얀 테이블보는 검붉은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
리의 부하들이 가만 있을리 없었다. 부상한 보스 리를 에워싸면서 호텔 각층으로 흩어져, 류의 부하들과 전면적인 총격전을 벌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리의 조직이 밀리기 시작했다. 부상당한 리의 부하들은 이 호텔 지하의 병원으로 하나 둘씩 몸을 피했다. 리의 부하들이 어디로 숨었는지 알아낸 류는 그의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형님'은 선양 경찰국의 고위간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몇몇의 경관들이 부상당한 리의 조직원들을 찾아냈다. 경찰은 피를 흘리며 신음하는 조직원들에게 다가서서, 무표정하게 바라보다가, 품속에서 칼을 꺼내 조직원들의 살속으로 깊숙히 박아넣었다. 비명소리가 어두운 밤하늘로 자지러지듯 퍼져나갔다.
◆ 호텔서 대낮 총격전
이것은 1999년의 일이었다. 그때는 중국 남방의 빈털터리 건달이었던 류가 동북방으로 진출, 인구 700만 도시인 선양을 쥐고 흔들던 '권력'의 절정기였다. 1995년만 해도 단순한 깡패에 불과했던 류가 어떻게 4년만에 중국 최대 도시중 하나인 선양을 테러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을까? 그 이면에는 중국 공산당의 어두운 그림자가 놓여 있다.
간간히 흘러나오는 짤막한 보도들, 비공개 인터뷰 등을 종합해 보면 오늘날 중국이 처한 추한 상황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깡패가 조종하는 경찰, 제 욕심만 채우려는 관리, 인민을 외면하는 정치체제의 세가지로 대표된다. 중국 각지의 성공적인 경제발전 모습만이 부각되고 있는 오늘날, 선양의 현재 상황은 과연 중국정부가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구를 수용할 능력을 갖고 있는 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 류와 상대 조직간의 다툼이 없었다면 이런 이야기는 외부로 흘러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총격전 이후 류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류는 1년이 지나도록 검거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지난해 7월, 중-러 지역 국경인 흑룡강성 어귀에서였다. 류의 양쪽 주머니는 현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류는 전자화된 여권을 위조하는데 실패했다. 경보기가 울렸고, 300여명의 국경 경찰이 그를 쫓았다. 어둠을 틈타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류는 3시간만에 도주를 포기, 무려 4병분의 수면제를 한번에 삼켜버렸다.
◆ 도망치던 두목, 자살 시도
사건의 전말을 알기 위해서는 '대부' 류를 살려야 했다. 대대적인 위세척 수술이 진행됐다. 그리고 그의 입을 통해, 극단적으로 잔인했던 그의 행각, 그리고 부패한 관리들의 이름이 하나 둘씩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잘나가던 전 시장 무쉬신, 그리고 그의 처, 첩, 형, 동생, 누나, 여동생, 딸, 그의 운전사, 그리고 적어도 100개 이상의 도시 공무원들이 부패에 연루됐다는 이달 보도는, 최근 (이 사건을 둘러싸고) 이뤄지는 부패에 대한 조사가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혐의 사실의 거의 대부분은 폭력조직과 모종의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여기서 어떻게 일개 깡패가, 그렇게도 완고한 중국 체제내에서 세력을 키워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한가지 답이 될 수 있는 것은 류가, 다른 모든 나라의 '조폭' 두목들 처럼, 무자비한 폭력을 무기로 타인을 협박하는데 능했다는 사실이다.
류는 그에게 "운이 안좋다"고 말한 점쟁이의 창자를 도려내기도 했고,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여자 사업가의 얼굴을 칼로 난자하기도 했다. 이 여인은 평생 지울수 없는 깊은 흉터를 얼굴에 지고 살아갈 것이다. 류와 그의 부하들은 45명 가량의 사람을 고문-살해했다.
하지만 전부터 그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류가 그렇게까지 잔인한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그는 유머있고, 겸손했으며 심지어 매력적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고급 관료들이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낮에는 중견 기업 총수
뇌물과 음해 그리고 향응 등의 수단을 통해, 류는 무 시장과 그의 가족들, 부시장, 부시장의 아내 그리고 지방 노동청장까지 손아귀에 넣을 수 있었다. 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얻은 '보호막'을 통해 류는 부동산, 담배회사, 그리고 '자양그룹'이라 불리는 판매회사까지 보유할 수 있었다. 자양그룹은 종업원 2500명에 7억위앤의 자산을 갖춘 중견기업이었다.
류가 이렇게 커나갈 수 있었던 데는 그의 공식적인 '보호자'들 뿐 아니라 중국 정부가 추진한 시장개혁이 큰 배경이 되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선양도 지난 10년간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그동안 천지가 뒤바뀐 것 같다"고 말할 정도이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는 '철밥통'이라 불리던 고용 상황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시장의 변화로 수십만명이 해고됐다. 주거지, 일터, 심지어 결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모든 생활을 규제하던 사회주의 원칙들이 이제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렇게 무너진 비효율적인 기간산업의 자리로 시장경제라는 냉혹한 물결이 밀고 들어왔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거리에서 물건을 팔러 다닌다. 매춘부들도 그들 틈을 오간다. 정부는 이제 그 매춘부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할 작정이다. 무 시장이 처음 시장에 취임하던 지난 98년, 그는 "인민을 위한 행정, 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면서 "형평의 원칙에 입각해 깨끗하고 검소하게 인민을 돌보겠다"고 말했었다. 그는 또 "모든 이익을 인민에게 돌려주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런 무 시장이 입고 다녔던 옷은 외국 유명 디자이너들이 도안한 수입 의류였다. 그는 검은색 벤츠 승용차를 몰고 다녔으며, 출장이라도 갈 때면 5스타급 호텔의 프레지덴셜 룸에 묵었다.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는 해고로 응답했다. 무 시장은 현재 뇌물 수수혐의로 고소돼 있는 상태다.
◆ 개방 경제의 그늘
지난 98년과 99년 두 해 동안 선양은 성공적인 경제개혁의 모델로 꼽혔었다. 그리고 그 개혁을 이끌었던 무 시장은 인민의 영웅이었다. 그는 유럽과 미국 등지로 순방을 하면서 외국 자본 투자를 호소했고, 환경보호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유엔의 표창까지 받았었다. 하지만 그 때 이미 그의 공적인 모습과 사적인 모습간의 격차는 메울 수 없이 벌어져 있었다.
그는 선양의 담배회사, 수송업체, 부동산 회사들로부터 비밀리에 리베이트를 받고 있었다. 한 지역신문은, 99년까지 그를 "큰 형님"이라 부르던 류가 그에게 수십만달러에 달하는 미화를 현금으로 바쳤다고 보도한 바 있다. 공식적인 자료에 따르면 무가 관련된 뇌물의 범위는 도합 7000만위앤에 달한다고 한다. 그의 주변인사들도 예외일 수 없었다. 무의 두번째 아내였던 영화배우 출신의 핑샤오팡은 미화 79만달러, 10만 홍콩달러, 그리고 97만위앤의 거액을 환전하려 했었다. 29살인 그녀는 무려 34개의 최고급 시계를 갖고 있었다.
시장 무와, 막대한 노름빚을 지고 있던 부시장 마샹동이 뇌물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달 월급이 1000위앤 가량인 사람들이 이탈리아산 수입 의류를 입고 다니는 모습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이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감독 시스템이 없다
선양의 문제, 아니 나아가 중국 전체의 문제는 바로 이들 지방관리들을 감독할 효과적인 시스템이 없다는 데에 있다. 고급 관리들은 거의 예외없이 당 고위직을 겸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인들에게 있어 당 서열은 법 위에 있다. 그들에게 경찰이나 재판정은 또 다른 이야기이다.
사실상, 지방 도시의 시장을 견제할 장치는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무 시장이 깡패두목 류를 선양 인민의회의 대표로 뽑았을 때, 의회에는 그의 의사에 반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도덕적인 의무감을 갖고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70세의 공산당 중견간부 저우웨이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저우는 마오쩌둥과 함께 공산 게릴라 운동을 한 사람으로, 아직도 조국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양에서 수년간 벌어진 부정을 알리리라 마음먹고 수차 베이징을 찾았다. 각종 자료를 첨부해 절차를 밟아 청원을 했지만, 그의 요청은 번번이 기각됐다. 2년 전인 1999년, 그는 "2년간 노동 수용소에서 생활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그의 죄명은 '대중에게 공지했다'는 것이었다. 저우는 "대중에게 사실을 알렸다는 것이 죄가 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것은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권리이다"라고 말했다. 쾌활한 성격의 저우는 겨울엔 만주의 찬바람에, 여름엔 몸을 갉는 벌레들에 시달렸다. 같이 수감돼 있던 불량배들도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조국을 염려하고 있었다.
"나는 고위관료의 90%는 썩었다고 생각합니다. 깨끗한 사람은 단지 일부일 뿐이지요." 이러한 그의 말은, (중국의) 급격한 변화를 이해하는 암울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범진 드림 bomb@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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