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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기독교 공동체의 예수이해에 관한 연구

작성자soul|작성시간18.05.03|조회수692 목록 댓글 0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예수이해에 관한 연구

 


- 예수의 칭호를 중심으로

1998년 12월 29일 화요일

김 진 성

<목 차>

개 요(1)

I. 서 론

1. 시대적 상황(2)

2. 연구의 목적과 방법(2)

II. 본 론

1. 역사적 예수의 자기 칭호

(1) 인 자(4)

(2) 아 들(11)

(3) 하나님의 아들(12)

(4) 메시아(12)

(5) ejgw(13)

2. Q 공동체

(1) 삶의 자리(15)

(2) 신학적 특징(15)

(3) 인자(17)

(4) 주(20)

3. 바울이전의 원시 교회

(1) 그리스도-메시아(21)

(2) 주(23)

(3) 하나님의 아들(27)

(4) 하나님의 종(32)

4. 바울 서신

(1) 바울과 그리스도교 전통의 관계(33)

(2) 주(33)

(3) 그리스도(35)

(4) 하나님의 아들(36)

(5) 사람(37)

(6) 구주(39)

5. 후기 바울 서신

(1) 구주(41)

(2) 그리스도(42)

6. 공관복음서

(1) 전승의 지평(44)

(2) 아들(50)

(3) 하나님이 아들(51)

(4) 메시아-그리스도(55)

(5) 인자(58)

7. 요한계열문서

(1) 요한공동체의 삶의 자리(66)

(2) 사상적 배경(70)

(3) 요한공동체 그리스도론의 특징(72)

(4) 로고스(74)

(5) 메시아(80)

(6) 왕(82)

(7) 인자(83)

(8) 어린 양(87)

8. 히브리서

(1) 삶의 자리(89)

(2) 위격적 칭호- 아들(90)

(3) 사역적 칭호- 대제사장(92)

(4) 대제사장의 의미(94)

9. 요한계시록

(1) 삶의 자리(96)

(2) 그리스도론의 역사적 문제(97)

(3) 어린 양(98)

(4) 말씀(104)

(5) 인자같은 이(105)

(6) 알파와 오메가(106)

(7) 다윗의 뿌리(107)

III. 결 론 (111)

참고문헌 (115)


개요 (Abstract)

신앙은 그 원천으로서의 대상이 있다. 특별히 기독교 신앙은 그 대상의 구체화가 시간과 공간 안에 이루어졌다. 그 위에 신앙과 교회는 성장해왔다. 신앙과 교회가 성장하는데는 그 역사라는 장 안에서 구체화된 하나님, 곧 그리스도인 예수에 대한 고백의 지평이 초석이 된다. 이 초석이 연속성을 가진 고백들에 의해 전승되어 왔다고 교회는 확신한다. 그러나, 신약성서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책과 편지들을 살펴보면 그곳에는 예수에 대한 이해의 연속성 못지 않게 불연속성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에 대한 이해의 연속성은 오랜 교회의 역사 아래에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라는 목적을 위하여 끊임없이 강조되어 왔고, 불연속성은 철저히 배제되어 왔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를 신앙고백의 대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교회의 역사와 존립이전에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고백이 선행되어야 하고, 또 추구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연속성과 불연속성은 올바른 자리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신약성서의 사건들이 약간의 시간적 차이는 있지만 동시다발적인 것이고,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점을 가진 문화와 사상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것들임을 기억한다면 원시 저술 공동체에서의 그리스도예수에 대한 이해에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하여 솔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본 글은 먼저 신약성서의 “삶의 자리”가 되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들을 구분하며, 그 특징적 요소를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들이 가지는 그리스도로 고백된 예수에 대한 이해를 신약성서 속에 사용된 호칭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덧붙여서 초기교회들의 고백문속에 나타나는 그리스도로 고백된 예수이해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이 논문의 주제에 충실하기 위하여 시대적인 순서로 나열한 후에 그 시간 속에서 그리스도로 고백된 예수에 대한 이해가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들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I. 서론: 연구의 목적


1. 시대적 상황

약 1800년간을 별 무리 없이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던 “역사적 예수”는 여러형태의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인해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무렵 여러 학자들에게서 “예수전”이 출판되었지만 모두 이제까지 교회 안에서 절대시되었던 예수 사역의 역사성에 일격을 가한것이었다. 교회는 이런 현실을 충격적으로 받아 들였지만, 오히려 이런 작업들은 20세기가 예수를 다시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세계의 기독교는 한마디로 요란하기 그지없다. 급속한 과학발전과 위기의식의 종교계는 이해할 수 없는 양극화 현상을 세기말의 산출물로 낳고 있고, 성서해석의 권위에 까지 복잡하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무분별한 해석은 교회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한국교회의 현실은 더 가관이다. 문자적 성경해석으로 인해 성서의 모든 기독론적 칭호를 마구 뒤섞어서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도 해보지 못한 총체적 신앙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던 한국 교회는 요즘 교회와 교단과 교리가 이 반도 위에서 포화상태를 이룬지 이미 오래다. 이런 혼란한 신앙고백을 통해 20세기의 기독교가 화려한 총천연색의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교회가 지구촌 곳곳에 포진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번의 천년을 닫게되는 지구의 현존 앞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2. 연구의 목적과 방법

2000년 기독교역사는 예수로 인하여 탄생하게 되었고, 또 그만큼 많은 대가를 치르기도 하였다. 태동할 무렵의 기독교를 바라보면 신약성서 속에 드러나는 여러 공동체들은 각기 자신들의 문헌전승을 보존함에 있어서 예수를 그 중심에 두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큰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던 당시의 공동체들은 그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함에 있어서 크고 작은 차이를 가지고 있음을 성서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 그러한 차이는 그 공동체가 위치한 지역의 특성과도 연관을 가지고 있고,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어떤 사람들인가 와도 연관이 있으며, 또 그들이 예수와는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었던 가에도 영향을 받으며, 더 나아가서 그들이 처해진 실존적 상황에 따라 그들이 각기 갈망하던 대상의 모습이 달랐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신앙고백과 공동체의 구성과 영위에 있어서, 선교의 방법과 실천에 있어서 크고 작은 갈등을 초래하게 되었다.


21세기를 바라보는 한국의 교회들 역시 한 공동체 안에서 이러한 신앙고백의 다양한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더구나 한국 교회는 상상 못할 분할을 거듭해왔고, 작은 나라안에서도 도무지 어울리지 못하며 우후죽순처럼 불어나는 십자가를 무심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 지금의 한국교회에 가장 절실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주의 몸된 교회로서 유기적인 조직이 되는 것이다. 완벽한 화합을 위해서는 우리의 고백대상에 대한 갈등의 모습이 불식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에 대한 연결된 이해아래, 더욱이 올바른 이해 아래서야 하는 것이다.


본 글은 원시기독교공동체들이 가졌던 예수에 대한 이해의 다양한 모습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러한 모습들이 가지는 삶의 자리를 보고, 그 이유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함에 있어서, 성서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예수에 대한 모습, 즉 칭호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예수에 대한 칭호는 당시의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인상”들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대의 반영물인 동시에, 시대의 갈망이기도 하다. 이를 염두에 두고 칭호를 조사함에 있어서 신약성서에 문서로 그 흔적을 남긴 공동체들의 삶의 자리를 살펴본 후에,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칭호들의 사용빈도와 특징들을 정리할 것이다. 순서에 있어서도 시간적 흐름을 고려할 것이며 그러한 정황의 이유를 가능한 한 추적해보기도 할 것이다.


II. 본론


1. 역사적 예수의 자기 칭호


(1)인자 혹은 사람의 아들(uiJo;" tou' ajnqrwvpou)


1) 언어학적 입장

이 표현은 유대주의적 전형의 표현이다. 이것은 아람어 “bar-e nash"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것에 정관사를 붙인 것이 bar -e nasha또는 bar-nasha(사람)이다.1) 이 칭호는 통속 헬라어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우선 이 단어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이것은 개별적 인간을 지칭하는 말이다. 아람어 “바르”(bar)는 히브리어 “벤”(ben)과 마찬가지로 혈통을 나타내기 위하여 실명사 앞에 사용되었다. 추상적인 용어 앞에서는 특별한 성격을 소유하는 것을 가리키고, 집합적인 용어 앞에서 그것은 개인을 지칭한다. ”인자“의 경우는 집합용어 앞에서 개인을 지칭하는 경우가 된다. 바로 “그 사람” (the man) 혹은 “한 사람”(a man)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묵시문학의 영향으로 점점 칭호로 인식되었다.2) 벨하우젠(J. Wellhausen)은 “인자-uiJo;" tou' ajnqrwvpou"가 칭호일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 단어가 고유명사이기 이전에 이미 일반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이스 문화권에서 독특한 의미를 가진 어절로 이해되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3) 이 단어는 요한복음에 12번, 공관복음에는 69회 등장한다.


2) 전승사적 입장

전승사적 입장에서 볼 때 “인자”의 칭호는 표면적으로 사용된 판과 사용되지 않은 판의 형태로 전해져 온다.4)

(눅6:22)makavrioi ejste o\{tan mishvswsin uJma'" oiJ a[nqrwpoi kai; o\{tan ajforivswsin uJma'" kai; ojneidivswsin kai; ejkbavlwsin to; o[noma uJmw'n wJ" ponhro;n e\{neka tou' uiJou' tou' ajnqrwvpou .

(마5:11)makavrioi ejste o\{tan ojneidivswsin uJma'" kai; diwvxwsin kai; ei[pwsin pa'n ponhro;n kaq! uJmw'n [yeudovmenoi] e\{neken ejmou'.


복음서에 나타나는 51회의 인자말씀들 가운데 적어도 37회는 인자칭호 대신에 ἐgῷ가 대체되어 사용되고 있다.5) 전승사적 입장에서 볼 때 인자칭호가 ἐgῷ;보다 이차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전승은 권위 있는 표현인 “ 인자”가 교회 내에 수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인자”칭호가 배제되는 경우도 외면할 수 없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다만 “인자”보다 “ἐgῷ;;"가 보다 이른 전승이라는 것이다.6) 이런 불확실성 외에도 인자말씀에 대한 분명한 용례는 본문 속에 존재한다.7)


3) 진정성의 문제

여기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예수가 과연 인자칭호를 실제로 사용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언어학적, 전승사적 분석을 마친 인자말씀에 대하여 완전한 진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방법상으로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4장 30절 전반부에는 마가복음 13장 26절에 나타난 인자의 징조(shmei'on)을 덧붙이고 있다.8) 마태복음이 여러 곳에서 묵시적 색채를 강하게 띠는 것으로 보아 이 구절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자의 영광의 보좌”란 구절이 오직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인자칭호를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초기 팔레스틴 전승임을 알 수 있다.9) 언어학적 증거 뿐 아니라 “인자”라는 칭호가 초기 단계로부터 기피되었음이 이것을 암시하고 있다. 

 

바울 역시 이 칭호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인자시편인 시편3편 21절을 인용하였고, 에베소서1장 22절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ajnqrwvpo/s(고전 15:21)와 o ajnqrwvpo"/(롬5:15)를 사용함에서 나타난다. 만약 바울이 이 칭호를 알고 있었다면,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의도가 반영되기 이전에 이미 “인자”라는 칭호는 유대공동체 혹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예수 자신이 인자칭호를 사용했는가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중 첫 번째 근거는 “초기성”이 인정될 수 있는 예수의 다른 말씀들 속에 다니엘 7장에 대한 언급이 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모든 전승 층은 예수가 인자를 3인칭으로 말하였음에 일치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과 인자를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은 인자라는 호칭이 최초의 기독교 공동체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주장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10) 원시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와 인자를 동일시 하였다. -적어도 그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런 부분은 그 용법이 부활이전으로 소급됨을 가리킨다. 물론 이 경우에는 3인칭으로 지칭된 대상이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이 남기는 한다.


진정성의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실은 바울시대에 헬라어가 통용되던 교회에서 인자칭호가 복음서를 있게 한 전승으로부터 굳건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복음서에로 확장해서 적용시킨다면 인자말씀이 오직 예수의 입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11) 인자칭호는 초대교회의 어떤 고백문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칭호는 오직 옛 자신의 말씀 속에서만 뿌리 박혀있다. 초대교회는 이미 이 단어가 가지는 특별한 지칭성에 대한 약화의 문제로 이 호칭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굳이 복음서에 인자의 호칭이 드러난다는 것에 대하여 예레미아스는 오히려 이것이 진정성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12)


4) 의미

인자칭호에 대한 설명은 복음서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그 호칭을 언급한 것으로 되어있는 예수 자신이 스스로에 대하여 사용한 칭호인지도 확정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유대 묵시문학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말씀들에 있어서도 인자는 영광의 용례로 사용되었다. 이에 대하여 불트만은 이에 대하여 때로 예수의 인성을 나타내는 호칭으로 이해되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구약에서의 인자, 즉 사람의 아들( 벤 아담)과는 차이가 있다.13) 그것은 성서의 배경이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루돌프 불트만은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인자’에 대해서 미래적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이 부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니엘 7장 13-14절의 묵시적 종말론과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14) 이를 지지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막13:26) kai; tovte o[yontai to;n uiJo;n tou' ajnqrwvpou ejrcovmenon ejn nefevlai" meta; dunavmew" pollh'" kai; dovxh".

(막14:62) oJ de; jIhsou'" ei\\pen ejgwv eijmi, kai; o[yesqe to;n uiJo;n tou' ajnqrwvpou ejk dexiw'n kaqhvmenon th'" dunavmew" kai; ejrcovmenon meta; tw'n nefelw'n tou' oujranou'.15)


“인자”라는 호칭은 구약 다니엘서 뿐 아니라 중간기의 문헌에서도 나타난다.16) 여기에서 등장하는 ‘인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천상적 인물로서의 인자모습과 세상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의 인자모습이 다니엘서 보다 더 발전되어 보인다. 17) 공관복음서에 등장하는 ‘인자’의 개념은 이러한 유대주의적 전통과 연계성을 가진다. 다르게 말하면 예수께서 인자로 자칭하실 때, 자기 백성들(유대인들)중 특정 집단들에서 유행하던 한 특수한 견해와 직접적인 접촉을 가졌음을 의미한다.18)


“인자”에 관한 말씀들의 신빙성 여부에 대하여 콘첼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① 이 표현은 고대적인 것이다.- 아람어권에서만 생겨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고대의 것이다. 헬레니즘 영역에서는 이 표현이 사라졌다. 그러나 매우 고대에 속하는 것이라고 해서 신빙성이 입증되지는 않는다.

② 이 칭호는 예수의 직접적인 말 속에서만 발견된다. 하지만 많은 구절들이 공관서 대조를 통해 이차적인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19)

이제 인자의 개념은 공관복음서에서 세 그룹으로 분류된다.(본 단원에서는 Q 자료를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① “인자”가 “필연적 고난”을 받는다는 구절들이다 : Q 자료에는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이런 구절이 없다. 세 개의 수난예고로서 마가복음 8장 31절, 9장 31절, 10장 33-34절 등이 있다.20)

② 지상에서 활동을 하는 “인자”: 마가복음과 누가복음, Q 자료에서 발견된다. 마가복음 2장 10절 병행구21) 에는 지상에서의 죄사함에 대한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콘첼만은 이에 대하여 “로기온”일 수 있지만 교회공동체의 교의적 진술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22) 이에 대하여 슈바이처는 이 말씀이 교회 공동체의 작문일 수 없다고 말한다. (마태복음11장 18-19절 병행 누가복음 7장 33-34절; 누가복음 11장 30절(Q 자료); 마가복음 10장 45절 병행 마태복음 20장 28절; 마태복음 12장 32절 병행 누가복음 12장 10절; 누가복음 19장 10절 등이 이에 대한 구절이다. 이에 대하여 불트만은 변함없이 일반적인 “사람”을 지칭하는 구절이라고 말한다.23) 하지만 콘첼만은 이에 대한 칭호적 의미를 외면하지 않는다.24) 슈바이처(E. Schweizer)는 바로 이런 부류의 말씀에 대하여 예수 자신에게 관련된 핵심적 요소인 의인의 낮아짐과 올리워짐의 사상이라고 보려고 한다. 이러한 슈바이처의 관념은 요한복음에서 도출된 것으로 보인다.25)

③ 앞으로 도래할 “인자”: 마가복음과 Q 자료, 특수자료에 나온다. 이 부류에는 고난이나 부활과 관련된 내용은 없다. 예수는 이 말씀들에서 인자 칭호를 사용하면서 다른 인물을 지칭하는 것처럼 말한다. 마태복음 10장 23절의 파견의 말씀은 박해받는 교회를 향한 묵시문학적 위안의 말씀이다. 때문에 순수 로기온인지 부활이후 교회공동체의 작성인지는 논란이 된다. ‘도래할 인자’의 개념과 ‘고난 당하고 부활하는 인자’의 개념은 유대적 전통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예수가 스스로 유대적 전통 안에서 사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불트만은 이에 대하여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다니엘과 이사야서의 내용을 메시아적으로 해석한 것이라는 입장을 가진다.26) 더구나 공관복음서 속에는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가지는 메시아이해와 실제의 전승자료 사이에 나타나는 괴리감으로 인하여 “메시아 비밀사상”이라는 탐구꺼리를 만들어 내었다고 말한다.

(막 8: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27)


이러한“침묵명령”은 사람뿐 아니라 귀신에게도 적용되었다. 이러한 침묵 명령은 예수의 입에 오른 인자라는 명칭을 통하여 자신의 천상적 존재를 은닉함으로 메시아 되심의 온전한 완성을 이루기 위한 비밀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입장도 있다.28) 감추인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위해 “인자”라는 호칭이 사용되는 것에는 앞에서 언급한 ‘고난’과 ‘도래함’의 두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 자신이 그 인자라는 단어를 통하여 표현하고자 했던 사역을 의미한다. 즉,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선 이스라엘의 죄악을 공감하고 있었으며, 또 이러한 왜곡된 현실을 극복해야만 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도래할 인자”가 가지는 인칭의 문제로 재림과 심판을 언급하기가 명백하지 못함에도 그의 사역이 가지는 고난의 의미는 이러한 범위안에서 구성된다.


세 부류의 “인자”에 관한 구절이 상호 관련 없이 병립해 있는 이유는 초기 교회의 공동체적 기독론 구조를 통해 설명된다. 이 기독론 구조를 통해 드러나는 당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믿고, 또 재림을 확신한다. 이러한 상황들이 각기 독자성을 가지고 표현되고 있음을 신조를 통해서 발견한다. 대망의 대상과 예수를 일치시켰는데 그것은 “인자”에 관한 유대교적 표상을 빌어서 표현했다. 그리하여 예수의 지상출현에 대하여 “인자”라는 칭호로 해석한다.


이 칭호의 발의 주체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호칭은 로기온에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 칭호를 향한 가장 확고한 지평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칭호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은 예수 스스로가 자신을 구약에서 기대되던 메시아, 고난의 종, 재림자의 연장선상에 두고있다는 점이다. 혹은 그 호칭이 교의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지평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29)


(2) 아들(oJ uiJo;")

절대용법인 “아들”과 “ 하나님의 아들”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 차이는 상이한 전승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와 뚜렷이 관계되어 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계시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종속과 복종이 이 관계를 본질적으로 규정해준다. “아버지”라는 단어가 절대용법으로 사용된 다음 두 구절(막 12:32 ; 마 11:27 ∥ 눅 10:22)에 대하여 콘젤만은 교회공동체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도 마찬가지이다(막12:1이하).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제하는 구원사를 유비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다만 “아들”이라는 칭호는 교회공동체의 그리스도론이 반영된 표현이라는 것이다.30) 이것 역시 “인자”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단순한 1인칭 단어가 변형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3) 하나님의 아들( oJ uiJo;" tou θεου)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는 공관복음서 대조를 통해 대부분 이차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본 단원에서는 단 한번 예수가 직접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마가복음 14장 61절을 통해 살펴본다.


(14:61)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그리스도냐

의회 앞에서 예수가 심문을 당할 때 “당신이 찬양을 받으실 분의 아들 그리스도요?” 한 그 대목에서이다. 하지만, 사실 이것도 마가복음에서 독특하게 등장하는 기독론의 개략일 가능성이 높다. 표면적으로 아들이라는 칭호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지만 스스로 “아들”칭호는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31)


(4) 메시아

Q 자료에는 메시아 칭호가 없다. 그리고 이외의 구절들은 대부분 이차적인 것이기 때문에 뒤에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5) ἐgw;

예수가 스스로에 대하여 귄위적 메시아 호칭을 사용했다고 확증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칭호들은 후일 교회공동체에 의해 교체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의 자의식이 늘 호칭을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에 대한 귄위를 묘사함에 있어서 구속자의 상징적인 부르심의 표상들을 즐겨 사용한다. 이러한 표상들은 “구원을 가져오는 자”를 묘사하는 것으로 모두 종말론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초대교회가 이런 표상들을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예레미아스는 복음서의 기독론적 칭호에 대하여 모두 부활 이후의 것이며, 오히려 표상들이 부활이전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32)예수가 스스로 나타내는 자신에 대한 표현은 “ἐgw;”(강조형);에서 두드러진다. 이 강조적 “;ἐgw”는 Q자료 중에서 여섯 가지 반제들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jHkouvsate o\{ti ejrrevqh ... ... ejgw; de; levgw uJmi'n)" 라는 표현양식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예레미아스는 이에 대하여 유대주의나 초대교회의 양식에서 이에 대한 유비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33) 여섯 반제중에서 세 번째와 다섯 번째 , 여섯 번째 반제들은 종종 이차적인 구성들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여기에는 문서비평, 내용, 양식의 면에서 그러한 것들이 확증되는 듯이 보인다.34) 하지만 좀더 면밀히 관찰해 보면 예레미아스의 주장대로 이러한 반제들 역시 이차적인 것이 아니다.35)


반제들 가운데 ejgw; de; levgw uJmi'n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단언하는 예수의 모습은 스스로에 대하여 ‘의의 교사’ 처럼 토라에 대한 합법적인 해석자임을 주장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신을 토라에 대하여 반대하는 위치에 놓는 ‘비할 바 없는 그리고 혁명적인’ 대담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는 ‘충만한 분량’을 가져오기 위하여 왔다고 예레미아스는 말한다. 권세있는 선언으로서 사용된 이러한 자기표현은 치유이야기에서도 등장한다.


(막9:25) ejgw; ejpitavssw soi

(막2:11) soi levgw

(마10:16)j Idou; ejgw; ajpostevllw uJma'"

(눅22:32) ejgw; de; ejdehvqhn peri; sou')


이러한 ejgw;는 ἀμην과 관련되는데, 이것은 신적 권세로 말함을 주장한다. 36)이것은 하나님의 이중적인 왕적 권세(εζοuσια) 곧 사죄와 입법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자기의식은 평소에 “토라의 말씀”을 듣고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하여 “토라”를 대체할 것으로 자신의 말을 사용하고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예수의 자의식은 “토라”를 있게 한 하나님의 명령을 대체할 존재로 스스로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 스스로에 대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대신하는 존재로 증거 하는 이런 예수의 모습은 문서 비평적 방법에 의해서도 제거되지 않는다.


2. Q 자료설에 의해 추정되는 공동체


(1) 삶의 자리

요한네스 바이스에 의해 처음 채택된 용어 Q(Logien-Quelle)자료는 “예수 어록”이라고 부른다.37)

Q의 저작시기는 50년대 설과 70년대 설이 있는데 50년대 설이 더 유력하다. 이는 Q자료가 가진 문헌적 특징이 유대적 성향을 잘 보존하고 있음과 무관하지 않다. Q자료는 나름대로의 구전과정과 단편적인 문서화 과정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는데 보통 예수님 사후에 얼마 안되어 (A. D 30-40) 역사적 예수에 대한 회고적 구전 수집이 있었고, 40-50년에 이 구전 자료는 아람어로 문서화된다. 그리고, 50-60년경 바울서신이 생겨날 무렵 이 아람어 자료는 헬라어로 번역되어 최종적인 형태의 Q자료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38)


이 자료는 예수의 주 사역지인 팔레스틴지역(갈릴리나 시리아국경지역)에서 저작된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유대계 크리스천임은 분명하다. 슐츠(S.Schulz)에 의하면 예수를 따르는 초기의 공동체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후에 예루살렘과 시리아 지역으로 각기 흩어지게 된다. 예루살렘의 열두 제자공동체는 원시기독교 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시리아지역의 공동체는 아람어로 된 “예수 말씀”자료를 남기게 된다.39)


(2) 신학적 특징

호프만(P.Hoffmann)은 Q공동체의 신학적 관심을 다음 네가지로 요약한다.

1. 임박한 종말사상

2. 하나님 나라의 도래

3. 인자로서의 예수

4. 심판자로 오실 예수

슐츠는 이 공동체 초기의 팔레스틴계와 후기의 헬레니즘계로 구분한다. 초기에는 예언자적, 묵시적 열광주의와 심판자적 인자기독론이 특징적이고, 후기에는 지연된 재림의 신학적 극복과 발전된 기독론을 향한 신학화 작업이 주를 이룬다.


바이스(J.Weis)는 Q자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대부분이 단편적인 예수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다.

2. 초기 갈릴리 예수 활동(주로 선포활동)이 전제되고 있다.

3. 예루살렘 수난전승이 없다.(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형성된 케리그마적 신학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4. 임박한 종말과 심판사상이 강하게 나타난다.

5. 하나님 나라 선포가 예수 선포의 주된 내용이다.40)

6. 예수를 “인자”로 보는 인자 기독론이 형성되어 있다.

7. 유일한 이적자료로 “가버나움 백부장의 종 치유”가 등장한다. (마8:5-13; 눅7:-10)

8. 비밀말씀 자료로서 “예수 시험 사건”, “세례요한의 활동”등이 나타난다.

9. 바울서신과 함께 가장 먼저 기록된 문서에 속한다.

10. 공동체의 교훈과 권면을 위한 지침서이다.41)


성종현은 Q자료의 신학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임박한 종말 및 심판사상: 추정되는 Q공동체는 임박한 종말 및 심판사상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다. 이것은 세례요한 공동체의 간접적인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예수의 임박한 종말사상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 나라의 선포: 추정되는 Q공동체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도래사상과 미래적 기대가 병존했으나 더 큰 비중은 미래적 하나님 나라의 대망에 있었다.

3. 묵시문학 및 지혜문학 전통의 영향: Q신학은 구약과 유대교의 묵시문학적이고 지혜문학적인 전통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다. 이것은 Q에 등장하는 많은 예수 말씀이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는데에도 잘 나타난다. (눅 13:31-35; 마 11:25-27)

4. “인자-기독론” Q공동체는 예수와 종말론적인 심판자인 “인자”를 동일시함으로서 예수가 곧 대망의 인자임을 강조한다.(눅 6:22, 7:34, 12:8-9, 22:28-30 등)

5. Q는 예수의 고난을 일차적으로 폭력에 의한 예언자의 죽음으로 이해한다. 마가복음에서와 같은 대속적인 속죄죽음 사상은 아직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6. 반 유대적 성향: Q공동체는 팔레스틴내 유대교와의 갈등상황 속에 있었고 따라서 많은 자료 속에서 율법주의 적이고 바리새주의적인 유대종교에 대한 비판이 밑바닦에 깔려 있다.

7. 선교에 대한 관심: Q공동체는 초기에는 주로 유대인들을 향한 그리고 후기 자료에서는 이방인들에게 가지 향한 선교적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3) 인자(uiJo;" tou' ajnqrwvpou)


다음은 Q자료에 등장하는 “인자” 칭호들이다.

1) 고난 당하는 인자의 모습

(눅 6:22-마5:11병행)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 도다

(눅 9:58-마8:20)(추종말씀)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고난의 이미지는 십자가를 통해서 역으로 확증된 것으로 보인다. 당대 유대인들의 기대에 있어서 메시아적 인자개념과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고난 당하는 종의 개념 사이에 일종의 융합이 있었지만 후대에 자리잡은 대속적인 죽음 차원의 융합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원수들과의 투쟁에서 고난 당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대속적 죽음의 차원에서 당하는 고난은 아니다.42) 이디오피아 에녹서에서도 인자가 이사야 53장의 종과 특성을 공유하지만 “대속적 고난”의 특징은 결핍되어 있다. 후대의 인자개념과 달리 투쟁으로서의 고난에 집중되어있는 인자의 모습과 수난이후의 전승이 없음에 비추어 볼 때, 한 위대한 선지자로서의 고난, 그러한 모습의 인자를 볼 수 있다.


2) 지상에서의 인자

(눅 7:34∥마11:19a)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 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11:30∥마12:4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눅12:8∥마10;32)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 를 시인하면 인자(마태는 “나”라고 표기)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눅12:10∥마12:32)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지상의 인자에 대하여 공관복음서에는 전체적으로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 인자”, “안식일의 주인”, “성령을 오게 한 인자”의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이 자리에서 Q 공동체는 하나님이 가진 권한이 이 땅에서 한 존재에게 부분적으로 이양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땅의 사역을 위해 이제 “인자”는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주었던 그래서 조상때부터 내려오던 유전들 까지도 손대게 된다. 이러한 인자의 모습은 고난과 죽음으로 이어 진다.43)


3) 종말론적 영광을 입은 인자

(눅12:40∥마24: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 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눅17:22∥마24:26)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눅17:24∥마24:27)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눅17:26∥마24:37)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눅17:30∥마24:39b)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Q자료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종말론적 이미지의 인자이다. 그는 다니엘서에 나오는 “인자”의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형식적 의미에서 Q자료는 사람의 아들과 예수를 구분하고 있다.44) 장차 사람의 아들이 인간에 대한 자세는 인간이 지금 예수에게 취하는 자세에 달려있다. 사람의 아들은 심판자이다. 그나마 Q자료는 예수 말씀의 진정성에서 매우 가치가 있다. 이미 Q 공동체에서 예수와 인자를 동일시 하는 작업은 진척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제도권 교회의 수장으로서 예수를 각인 하려는 노력은 Q자료에서 보이지 않는다. 예수와 인자의 구분이 있는 듯이 보이는 본문과 예수와 인자가 완전히 동일시 되는 본문의 차이는 아마도 초기 Q자료와 후기 Q자료와의 차이일 것 같다.45)


(4) 주(kuvrio")

(눅 7: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눅 9: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눅 17: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눅 17: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Q자료에는 “그리스도”의 칭호와 “하나님의 아들” 칭호는 나타나지 않는다. 대신 위의 본문에서 “주”칭호가 나타나지만 초기 공동체의 문서화작업에서는 없던 것이 그리이스문화권과 접촉하면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아람어”로 문서화될 때는 “인자”칭호만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바울이전의 원시 교회

지금의 성서 속에는 바울 이전의 원시교회가 작성한 직접적 문헌이 없다. 물론 Q 자료가 있긴 하지만 이것 역시 최초의 교회 공동체에 대하여 어떤 역사적 상황을 전하지 않고 예수의 가르침을 전승하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 가르침을 순수하게 전승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승공동체의 사상을 반영․현재화하고 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생애 사건직후의 기록을 언급하고 있는 문서는 사도행전이다. 그 기록들에는 오래된 보도들이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콘젤만은 이에 대하여 누가가 자신의 역사성을 형성하기 위하여 그 자료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한다.46)


사도행전 6장은 헬라인으로 표현되는, 예루살렘에 있는 한 그리스도교인 집단에 관해 보도하고 있다. 이들은 그 스스로에 대하여 새로운 종파로 이해하기 보다는 유대 종교 공동체에 속해 있는,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믿는 집단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이들은 유대의 율법규정도 고수하였다. 하지만 메시아에 대한 결정적인 견해차는 이들이 이스라엘에서 축출되게 하였다. 축출된 이 집단은 이제 헬레니즘 문화권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바울 이전 시대는 이런 원시교단과 헬레니즘교단의 전승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본 글에서는 불트만과 콘젤만의 의견을 통하여 기독론적 칭호를 살펴 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Cristὸ")'- 메시아

로마서에 66회․고린도전서에 64회․빌립보서에 37회․데살로니가전서에10회 등장한다. 원시교회에서의 신조양식은 단 하나의 신앙조항, 즉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만을 포함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함께 포함하는 가로 나뉜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원시기독교 공동체 중에서도 초기단계에 신앙고백에서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신앙고백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울의 글에 수록되었거나, 공관복음서에 등장한다면 그것은 이미 기록자와 동시대적 산물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사용되고, 강력하게 확증되어 온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공관복음서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한 개인의 신앙고백이라기 보다 이미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 누군가 -베드로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의 고백을 시작으로 정형화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용례는 두 가지 어법으로 구분된다.

1. 메시아 칭호(막 8:29)-oJ Pevtro" levgei aujtw'/ su; ei\\ oJ cristov".

2. “예수”라는 이름과 함께 고유명사화 되어버림.

시간적 우선순위를 따져볼 때 칭호로서의 용례가 고유명사화된 것 보다 시대적으로 앞서는 것이 자명하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구약성서에서 왕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동양적인 궁전문학적 어법에 따르면 왕은 구원을 가져오는 자다. 왕은 신의 현현이요, 신의 아들이요, 신의 대리자이지만 신 자체는 아니다. 영역의 측면에서 왕은 오히려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영역에서 활동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추해 볼 때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표현은 초자연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구원자의 모습에 근거한 것이다. 이러한 구원자의 모습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여러 형태의 희망을 상징하는 표상들과 융합되었다. 메시아의 모습은 점점 초월자의 형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시문학적 사고에는 언제나 낯선 개념이었다.47)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 예수는 구원사업의 성취자로 표현명된다. 그리하여 신앙고백의 현장에 주어로 등장된다. 이때 예수는 그리스도라 불리운다. 이 칭호의 시간적 지평은 주로 구원사건으로 이해되는 과거이다. 때문에 다른 칭호보다 과거의 큰 사건, 즉 십자가로 인한 예수의 죽음이 강하게 부각된다. 구원사업 즉, 죽음과 부활의 현장에 관심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언제 또 어떻게 그가 그리스도가 되는 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바울 이전시대에 이 “그리스도”는 아직도 예수의 가장 큰 사역을 대변하는 칭호였다.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임박한 종말기대와 예수에 대한 이해 없음은 예수를 죽음으로 대속한 그리스도로만 이해하게 했다. 이제 곧 임할 종말앞에 예수의 공생애에 대한 집착은 무의미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하지만 종말의 지연됨에 따라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용도의 변화를 맞게 된다.


(2) 주(oJ kurὶio")

원시교단에서 헬레니즘, 그리스도교에로의 이행이 뚜렷이 반영되어있는 칭호로 “그리스도”라는 호칭과 함께 고백의 칭호로 나타난다. 48)이곳에 μαραναθα(주여 오소서)라는 아람어적 부름이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μαραναθα 라는 부름은 순수히 묵시문학적 그리스도론의 표현이다. 원시교회는 스스로를 고대하는 자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이에 반하여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드러나는 주의 모습은 오실 자를 기대하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현재 지배하는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인 교단이란 윤곽이 드러난다. 헬레니즘 교단은 고대의 표현대신 환희의 호칭을 사용한다.- Κυριος `Ιησους (예수는 주 이시다.)49) 원래 “주”라는 표현은 70인역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메시아에게 사용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국한된 표현이었다. 이런 표현이 헬레니즘시대에는 예수에게 적용되어 사용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 속에서 이 “주”라는 칭호를 이미 확고한 용어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 사실은 바로 양식화된 환호문구가 입증해주고 있으며, 바울이 이 칭호를 자명한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즉, 바울 이전에 이미 원시교회에서 사용되고 있었음을 말한다.


콘젤만은 “주”와 “하나님의 아들”이 교차되어 사용된다고 말한다.50) 하지만 용례에 있어서 이 둘은 뚜렷이 다른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구속자의 본질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서부터 본래적으로 부여된 것을 말한다. 이와 달리 “주”라는 말은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에게 부여된 지위이다. 그러므로, 원시교회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 아들에 대하여 “주”라고 말한다. 물론 이 시대에서 예수가 살아있음에 대하여 “주”라고 환호하는 것은 아니다. “주”는 현장에 있는 육신의 “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으로서의 주에 대한 환호이다. 그러므로 이 칭호는 “성령, 그리스도의 영”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고전3:17) oJ de; kuvrio" to; pneu'ma ejstin ou| de; to; pneu'ma kurivou, ejleuqeriva.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주” 라는 칭호는 그 기원에 대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대교는 결코 메시아를 “주”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칭호가 유대주의에서 직접적으로 유래한 것이라고 단언하기 힘들다. 하지만, 이미 70인역에서는 “야웨”를 “주”라고 표기한다. 이것으로 상황은 대단히 혼란스럽다. 혹자들은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이 야훼와 예수를 동일시 했던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지만 그 반증도 만만하지 않다. 51)이러한 이유로 “주”라는 칭호는 70인역에서 단독으로 유래되었다기 보다 정치 사회적으로 널리 통용되던 “주”라는 절대칭호를 교회가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접근으로 보인다. 실제로 “주”는 희랍인들에게서가 아니라 시리아, 에집트 그리고 소아시아에서 신의 명칭이었다.


헬레니즘적 통치자 숭배에서 “주”는 “왕”을 일컫는다. 이 의미를 원시교회는 분명히 알았을 것이고, 유대인들이 주축이었으므로 70인역에서의 “주”의 의미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라는 칭호로 “예수”를 설명하고자 했다면, 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대리자” 이상으로 고백했었다는 추론을 조심스레 할 수 있다.


예수는 주로서 하나님의 기능들을 수행한다. 즉 예수는 세상을 다스리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자이다. 하지만 그는 또 하나님과 분명히 구별된다. 이에 대하여 콘젤만은 “주” 칭호가 “중재자”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52)


불트만은 이 호칭에 대하여 당대 그리스도교 공동체 모임을 중에 현존한다고 믿어지고 경험되는 신성이다.53) 그는 클레멘스 제 1서 61장 3절 마지막을 인용하며 “제의적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용어라고 정의한다.54) 그리스도는 제의적으로 숭배되는 그 순간마다 그 현장에 현존한다. 이것은 당시의 공동체가 종말론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한다. 빌립보서 2장 10-11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수행된 구원사건의 목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i\{na ejn tw'/ ojnovmati jIhsou' pa'n govnu kavmyh ejpouranivwn kai; ejpigeivwn kai; katacqonivwn. kai; pa'sa glw'ssa ejxomologhvshtai o\{ti kuvrio" jIhsou'" Cristo;" eij" dovxan qeou' patrov", 빌 2:10-11 )

이것이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종말론적 특수성이다. 왜냐하면 이 공동체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종말론적 구세주의 모습뿐 아니라 제의로 숭배된 “주”의 모습까지 얻었기 때문이다. 퇴색해가는 “인자”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헬레니즘계 공동체들에서는 “주”의 칭호가 등장하였다. 위의 본문에 포함된 빌립보서 2장 6-11절의 그리스도찬가는 그 문맥을 위한 바울의 작품이 아니라 인용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용은 바울이 로마서 10장 9절 이하에서 그리스도교 공동의 신앙고백에 관여하고 있음을 입증한다.55) 이 밖에도 “그리스도”라는 칭호 대신에 “주”라는 단어가 제의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분명 이 단어가 바울 이전의 초기교회시대에 존재하였지만 전도자 바울의 수많은 사용으로 급속히 확산된 것 같다.


(3) 하나님의 아들(υἱὸς του Θεου)

그리스도라는 칭호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의 역사적 출처는 그 다지 명확하지 않다. 예수 자신의 칭호에도 등장하고, 또 원시교회가 이미 그 칭호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는 의미는 “메시아”와 동일하다. 유대교 문헌에서는 때때로 개인 혹은 의인이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되기도 하는데 이는 세상속에서 당하는 의인의 고난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아들”이 묘사의 목적이 있다면 신약에서 이미 칭호가 되어 버린 “하나님의 아들”과는 엄밀히 구분되어야 할 것이다.56) 불트만은 양식비평을 통하여 메시아개념과 “하나님의 아들” 개념을 구분해낸다. 살아있을 때 예수는 메시아(다윗의 후손)였다. 죽음 후에 그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되셨다. 하나님의 아들됨은 육신에 따라 이해되지 않고 법적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이 양식은 두 본성을 구별하지 않고 예수 실존의 두 시기를 구별한다. 이 양식에는 선재성에 대한 언급은 없다. 오히려 ‘양자’개념과 가깝다. 메시야로서의 예수는 초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특별히 부여된 신분적 지위에 자리하게된 인간이었다고 불트만은 주장한다.57) 아직 선재의 개념은 자리잡지 않은 시점이었고, 그런 지평 위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직위의 ‘부여됨’으로 인식된다.


이와는 다른 견해도 있다. 그것은 ‘선재성’에 근거한 칭호의 의미이다. 바울이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롬 8:3)라고 표현할 때, 선재성을 전재하고 있다. 그 선재성은 바울이 이미 그 이전의 교회로부터 전수 받은 빌립보서 2장 6-11절에 잘 나타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이 본문은 시절로 나위어져 있고, 개념적으로는 바울 이전의 것이다. 여기에는 분명히 십자가 사건이 극대화 되어있고, 이것은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또 한가지 사실은 그가 “본래적으로 하나님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이 본문에 “아들”이라는 칭호는 없지만 내용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을 뜻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존재는 “본체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동일하다.” 즉, 계시자는 하나님과 동일하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런 신적인 특성에 성육한 자가 가진 종의 지위를 대조시킨다. 무한에서 유한에로의 하강, 죽음, 다시 올리워짐의 도식을 가지고 있다. 물론 바울을 이 도식을 부활사건을 중심으로 재해석 한다. 이 찬가에서는 죽음을 통해 지위가 회복되는 역설을 노래한다. 이곳에서는 미래에 대한 어떤 언급이나 예견은 없다.58)

불트만은 위의 본문에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에 초점을 맞춘다. 이 “더 뛰어난 이름”은 히브리서에 의하면 의심 없이 “아들”이라는 의미를 가진다.59)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 kurio" 칭호로 “그리스도”를 담아낼 때 이미 그 공동체 안에 있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선교는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소유한 후였을 것이다. 초대교회가 예수를 이미 그렇게 호칭한 사실에서 알 수 있다.60)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는 이유는 예수의 인성이 아니라 신적인 능력을 부각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당대에 당연시 되었던 이원론적 사고구조에 힘입은 바 크다. 불트만은 신약성서가 그리스도를 “qeo;""로 표시하는데 있어서 아직도 조심스러워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2회(1:1; 20:28) 등장하고, 그외에 데살로니가 후서 1장 12절과 디도서 2장 13절, 베드로후서 1장1절 뿐이다. 당시의 기독교 공동체가 ”uio'][[]'" tou ;qeou"에 대하여 이렇게 이해한 것은 헬레니즘적 사고에 의한 것이었다.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의 전통적 유산으로서 ‘신의 아들’은 고대근동에서 드러나는 제의적 예배의 주체였다. 그것은 구속론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아들은 죽음의 의미를 맛본 후에 다시 죽음에서 일어서며 구속자가 되는 것이다. 61) 하지만, 그리이스 지역에서 팽배해 있는 ‘신의 아들’은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화적 영웅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신에게서 부여된 “신적 인간”으로, 인간들보다는 모든 부분에서 차별적인 존재였다. 고대 근동의 의식에서와 달리 신의 아들이 인간계에서 살아가며, 능력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이들에게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예전부터 당연한 것이었으며, 오히려 기독교에서의 “신의 아들” 역시 그러한 그리이스의 “신의 아들들”처럼 이해되었으며, 결국 “구속의 역설”보다 “카리스마적 현상”과 “이적 행위들”에 더 관심이 있었다.

불트만은 그리스도의 유형을 세 가지로 나눈다.


1. “권위적 유형”: 이러한 모습은 공관복음서에 잘 나타난다. 그 모습들은 유대교적 메시아사상의 반영과 그리이스 영웅신화의 전형이 뒤섞인 형태로 나타난다.62) 하지만, 바울이 선교를 할 시점에는 이미 이러한 “권위적 유형-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유형”은 예전보다 더 당연시 되었다.


2. “권위를 강조하기 위한 유형 - 신의 아들”: 이 경향은 “선재된 신의 아들”로 나타난다. 바울과 요한에게 선재의 개념은 자명한 것이었다.63) 그것은 바울 이전의 그리스도상(빌 2 : 6-11)에 나타난다. 이 견해는 구원사건의 역설에 관한 파악에도 일치한다. 인간이 된 신의 아들의 인간성에 대한 사실과 인간의 숙명이 극히 강조되어 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예수가 그의 지상 생활에서 신의 아들로서의 그의 이적들을 통해 자신을 증명했다는 파악은 본래 모순된 것이다. 그것은 빌립보서 2장 6-11절이 증명하는 바이다. 이 사유의 방식 역시 바울에게는 생소한 것이다. 결국 이 두 유형의 그리스도론은 헬레니즘계의 그리스도교에서 긴장된 통일성으로 종합되었다. 그리고 공관복음서들은 이적을 일으키는 신의 아들의 상과 함께 보존되었다.


3. 영지주의적 유형: 여기에서 신의 아들은 구속론적 의미 뿐 아니라 우주론적 의미도 부가되었다. 이러한 우주론적 의미는 본질에 대한 종교철학적 사변들로 인해 발전되었다. 필론과 헤르메스는 lovgo"를 “신의 아들”로 해석한다.64) 이러한 우주론적 칭호는 고린도전서 8장 6절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 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ajll! hJmi'n ei|" qeo;" oJ path;r ejx ou| ta; pavnta kai; hJmei'" eij" aujtovn, kai; ei|" kuvrio" jIhsou'" Cristo;" di! ou| ta; pavnta kai; hJmei'" di! aujtou'.,고전8:6)

하지만, 이 개념이 언제부터 본격화 되었는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더욱이 사용되는 칭호는 그리스도이다. 영지주의와의 신경전은 상당히 초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신의 아들의 모습 역시 원시기독교 공동체가 한 부류의 순수집단이 되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승들 역시 신약의 문서들 안에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칭호는 초기교회의 설립에 결정적 요소가 되었다. 순수에서 복합으로의 이행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볼 때 이 칭호는 아직은 정교해지지 못한 고대교회의 교리들이 여러 양태로 혼재 해 있었음을 보여준다.65) 단순한 칭호에서 복합적인 칭호로 발전하려는 단계임을 알 수 있다.


(4) 하나님의 종( pai'" tou ;qeou)

이 칭호는 특히 고대적인 것으로 자주 간주된다. 즉, 예수가 자신을 제2이사야, 특히 이사야 53장에 따라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으로 이해했다고 가정되었다.66) 하지만 콘젤만은 이런 가설에 대하여 지지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개념이 구약성서에서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사용되었던 탁월한 능력의 사람들, 특히 모세와 다윗 같은 사람들, 그리고 예언자들이 이 범주에 포함되는데, 이러한 명칭은 주로 영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67)


복음서에서 이 칭호는 고난의 의미로 한번 마태복음 12장 18절에서 등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후대의 단편을 첨가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 한번의 종이란 말은 사도행전 4장 27-30절에 등장한다. 하지만 이 부분 역시 예수의 행위를 표현하기 위한 인용이다.


4. 바울 서신


(1) 삶의 자리 - 바울과 그리스도교 전통의 관계

자료로 사용되는 것들은 소위 “바울 친서” 들이다. 에베소서와 목회서신은 그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바울은 이미 하나의 그리스도교 전통 속에 서 있으며, 거기서부터 그의 신학 재료를 얻었다. 문제는 그가 무엇을 발견했고, 그가 발견한 것을 어떻게 발전시켰느냐는 것이다. 바울 이전의 신앙형식들을 재구성해 보면 바울의 해석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 서신에 나타난 그리스도론적 명칭들 역시 “신조”들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내용에서 중복됨이 나타날 수 있으며, 그러한 것들은 최대한 중복을 피할 생각이다. 바울 이전 기독교 공동체와의 두드러진 차이는 소극적 의미에서의 “사람의 아들”이나 “종”이라는 명칭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바울은 기타의 명칭들을 사용할 때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혼재하던 단순한 칭호들을 쉽게 복합적으로 재구성해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68) 그는 자신의 글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의 한 부분으로 사용함에 있어서 별 주저함이 없었다.


(2) 주 (kurivo")

로마서에 44회, 고린도 전서에 66회, 고린도 후서에 29회, 갈라디아서에 6회,빌립보서에 15회, 데살로니가 전서에 24회, 빌레몬서에 5회 나타난다. 이 칭호에 대하여 콘젤만은 그리스도 현존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제의 속에 주께서 인격적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이 그를 대신해 준다고 말한다. 실제로 공관복음서에서 이 칭호는 마가복음 11장 3절을 제외하고는 전혀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칭호는 헬라주의적 경향을 더 많이 띠는 문서들에서는 점점 더 빈번하게 사용된다. 이 칭호가 제의와 직접적 영향을 가지는 것은 헬라주의 토양에서 예배가 시작되었음과 연관이 있다.69) 릿즈만은 바울이 자기 서신들에 대하여 교회들이 예배와 떡을 떼기 위해 모일 때 읽혀지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서신들의 인사말들에서 가장 오래된 성찬식 예배문들의 일부 구절들을 사용한다고 생각한다.70) 바울은 이 칭호의 창시자가 아니다. 그것은 바울이 쓴 서신들 중에서도 이 칭호가 나타나는 부분은 전승에 의한 찬송의 부분에 집중되어 나타남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나오는 marana;;θa는 이 문제의 초점이 된다.71) 아람어 marana;;θa는 다음두가지로 번역된다. 

 

①maravn aqa는 미래 직설법으로 “주가 오신다(Our Lord comes)”라는 고백으로 읽혀지며,

②maravna qav는 현재 명령형으로 “오시옵소서!(Come, our Lord!)"라는 의미가 되며 제의의 상황에서,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며, 기도자의 부름- 정형화된 문구-으로 이해된다.72)

일반적으로 marana;;θa는 초대교회에서 아람어의 형태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미 아람어권에서 정형화된 후에 헬레니즘 기독교도들에게서 재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73)


(3) 그리스도(Cristo")

로마서에 66회, 고린도전서에 64회, 고린도후서에 47회, 갈라디아서에 38회, 빌립보서에 37회, 데살로니가전서 10회, 빌레몬서에 8회 나타난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역적 단어로 사용하기 보다는 예수에 대한 구체적인 표상으로 사용한다. 그는 이 단어를 “메시아”라는 명칭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정관사”를 사용하는 경우 까지도 “연역적”으로 예수에게만 적용한다. 신조를 표현한 언어에서 “그리스도”는 예수를 구원사업의 동인으로 특징지운다. 이런 모습이 로마서 8장 34절․14장 9절, 고린도전서 15장 3 절이하에서 “그리스도”를 주어로 해서 나타나고 있다. 쿨만(O.Cullmann)은 원시기독교공동체가 부활신앙을 토대로 “그리스도”를 신앙고백으로까지 고양시켰다고 말한다.74) 하지만 마가복음에서 드러나지 않는 이 표현을 가지고, 누가복음을 토대로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는 듯 하다. 아무튼 바울에게서 이 칭호는 예수와 완전히 결합된 형태의 또 다른 이름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메시아”라는 유대적 호칭이 가진 ‘지평’이 무용화된 지역에서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는 사용되기 시작했고, 바울은 이 단어를 예수의 이름과 결합하여 예배에서의 공식칭호로 정착시킨다. 물론 이러한 공식칭호가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지만 바울은 십자가로 절정을 이룬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이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통해 표현해 낸다.75) 바울이 인용한 또 다른 전승(고전 15:23-28)은 고린도전서 8장6절과 유사한 사상으로 하나님이 창조자이시고, 그리스도는 선재자로서 창조의 중보자이고, 세상의 주님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동안 자신의 신분을 옮겨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승천 즉, 원래의 자리로 복귀하신 후의 그리스도는 당연히 만인의 신앙고백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76) 바울은 승천 후 그리스도의 사역이 가지는 구체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는다. 그에게서 중요한 것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도식이다. 그 중에서도 부활에 대하여 바울은 주목한다. 실제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사상논쟁에서도 언제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신앙의 지평으로 삼는다. 바울은 예수의 전 생애를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것은 그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대한 확신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에게서 역사적 사건은 예수의 공생애가 아니라 부활사건이다. 이 사건이 더 이상 유대적 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므로 “메시아”라는 단어보다 바울에게는 “그리스도”라는 단어가 예수에게 더 적절한 것이다.


(4) 하나님의 아들 (uio'][[]'" tou ;qeou)

로마서에 12회, 고린도전서에 2회, 고린도후서에 4회, 데살로니가전서에 3회 나타난다. “주”와 함께 즐겨 사용되는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o\{te de; h\\lqen to; plhvrwma tou' crovnou, ejxapevsteilen oJ qeo;" to;n uiJo;n aujtou', genovmenon ejk gunaikov", genovmenon uJpo; novmon, 갈 4:4)


여기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선재하신 아들”로 등장한다.77)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용어를 종종 ‘하나님의 사람’이란 의미와 연관지어 사용하며, 또 신자들은 “양자”로서의 아들이라고 말한다.78) 바울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보다 “그리스도”, “주”라는 칭호를 즐겨 사용한다. 그는 자신의 초기서신인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언급하며 “그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재림에 대한 이런 묘사는 마치 공관복음에 나오는 인자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론 바울은 이 칭호를 독창적으로 창출해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것은 바울 이전 시대의 신앙고백이다. 바울은 이 신앙고백을 자신이 그대로 사용함으로 여전히 그가 “도래할 아들”에 대한 바램의 지평 위에서 “예수”를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그가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잠시 “전권”을 위임한 자로 단정하고 있음으로 보아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역시 그 “전권”을 위탁받은 자, 즉 십자가 사건과 부활사건 이후에 완전히 신적으로 회복된 그런 “신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을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칭호사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에게서 예수의 공생애 사역은 아는 바가 없다. 오직 고린도전서 15 장 등에서 성만찬 전승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가 인간 예수의 모습을 신성과 동시에 담아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힘들어 보인다.


(5) 사람 (ajnqrwvpo")

로마서에 27회, 고린도전서에 31회, 고린도후서에 8회, 빌립보서에 3회, 데살로니가 전서에 5회 나타난다. 바울은 자신의 서신에서 가끔 사람, “ 마지막 아담” “제 2 아담” 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그래서 바울 서신 연구가들은 이 같은 용어가 복음서의 표현 이면에 숨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79) 부제(W. Bousset)나 봐이스(J. Weiss)는 사도 바울이 “인자”에서 “사람”으로서의 예수칭호를 발전시켰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울이 오히려 유대주의의 교리적 측면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은 “인자”의 개념과는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이라는 단어는 바울에게서 보이는 가장 특징적 용어이다. 바울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원시교회의 대표적 칭호들보다 이 단어로 예수를 자주 설명한다.


이 칭호가 바울에게서 가지는 의미는 구원론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이러한 “사람”의 개념을 신화적 영광인 피조물이 구조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종교사학파는 바울이 영지주의의 입장을 수용하고 있음을 말한다.80) “원인간”(Urmensch)의 모습은 묵시적인 유대교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종말론적인 “마지막 사람”(Endmensch)으로 바뀌었다. 이곳에서 원인간은 낙원의 왕으로 묵시적으로 변형되었으며, 헬라적 유대교는 이 원인간 사상을 첫 사람과의 대립개념으로 확대시켜 “창조 중재자”의 개념을 부여하였다. 바울에게는 “종말론적 최종자”와 “창조 중재자”의 두 요소를 붙잡았다. 그에게서 “창조 중재자”는 선재성에 기인하고 있다.81)

(고전15:45)ou\{tw" kai; gevgraptai ejgevneto oJ prw'to" a[nqrwpo" j Ada;m eij" yuch;n zw'san, oJ e[scato" jAda;m eij" pneu'ma zw/opoiou'n.

(고전15:47)oJ prw'to" a[nqrwpo" ejk gh'" coi>kov", oJ deuvtero" a[nqrwpo" ejx oujranou'.


여기에서 더욱 중점적인 것은 종말론적 “마지막 사람”의 모습이다. “그리스도”가 특별히 마지막 아담으로 명명된 것은, 삶을 주는 영으로서 산 자인 첫 아담과의 대조를 이룬다. 더구나 “하늘로부터 온 존재”인 마지막 아담은 “땅”에서부터 비롯된 첫 아담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모습에는 묵시적 마지막 사람으로서의 “원인간”형과 헬라적 유대교에서의 창조중재자로서의 모습이 동시에 나타난다. 이러한 모습은 원시교회에서 바울에게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6) 구주(swth'r)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hJmw'n ga;r to; polivteuma ejn oujranoi'" uJpavrcei, ejx ou| kai; swth'ra ajpekdecovmeqa kuvrion jIhsou'n Cristovn, 빌3:20)

이 시기에 swth'r는 단 한번 나타난다. 그것은 아직 이 칭호가 보편화되지 않았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칭호가 제도권, 통치권과 연관된 것임을 생각해 볼 때 아직 교회가 공동체로서의 순수함을 함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 후기서신들에서 구주의 용례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과 비교해 볼 때82), 아직은 특별한 용례가 없이 구원사역의 용례로만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사실을 신앙의 조항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그리고나서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종말사건들에 관한 교리문답적인 구절을 하나 덧붙이고 있다 (살전 5:1이하). 여기서 예수 재림의 시일에 대한 문제가 방향을 돌려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자격을 가진 자들인가라는 신자규정의 문제로 되돌아 간다. 이러한 묘사를 통해서 바울이 밝혀 주는 것이 있다. 즉 신자가 그 구원사건과의 관련에서 자기의 신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파악했을 때 비로소 그 신조가 이해된다는 것이다. 바울의 서신들은 임박한 종말사상에서 세상을 향한 교회론으로 서서히 전환하고 있다.


바울은 언제나 신조를 언급하고 그 결과를 끌어들인다(고전 15장). 즉 그리스도가 부활하셨으니 따라서 우리의 미래도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희망은 어떤 사색적인 우주론이나 심리학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그리스도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5. 후기 바울서신

바울은 유대주의와 또 유대주의적 그리스도교와의 실제적 논쟁에서 그 스스로 교리를 형성해 나갔다. 하지만 후기 바울서신에서 이러한 실제적 논쟁은 배후로 물러난다.83) 예수에 대한 칭호들은 바울서신에서와 별다른 차이가 없이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기 바울서신들은 더 구체화되고, 체계화된 교회와 직제를 향하여 더욱 치밀하게 설명된 예수를 말하고 있다. 콘젤만은 이 서신들이 기록된 시대를 “반성”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한다.84) 교회는 이제 임박한 종말론을 지양하고, 조직화된 공동체로서 예전과는 다른 형태로 예수에 대해 고백하기 시작한다.


(1) 구주(swth'r)

디도서에 6회, 디모데후서 1회, 디모데전서 3회 나타난다.85)

황제를 종교적으로 숭배할 때 사용되었던 이 용어는 로마시대의 절정에 세계를 통치하는 인간에 대한 칭호로 채택되었다.86) 바울서신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던 swth'ρ가 이 시기에 대거 등장하고 있다.

(엡5:23) o\{ti ajnhvr ejstin kefalh; th'" gunaiko;" wJ" kai; oJ Cristo;" kefalh; th'" ejkklhsiva", aujto;" swth;r tou' swvmato".

' (딛 1:3)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tou' swth'ro" hJmw'n qeou)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딛 2: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 (swth'ro" hJmw'n jIhsou' Cristou')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 다리게 하셨으니


후기 바울서신에 등장하는 swth'r는 이미 그리스도의 몸으로 자리잡은 “교회”를 염두에 둔 “구주”이다. 예전의 임박한 종말론적 기대보다는 안정된 현실에서, 지연된 종말을 인식한 “교회공동체”에게 사용되었던 고백이다. “구주”는 예전의 구원론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 두드러진 특징이 대상의 보편성에 대한 문제이다. 즉, “swth'r"는 모든 사람에 대한 ”구원사건“은 아니다. 후기 영지주의에서 이런 범주는 “자연주의”에서 추론된다. 여섯 개의 본문에서 하나님은 멀리 있지 않고, 인식 가능한 범주에서 “우리의 구주”로 불리워진다. 

 

(딤전2:3)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이러한 개념은 곧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직결된다.

(딛 1: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Cristou' jIhsou' tou' swth'ro" hJmw'n)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 찌어다.

(딤후1:10)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tou' swth'ro" hJmw'n Cristou Ihsou)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 망을 폐하시고 복음 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 라.

이곳에서 예수는 복의 기대로 언급된다.87)그는 성령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딛3: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dia; j Ihsou' Cristou' tou' swth'ro" hJmw'n) 풍성히 부어 주사

예수의 역사적 재림을 고대하던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 한시적 기능으로서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없었던 성령의 비중이 점점 극대화되어 감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는 “성령”의 모습으로 교회공동체에게 임하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Cristo")'

골로새서에 25회, 에베소서에 46회, 디모데전서에 15회, 디모데후서에 13회, 디도서에 4회 등장한다. 골로새 교회와 에베소 교회는 바울을 통해 완성된 새로운 개념의 “메시아”를 도출해 내게된다. 이것은 영지주의와의 구원논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가 직접적 지도자라는 개념과 재림에 대한 묵시적 사상이 그 저변에 깔려있다. 그리스도는 신화적 형상이 아닌 역사적 실체이다.

(엡5: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 시니라.

(엡5:32)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이제 그리스도의 개념은 교회와 필연적인 개념이 되었다.88)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리스도는 이제 교회의 머리로서 존재하는 상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우주적 세력의 거세가89) 신의 행위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서(εν Χριστῷ) 실현된 구원의 시대로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에게 소유되면서 믿는 자들은 “어둠의 세력”으로서 세력들의 지배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지배로 옮겨진 것이다. 이런 시대적 요구들은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였다.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고자 했던 노력들은 이제 교회의 머리로서 대적을 향해 서있는 그리스도가 되게 하였다.


에베소서에서 교회는 구원사건의 현장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개개 구성원인 개인들이 성취되는 장소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나는 구원의 사건이 이제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사건의 측면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와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90)


에베소에서 구원의 “그리스도”는 찬송고백을 통해 채택된다(엡 1:3-14; 2:4-7․10․14-18․3:14-21․5:14). 먼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1:3-14). 영원 전부터 선택된 사랑받는 자 그리스도(1:6), 그는 모든 구원을 이루시는 이시다. 그의 구원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스도는 구원의 시작이며, 동시에 완성이다. 그 사건의 현장에 교회가 자리한다.


6. 공관 복음서

공관복음서의 전승은 예수에게 칭호를 부여하고 예수 자신이 이 칭호들을 사용한 것으로 함으로써 예수의 인격에 대한 이해를 제시한다고 콘젤만은 말한다. 91)이런 이해를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그러한 공동체들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역사적 예수를 어떤 신앙의 대상으로 이해해 갔는지 그 칭호를 통해 살펴보겠다.


(1) 전승의 지평

초기의 교회는 원시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예수의 선포를 받아들여서 전수해 나갔다. 그 내용의 중심이 있는 예수는 원시기독교 공동체로부터 “인자”와 일치시켜진 존재였다. 대망과 가시적 대상을 일치시키고 있는 이러한 공관복음서의 모습은 여전히 유대 묵시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1) 마가복음

주후 66년경 유대전쟁이 시작될 무렵 갈릴리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를 염두에 두고 저작되었다(Willi Marxen). 마가복음은 점점 더 격화되는 전쟁이 세계종말과 내림을 초래하리라는 기대 가운데 쓴 현실적인 기획서이다. 따라서 이 복음서는 교회 공동체에게 예루살렘을 떠나 주께서 나타나실 갈릴리로 도피하라고 촉구하고 있다(13:14․16:17). 그러나 파국이 급박하게 도래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 급히 도주하라고 촉구하기 위해 태연히 책을 저술하고 있는 사람을 가정할 수 없거니와 이런 가정은 마가 복음 13장의 분석에 의해 부정된다.


휠하우어(Ph. Vielhauer)는 마가복음의 그리스도론에 대하여 ‘선재’개념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자” 칭호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이 칭호는 예수의 본질을 신적 인간으로 나타낸다. 그것은 기적설화를 통해 구현된다. 그러나 이 칭호는 존엄한 위치를 나타내는 데 강한 비중이 있다. 예수는 종말론적 구원의 때에 왕인 것이다. 이 존엄한 지위는 세례, 변모, 십자가라는 세 단계인 점진적인 즉위도식에 따라 발전되고 있다. 마가복음의 기독론은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에 의해 자리 지워진다.


2) 마태복음

마태복음은 갈릴리를 선택된 땅으로 보는 마가복음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구약성서의 예증귀절을 첨가함으로써, 즉 갈릴리를 약속이 성취된 땅으로 서술함으로써 마가의 사상을 더욱 진전시킨다. 마태가 속한 교회공동체는 현실적으로 유대교와 대결하고있었다. 그의 교회 공동체는 분명히 유대전쟁과 연루되어 있였으며, 유대전쟁 후에 바리새적 랍비들이 주도했던 유대 복구운동과도 연루되어 있다. 이 예리한 대결구도는 마태의 구원사적 기본사상에 그대로 드러난다. 교회는 참된 이스라엘이다. 볼 수 있는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빛이 되라는 위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이스라엘의 선택은 무효가 되었으며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게 된다는 것이다(포도원이 다른 백성에게 넘어가는 비유). 그러나 교회는 연속성을 견지해야 한다. 마태가 속하였던 유대 그리스도교적 공동체는 유대적 율법공동체와 결별할 수 없었고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란 주장 때문에 유대교와 싸우게 된다(마23:1 이하). 이렇게 마태가 이스라엘에 결부시킴으로써 교회를 유대 그리스도인들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반대로 이스라엘의 과제는 항상 보편적인 것이다. 여기서 마태는 모든 민족들로 이루어지는 교회사상을 이끌어 내고 있다.


여기에서 작용하는 신학적 원리는 약속과 성취의 원리이다. 이 원리는 마태복음 전체를 일관하고있으며, 특히 구약성서 인용구절들에서 뚜렷이 알 수 있다. 구원사적으로 확정된 낮고 박해받는 예수의 현존은 현재 교회가 유대교와 관계를 맺는데 있어서 모범이 된다. 약속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신앙의 사신을 거절하고 자신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는 이스라엘과 예리하게 대립한다(5:17-20)(E. Schweizer). 마태는 율법의 존속에 관한 Q자료의 로기온(눅 16:17)을 이용하나 이 로기온으로부터 율법, 의, 구원의 길에 대한 근본적인 진술로 변형하고 있다.: 예수는 율법을 폐하려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 즉, 유효한 것으로 견지하기 위해 왔다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랍비들과 경쟁하는 것처럼 나타나며 그리스도교적 율법해석은 랍비적 율법해석과 대립해 있다. 그러나 마태는 현실적으로 율법의 시행세칙을 양적으로 얼마만큼이나 규정할 수 있는 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에게는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율법전체의 의미를 해석한 것이 문제가 된다. 이에 반하여 유대교적 전통은 이 계명을 수행하는 게 아니라 회피하는 것으로 보여졌다. 유대교 전통의 대변자들은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을 분리한다. 그들은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낙타는 삼킨다. 그들은 위선자들이며 잘못된 길에 빠진다. 그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문을 닫는다. 산상설교와 바리새인에 대한 말씀은 어떻게 그들이 자신들의 규례를 통해 계명을 무효케 하는 지를 예시 해준다. 그들의 자기 주장은 그들의 행태를 통해 나타난다. 그들은 신자를 박해하고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본분을 상실했음을 입증해낸다. 교회는 참된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 원수사랑의 계명은 박해를 받을 때에 구체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5:44). 이스라엘을 계승함으로써 교회는 유대교적 형태의 회당과 의식적으로 구별하여 종말론적인 형제교제의 공동체로서 자체의 내적 질서를 형성한다(23:8-12).


마태는 예수의 공적 가르침과 제자들을 위한 특별한 지도를 구별한다. 이런 모습은 마가에서도 발견된다. 하지만 마태에게서 이런 모습은 이미 초기단계를 넘어선다. 비밀한 교육자체가 소종파의 특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에게서는 이런 소종파적 비밀교육의 규정은 나오지 않는다. 제자들의 비밀교육은 교회 공동체에 대해서 교회의 공개적인 선교가 어디서 유래한 것인지 알려줄 뿐이다(10:26-27). 결국 비밀교육은 부활절이전의 역사적 상황과 결부되어 있다. 부활절 이후부터 공개적인 것이된 것으로 보인다.92)


세계종말에 대한 가르침도 비밀스럽지 않다. 이 문제는 단지 이 가르침을 듣고 이해했는 가를 말하는 것 뿐이다. 묵시문학적 특징은 예수에게서 보다 마태에게서 더 농후하다. 그러나 묵시문학적 사변에 제동을 하는 경우가 있다. 가령 마태가 심판 장면을 서술하는데(25장), 사실 그 심판장면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행위에 의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가 묵시적 종파와 자신을 구별하였다는 사실은 세상에서 자신을 고립시키지 않은 점에서 볼 수 있다. 세상은 악마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나라로서 선포된다(13:37이하). 따라서 교회는 세상에서 의로운 자들과 불의한 자들의 종말론적 분리를 이미 하지 않고 있다. 그 분리는 하나님께 맡겨져 있다. 그것은 미래에 실현될 것이다. 마태는 항상 교회사상에서 종말론적 전망에 도달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외부의 박해와 내부의 이단에 의해 위협을 받는다. 마태의 이런 말씀들에서 박해와 이단에 대한 경고도 종말론적 전망에 선행하는 확고한 내용에 속한다. 제자들이 계명을 배웠고 교회규율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소종파의 형태는 아니다.


교회공동체의 회의는 맺고 풀 권세, 즉 교권과 징계권을 가졌다. 이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들은 곧 하늘에서도 타당하다. 이것이 공교회개념의 의미에서 교권과 징계권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하다. 이 직권이 결코 특정한 기관에 절대적으로 위임된 것이 아니다. 교회는 독자적으로 구원을 중재할 능력을 지닌 중간기관이 아니다. 교회의 판별권은 교회 안에서 교설과 이단, 질서와 무질서를 판별해 주는 말씀을 전함으로써 행사된다.


마태로부터 새로운 율법주의에로의 길이 보인다. 하지만 마태의 사상이 그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 구원의 길에 관한 추상적 가르침으로 이해될 때 즉시 새로운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마태에게서도 미래와 현재의 변증법이 지배한다. 이 변증법은 , 구원을 약속하는 직설법적 말씀에서 나온 명령에서 구체화된다.


3) 누가복음

누가의 신학은 초기 가톨릭 적인 것으로 특징 지워진다. 실제로 누가에게는 전통에 관한 사상이 확립되어 있다. 전통에 관한 사상은 열둘로 한정된 사도개념을 통해 확고해 진다. 교회는 더 이상 종말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다. 이제 교회는 세상에로 눈을 돌린다. 하지만 완전한 단정은 금물이다. 전통적인 것이 있다하여 가톨릭 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누가는 사도직은 알았지만 계승사상은 몰랐으며, 전통은 알았으나 전통을 전수하는 법적 기구는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93)


종말론적 긴장의 완화가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데, 이것은 적극적인 신학적 성찰의 결과이다. 누가복음 중에서 임박한 기대는 단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구원사적 상징으로 대체되어있다. 이것은 의식적 작업의 소산이다. 그리고, 예수의 생애를 ‘내적으로’ 서술한 것과 예수의 생애를 ‘외적으로’ 즉, 구원사적 틀의 중심에 삽입시킨 것은 상호 부합된다.94) 이렇게 구원사와 예수의 생애를 결합하는 작업에서 종말론과 역사에 대한 통일된 이해가 표명된다. 교회는 유대교적 유산을 물려받고 있다. 교회는 참된 이스라엘이다. 교회는 부활과 재림의 중간에 서 있다. 종말은 교회의 바로 앞에 서 있지 않다. 새로운 세계는 좀더 멀리 있다. 그러므로 종말이 도래하기까지의 장구한 시간에 대하여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 누가는 자신의 역사관에 의해 이 장구한 시간에 대한 자세가 소극적인 체념적 자세가 되는 것을 방지한다. 재림(parousia)까지의 시간영역은 교회의 시간으로서 하나님의 구원계획 속에 포함되어졌다. 누가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그 나라가 초시간적으로 저쪽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며 확실히 도래할 것임을 강조한다. 이것이 언제 도래할 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도래한다. 누가는 재림에 대한 역사적 전망과 예수에 대한 회고를 결부시킨다. 이런 회고를 통해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진리는 예수를 통해 나오며, 그의 이적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의 보내심을 통해 확증된다.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도 예수의 인격을 통해서 알려지고 있다. 때문에 예수의 역사적 출현은 누가에 의해 구원상태의 ”표상“이 되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상은 무시간적이고 이상적인 모범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 예수는 전혀 모방될 수 없다. 그의 행위는 역사적으로 일회적인 것이다. 예수가 세상을 뜬 후 교회에만 세상 안의 새로운 조건이 지배한다. 누가의 구원사관은 그의 교회이해도 규정한다. 교회는 참된 이스라엘로, 이곳에서 부활하신 이가 예루살렘에 나타나고 사도들이 당분간 이 도시에 매여 있다는 사실에서 표명된다. 이 도시에서 성령이 나려지고, 이방인 그리스도교회도 예루살렘과 연관되어 있다. 선교는 항상 먼저 유대인에게 향한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구원을 배척한 후에야 선교는 이방인에게로 향해진다.


(2) 아들

마태복음에 90회, 마가복음에 35회, 누가복음에 77회 나타난다. 절대 용법으로서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과는 구분되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것은 전승의 차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아들”이라는 단어는 이미 “아버지”와 관계되어 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계시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복종이 이 관계를 본질적으로 규정해준다. 아버지가 절대용법으로 사용된 구절들(막 12:32, 마11:27 병행 눅10:22)은 교회공동체의 산물로 보인다.


(막 1:11)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막 9:7)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12:6)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막 13:32)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 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눅 10:22)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마 1: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 하니라

마가복음 12장 1절 이하의 “악한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제하는 구원사를 유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공관복음서를 통해본 아들의 모습은 교회공동체가 의도하는 사명을 지평으로 하고 있다. 첫 번째 예수가 “아들”로 우리에게 고백되어야 한다는 것과, 두 번째 그 예수가 “고난”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성이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것은 원시기독교 공동체가 자기집단의 대외적 정체성을 확립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가 “아들”로 확증됨을 통하여 선포의 지평을 열어가고자 하였다.


(3) 하나님의 아들(uio'][[]'" tou ;qeou)

마태복음에 9회, 마가복음에 4회, 누가복음에 6회 나타난다.

(마 8:29)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 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 14:33)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 들 이로소이다 하더라.

(마 16:16)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27:54)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 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 었다 하더라.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눅 1:35)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 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 4:41)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 님의 아들 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 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눅 8:28)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 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 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눅 22:70)다 가로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 말 과 같이 내가 그니라.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칭호가 예수 자신에게 소급되는가 이다. 공관복음서를 대조해 보면 상당한 부분이 이차적임을 발견하게 된다(마14:35, 16:16, 27:40․43).95)


본문중 설화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등장하지 않는다. 콘첼만은 그 이유에 대하여 이 칭호가 신앙고백자체에 거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칭호가 사용되는 대표적 용법은 다음과 같다.

① 십자가 아래에서의 이방 백부장의 고백

(막15:39)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 사건은 역사적 상황에 대한 고백적 진술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존재에 대한 신앙적 고백의 진술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십자가 아래에서 그 사건을 목도한 사람의 진술이라기 보다는 십자가 사건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한 이방 신앙인이 그 사건의 주체에 대하여 던지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② 현시의 경우

a) 세례: 예수는 하늘에서부터 나오는 소리를 통하여 (시 2:7과 사 42:1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다. 이제 예수는 하나님에 아들로 공인된다는 사건이다. 콘젤만은 이 사건의 역사성을 부인한다.96) 쿨만은 이 상황에 대하여 “예수의 세례체험”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콘첼만은 이 본문에 대하여 한 개인의 체험을 묘사한 환상적인 것에 대한 어떤 흔적도 없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만일 이 본문이 개인적 체험에 대한 환상적 묘사라면, 왜 예수의 입을 빌어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 말씀”의 형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97)

b) 형상의 변화(막 9:1이하 병행): 이 설화의 경우도 유사한 형태를 가진다. 이 설화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언급과 함께 그에 병행하는 아들의 권위가 나타나난다. 이 민담이 현시동기를 제공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행위의 표상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콘첼만은 말한다.98) 이 민담은 현시 동기를 거듭 제공한다. 이는 전혀 행위의 표상으로 간주할 수 없는데도 이 사건을 묘사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본래 세례설화와 경합한다. 현재 문맥에서 그것은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수난예고에 뒤따른 하늘의 확증으로 되어 있다.99) 위의 두 설화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가져다 주는 신분적 보상은 법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아들이 주는 권위를 지탱하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콘첼만은 예수의 선재사상과 별개의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③ 귀신들의 외침

(막 3:11)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 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막 5:7)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 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마가복음 3장 27절이 이 구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아무도 먼저 힘센 사람을 결박하지 않고는 그 힘센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없다.” 귀신들이 사람보다 먼저 예수의 “하나님 아들”됨을 알게된다. 영력에서 사람을 능가하는 귀신들이 예수의 권능을 초월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반대로 말해서 이 본문을 읽는 사람은 귀신을 통해서 예수의 권능을 알게 된다.

④ 마태와 누가의 前史

마태와 누가는 다윗의 후손이란 동기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동정녀 탄생”의 동기를 결합하고 있다. 이 결합은 일차적이지 않고 오히려 이차적이다. 세례설화와 변모설화에서 하나님의 아들된 신분이 법적으로 파악되었다고 한다면 여기서는 오히려 신체적 신분으로 파악되고 있다 : 예수는 기적적으로 탄생한 하나님의 아들이다(눅 1:35). 여기에도 선재사상은 없다. 예수의 탄생설화가 복음서 안에서 세례설화나 변모설화보다 앞에 위치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이 탄생설화는 세례설화와 변모설화 앞에서(비록 선재사상은 없지만) 뒤에 등장하는 “세례설화”와 “변모설화”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의미를 변경시키고 있다. 탄생설화가 없는 경우에 세례설화와 변모설화의 의미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공증작업이 되지만, 탄생설화가 먼저 자리하게 되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먼저 확증시켜놓은 후에 세례설화와 변모설화를 통해 공증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콘젤만은 말한다.100)

⑤ 예수의 자기 칭호

마가복음 14장 61절이 예수의 역사적 자기칭호의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구절이다.

(막14:61-62)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그리스도냐, 예수께서 이르 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콘첼만은 이 구절의 질문에 대하여 역사적 보도가 아니라 마가식 그리스도론의 개약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생각은 불트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불트만은 마가복음 14잘 55-64절의 공회심문에 대한 보도에 대하여 “신앙전설”로 성격 짓고 있다. 이 보도는 십자가형 설화의 전설적인 개작에서도 표현되고 있는 것처럼 예수가 메시아로서 처형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일반적인 메시아교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고 불트만은 말한다.101) 다시 말해서 예수는 그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4) 메시아- 그리스도(Cristo")

마태복음 16회, 마가복음 7회, 누가복음 12회 나타난다.

신조에서의 메시아 칭호는 구원사업, 그 신조 이전에 있었던 사건 즉, 구원사건과 연관이 있다. 먼저 “그리스도”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 구절(막 1:1)은 배제되어야 한다. 그것은 분명하게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관복음서 대조를 통해 이 칭호가 이차적인 것으로 입증된 구절들(마 11:2 ; 눅 7:18 ; 마 24:5․26:68 ; 눅 3 : 15․23 : 2․39)은 모두 배제되어야 한다.

콘첼만은 마가복음에서 의회의 심문에서 나타난 메시아 칭호는 편집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102) 그리고 마지막 때에 거짓 메시야들의 출현을 예기하고 있는 묵시문학적 언설(막 13:21-22)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모두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교회 공동체의 미래상인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을 주 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 라.

(O" ga;r a]n potivsh/ uJma'" pothvrion u\{dato" ejn ojnovmati oτ\ι Cristou' ejste, ajmh;n levgw uJmi'n o\{ti ouj mh; ajpolevsh/ to;n misqo;n aujtou, 막9:41)


이 본문은 예수를 간접적으로 섬기는 방법은 그의 제자들을 섬김을 통해서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도성은 그의 제자들이 섬김을 받아야 한다고 인식되는 시대의 산물이라고 콘젤만은 말한다. 불트만은 더 직접적으로 이것에 대하여 예수의 대한 것 이전에 다른 원형이 있다고 말하고, 그리스도적 칭호에 대한 본문이라기 보다 원시기독교 공동체에서 당당한 위상을 가진 제자들이 있던 시절에 기록된 것이라고 본다.103)


예수의 그리스도이심에 대한 본문 중에는 검증해야할 두 구절이 있다.

① 마가복음 8장 29절의 베드로의 고백

(막8:29) kai; aujto;" ejphrwvta aujtouv" uJmei'" de; tivna me levgete ei\\nai_ajpokriqei;" oJ Pevtro" levgei aujtw'/ su; ei\\ oJ cristov".

불트만은 이 본문에 대하여 이차적인 것이라고 말한다.104) 콘젤만은 이 장면에 역사적 핵심을 가정하려는 경향, 즉 예수가 메시아로 불리우기를 거부했다는 것을 통해 접근하는 것에 대하여 오히려 그것이 본문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만든다고 말한다. 오히려 이 장면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한 인간이 신앙고백을 하게 되는 현장을 빌어 말하고자 하는 실존론적 그리스도론의 사변적 반영이라고 콘젤만은 말한다. 베드로는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신조가 되었고, 장차 이름이 되는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를 정확하게 말한다. 마치 “Back to the Future" 처럼.

② 마가복음 15장 32절의 십자가에 달린 이에 대한 조소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라는 문구는 마가복음 15장 26절의 유명한 팻말 “유대인의 왕”을 전제한다. 이 팻말의 진정성 여부는 의심하지 않아도 될 만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수의 수난이 철저히 그리스도론적으로 해석되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왕”으로 사용된 칭호는 모두 편집적인 것으로 보인다.

③ 다윗의 자손(혈통성의 문제)

족보는 역사적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 족보 이외에는 다음 구절들이 남는다.

(막 10:48) 소경 바디메오의 외침

(막 11:10)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다윗 왕국의 도래에 대한 환호

(막 12:35-37)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일 수 있는가에 대한 구절 105)

이 세 구절 역시 메시아의 역사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콘젤만은 말한다.

(5) 인자(uio'][[]'" tou ajnqrwvpou)

마태복음 32회, 마가복음 14회, 누가복음 26회 나타난다.

이 표현은 아람어 bar-e nash(사람의 아들)에서 유래한 것으로 희랍적 표현은 아니다. 여기에 정관사를 붙인 것이 bar-e nasha 또는 bar-nasha(사람)이다.106) 이것은 개별적인 한 사람을 지칭하는데 쓰는 말로서 별다른 뜻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더구나 이것은 칭호로 사용되기에 부적합한 것이다.


벨 하우젠(J. Wellhausen)은 “사람의 아들”이 칭호일 수 없다고 말한다. 아람어에서는 사람과 사람의 아들이 구분되지 않으며, 따라서 마태복음 8장 20절은 “사람은 머리 둘 곳도 없다.”는 말로 번역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희랍어로 번역되면서 완전히 칭호가 되었다. 이것은 다니엘 7장 13절에 등장하는 “인자 같은 이”에 의해 유발된 오해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인자 같은 이의 개념과 당대의 구원자로서의 메시아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사람의 아들”이라는 일반 호칭은 묵시사상을 만나 “초월적 존재”라는 위격을 가지게 되었고, 희랍적인 문화가 팽배하던 시절에는 완전히 메시아를 지칭하는 단어로 통용되게 되었다.


1) 언어상의 관찰

하지만 벨 하우젠의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 달만은 아람어에서도 사람과 사람의 아들이 구별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수의 시대 그리고, 예수가 사용한 방언에서는 bar-e nash가 일상대화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 표현은 성서적 표현으로서, 즉 성서본문 (다니엘서와 에스겔서)을 모방하는 경우에만 사용되었다고 말한다. 예레미아스는 이러한 주장에 반대한다.107) 그는 일상대화에서 그 표현이 사용되었음을 확인한다. 108) 이에 대하여 “나”의 대용으로 사용된 완곡어법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사람의 아들이 왔다.” 또는 “사람의 아들을 모독하는 자는... ...”과 같은 특정한 어법과 유사한 유대교적 어법은 없다고 콘첼만은 말한다.109)


이러한 경우로 인하여 아람어적 지식만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서에서 등장하는 본문들의 어법자체에 대한 문제이다. 만일 bar-e nash가 단순히 “사람”을 의미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이 칭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배제된 것은 아니다. 이 칭호가 원시기독교공동체가 받아들인 묵시문학적 기원을 가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공관복음서가 가지는 두드러진 특징은 이 칭호는 유대묵시문학과는 달리 “인자”가 가지는 천상적 선재에 대하여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관복음속에 나타난 “인자”의 특징은 오히려 “양자론”적인 모습이다.


2) 진정성의 문제

인자에 관한 말씀들의 진정성을 입증하게 위해 다음과 같은 예거가 요구된다.

① 이 표현이 아람어권에서만 생겨날 수 있었으므로, 이 표현이 고대적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헬레니즘 영역에서는 이 표현이 사라졌다. 그러나 매우 고대에 속하는 것이라고 해서 신빙성이 입증되지 않는다.

② 이 칭호는 직접 예수가 하는 말에서만 발견된다. 하지만 많은 구절들이 공관복음서 대조를 통해 이차적인 것으로 입증될 수 있다: 누가복음 6장22절(병행 마5:11); 누가복음 12장 8절(병행 마10:32)등을 통해 대조해 볼 때 이차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것도 이차적이다: 마태복음 16장 13절(병행 막8:27); 마태복음 16장 28절(병행 막9:1); 마태복음 26장 2절(병행 막14:1);마태복음 19장 28절(병행 눅22:28-30)을 대조해 볼 때 이차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110)


남는 것은 다음 세 부류의 말씀이다.

1. 사람의 아들은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한다.

2. 사람의 아들은 잃은 자를 찾으러 왔다.

3.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이 없다.

4. 사람의 아들은 구름을 타고 올 것이다.(막 13:26)


3) 분류


① 인자가 받을 “필연적 고난”에 대한 말씀들

Q자료에는 그리스도칭호와 마찬가지로 이 말씀들이 없다. 우선 세 개의 수난예언으로서 마가복음 8장 31절․9장:31절․10장33-34절을 들 수 있다. 그 외에 마가복음 14장 21을 들 수 있다. 이 구절들은 모두 사후예언(L aticinia ex eventu)이라고 콘젤만은 말한다.111) 이 구절들은 앞으로 전개될 상황에 대한 예보이기 보다 교리적 주장으로 보아야 한다. 메시아 비밀의 주제가 보여주듯이 마가복음 9장 12절도 편집구이다.112) 결국 이러한 유형으로 등장하는 본문에 나타나는 “인자”도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원시기독교 공동체가 그 공동체 안에서 ‘예수의 메시아성’을 묵시적 관점에 부합시키기 위한 노력한 모습으로 보인다.

② 지상에서 인자의 활동

이것은 마가복음, Q자료, 누가복음에서 발견된다.

(막2:10)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 게 하려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인자는 지상에서의 죄사함의 권세를 가진다. 본래 이 말이 개별적인 로기온일 수 있지만 이 본문은 교회공동체의 교의적 목적에 의한 진술임에 틀림없다.113)

(막2: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이 본문 역시 같은 방법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마8:20)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눅9:58이 병행 구이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이 말씀에 대하여 교회 공동체의 작문임을 거부한다. 이에 대하여 휠하우어는 예수가 직접 이 말씀을 하였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이라고 말한다.114) 이 본문은 인자의 권위에 대한 본문으로 보아야 한다. 슈바이처가 본래적인 것으로 간주하지만, 이 말씀은 예수의 전체활동에 대한 총괄적인 회고로서만, 즉 교의적 진술로서만 이해 될 수 있다.


슈바이처는 이런 부류의 말씀에 대하여 예수 자신에게 관련된 핵심적 요소인 의인의 낮아짐과 올리워 짐의 사상이라고 보려고 한다.115) 그리스도교, 그는 지상에 머물러 버림받은 “인자”에 관해서 유대교도 원시 기독교 공동체도 모르는 데 대해 예수는 고난받는 의인에 관한 유대교적 동기(솔로몬의 지혜)와 관련시킨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난받는 의인은 “인자”라 불리우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운다. 게다가 유대교에서 “인자”는 묵시문학적 존재이다. “인자”는 결코 자기를 나타내는 명칭이 아니다. 특히 현재적인 “인자”에 관한 말씀들은 올리워짐의 관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슈바이처는 이 관념을 요한복음에서 이끌어내고자 한다.116)

불트만은 변함없이 “인자”말씀의 칭호성을 거부한다. 그것은 그 칭호가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저작까지 부인하게 되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의 저술이 “원시기독교 공동체”와 분리될 수는 없다. 단순한 단어가 아닌 “인자”는 모두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교의적 표현이다.

③ 도래할 인자말씀: 마가복음, Q자료, 특수자료.

이 부류의 말씀들에는 고난이나 부활과의 관련이 없다. 예수는 이 말씀들에서 사람의 아들에 관하여 다른 인물에 관한 것처럼 언급한다.

(막 13: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이 말씀은 다니엘 7장13절에서 유래한 것이다. 묵시적 종말사상과 그들이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예수가 연결되어 있다.

(막 14:6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그리스도론적 칭호에 대한 요약적 진술로서 다니엘 7장13절과 시편110편1절이 결합된 형태이다.117)

마태복음 10장23절의 파송의 말씀은 박해받는 교회를 향한 묵시 문학적 위안의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본문은 부활사건이후에 작성된 것이다. 예수는 “인자”와 동일시된다. 누가복음 6장22절(마5:11과 비교)도 동일한 상황(교회에 대한 박해)을 반영한다.

누가복음 17장22절 이하118)에 나오는 “묵시문학적 어록”의 기본주제는 갑작스런 종말의 돌입이다. 22절은 26절과는 부합되지 않는 편집적 도입구이다. 22절과 26절에는 동일한 표현이 있지만 그 의미는 다르다. “인자의 날들”을 지상적 예수의 날들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3-24절의 신빙성 문제는 논의되고 있다. 23절에서 메시아의 기대를, 24절에서는 인자의 기대를 볼 수 있다. 이 두 구절은 이런 경우에 이차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119)

(막 8:38)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마 10:32)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 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마 10:33)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 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눅 12:8)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 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눅 12: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 함을 받으리라.


마가복음과 Q자료에서는 예수와 “인자”가 원래 형식적으로 구분되고 있다. 장차 인자가 인간에 대해 가지는 자세는 인간이 지금 예수에게 취하는 반응에 달려 있다. “인자”는 하나님의 심판앞에서는 증인이 아니라 “심판자” 그 자체이다. 이 말씀이 예수의 것으로 진정성이 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 예수와 사람의 아들 사이의 구별이 교회 공동체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 마태복음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 공동체는 양자를 동일시 하고있다. 하지만 예수가 직접 이 말씀을 한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은 예수자신과 인자와의 구체적 관계에 대해 어떤 설명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설명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한 예로 예수 자신이 장차 ‘인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스스로 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는다. 슈바이처는 예수가 ‘인자’’의 도래를 기대하지 않고 자신이 ‘인자’로 올리워지기를 기대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가정은 불가능하다고 콘젤만은 말한다.120) 콘첼만은 ‘올리워짐’의 사상에 대하여 요한복음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교 문헌에서도 이 사상은 추가된 부록인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70,71장에서만 발견된다. 더욱이 이 말씀에서 예수와 “인자”가 구별된다는 인상은 착각이다. 두 인물이 아니라 같은 인물의 활동의 두시기가 구분되고 있다. 인자가 삼인칭으로 언급되고 있음은 인자에 관한 모든 부류의 말씀의 경우와 일치한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인자에 대한 묵시문학적 일반적 표상에 근거해서 작성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수를 ‘인자’로 본 것이며 결국 이것은 처음부터 예수를 ‘인자’로 상정할 수 있는 시점인 부활 이후에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요한복음이 가지는 “선재적 기독론”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요한복음에서는 인자의 고난도 요한적인 양식의 고난으로 바뀌었다. 이에 대하여 불트만은 요한복음의 ‘인자’가 공관복음의 ‘인자’와는 전혀 다른 종교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불트만은 그 기원을 묵시문학이 아니라 영지주의에서 찾고 있다. 이 부분에서 콘첼만과 불트만은 서로 견해를 달리한다.


7. 요한 계열 문서

요한복음과 요한의 세 서신 그리고 요한 계시록은 “세베대의 아들”인 요한의 이름으로 전해왔다. 하지만 요한 묵시록은 다른 문헌들과는 달리 문체나 내용이 독특하다. 때문에 요한계시록은 뒤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요한 복음과 요한 서신들의 저자가 누구인지 역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요한서신들은 전도자의 그룹에서 유래되었다고 콘젤만은 말한다.121)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의 전도활동을 목격한 사람은 아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목격한 것들을 회상해서 기록하지도 않았고, 자신의 신학적 해석을 하였다. 그는 이미 쓰여진 자료들을 이용했다.122) 이와 같은 사실은 요한복음과 공관복음 그리고 공관복음의 전승과 관계성에 관한 질문을 제기한다. 이 문제는 단지 문헌학적인 것 뿐 만이 아니기 때문에 더 넓은 범위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1) 요한 공동체의 삶의 자리

요한 공동체는 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고립되거나 폐쇠적인 공동체는 아니었으며 어떤 형태로든지 베드로로 대표되어지던 당시의 주류 기독교 공동체와 교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80년대는 이미 마가 ․마태․누가복음이 완성되어서 당시 여러 교회공동체에서 유통․사용되고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러한 공관복음서 문헌자료들을 요한 공동체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실제로 요한복음저자가 문서화 시킨 수난사자료와 공관복음서에서도 나타나는 그 박의 자료들(이적자료, 일부 말씀 및 설화자료 등)을 사용했다는 것이 일부학자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요한복음 원저자는 요한 공동체 내에서 전승의 수집과 보존관리 및 활발한 신학적 토론 및 해석작업을 주도했던 “요한학파”의 권위있는 지도자겸 신학자였다고 성종현은 말한다. 그에 의해서 90년대에 기록된 요한복음서가 그 후 공동체 편집자들에 의해서 몇 차례 보완․교정 및 신학적 해석작업을 거치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이 공동체에서는 특히 교회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할을 신학적으로 깊이 성찰했고 하나님과 하나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아들의 완전한 계시와 그 분을 신앙하는 믿음 안에서 이미 현재적으로 누리는 성도들의 구원과 영생을 기독론적 으로 주제화했다. 이러한 공동체 신앙의 신학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이 구약과 유대교의 묵시문학적, 이원론적 그리고 지혜전승사적 배경이라고 분석된다(모세유형론, 출애굽;유월절 유형론, 쿰란적 이원론 사상, 구약-유대교의지혜전승과 예수-로고스 사상이 접목된다.).


요한공동체 초기의 주 구성원들은 유대교 출신 기독교인들로 판단되는데 이들은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 오래동안 유대교 신앙전통 속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공동체의 종교사적 배경이 비록 종교혼합주의와 태동하는 영지주의 사상으로 대변되는 종교사적 변환기 내지 혼란기였다 할지라도 요한공동체는 구약(유대교)-기독교로 이어지는 사상적 뿌리를 이탈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생성중인 영지주의 혼합사상과의 비판적 토론과 신학적 사색을 통해서 독특한 요한공동체의 신학을 창출해 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쿨만은 요한 공동체의 역사적 기원을 “비정통적 유대교”에서 찾는다. 그가 사용한 “비정통적 유대교”라는 개념은 “정통적 유대교”의 대칭개념으로 사용된다. 하지만 이것은 역사적으로 부정확하다.123) 왜냐하면 주후 70년경 바리새파가 주도권을 잡고 바리새파의 신학이 “정통”이 될 때까지 유대교에는 사실 정통이란 단어를 붙일 만한 종파가 없었기 때문이다. 요한 공동체의 기원규명에 관한 노력은 오히려 마틴(J. Martyn)과 브라운(R. Brown)에 의해 진전을 보게 된다.


마틴은 요한 공동체의 역사를 초기, 중기, 말기의 세시기로 구별한다. 초기시대는 유대전쟁 전부터 80년대까지의 기간이며 복음서 형성 이전의 단계로 정의한다.124) 유대교 회당권내에서 살고있던 그리스도교적 특색을 지닌 유대인들이 바로 이 주역들이며 이들은 비교적 안정권내에 있던 사람들이였다. 이들은 유대인의 유산에 충실했으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인들 이면서, 동시에 메시아이신 예수의 제자들이였다.125) 중기(주후 80년대 후반 경)에는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공동체가 급격히 성장하여 유대 종교당국의 의심을 사게되는 분위기가 전면에 부각되어 있다. 이때 회당 당국자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주장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요구하였고 회당내에서는 이 공동체를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논쟁이 분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유대교회당은 더 이상 유대인들이 이 그룹에 전향하지 못하도록 이단 저주령(Birkath ha-Minim)을 공포하여 예수를 쫓는 유대인들을 추방하기에 이른다. 이때 이들 중 일부는 회당 내에 그대로 머물기 위해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하던 것을 포기했으며, 끝까지 고백한 사람들은 결국 축출 당하기에 이르른다. 마틴은 축출된 이들이 “회당 내의 예수도당”으로부터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로 자기정체성을 바꾸게 된 것으로 보인다.126) 마틴이 분류한 말기에는 요한공동체가 회당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다른 기독교 그룹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게 되는 시기이다. 마틴은 이 시기에 적어도 네종류의 사회적 신학적 집단들이 있었을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 유대인 회당공동체 (2) 회당내의 비공개적 그리스도인들 (3) 요한공동체 (4) 요한공동체가 결국 연합하기를 희망했던 회당으로부터 축출되었던 유대교적 그리스도인들의 또 다른 공동체들127)로 나누는 이러한 구성은 매우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애제자”에 대한 언급을 도외시하는 것과 요한공동체를 “유대교적 공동체”로만 인식하고 있음으로 인해 실제로 회당에서 축출된 후 요한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사마리아인들․이방인들․세례요한의 제자들․갈리리인들 등을 자신들의 그룹 속에 부분적으로 수용했음을 반영해주는 단락들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이다.128)


브라운은 마틴과는 달리 “애제자”가 요한공동체를 태동시켰다고 말한다.129) 이 그룹은 반 예루살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많은 사마리아인들을 전향시킨 두 번째 그룹을 수용하고 이를 통해 보다 높은 차원의 선재기독론을 발전시켰다고 브라운은 말한다.130) 이 고차적인 선재기독론이 유대인들과의 논쟁을 야기시켰고, 결국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이 요한적인 그리스도인들을 회당으로 추방시켰다고 본다.131) 하지만 사마리아인들의 현격한 증가(4:41-42)는 그 공동체의 축출전 보다는 축출후의 상황에 더 잘 어울린다.132) 마틴과 브라운의 가설은 요한공동체의 기원과 성장에 따라 그 기독론이 변하고 있음을 잘 알려준다.


축출된 이후 요한공동체 멤버들은 대단한 소외를 체험하게 되었고, 유대교회당을 자기들을 박해하는 실체로 간주하게 되었다. 축출이후에도 회당지도자들이 이 그룹에 대하여 하나님이외에 다른 신을 섬긴다고 비난하면서 박해를 가하자 공동체는 그들만의 새로운 기독론적 관점을 제시하게 되었다. 전통적 메시아 대망이 예수에게서 성취된 것으로 생각했던 구속사적 사고구조가 이원론적 구조로 변형되어 갔다.133) 유대교 회당과 요한 공동체의 갈등이 전면화 되면서 요한 공동체는 유대교회당의 멤버들에 대한 선교활동을 포기하고 사마리아 전향자, 이방인 전향자, 세례요한의 제자중 일부 전향자, 갈릴리 전향자의 그룹들과 연합하면서 성장해 나가게 되었다.이들 다양한 그룹들의 수용은 인자 기독론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서에 반영된 주요 외부공동체들은 비공개적 그리스도인들, 사도계 그리스도인들, 세례요한의 제자들, 그 밖의 유대인들이며 요한공동체는 이 소공동체들과의 신앙적 갈등과 화합을 통하여 독특한 공동체의식을 더욱 뚜렷이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로마의 이교도 공동체들, 영지주의 공동체들 역시 요한 공동체와 대립관계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 사상적 배경

요한복음의 주제와 개념이 다음에 열거하는 사상적 배경에서 나온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 구약 성서적 배경

요한 복음의 첫 문장은 창조기사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창조주로서의 로고스는 구약성서에 나온 사상이 아니라 빛과 어둠을 말하는 이원론에서 나온 것이다.

2) 유대주의적 배경

이원론 사상은 성서 이후 유대문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유대주의에 나타나는 이원론 사상은 그 자체가 하나의 문제이며 더욱이 요한복음에서의 이원론은 유대주의적 이원론과는 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다.

3) 지혜

로고스는 실제로 소피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 나타난 주제는 유대주의에서 발전된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은 초기의 영지주의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시간성의 개념 역시 유대적 지혜문학과는 거리가 있다.

4) 쿰란

영지주의와는 대조적인 이원론 개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원론적 사고는 하지 않는다. 쿰란 본문과 요한복음이 만나는 점이 바로 여기이다. 하지만 쿰란에서는 계시자의 내려옴과 올라감 같은 신비적 개념은 없다. 쿰란은 구속자 개념도 없고, 중생의 개념도 없다.

5) 영지주의

영지주의 문헌들, 즉 그리스도교적인 것 (솔로몬과 이그나티우스의 송시)과 비 그리스도교적 문헌(Hermetic과 Mandaennan문헌)은 비교하기에 가장 좋은 자료를 제공한다. 하지만 영지주의 문헌은 요한복음보다 훨씬 더 강한 신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고, 선교, 하강, 소명, 흩어진 빛의 파편을 모음이라든가 “상승”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독립된 주제를 만들고 있다. 즉 최초의 인간의 타락과 빛의 파편의 분산, 구속자와 구원받은 자의 동일 본질론을 보면 요한복음에는 어떤 신비적인 배경도 없다. 또한 우주적 체계(천체를 몇 개만으로 나누는)가 없다. 요한은 절대자 하나님이 보낸 계시자, 선재한 저 세상은 광경도 묘사한 바 없으며, 하늘에서의 대화도 이야기한 바 없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가 하나님 아버지 말씀을 듣고 보았다고 선언하는 그 점에서만 하늘의 대화를 주제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ἐgῷ;;-말씀”과 아버지 하나님이 그에게 아버지가 된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대화 이외의 다른 내용이 없다. 요한은 로고스의 선재를 알고 있지만 영혼의 선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구원은 근본적으로나 자연현상으로나 이해하기 쉬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선택의 자유행위로서 이해된다. 요한은 계속해서 창조와 구원의 일치를 주장한다. 영지주의에서 신화가 영지주의 초창기부터 발달했는 지에 관한 논쟁이 있다. 그것을 전제할 때 요한이 이와 같은 형태로 영지주의와 가까웠었는 가에 대한 문제도 토론할 수 있다. 이런 경우 요한의 사상경향은 급진 것으로 신화를 감소시켰을 것이라고 불트만은 말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주 유치한 상태의 영지주의를 전제한다.134)


(3)요한공동체 그리스도론의 특징

요한복음 저자는 자기가 살고 있던 시대의 정황을 주구보다도 예민하게 통찰하며, 그 시대의 다원적 철학 사상과 종교 사상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였다고 생각된다.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탄생과 그의 활동을 통하여 실현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두고, 예수께서 그 천국 복음을 전하신 사실을 묘사하였다. 하지만, 요한 복음 저자는 예수님의 생애 자체에서 복음을 발견하고 예수가 곧 선포의 주체와 내용이 된다.135) 그러므로, 요한의 중심사상은 그리스도론 이다. 이러한 모습은 바울신학과 원시기독교공동체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요한의 방법은 이와는 차이가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론을 “나는 ...이다.”라고 하는 자기 폭로에 집중시켰다. 구래서 우주적인 구조가 벗겨진다. 이런 모습이 바울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εικων)으로 표현한 것이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고후 4:4). 이것은 유대인의 지혜사상에서 이어받은 그리스도론적 개념이다. 인격화한 지혜는 신적 계시의 능력이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기대와 그의 계시, 즉 “지혜”에 대한 기대가 예수에게서 완성되어 나타났다. 지금은 지혜의 모습이 말씀의 모습과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요한이 예수를 로고스라고 할 때 요한은 바울의 그리스도론에 가깝게 보인다. 하지만 바울이 “형상”을 말한 것에 비해 요한이 “로고스”를 말하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바울에게서 지혜의 인격성은 확실히 그 배경이 있지만 예수의 칭호를 “형상”으로 명명한 것은 특수묘사로 쓰여진 것이다.136) 그런데 이것은 아직 칭호로 규정되지는 않는다. “지혜”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고전 1:20이하, 30) 바울은 지혜의 모습을 확정하지 못했다. 바울은 추상적인 지혜로부터 시작하여 희랍인들의 지혜를 추구하고 그들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우매한 것이며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를 위한” 지혜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하나의 명백한 형태로서 유대형식에서 확인된 것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인격화는 아니다(고후 5:21).


이와는 달리 요한의 로고스는 선험적 인격으로 계셨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요한은 “하나님의 로고스”를 말하지 않고, 독립된 용어로 “로고스”를 말한다. “예수는 로고스”라는 진술은 단순히 어떤 지정된 표현이나 수사학적 과장이 아니다. 이것은 글자가 뜻하는 그대로 예수의 본성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요한 문헌에 나타난 그리스도론적 모든 다른 칭호들은 다만 이 하나의 근본적인 칭호를 해석하기 위해 뒷 부분에 등장한다.


개개의 칭호들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의미는 사도신경에 명백히 제시되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한이 다른 칭호들을 “로고스”, “아들”, “보냄을 받은 자”라는 개념에 종속시켰으며 그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요한은 이 책 서두에 로고스 칭호를 주제화함으로써 이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이와 같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이 칭호가 사라지게 된 것이다.137)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을 해석하기 위해 바울은 고린도전서 2장에서 계시된 지혜의 내용을 말하고 있다. 반면 요한은 지혜의 내용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로고스 그 자체가 전체이며 배타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4) 로고스( lovgo")

요한복음에 40회, 요한 삼서에 2회 나타난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에 대하여 “로고스”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요한은 서언을 통하여서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계시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를 부르는 칭호들과 예수의 구원의 의미를 알게 해주는 많은 개념들 즉 생명, 빛, 진리 등을 복음서 안에서 병행시키고 있다.138)


1) 어원적 고찰

“로고스”는 희랍적 용어이다. 희랍어 원문 lovgo"는 lεvgειν(I say)의 동사형에서 나온 명사형이다. 어근은 lεvg (together, to count)에서 나온 집합, 집회의 뜻을 가진다. 이것은 결국 사유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139)


로고스 개념의 종교적 단계는 헬레니즘 시대와 신 플라톤 주의와 스토아주의에 이르러서야 최고조에 도달한다. 그리고 로고스가 사유의 개념으로 사용된 것은 주전 5세기 후반부터이고, 일반적인 말이 되기까지는 희랍정신의 개념형성처럼 많은 시간을 요했다.140)


2) 성서적 배경

신약에서 로고스 개념은 산발적이며 다양하다.141) 희랍적인 사유개념이나 수학적인 개념보다도 주로 “말씀”으로 사용된다. 이 칭호를 통해서 요한복음은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설명한다. 신약에서 로고스가 신언의 기관으로 등장하는 것은 희랍적 로고스와 동일한 지평을 갖는다. 공관복음서들과 달리 그리스도인 예수가 메시지의 중심에 등장하며,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도 가능해 진다. 이러한 모습은 이미 공관복음과 많은 차이가 있으며, 더구나 구약의 유대주의와는 더 많은 차이를 가진다. 요한계열 문서에서 로고스는 예수를 증거하기 위한 도구였고, 사도들의 예수에 관한 해석이었으며, 오늘날 교회의 케리그마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 즉, 구속사업의 주제이고 객체이다. 요한 서신에서 로고스는 선재한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역사적인 예수의 로고스성을 더 강조한다.142)


3) 요한복음의 로고스

요한복음의 저자가 이 칭호를 사용할 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독자들이 이미 “로고스”가 의미하는 바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 가능하다. 그는 이 칭호를 주로 사용하면서 자신의 기독론 해법으로 삼았다. 요한은 서언을 통해서 인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제시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를 부르는 칭호들과 구원을 알게해주는 많은 개념들-생명, 빛, 진리-을 복음서 안에서 병행시키고 있다.143)


요한은 로고스의 역할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주된 특성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요한은 아들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아들을 창조이전의 상태로 소급시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 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jEn ajrch'/ h\\n oJ lovgo", kai; oJ lovgo" h\\n pro;" to;n qeovn, kai; qeo;" h\\n oJ lovgo"., 1:1)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ou|to" h\\n ejn ajrch'/ pro;" to;n qeovn , 1:2)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pavnta di! aujtou' ejgevneto, kai; cwri;" aujtou' ejgevneto oujde; e\{n.o\} gevgonen , 1:3)

서두는 창세기 1장1절과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저자는 이 방법을 이용하여 “선재성”을 부각시킨다. 또 “말씀은 곧 하나님이다.”라는 진술은 말씀의 개인적 특질과 하나님의 개인적 특질 사이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지 않으면서 이 말씀의 신성을 표명한 것이다. 따라서 요한이 자기 독자들에게 “말씀”이 하나님의 속성을 지녔음을 이해시키려고 의도했다는 것을 의심할 합당한 이유가 없다.144) 그는 정관사를 로고스에만 사용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사용하지 않음으로 로고스가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하나님이 로고스 이상이라고 말한다.145)

둘째로, 요한은 로고스와 이 세상의 관계를 지적한다. 요한은 로고스가 창조의 대행자라고 주장한다. 로고스는 창조의 궁극적 원인이 아니라 대행자이며 하나님은 그를 통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저자는 말한다.146) 로고스는 창조물과는 판이하게 구분되는 존재이다.147) 

 

로고스는 육신을 가지게 된다.148) “육신(σαρξ)"이 된 로고스는 인간과 동일한 본성을 가지게 된 것으로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가지게 된다. 다시말해서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선재를 통한 높임과 성육신을 통한 겸비를 아울러 내포한 것이다. 149)


로고스는 “영원성”을 함축하고 있는 칭호라고 래드(G. E. Ladd)라고 말한다. 래드는 “태초에”라는 부분에 주목한다. 이 표현은 특별한 진행 시간의 시초나, 한정된 시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보다 선행하며, 측량할 수 없는 과거를 가지고 있는 영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불가해한 “영원성”이 미래적 지평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4) 희랍철학과 로고스

콘젤만은 로고스가 구약성서의 창조기사와 연관을 가지고 있지만 구약성서로부터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창조설화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그의 말슴은 말씀 자체이고 인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로고스라는 말은 창조기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말씀”은 구약성서 안에서 결코 삼위일체의 하나인 그리스도의 인성(Hypostasis)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을 의미한다. 그러나 전문적인 방법으로 “그 말씀”을 개념화한 것은 아니다.


사실 로고스 개념은 희랍철학에서 유래된 것이다. 헤라클리투스는 그의 작품서문에 다음과 같이 써서 그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인간은 영원한 로고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로고스에 대해 듣기 전이든지 그것을 이미 들었든지간에 영원한 로고스를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로고스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인간은 언제나 미숙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150) 여기에서 등장하는 로고스개념은 인격체도, 창조적 주체도 아니다. 결국 로고스는 스토아의 우주적 인간학의 개념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스토아 철학자들이 인격적 로고스에 대하여 부분적인 도입을 시도하는 경우를 찾아 볼 수는 있다. 여전히 로고스는 아직 하나의 개념으로 남아있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이와 다르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는 “이성의 빛”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151)


5) 로고스의 선재성과 역사성

요한복음 서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로고스는 하나님과 동일한 존재이며, 다른 한편 하나님과 다른 존재라는 역설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역설에 대하여 콘첼만은 타당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계시 자체의 사상으로 주어진 것이다. 즉, 계시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셨는데 직접 나타나시지는 않으시고 계시자를 통해서 나타나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요한의 궁극적 의도가 성취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상이 비신화화 되었다는 불트만의 생각에 대하여 콘첼만은 반대한다.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1:6)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1:7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 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1: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1장 5절이 선재성여부에 대하여 불트만은 복음서기자가 같은 개념을 삽입시키고 있음에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요한은 5절과 예수의 역사적 출현을 관련시키고 있다. 그러나 자료는 로고스를 이런 식으로 이해했다고 보지 않는다. 불트만은 이 자료를 그리스도교 이전의 것으로 생각했으며 유대 영지주의 형식으로 된 계시찬양으로 그 성격을 특징지었다. 아마도 이것은 세례 요한을 계시자로 잘못 생각했던 그룹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불트만은 생각했다. 복음서기자는 이것을 그리스도교적 찬양으로 만들고 있다.152) 그 자료를 보면 5절은 로고스의 선재 법칙으로 말했고 선재하는 동안은 로고스의 거절을 의미한다. 물론 현재형 “나타내다(φαινει)"가 적합하지 않다. 오히려 과거형이 여기에 맞는다. 불트만은 12절까지 로고스의 선재적 법칙이 기록되어 있고, 14절부터 로고스의 역사적 법칙이 기록되어 있다.153) 이와는 다른 입장도 불트만은 전개한다. 즉, “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는 귀절(14절)154)에 대하여 이것의 그리스도교적 순수성을 주장한다. 이것은 유대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영지주의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오직 예수를 로고스로 생각한 사상이다. 결국 5절에서도 역사적 계시는 드러난다는 것이 불트만의 입장이다.


6) 로고스이신 예수

요한에게는 구원론의 내용으로서 어떤 물질적인 인간론이나 우주론은 없다. 그 의미는 간단하다. 즉 예수 자신이 성육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요점은 말씀이 내용적으로 자유스럽게 전달될 수 있기 위해 계시자의 인격과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존재에 대한 유일한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로고스는 지식으로 가르침을 받을 수도 없고, 지식으로 배울 수도 없는 것이다. 그 인격을 소유하는 사람, 즉 그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


요한은 세례요한의 선택을 로고스 찬양에 삽입 시켰다. 여기에서 요한 자신의 스타일이 즉시 드러나 보인다. 그는 세례 요한을 시대적 선구자의 묵시적 형상으로나 엘리야의 재현으로 생각하지 않고 증인의 한 사람으로 설명했다. 요한복음 1장 19절 이하에 보면 주로 부정적인 주석이 있는데 세례요한은 메시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예언자(묵시적 의미의)도 아니고 증거자라고 하였다. 요한은 결국 예수가 바로 메시아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의 본성은 유대교나 초기 그리스도교 묵시문학에 나온 말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정의되어 있다. 요한복음 1장은 예수의 본성과 역사를 적절히 표현해 놓으며, 예수에게 적용되는 칭호를 정중히 사용한다.


로고스로 표현된 예수는 이제 유대주의 안에서만 통용되는 구원자가 아니고, 헬라 철학적 신비주의가 말하는 어떤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또 지나가 버린 시절의 한 영웅도 아니요, 먼 미래에나 볼 관념적 영웅도 아닌 시간과 영원 속에 항존하는 존재이다.155) 

 

(5) 메시아

요한복음에 19회 나타난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 비해서 메시아 사상이 더욱 두드러진다. 요한복음만이 이 칭호를 구체적으로 사용하고있으며(1:41, 4:25), 그리스도로 번역된 것만도 17회나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합성적 칭호도 2회 나타난다.


(1:41)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 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5)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메시아라는 말 뒤에 그리스도라는 설명이 붇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오히려 그리스도라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 “메시아”라는 유대적 칭호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1장에서 뿐만 아니라, 그 뒤에서도 여러 번 이런 여러 가지 메시아적 칭호를 끌어내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상이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메시야신앙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메시아가 반드시 다윗의 자손이어야 한다.”는 유대적 전통에 대하여 그것이 메시야에 관한 진정한 그리스도교적 교리와는 무관하다는 태도를 가진다. 마가복음과 함께 요한복음은 예수의 족보를 소개하지 않는다. 그에게서 육신의 혈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그가 육신의 혈통에 대해서 알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요한복음이 형성될 시기의 이스라엘이 이미 초토화되어 있음이 유대주의가 기독교 안에서 힘을 잃게 하였을 수도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의 초시간적 존재개념이 확대된다. 유대적 갈망이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메시아의 모습이 유대적 범위를 뛰어넘어 기독교 공동체의 대망이 되어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완전히 열려진 메시아 개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유대인들은 신비적 형태의 메시아 도래를 믿고 있다. 또 메시야에 대해서 “영원히 남아있다.”는 유대주의적 개념을 요한은 인정하면서 동시에 메시아의 육체적 고난을 강조한다. 동시에 육체적 고난을 스스로 감수하는 메시아는 유대인에게 “왕” 이었다. 마가복음에서 역사적 정황의 한 부분으로 표현된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팻말은 조롱거리였다. 하지만, 조롱의 칭호로 사용되었고 또 이미 유대인의 갈망이기도 한 “유대인의 왕”이란 칭호는 요한에게서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여전히 유대주의적 개념이 남아있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더 이상 유대주의적이지 않은 구원자의 개념이다.156)


(6) 왕

요한복음에 11회 나타난다.

“왕”으로서의 칭호는 예수 자신에게서는 단 1회밖에 발견되지 않는다. 요한에게서는 발견되는 이 칭호 역시 유대주의적 요소가 강한 것이 그 특징이다. 다른 형태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를 굳이 “왕”이란 단어로 표현한 것은 유대적 역사성에 대한 강한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12:13)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 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2:15)이는 기록된바 시온 딸아 두려워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8:37)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 대.

판넨베르그(W. Pannenberg)는 이 칭호가 직접적 자기계시에 의해 주어진 이름이라고 말한다.157)이 칭호의 형태는 다르지만 그 본질은 하나인데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올 각 생명을 주실 구원자로서의 모습을 가진다. 그 이름을 통해 사람들은 예수가 드러내는 그 본질에 접근할 수 있게 된다.

(19:3) 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찌어다 하며 손바닥으 로 때리더라

(19:12)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9: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라 기록되었더라

(19: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하니


위의 본문은 역사적 정황에 대한 표현으로, 공관복음서와 별 다른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콘젤만은 요한이 유대인의 메시아론과 그리스도론적 칭호를 명백하게 구분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요한이 굳이 유대인의 왕이란 대목을 손질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는 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콘젤만은 요한이 이미 그리스도교적 교리를 안목에 두고 칭호를 관망했다. 실재로 “왕”이란 칭호에 대한 본문은 공관복음서와 중복되는 부분으로 역사적 정황성이 많다. 이런 의미에서 여기에 깊은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시도는 유대교와의 결별로 인정 될 수 있다. 

 

(7) 인자(uio'][[]'" tou ajnqrwvpo")

공관복음서와 비교할 때 요한복음서에서의 인자개념이 가지는 차이점은 “하나님의 아들”과의 비교에 있어서 인자용어 사용 횟수상의 차이, 인자의 범주 분류상의 차이, 내용상의 차이, 인자 예수에 관한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에 대한 차이가 나타난다. 이러한 차이점들은 공관복음서 공동체들과 요한공동체의 상이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158)


인자칭호의 사용에 있어서 공관복음서에서는 인자용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나타난다. 요한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과 “인자”가 비슷한 빈도를 보이지만, 공관복음서에서는 “인자”가 “하나님의 아들”보다 훨씬 많이 나타나고 있다.159)


인자칭호의 범주를 분류함에 있어서 불트만은 공관복음서의 인자를 “도래할 인자, 고난과 부활의 인자, 현재사역으로서의 인자”로 분류했음은 앞에서 언급한바 있다.160) 히긴스(A. J. Higgins)는 인자의 의미를 지상사역, 고난, 영광으로 나눈다.161) 반 더립(D. G. Vanderlip)은 인자의 의미를 지상에서의 현재사역, 예수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예시들, 묵시적 심판자로서의 예시들로 구분하고 있다.162)


요한복음서의 인자칭호가 가지는 범주에 관하여 히긴스는 공관적인 유형의 언어들과는 달리 비공관적인 유형의 언어들로163), 린다스(B. Lindars)는 인자의 들림과 계시의 의미로164), 슈낙켄버그(R. Schnackenburg)는 인자의 강림과 재상승, 높임, 영광으로 나누고 있다.165)


이러한 범주분류의 차이를 통하여 볼 때 요한복음서의 인자에는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고난과 죽음의 측면이 감소되는 대신 선재의 측면이 부각되어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슈바이쳐는 공관복음서가 “인자”를 지상에서 하류층의 삶을 살고 거부당하며 대적자들에게 넘겨지지만, 결국 하나님을 존귀케하며 최후심판의 최고증인이 되는 자로 묘사하고 있으며, 반면에 요한의 여러 인자칭호는 그 전승 층이 특수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두드러지는 모습은 존귀와 영광이 강조된다는 것이다.166) 스몰리(S. Smalley)의 입장도 선재, 지상사역과 수난, 존귀와 영광으로 구분된다점에서 별 차이가 없지만 공관에서는 예수와 인자의 동일시 혹은 차별화가 명확하지 않음에 비해 요한의 양식은 예수와 인자가 동일시되고 있다고 말한다.167) 

 

풀러(R. Fuller)는 요한복음서의 인자칭호를 초대교회의 헬라주의적 이방선교 시기중에 발전된 “3단계”의 기독론적 유형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한다.168) 첫째, 초대교회의 케리그마는 예수를 그가 예언했던 종말론적 인자와 동일시 했으며,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으로 소급 적용되었고,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미래적” 인자 칭호가 창출되었다. 또 지상에서 그의 권위와 수난을 언급하는 공관복음서적인 언어들을 새롭게 하거나 수정했다. 둘째, 헬라적 유대인 선교의 제2기에 공관복음의 인자언어가 다소 수식되어 수용되었고 그 칭호는 예수의 인성을 암시하는 자기 “칭호”가 되었다. 셋째, 헬라적 이방선교의 제3기에 선재, 성육신, 고양의 최종적인 ‘3단계’ 기독론이 창출되었으며 예수의 선재에 관한 인식과 창조에서의 그의 행위에 대한 인식이 출현되었다.


결국 강림(Katabasis)과 올리워짐(Anabasis)의 기독론적 관점에서 요한복음 특유의 인자칭호가 발전되어옴을 발견할 수 있다. 이 기독론적 관점에서 요한복음서 인자의 특성은 선재와 성육신의 개념과 소외를 포함하고 있으며 수난에 관한 인자칭호들이 발견되지 않으며, 재림에 대한 흔적도 없다는 것이다.


인자칭호에 대한 역사적 신빙성의 가치로 볼 때 히긴스는 요한복음서에 사용되고 있는 정승이 예수와 인자문제에 관한 어떤 새로운 빛을 조명해 주지 않는다고 결론짓는다. 요한의 인자언어는 근본적으로 고양되고 영화된 인자이며 주님이기 때문이라고 히긴스는 말한다. 마가, 누가, Q에 따르면 예수는 단지 종말론적인 인자의 역할을 말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며 그들 중 아무것도 예수와 인자가 명시적으로 동일시되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다.169) 하지만 마태복음에서는 마가(14:62)와 누가(17:22)에서 예수가 심판자로서의 인자의 종말론적 행위에 관해 말했던 정확한 전승을 보존한 것 처럼 보이는 반면, 마태는 진정성있는 언어를 제공하지 않는다. 마태의 인자기독론은 부활에 편향되어 있다. 인자의 지상사역과 고난에 관한 언어들은 예수의 언어를 포함하지 않는다.170) 요한의 인자는 원시교회의 삶에 근거한 기독론으로부터 유래되며 초대교회에서 예수가 인자라는 직접적인 등식은 2차적인 해석이었다. 즉 요한의 인자언어들은 마가, 누가, Q와는 달리 인자예수에 관한 신빙성 있는 자료를 갖고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8) 어린 양(ajmno;")

요한복음 1장 29절과 36절에서 "2회“ 등장한다.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1:36)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 칭호는 세례요한이 지나가는 예수를 향해 외친 것이다. 이 칭호가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유월절 양에 대한 암시

요한복음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표현하는 형태로서 유월절에 대한 다른 암시 구절을 갖고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이 암시는 19장 36절에서 찾을 수 있다.171)“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한다.”는 것은 유월절 희생에 대해서 출애굽기 12장46절과 민수기 9장12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172) “어린양”이 유월절 양이라는 이론에 대한 반론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유월절 희생물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가 ‘어린 양’이 아니라 ‘파스카(Pascha)'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반론은 유월절 희생제물을 속죄 제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이라고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월절을 비롯한 모든 희생들은 속죄론 적이라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렛트(C. K. Barrett)는 유대교에서 유월절에 바친 양이 죄를 없애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시하면서 요한의 ‘어린 양’ 사상이 유대교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최후의 만찬과 성만찬을 유월절에 의해 해석했다고 본다. 성만찬은 유월절 식사이며 거기서 죄사함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유월절 양이며, 그리스도는 죄를 짊어지고 그것을 없앤다는 두 가지 명제가 결합된 것으로 본다.173) 

 

2) 이사야 53장

이사야 53장을 배경으로 보는 이 견해는 두 가지로 주장되어 왔다. 하나는 이사야 53장7절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에서 착안한 것으로 이사야 53장이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널리 받아들였다는 전제하에서 ‘어린 양’을 메시아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요한공동체가 당시에 이사야 53장을 메시야와 연관시켜 생각했다는 근거를 가지지 못함으로 인해 신빙성이 약하다. 또 다른 하나는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에 대한 히브리어를 아람어로 번역함에 있어서 오역함으로 요한복음에는 “어린 양”으로 언급되었다는 입장이다. 발은 ajmno;"가 아람어 אꖷꗡꖨ(talya)에서 취해진 것으로 이는 “어린양” 뿐 아니라 ‘종“이나 ’소년‘을 의미하는 헬라어 "παι""에 해당되는 것으로 요한복음의 헬라어 본문이 오역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예레미야스는 이 견해를 채택하고 있다.174) 하지만 요한복음의 구절이 아람어 자료로부터 직접 번역되었다는 증거가 없으며, 히브리어דꔫ꘡(ebed, 종)에 해당되는 일반적인 아람어는 אꖷꗡꖨ가 아니라 אדꔫ꘡(ebeda)이다.175) 또한 그리스도를 어린 양으로 말하는 것은 신약성서에서 익숙한 것으로 반론을 당하고 있다. 176)하지만 “세상죄를 지고가는”의 개념에서는 이사야 53장12절을 염두에 두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3) 양떼를 인도하는 자

묵시적 상징주의에 기초한 이 이론은 계시록에 의해서 지지를 받는다. 다드는 이 이론의 문제점을 잘 인식한다. 그 문제점은 요한계시록에 사용된 어린 양의 용어가 ajmno;"가 아니라 ajρνιoν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다드는ajρνιoν과 마찬가지로 ajmno;"도 양 떼의 지도자에 대해서 사용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부가절인 “세상 죄를 지고가는”에 의해서도 설명된다고 말한다. “죄를 지고가는 ”(aιρειν ἁμαρτιαν)은 특별한 희생제물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는 “죄를 지고 가는”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되었으며, 그것은 “죄를 없애는”을 의미한다. 이렇게 죄를 없애는 것은 속죄적 죽음과는 관계가 먼 유대 메시아의 기능이기에 요한복음에서 언급된 어린 양은 메시아를 나타낸다고 다드는 말한다.177) 하지만 증거로 제시된 구절들에 정확한 제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유월절 양에 대한 다른 구절들을 과소평가한다는 반론을 낳고 있다.178)


8. 히브리서


(1) 삶의 자리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특별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는 책이 바로 이 히브리서이다. 본 서한에 “히브리”라는 말이 한 마디도 없으면서 이 책의 표제는 언젠가부터 “히브리인에게 보내는 서신”이 되었다. 본래 동방교회에서는 디모데(13:23)와 연관있는 바울의 저작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리겐으로부터 부정된 바울 저작설은 바나바, 혹은 아볼로, 혹은 스데반 순교후 세계전도에 관심을 가진 알렉산드리아태생인 어떤 유대인 설로까지 확대되었다. 결국 이 책은 세계 선교의 넓은 시야에 드는 그리스도교인이 이 서신의 수신자라는 것을 확인할 뿐이며 형식의 측면에서도 그 형태를 규정하기 대단히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히브리서는 구약성서에 능통하며 알렉산드리아 사상에 깊이 젖은 우수한 목회 설교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설교의 체제는 대체로 두 가지 성격을 띠고 있다. 하나는 이론적이며, 또 하나는 감정에 호소하여 격려와 경고와 위로의 말로 수신자의 마음을 설득하고자 한 의도가 보인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부분과 신앙생활의 실제적인 교훈과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대체로 이론부를 1-10장까지(혹은 9장 까지)로 하고 나머지 부분은 11-13장까지는 실제 교훈부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론부와 실천적 권고부는 하나의 주제 “그리스도론”을 해설한 것이다. 처음에는 주제의 도입으로 그리스도의 위격(status)을 논하고(1:1-4:13),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사역(works)을(4:14-10:18), 나머지 부분은 주제의 결론으로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 대한 권고가 있다. 결국 히브리서 전체에 기독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2) 위격적 칭호- 아들(24회)

히브리서의 서언(1:1-3)은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의 방법을 말하였다. 과거에 수많은 예언자들이 단편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불완전한 상태로 각 시대에 전달하였다. 그러나 이제 이 “마지막 세대”, 곧 세계역사의 마지막 단계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국면에서 영원 절대자로서의 완전한 계시자가 요구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179)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 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키이(H. C. Kee)는 이 아들의 성격을 두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하나는 종말론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현 역사안에 돌입했고 또 다른 하나는 철학적으로 아들이 하나님의 성품을 거침없이 완전히 계시하셨다고 하였다.180)

본서의 서언은 그리스도론의 요약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아들의 성격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아들은 창조이전에 택해 세우신 만물의 후예가 되었다.(1:2) 이 점에 있어서는 요한복음의 서문과 같은 선재설을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② 다음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가 지음을 받았으며 그의 능력의 말슴으로 만물이 유지 될 뿐 아니라, 인류의 죄를 정결케 하시기 위하여 육신으로 오셨다(1:3).

③ 아들은 현재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존귀함 중에 계시다. 그런데 이 존귀성에서는 부활이나 승천의 역사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저자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관심을 집중한다. 때문에 부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저자는 기독론을 설명하고자 천사, 아들과 비교한다. 그것은 선재성과 성육신의 위상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2) 사역적 칭호: 대제사장(11회)

사역의 문제로 대제사장직에 대해서 일반 대제사장과 특수 대제사장 멜기세덱과 비교를 하고 있다. 실제로 유대교에서 메시아가 대제사장 계열에서 나타나리라는 사상은 없었다. 다만 12족장의 계약과 최근 발견된 ‘사해사본’에 약간의 암시가 있을 뿐이다. 181)

(2: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 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 하려 하심이라.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 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 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 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5: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 니라.

(7: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 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7: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 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8: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 이 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9: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 니 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 암아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에 대한 비교 논법은 여기에서 비교적 우월성, 상대적 차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로 무한한 질적 차이를 확증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만이 가능한 영원한 구속사업의 절대성을 확증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에 있어서 소극적인 논법이 대제사장에게 있어서 적극적인 논법으로 변했다고 할 수 있다.


본서의 대 서언에서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1:3)라는 말에서 벌써 제사장적 사역을 발견할 수 있는데 4장 14절 이후에 본격화 된다. 저자가 그리스도를 대제사장으로 비한 것은 구약의 제사제도의 효과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지역에 있었기 때문으로 추론된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의 이원론적 세계관인 ‘하늘의 실재’ 와 ‘지상의 그림자’ 사상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그리스도의 희생에 대해서 설명한 것이다.182) 그런데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사실을 내세우고 구약의 희생제사제도를 무조건 폐지시키자는 것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옛 계약을 지양하고 새 것으로 완성시키기 위하여 그리스도 자신의 사업으로 만든 것이다.

(7:23-25;10:19-25)


그리스도는 어떤 제사장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히브리서가 가지는 독특한 입장을 소개하고자 한다.

①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임명받았다.

(5: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 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 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저자는 이곳에 시편 2장7절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겸비성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겸비성을 통해서 인류전체의 대제사장 직임을 맡기셨다.

② 그의 임무는 영원하다.

(6: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 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시편 110편을 인용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멜기세덱과 같은 왕의 직임을 맡았으며 동시에 제사장의 사업을 영원히 현재적으로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저자가 멜기세덱을 끌어들인 것에 대하여 특수한 동형관계를 설명하려는 목적으로 끌어왔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멜기세덱은 제사장과 왕이 되시는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설명하고 있다. 멜기세덱의 한 토목의 에피소드가 창세기 14장18-20절에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성격에 대한 기록이 시편 110편 4절에 있다. 이 두 곳 기사를 종합하여 저자는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가지는 영원성을 논증한다. 멜기세덱은 율법 이전에 아무런 제약 없이 세워진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존재로서 영원성을 느끼게 한다. 멜기세덱은 또한 족보를 모른다는 점보다는 영원한 하늘의 존재라는 점에서 그리스도와 일치한다. 그래서 저자는 ‘영원하다’(αιων)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고 있으며 본서의 중요한 사상은 이 말에 근거하고 있다.


(4) 대제사장직의 의미


1)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은 새 계약에 의한 것이다.

그리스도는 옛 계약에 의한 아론의 직능과 하나님의 계약의 중보자였던 모세의 역할을 맡은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8:6)이시다. 특히 저자의 착안점은 새 계약, 더 좋은 계약의 문제이다. 새 계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계약개념을 토대로 하여 인간을 구원할 하나님의 자유의지가 드러내는 것으로서의 구속사를 설명하는데 사용되었다. 8장8절 이하에 인용된 예레미야의 예언(렘 31:31-34)에 대해서 맨슨(J. W. Manson)은 ‘새 출애굽’을 의미한다고 하고 이에 대한 옛 계약은 애굽에서의 노예 해방시대를 회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새 출애굽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러므로 새 계약으로 하나님과 각 개인이 영적으로 직접 교제하여 완전히 속죄의 은사를 받는 정신적인 해방을 받아야 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것은 곧 속죄의 필연성으로 귀결된다.


2) 그리스도의 제사는 단 한번의 사건이다.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새 계약의 보증으로 아들의 일회적 희생이 요구되었다. 그가 한 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전 인류의 죄를 완전히 대속하는 구속사업을 완성하셨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9:26)고 하였다. 그런데 이 일회적인 구속사업은 누구나 다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가능하며 그에게만 이 유일회성의 의의가 있다. 이 세상 역사 안에 무엇이나 단 한 번의 사건이 다 큰 의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사건만이 유일회적 진정한 의의를 가진다. 결국 대속제물로서의 그리스도가 죽는 일은 단 한번으로 족하다.


3) 영원한 현재성인 대제사장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구속의 가능성이 주어진 새 시대가 되었다. 본서의 대선언을 통해 그는 “죄를 결정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하였다(1:3). 그리스도의 존귀성은 현재 그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현재도 대제사장직을 계속하신다.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 에 나타나시고

이처럼 그리스도의 죽음과 현재의 존귀성은 구속적인 의미에서만 의의를 가진다. 그리고 존귀성에 의하여 대제사장직은 영원한 현재로 언제나 변함없이 계속되는 것이다. 183)


9. 요한계시록


(1) 삶의 자리

요한계시록은 주후 81-96년 경 도미시안 황제 박해시절에 기록된 것이라는 견해184)와 박해상황이후(96년을 근처로)에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있다.185) 도미시안이 자기 신복들에게 그 스스로를 “신”으로 부르게 하고 그의 형상을 경배하도록 요구하던 그 시절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거나 유배를 당하고, 남은 그리스도인들도 엄청난 위협 속에 시달려야 했다. 저자는 자신의 가르침을 신비로운 형상들과 독특한 은유로써 표현하여 비 그리스도인들이 그 내용을 알 수 없게 한 후에, 박해 받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미래적 약속을 전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은 당대에 통용되던 “훌륭한 문법”을 무시하고 헬라어 구문법을 심하게 어긴 실례의 수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런 점은 저자가 헬라어보다는 셈족어에 더 익숙해 있었고, 따라서 비헬라적인 표현으로 치달았을 것이라고 이해되어 왔다.186) 

 

(2)그리스도론의 역사적 문제

계시록의 그리스도론은 신약성서 중에서 가장 광범위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절대적 위력을 소유한 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존엄성을 보장하는 한편,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적 묵시 문학에서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는 원시적인 메시아관에 근거한 소박함도 있다. 계시록에서의 그리스도론은 예수의 인성에 비중을 두었던 공관복음서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곳에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언급 이전에 관심조차도 없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혈통의 언급(5:5) 역시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187)


(3) 어린 양(ajrnion)


1) 전승사적 연구

요한계시록의 어린 양은 묵시적인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칭호이다. 그러나 어린 양은 구약의 제사문헌에 나오는 희생제사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어린 양이 가지는 희생의 의미는 ‘유월절’과 관계 있다. 어린양의 피는 죽음의 천사에 의한 공포로부터 유대민족을 구해낸다(출 12:11-13). 또한 가지 어린양은 제사에서 드려지는 희생제물이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제사는 대개 흠 없는 일년된 수양 한 마리 씩을 드리게 되어있다 (출 29:38이하, 민 28:31). 그런데 안식일에는 여러 마리 양과 송아지를 잡아 드린다 (민 28:9이하). 그 밖에는 오순절과 같은 대절기와 대속죄일에 희생 제물로 어린양과 송아지를 드리게 되어있다(민 29:1이하). 세 번째, 예언서에서 어린 양은 “인간”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된다.188) “어린 양”은 신구약 중간기 문헌에서는 종종 강력한 정복자로 언급된다.189) 제 1에녹서 90장에서는 마카비가족들이 “뿔 달린 양들”로 묘사된다. 또한 요셉의 예언서 19장8절이하에서는 유대계통의 메시야는 사자로서 표현되며, 아론계통의 메시야는 어린 양으로 표현된다. 중간기의 묵시문학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짐승의 상징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으며(제1에녹서 85-90), 메시야에 대하여 뿔 달린 양의 형상을 사용하여 전능한 왕이나 전사 그리고 심판자로 묘사하고 있다.190)


2) 어린 양 기독론

어린양은 요한계시록에서 29회에 걸쳐 스물일곱 절에서 나타난다. 요한복음에서 ‘어린 양“은 헬라어로 ajmno;"이지만 계시록에서는 ajrnion이 사용된다. 이러한 차이점의 해결을 위해 바레트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요한복음 1:29은 유월절과 성만찬의 관점에서 ”ὁ amvno" tou qeou“의 종말론적 측면을 정당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월절 식사가 오실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이 칭호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배적인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①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어린 양(5:6,12; 7:14; 12:11; 13: 8)

(5: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 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 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어린 양은 메시아로서, 희생제물로서 죽임을 당하였으며 그 대속적인 피로 말미암아 성도들의 옷을 희게 씻는다.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 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요한 계시록은 묵시적 메시아를 어린 양으로 칭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어느 곳에서도 직접적으로 메시아를 어린 양으로 부르지 않았다. 구약의 어린 양은 유월절의 희생이나 제사에서 드려지는 제물을 의미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어떤 인물, 즉 고난받는 하나님의 종(렘11: 19, 사 53:7)을 비유하였지만 메시아를 직접적으로 가리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중간기의 묵시문학에서는 짐승이 인간을 묘사하고 있으며 특히 어린양은 전능한 왕이나 전사, 심판자로 묘사되고 있음은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어린 양은 묵시문학의 표현 방식을 사용하여서 구약성서의 메시야와 묵시적인 메시아 사상을 동시에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어린 양의 그리스도는 종말의 때에 그의 특수한 사역을 감당한다. 그는 종말론적 심판을 진행하며(5:9;6:1이하), 이 심판은 바로 그의 진노이다.


(6:16)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 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리고 짐승과 싸움을 치를 전사자이다. 그는 종말론적 싸움에서 승리할 만주의 주요 만 왕의 왕이며(17:14; 19:16), 우주적 통치자인 것이다.191)

② ‘사자’로서의 어린양

(5:5)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어린 양의 승리에 대한 사상은 중간기의 사자표상에서 나타난다. 192)요한계시록은 여린 양을 ‘유대지파의 사자’라고 표현하는데, 구약에서 유래하여 (창 49:8-12), 기독교 이전 시대에 메시아에게 적용되어 해석되었다. 요셉의 예언 19:8이하에서 유대 계통의 메시아는 사자로, 아론 계통의 메시아는 어린 양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서로 다른 두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양떼를 이끌고 사악한 자들을 강력한 힘으로 정복해서 승리자가 되어 의의시대를 만든다는 상상을 다양한 표상으로 나타낸 것이다. 요한 계시록의 주요주제가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궁극적 승리라는 점에서 어린 양 그리스도에 대한 사자표상은 적절하게 보인다. 그렇지만 사자라는 명칭은 요한 계시록 가운데 이곳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193)


사자의 표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어린 양의 표상과 연결된 온유함으로 대체된다.

(5:6)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어린 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


어린 양은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다(5:6).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어린 양 그리스도는 희생적 죽음을 통해서 승리자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십자가에서의 그의 승리는 인봉한 책을 떼기에 합당한 자격을 획득하는 것으로 귀결된다(5:5-6). 고난을 통한 승리는 본서를 흐르는 중요한 사상이다. 194)


3) 목자로서의 어린 양

어린 양은 목자와 동일시 되기도 한다.

(7:17)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 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 이러라.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묘사된다(시 23:1). “그는 목자와 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 40:11)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그 목자는 부족함이 없이 양을 보살피며 양식을 먹이신다. 또한 하나님은 미래에 양무리를 칠 목자에 대해서 에스겔을 통하여 말씀하심으로 (겔 34:23)그리스도에 대해 목자로 예언하신다. 그는 자기 백성을 생명수의 샘으로 인도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존재이다.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성도들의 필요를 충족하여 준다. 생명수 샘으로 인도된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을 갈망하며 주께서는 이것을 채우신다. 그리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서 성도들은 모든 죄악으로부터 해방된다. 195)요한계시록 7장의 목자를 언급하는 구절이 나팔심판의 전주곡이기 때문에 목자 표상은 그리스도인을 격려하기 위해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요한계시록은 십자가 없는 기독론을 알지 못하며, 어린 양은 심판을 포함한 모든 경우에 격려와 구원의 사역을 감당한다.196)


4) 심판자 “어린 양”

보좌에 앉으신 이(5:1) 즉 하나님의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인 된 책을 열기에 합당한 사람은 오직 ‘어린양’뿐이었다(5:5). 뿐만 아니라 그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뗄 때마다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일련의 심판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6:1)내가 보매 어린 양이 일곱 인 중에 하나를 떼시는 그 때에 내가 들으 니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우뢰소리 같이 말하되 오라 하기로

일련의 심판들이 너무 극심하여서 그 심판을 당하는 사람들이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고 절규한다(6:6). 비록 어린 양의 모습이 죽임을 당하였고, 겸손하며 나약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어린 양은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와 위엄을 가지고 불과 유황으로 심판하신다(14:10).


5) 만 왕의 왕, 만주의 주(17:14; 19:16)

(17: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 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 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이 칭호 역시 중간기의 묵시문학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197) 이런 묵시적 배경의 어린 양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는 짐승과 전투를 한다. 그 전투에서 어린 양은 물론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이길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린 양이 ‘만주의 주시오 만 왕의 왕’이기 때문이다.(17:14) 이러한 어린 양에 대한 모습은 19장16절에서도 다시 언급되었는데 그 어린 양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백마를 탄 전사로 나타난다. 그는 기수의 의복을 입었는데 그 옷에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고 새겨져 있다. 결국 이 이름은 적들과의 전투에서 종말론적 승리는 물론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를 강조한다.198) 따라서 다니엘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칭호를 전사이신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여 음녀와 적들에 대한 전투 속에서 이 칭호를 선포함으로 어린양이신 그리스도의 절대적 신성과 메시아 왕권을 드러내고 있다.


(4) 말씀(lὀgo")

(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 하더라.

이 구절은 재림환상(19:11-16)에 대한 내용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는 백마 탄 자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네 이름이 소개된다. 그것은 “충실과 진실”, “ 자기 밖에 아는 이가 없는 이름”, “하나님의 말씀”, “ 만 왕의 왕, 만주의 주”이다. 

 

λὀγος가 위의 네 이름과 직접 결부된다는 증거는 약하다. 그렇게 보면 결국 요한계시록은 19장13절에 한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 부분은 백마탄자를 직접 그리스도와 일치시키고 있지 않다. 다만 그의 모습과 명칭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 본문에 나오는 피묻은 옷은 전쟁에서 승리를 상징한다.199)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λὀγος)이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기 위해 오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지칭하며 “λὀγος"를 칭호로 사용하고 있다(19:11-16). 백마 탄자는 충신과 진실이며(3:14), 그의 눈이 불꽃같고(1:14; 2:18), 머리에 면류관을 썼으며 (14:14),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며 (1:16; 2:12; 14:14), 그 이름은 만유의 주이다(17:14). 말씀은 심판을 행하는 묵시적 그리스도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요한복음과 달리 말씀자체를 심판행위, 심판자로 보고 있는 것이 다르다.


(5) 인자같은 이(o\{moion uiJo;n ajnqrwvpou-1:13; 14:14)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 를 띠고

인자와 메시아 사상은 그 기원이 서로 다르며 서로 다른 희망을 대표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일부 묵시문학가들의 사상에서 서로 섞이게 되었고, 그 결과 영원하고 초월적임과 동시에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메시야, 그리고 종말론에서는 역사적이면서도 초역사적이고 절대적인 성격을 지닌 메시아 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계시록에서 인자 칭호는 두 번 등장하다. 그 표현도 “인자 같은 이”라는 칭호로 이루어져 있다. 묵시문학의 전형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인자”는 계시록에서 관사 없이 사용된다. 문법적으로 관사가 없으면 단순히 인간성의 문제가 된다. 즉, “인자”는 묵시자가 본 환상 속의 특정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 같은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묵시자는 사람 같은 어떤 인격적인 존재를 본 것이 확실하다. 계시록의 저자는 인자 같은 이를 보고자기가 본 인자 같은 이의 모습을 기록한다(1:13-16). 이어서 인자 같은 이의 자기 자신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1:17-18). 그리고 곡식 추수에 대한 환상 가운데 인자 같은 이를 본다(14:14-16).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인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초월성과 내재성에서 찾을 수 있다.200) 모든 묵시문학에서의 그리스도는 초월적인 메시아로 등장하며 요한 계시록에서도 마찬가지로 초월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의 모습은 신적인 능력과 권위를 나타낸다. 그리고 종말의 때에 심판을 수행할 천상적 임무를 띤 초월적인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교회와 역사 안에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이다. 계1:13에 인자 같은 이가 촛대 사이에 있다. 요한이 환상을 볼 때에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를 의미한다.(1:20)그러나 오늘날 촛대는 현재 지상에 산재해 있는 모든 교회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된다.201)


(6) 알파와 오메가(to; a[lfa kai; to; w\\-1:8; 21:6; 22:13)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 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 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알파와 오메가는 하나님의 칭호로 요한계시록 1장8절과 21장6절에서 하나님에게 적용되었다. 이 칭호는 그와 유사한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표현으로 확대되어 해석된다. 그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하며(1:17; 2:8) “시작과 끝”이라는 해석적인 구절을 덧 붙인다(22:13). 알파와 오메가는 히브리어 א 과 ת를 의미하며, 알파벳의 처음과 나중 뿐 아니라 모든 글자를 의미한다.


이 명칭은 이사야 44장6절과 48장12절에서 인용되었다. 이사야에서 이 칭호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강조한다.

(1:17)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 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18)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주장과 약속이 보인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정복한 주 이심을 주장하며, 자기의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하여 살아계신 분임을 약속하고 있다202). 이 칭호는 믿음으로 인하여 당장 핍박을 받게 될 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해준다.

(7) 다윗의 뿌리(hJ rivza Dauivd-5:5; 22:16)

(5:5)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

(22: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 이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은 이 칭호를 “유대지파의 사자”와 연결시키고 있다. 야곱이 죽기 전에 유다를 향하여 “사자의 새끼”(창 49:9)라고 불렀다. 사자는 제2에스드라서 12장31절에서 “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아이시다.”라고 기록된다. 이 경우 역시 메시아에 대한 표상으로 정복의 측면이 강조되어 있으므로 다윗의 계보를 따른 왕권을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203)


다윗의 뿌리는 “이기었으므로” 일곱인을 떼실 자격을 가진다(5:5). ‘이기었으니’는 단순과거형으로 “한번해서 영원히 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시제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단회적인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가리키며, 십자가 사건을 인봉한 책을 떼기에 합당한 자격과 연결시키는 것은 앞으로 내릴 심판이 성도에겐 구속의 의미를 지닌 것임을 암시한다.204) 다윗의 뿌리이신 그리스도의 메시아 됨은 단순한 다윗 계열일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의 승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요한계시록의 특징이다.


III. 결론

1세기,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하며 사는 사람들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신앙의 시간을 근심과 희망, 그리고 의혹과 기다림으로 지속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같은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 있었지만 그 구체적 내용은 크고 작은 차이가 있다. 처음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통해서 육체적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는 다른 모습에서 하나님이 특별한 모습을 부여해 주셨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생각은 구약의 “인자”를 생각하게 되었고, 고난받는 이의 모습을 상정하게 되었다. 십자가 사건이후 그들은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예수를 자신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어떤 존재가 하나님에게 특별한 사역을 하명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교의 소 종파로 존재하기를 원했던 이들은 결국 율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인해 유대교를 떠나야만 하게 되었다. 그래도, 할례를 고수하던 소수의 사람들이 예루살렘 변방에 남아있었고, 나머지는 시리아와 갈릴리 접경지역으로, 또 안디옥으로, 이집트로, 이디오피아로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다. 이제 각 사람들의 삶의 자리는 모두 다르게 되었다. 이들 모두가 예수 혹은 또 다른 인자에 대해 빠른 재림을 원하고 또 믿고 있었지만, 종말이 지연됨에 따라 단기전 위주의 신앙생활에 변화를 주어야만 했다. 각 지역에서 각각의 소 모임들은 이제 지연된 종말에 맞추어 그 공동체를 지탱해야만 했다. 결국 공동체들 나름대로의 규칙과 신앙관점이 자리잡히게 되고, 그러한 모습은 예수에 대한 나름대로의 독특한 신앙고백을 창출해 내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시대적, 사회적 정황으로 볼 때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이 무렵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바울은 안디옥을 거점으로 그리이스-로마문화권에 예수를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이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사람으로, 또 유대계 혈통이었던 그의 사역은 이질적인 예수를 만인의 구주로 증거되게 하였다.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각 교회는 바울의 가르침을 토대로 유대인 예수가 아닌 그들이 “신”으로 고백할 만한 범 세계적 구원자를 만났던 것이다. 미약한 시작이었지만 그 열매는 참으로 귀중한 것이었다.


드디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다리던 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그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었다. 하나님이 세워지신 “시온의 성읍”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지상통치의 영광이라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 성읍이 이제 이방인의 파괴로 완전히 사라지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임박한 종말에 대한 기대로 재림주를 기다리던 이스라엘거주 기독교인들은 이 멸망의 상황을 심판의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적어도 이스라엘이 없어지기 전에 이스라엘의 왕은 강림하셔서 택한 백성을 구하시고, 세계를 다스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멸망 이후에는 어떤 강림의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속히 오리라.”하시던 주는 강림하지 않고 예수를 따르던 교회의 지도자들은 대부분 노쇠하였고, 이미 많은 사람들은 순교한 이후였다. 주의 재림을 갈망하며 좀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했던 이들은 이런 낙망스런 상황에도 희망의 빛을 찾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예수가 이스라엘에 국한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이런 신앙고백은 조상 적부터 전해져 오던 것이었다(빌2:6-11). 혼란스러워하던 초대교회는 역사적 예수의 선재를 통해 이스라엘의 멸망에 지장 받지 않는, 인간의 역사에 구애받지 않는 그리스도 예수를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초기의 교회들이 다 이러한 생각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의 완전한 멸망이라는 혹독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적 예수의 “역사초월”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이제 지중해를 중심으로 5대교구로까지 자리하게 된 기독교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의 신앙고백 대상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를 지탱하기 위한 지평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예수가 친히 세우지도 않았던 교회는 직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그 머리에 세우기에 이른다. 이제 예수는 교회라는 창구를 통해서만 사람들에게 파급되게 되었다. 예수에 대한 모든 관심은 교회를 통하여, 교회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많은 문헌들이 또 교회를 통하여 보존되어왔다.


초창기의 단순하고, 양자론 적인 기독론(인자,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등)은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 증가함에 따라 또 그 주도권이 헬라문화권으로 넘어감에 따라 (그리스도, 주, 구주 등), 재림이 지연됨에 따라 선재적 기독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더구나 영지주의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기독론과 기독교자체는 영과 육의 이원론의 깊은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다. 당연히 이 땅에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된 예수에 대하여도 “영”으로만 이해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게 되었다(말씀, 지혜 등). 특이한 사실은 이런 기독론의 변화가 하나의 역사적 지평 위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병존의 형태로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즉, 각 교회공동체들이 나름대로의 삶의 자리에서 예수를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함에 있어서 시간의 변화에 따라, 시대적 요구에 따라 많은 다양성을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각 각의 칭호들은 하나도 소멸되지 않고, 공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하나의 공통분모로 인해 가능해 지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 수많은 환경적 요인에 좌우되면서도 여전히 변함없이 지켜야 했던 한가지는 역사 속에서 존재하였던 (그들 스스로 체험하였든지, 아니든지 간에) 한 존재를 필연적 관계로 받아들이고, 그 존재를 각 개인과 공동체의 전 시간적 주체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모두 각기 다른 신앙고백의 표상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표상들은 모두 예수에 대한 표상이었다. 그 예수는 역사 속의 초인 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존재였다. 초기의 기독교는 바로 이 한가지를 통해서 생존해나가고자 했기 때문에 수많은 아픔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게 “예수”를 증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원시 기독교 공동체는 예수에 대한 서로 다른 고백의 형태들로 인해 많은 상처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런 선대들의 시행착오는 지금도 끊이지 않고 우리에게 유전되어 왔다. 우리는 이런 악한 인자를 앞으로도 어김없이 대물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 중에도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여전히 “한 통로”를 열어주고 계시고, “그 통로”를 통하여 -비록 수많은 사람들이 그 통로의 한 부분을 전부라고 주장하지만- 사람들을 만나며, 붙들어 주신다.


역사적 예수가 가지는 많은 다양한 칭호들은 하나님의 어지러운 난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산란한 파편들이다. 하지만, 이런 파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또 다른 파편을 만들어 내고자 열중할 것이다. 언제나 기억되어야 할 것은 그 파편은 본질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은 우리의 이런 정리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로 결속시킨다. 이 작업은 하나님 나라의 이룸에까지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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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ans Conzelmann, 『신약성서신학』, 김철손.박창환.안병무 역, 한국 성서 신학 연구소, p155, 1994

2) J.Jeremias, 『신약성서신학』, 정충하 역, 새순출판사, p377

3) Ibid,, p155

4) J.Jeremiahs, 『신약성서신학』, p379; 팔복가운데 마지막 복에 대하여 누가복음판에는 e\{neka tou' uiJou' tou'ajnqrwvpou (인자를 위하여)라고 기록되었고, 마태복음판에는 e\{neken ejmou' (나를 위하여)라고 기록되어있다.

5) Ibid, p.380

6) Ibid, p.380

7) 마가복음 13:26 병행; 14:62 병행; 마태복음 24;27, 37하반절= 39하반절 병 행.눅17:24, 26; 마태복음 10: 23, 25: 31; 누가복음 17:22,30,18:8,21: 36;요한 복음 1:51. 요한복음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 어록에 관한 말씀이다.

8) 요아킴예레미아스, op.cit.,,p382 - 본문에 등장하는 두 표상 ‘깃발’과 ‘나팔’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종말론적 표상이다.

9) 같은책,p382

10) Ibid, p.384- 물론 이에 대하여 불트만은 반대입장을 가진다. 이것은 뒤에 다시 다루겠다.

11) Ibid, p384-요한복음 12: 34은 분명한 예외적 경우로 보아야 한다.

12) Ibid, p 385

13) 윤철호, 『예수 그리스도』.p.59

14) R. Bultmann, 신약성서신학, p26

15) 하지만 불트만은 이런 “인자”의 인칭에 대하여 3인칭이기 때문에 반드시 자기 자신을 지칭한 호칭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한다.-Rudolf Bultmann, 허 혁, 신약성서신학,p26

16) M. Mcnamara, op.cit., p 49

17) 윤철호, Ibid., p60

18) Oscar Cullmann, 『신약의 기독론』, 김근수 옮김, 나단출판사, 218쪽, 1995

19) .(누가복음6장22절은 마태복음 5장11절과 , 누가복음 12장 8절은 마태복음10장 32절과 비교해 볼 때 오히려 이차적이다.- Hans Conzelmann, 신약성서신학, p156)

20) (Conzelmann은 이에 대하여 예고라기 보다 교리적 주장에 가깝다고 말한다.-신약성서신학 p157)

21) 마가복음2장 10절: i\{na de; eijdh'te o\{ti ejxousivan e[cei oJ uiJo;" tou' ajnqrwvpou ajfievnai aJmartiva" ejpi; th'" gh'"- levgei tw'/ paralutikw.)

22) Conzelmann, op.cit., p157)

23) Rudolf Bultmann, 『신약성서신학』,p26

24) Conzelmann, op.cit., p158

25) Ibid, p158

26) Rudolf Bultmann, op. cit.,p28

27) Ibid, p29

28) 윤철호, op.cit.,p 61

29) Rudolf Bultmann, 신약성서신학,p158

30) H. Conzelmann, 신약성서신학, p152

31) H.Conzelmann, op.cit. p 152

32) J.Jeremias, 『신약성서신학』, p364

33) Ibid, p365

34) Ibid, p365

34) Ibid, p365

문서비평적 관점에서 볼 때 이 반제들(마태복음 5: 31이하, 38이하, 43이하)은 반제적 형태를 취하지 않고 전승된 것이다. 이로부터 , 위의 세 가지 것들에 붙여진 반제양식은 다른 것들을 모방한 것이고, 따라서, 첫 번째, 두 번째, 네 번째 반제들만이 원래적인 것이라고 도출된다. (불트만 공관복음 전승사,p134, ):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

35) J. Jeremias, 『신약성서신학』,p366-367 참고

36) Ibid, p367 (더 자세한 사항은 P68)

37) Anchor Bible Dictionary, vol 5, p567

38) Ibid, p 567 Q자료에 대한 가설은 확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성에 근거해서 재구성하였다.

39) Ibid, p569

40) 성종현, 공관복음서 대조연구,p381

41) 성종현, 공관복음서 대조연구.p454

42) G.E.Ladd,『신약신학』, p169-170

43) H.Conzelmann, op.cit., p150

44) Conzelmann, op.cit., p 159

45) 성종현, op.cit. p445

46) H.Conzelmann, 『신약성서신학』, p45 - 예를 들어 교회의 정상에 위치한 “열 두 사도”의 지위에 관한 상은 비역적이다. 특수위치를 가진 “열 두 사도”란 없었다. 단지 사도의 수가 “열 둘”이라는 의미이상의 무엇을 알 수 없다. 여기에서 그들의 지위는 명확하지 않다. 결국 누가가 증언하는 사도의 상은 보다 후기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46) H.Conzelmann, 『신약성서신학』, p45 - 예를 들어 교회의 정상에 위치한 “열 두 사도”의 지위에 관한 상은 비역적이다. 특수위치를 가진 “열 두 사도”란 없었다. 단지 사도의 수가 “열 둘”이라는 의미이상의 무엇을 알 수 없다. 여기에서 그들의 지위는 명확하지 않다. 결국 누가가 증언하는 사도의 상은 보다 후기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47) H.Conzelmann, 신약성서신학, p 92: 메시아는 묵시문헌에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에티오피아어 에녹서 1-36, 91-104 ; 슬라브어 에녹서 ; 모세의 승천기 ; 희년서) 묵시문학에서 메시아 개념이 침투되어 있는 부분은 (에녹서, 제4에스라서, 바룩서)이차적 발전단계에 속한다. 왜냐하면 구원자는 이 땅에서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실재로 유대교에서는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가 직접적으로 결합되지 않는다. 거기서는 메시아가 하나님 나라를 이끌어 온다는 사상은없다.

48) H.Conzelmann, op.cit., p102- 오늘날 까지 이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가 격렬히 논의되고 있다.

48) H.Conzelmann, op.cit., p102- 오늘날 까지 이에 대하여 다음 두 가지가 격렬히 논의되고 있다.

1. 이 칭호는 어디서 유래했는가? 2. 언제 그리고 어디서 이 칭호가 그리스도교에로 들어왔는가, 이미 원시교단에서 인가 아니면 헬레니즘 교회에서인가?

49) H. Conzelmann, op.cit., P102

50) Ibid., p 103

51) 콘젤만, 신약성서신학, p103: 제시된 반증은 아래와 같다.

51) 콘젤만, 신약성서신학, p103: 제시된 반증은 아래와 같다.

1. 바울에게서 주 칭호는 예수에게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다시말해서 “주”라는 칭호는 하나님과 예수를 구별하는 단서가 된다.(고전 8 : 6)

1. 바울에게서 주 칭호는 예수에게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다시말해서 “주”라는 칭호는 하나님과 예수를 구별하는 단서가 된다.(고전 8 : 6)

2. 이 칭호가 당초에 환호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이것으로만 해결되지는 못한다.

2. 이 칭호가 당초에 환호로 사용됐다는 사실이 이것으로만 해결되지는 못한다.

3. 70인역 밖에서 “주”라는 호칭은 유대인에게 조차도 신의 명칭이 아닌 정치, 사회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3. 70인역 밖에서 “주”라는 호칭은 유대인에게 조차도 신의 명칭이 아닌 정치, 사회적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4. “주”는 그리스도교적 70인역 사본에만 등장하고 유대교적 사본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52) Ibid, p 104

52) Ibid, p 104

예수를 부르는 것은 기도와는 구별 되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께만 드려진다. 그러나 도대체 기도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주에 의해 중재되는 기적이다. 그 때문에 예수에게 의거하여야 한다. 주의 이름으로 기도한다.

53) R. Bultmann, 신약성서신학 ,p122

53) R. Bultmann, 신약성서신학 ,p122

54) “당신에게 우리는 우리 영의 대제사장이며 인도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찬양하나이다. 그를 통해 당신에게 영광... ...”

55) o\{ti eja;n oJmologhvsh/" ejn tw'/ stovmati sou kuvrion jIhsou'n kai; pisteuvsh/" ejn th'/ kardiva/ sou o\{ti oJ qeo;" aujto;n h[geiren ejk nekrw'n, swqhvsh/ “만일 네가 네입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 바로 이 κυριος Ιησους(Χριστος) 그리스도교 특유의 신앙고백이다.,(불트만, 신약성서신학, p124)

55) o\{ti eja;n oJmologhvsh/" ejn tw'/ stovmati sou kuvrion jIhsou'n kai; pisteuvsh/" ejn th'/ kardiva/ sou o\{ti oJ qeo;" aujto;n h[geiren ejk nekrw'n, swqhvsh/ “만일 네가 네입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 ...” 바로 이 κυριος Ιησους(Χριστος) 그리스도교 특유의 신앙고백이다.,(불트만, 신약성서신학, p124)

56) Walter Grundmann은 이에 대하여 새로운 제안을 한다. 그것은 레위계약서 4장이하에 레위가 하나님의 아들과 협력자가 되리라는 구절을 들어 레위지파 전승과 관계되는 쿰란종파에서 기대하였던 대제사장적 메시아를 연상하며 이 비의적 종파에서 대제사장을 아들로 명명하노라고 말한다.. 하지만 레위계약서 역시 “아들”이 칭호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가정은 의심스럽다. 그 밖에도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대사제로 표시하는 것은 후대의 전승 층에 속한다. (불트만, 신약성서신학,p96)

56) Walter Grundmann은 이에 대하여 새로운 제안을 한다. 그것은 레위계약서 4장이하에 레위가 하나님의 아들과 협력자가 되리라는 구절을 들어 레위지파 전승과 관계되는 쿰란종파에서 기대하였던 대제사장적 메시아를 연상하며 이 비의적 종파에서 대제사장을 아들로 명명하노라고 말한다.. 하지만 레위계약서 역시 “아들”이 칭호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가정은 의심스럽다. 그 밖에도 신약성서에서 예수를 대사제로 표시하는 것은 후대의 전승 층에 속한다. (불트만, 신약성서신학,p96)

57) R.Bultmann, 신약성서신학, p 97

58) H. Conzelmann, 『신약성서신학』, p100

59) R. Bultmann,『신약성서신학』, p127

60) R. Bultmann, 『신약성서신학』, p128

61) H.링그렌, 『이스라엘의 종교사』, 성바오로출판사, p 42

62) R. Bultmann, 『공관복음 전승사』, p268

63) H.Conzelmann, 신약성서신학, 102p

64) TDNT, vol VIII, p354/ 불트만, 신약성서신학, p131

65) TDNT, vol, viii p396

66) H. Conzelmann, 『신약성서신학』, p 105:

67) H.Conzelmann, op.cit., p105:

67) H.Conzelmann, op.cit., p105:

쿰란문서에서 “종”은 고정된 표현이다. 유대교에서 “종”은 메시아의 명칭으로서 단지 주변적인 곳(제 4 에스라서, 시리아어 바룩서)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주로 고난의 의미가 아니라 영광을 염두에 두고 잇다. 그 외에 고난에 대한 모습은 솔로몬의 지혜 2장 13-18절에서 오직 한번 “종”과 ”아들“로 번갈아 사용된다. 하지만 이것은 의인의 신 인식에 대한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콘젤만은 예수의 ”이사야 인용“에 반대한다.

68) H.Conzelmann, 『신약성서신학』, p237

69) O. Cullmann, 『신약의 기독론』, p317

70) O. Cullmann, 신약의 기독론, p 324. -쿨만은 그의 이런 생각에 동의한다.

71) ei[ ti" ouj filei' to;n kuvrion, h[tw ajnavqema.maravna qav.

72) R. N. Longenecker, op. cit., p121

73) R. Bultmann, op.cit., p51

74) O. Cullmann, op.cit., p212

75) H. Conzelmann, op.cit., p242: 바울은 이를 위하여 빌립보서 2장 6절이하의 그리스도 찬미송을 도입한다.

76) Ibid, p242

77) 박영희, op.cit., p123

78) 성서대백과사전, p151

79) 신약의 기독론 명칭 연구, 총신대 출판부, 박영희, p166

80) Ibid, p 107

81) Cullmann, op.cit.,p 169

82) T.D.N.T. op.cit., vol 7, p1016

82) T.D.N.T. op.cit., vol 7, p1016

엡 5:23에서“aujto;" swth;r tou' swvmato""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83) Conzelmann, op.cit., p 519 - 실재로 후기 바울서신에 대하여 다룰 때 콘젤만은 “비역사적 평가”를 내릴 수 있음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84) Ibid, p 355

85)T.D.N.T,op.cit., vol 7,p1016

85)T.D.N.T,op.cit., vol 7,p1016

딤전 4: 10에서만 서술적으로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hJmw'n과 함께 사용되었다. 여섯 번은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었고, 4번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용되었다.

86) T.D.N.T, op.cit., vol 7, p1010

87) T. D. N. T, vol 7, p1017

88) T.D.N.T.,vol 9, p556: 골로새서와 에베소서를 지탱하는 것은 교회론 이다.

89) Bultmann, op.cit., p 541

90) T. D. N. T., vol 9, p558

91) Conzelmann, op.cit., p152: 예수의 자기칭호에 대한 진정성의 문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대게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산물이라고 단정한다.

92) Conzelmann, op.cit., p171:위의 내용은 Conzelmann의 기록을 요약한 것임.

93) Conzelmann, op.cit.,p174

94) 이 구원사는 연대기적으로 계산되어서는 않된다.

95) 성종현, 『공관복음서 대조연구』, p458-459

96) Conzelmann, op.cit.,p152

97) R. Bultmann, Form Criticism, p102

98) Conzelmann, op.cit., p153

99) Ibid, p163 R. Bultmann, Syn.Trad. p278, Bultmann은 이 설화를 본래적인 부활절 설화로 간주한다. 하지만, 콘젤만은 불트만의 이러한 견해에 반대한다.

100) Conzelmann, op.cit., p153

101) Bultmann, Syn.Trad,p387: 일반적 메시야 교리에서 유래된 것도 아니고, 메시아적 전 사화들과는 구분된다. 불트만은 이에 대해서 일반기독교적 메시아 신앙에서 유래한 것이고, 따라서 이 장면은 전설적인 수난 예언들과 같은 계열의 것이라고 말한다.

102) Ibid, p154

103) Bultmann, Syn.Trad., p 180 : 이 본문의 원형은 예수 인물에는 아무런 관련을 지니지 않는 유대적 말로, 하나님은 미천한 인간에 대한 선행을 자기에게 표시된 것으로 평가한다는 것을 말한것일 수 있으리라.

104) Ibid, p290

105) Conzelmann, op.cit., p155: Conzelmann 은 이 구절에 대하여 원시기독교공동체의 두 단계 그리스도론을 표현해준다고 말한다.(로마서 1:3,4과 비교)

106) Conzelmann, op.cit., p164: 구약성서에는 ben-adam(사람의 아들)이란 말이 나타나지 않는다.

107) J. Jeremias , op.cit., p 589

108) 하지만 용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109)Conzelmann, op.cit., p156

110) Conzelmann, op.cit., p156

111) Conzelmann, op.cit., p157

112) (막9:12)

112) (막9:12)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113) Conzelmann, op.cit., p157

114) Bultmann, Syn.Trad, p67

115) E.Schweitzer, 역사적 예수 연구 ,p232

116) Conzelmann, op.cit., p158

117) J. A. T. Robinson, Jesus and his Coming,1957, p43이하

117) J. A. T. Robinson, Jesus and his Coming,1957, p43이하

이 말씀은 파루시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올리워지심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오른편에 앉아 있음, 구름 타고 옴”이란 문장 배열에 배치된다.

118) 눅17:22-26

118) 눅17:22-26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찌니라.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119) Conzelmann, op.cit., p159

120) Conzelmann, op.cit. p159

121) 요한복음21장은 제자들의 무리가 있음을 암시해준다.

122) Conzelmann, op.cit., p387: C.H.Dodd는 요한이 구전만을 이용했다고 말한다.

123) 서중석, “요한공동체의 기원과 성장”, 신학논단, 19(1989), p 128참조.

124) 이 구분은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125) J.L. Martyn, The Gospel of John in Christian History (New York: Paulist Press, 1979) pp.6, 93-102: 1:35-39처럼 개개인 설교자들이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는 동료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볼 수 있도록 설득하며 설교하는 시기이다.

126) 마틴은 9:22;12:42;16:2에 암시되어 있는 축출을 Birkath ha-Minim과 관련시킨다.

126) 마틴은 9:22;12:42;16:2에 암시되어 있는 축출을 Birkath ha-Minim과 관련시킨다.

J.L. Martin, op.cit., p6, 107, pp.93-102.

127) J.L. Martin., The Gospel of John in Christian History, pp107-121 참조.

128) 13:23-25; 19:25-27; 20:2-10; 21:1-14,20-24.

129) 예수가 사랑한 제자를 마땅히 취급했어야할 당위성의 근거에 대하여는 서중석, 『요한공동체의기원과 성장』, p130 참조.

130) R.E.Brown, The Community of the Beloved Disciple, pp31-34 참조.

131) Ibid., pp23, 32ff.

132) 서중석, 요한공동체의 기원과 성장“, p132

133) Ibid, p134

134) Conzelmann, op.cit., p396-397

135) 김철손외 4인 공저, 『신약성서신학』, p274

136) Ibid, p399

137) Ibid, p 400

138) D. Guthrie,"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사역 』 p176-177

139) Thorlief Boman, 허혁 역,『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도적 사유의 비교』, 분도출판사,1975,p. 30

140) 박영희, op.cit.., p60

141) G.Kittel. op.cit., p86

142) Ibid,p66

143) W.G.Kümmel, "신약성서신학“,opcit., p329,335

144) D.Guthrie,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사역』, op.cit., p179-180

145) G.E.Ladd, 『신약신학 』 ,op.cit., p268

146) Ibid.

146) Ibid.

(1: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47) 로고스: 계시니라.(to be)

147) 로고스: 계시니라.(to be)

피조물: 되었으니, 생겼으며(to become)

148)(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49) D.Guthrie, op.cit., p180,181

150) A.B.D. vol 5, p 246

151) Conzelmann, op.cit., p401

152) Bultmann,『요한복음서 연구』,p 125

153) Conzelmann, op.cit., p402-13절은 편집된 구절이다.

154) Conzelmann, 『신약성서신학』,op.cit., p406

154) Conzelmann, 『신약성서신학』,op.cit., p406

케제만은 이러한 의견에 반대하여 로고스개념을 12절에서 종결시킨다. 14절과 16절의 연관성을 깨뜨리고 있는 15절도 편집된 구절이다. 14절과 16절은 자료에 예속된 것이다.

155) 김철손 외 4인 공저, 『신약성서신학』, op.cit., p 278

156) R. Bultmann,『 요한복음서 연구』, p101

157) Revelation of History, (London: Macmillan co, 1968, p16

158) M. Hengel,『요한문서탐구』.p32

159) J.B.Smith, Greek -English Concordance (Scottdale, Pa.: Herald Press, 1965), p353-354, 5107a-5107 참조.

159) J.B.Smith, Greek -English Concordance (Scottdale, Pa.: Herald Press, 1965), p353-354, 5107a-5107 참조.

인 자

하나님의 아들

마태 복음

32회

9회

마가 복음

14회

4회

누가 복음

26회

6회

요한 복음

13회

12회

160) R. Bultmann,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op.cit., p30-N.Perrin과 H.E.Todt등이 이런 입장에 동조한다.

161) A.J.B. Higgins, Jesus and the Son of Man, (Guildford & London: Billing & Son Ltd, 1964) p185

162) D.G.Vanderlip, Christian acc. th John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1975) p58

163) A.J.B.Higgins, op.cit., p157

164) B.Lindars, Jesus Son of Man (London: SPCK, 1983).p145-155참조.

165) R. Schnackenburg , "Der Menschensohn in Johannes

165) R. Schnackenburg , "Der Menschensohn in Johannes

Evangelium",NTS11(1964-65):p125

166) E. Schweizer, "The Son of Man", JBL79(1960):p122-123

167) S.S.Smalley, "The Johnnine Son of Man Sayings", NTS 15(1968-69): p298

168) R.H. Fuller, The Foundations of New Testament Christology (London; SPCK, 1965),p151-155,229-230,243-246 참조.

169) Ibid., pp.94-95,118,141.

170) Ibid., 불트만 역시 묵시문학적, 미래지향적 인자만이 본래의 역사적 예수언어에 속하지만 그것은 이미 예수가 아닌 다른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수난의 인자, 지상의 인자는 원시기독교 공동체의 교리신학이라고 말한다.(R. Bultmann, 신약성서신학, op.cit., pp28-31). 슈바이쳐역시 인자가 다니엘적이며 묵시문학적 의미에서 사용된 3구절(마10:23;25:31-46;16:62)은 순수하다고 본다.(A.Schweitzer,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New York: Mcamillan Publishing Co, .1978),pp.277-279 참조.

171) (19:36)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172) C.H. Dodd, The Interpretation of the Fourth Gospel(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1980)p233

173) C.K.Barrett, 『요한복음I』 , 국제성서주석 37-1 (한국신학연구소, 1984), p 272. 김철손은 요한복음 1:29,36에서 언급된 ‘어린 양’에 유월절 양의 특징이 스며들어 있어 제사와 예배에 간한 것을 언급 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대속적 사건을 말한다고 주장함으로 바레트의 견해를 따르면서도, 다드의 주장처럼 묵시문학적 메시아 칭호로 발전했다고 주장한다.(김철손 외 4인공저, op.cit., pp163-165)

174) C.H. Dodd, op.cit., pp235-236

175) R. Bultmann, "요한복음서 연구“ , op. cit., p98

176) C.K. Barrett, op.cit., p273

177) C.H. Dodd, op.cit., pp236-237

177) C.H. Dodd, op.cit., pp236-237

레위기 18:9, 솔로몬 시편 17:29, 제2바룩서 68:1-4, 마1:21, 행 5:31

178) C.K. Barrett., op.cit., pp210-211

179) Das Neue Testament Deutsch, Hebraerbrief, p.70. & N.T. Understanding, p417 참조

180) Kee,N.T. Understanding, p 417

181) Ibid, p418

182) 김철손 외 4인 공저, 『신약성서신학』, p314

183) 김철손 외4인 공저, op.cit., p 317

184)B.Metzger, 『신약성서개설』, p 292

185) 성종현, 『신약총론』, p712

186) B.Metzger, op.cit., p292

187) 김철손 외4인공저, op.cit., p364

188) (렘11:19) 나는 끌려서 잡히려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189) 레온모리스, 요한계시록, 김근수 역, 기독교 문서선교회, 1993,p118.

190) 오토 뵉허, 요한묵시록의 난제 열 두 가지, 박두환 역, 한국신학연구소, 1996,72쪽

191)E. Lohse, 『요한계시록』, p182

192) 마틴, 멕나마라., 신구약 중간시대의 문헌이해, p59

193) D. Guthrie, 요한계시록의 신학, 정충하 역, 새순출판사, 1991, pp50-51

194) 박수암, 요한계시록, op.cit., p93-94.

195) 레온 모리스, op.cit., p145

196) D.Guthrie, op.cit., p53-54

197) L. Morris, op.cit., p145

198) E. Loshe,. op.cit., p199

199) 박수암, op.cit.,p247

200) 박수암, op.cit., p43

201) 김철손, op.cit., p168

202) Loshe, op.cit., p216

203) D.Guthrie, 『그리스도, 그리스도 사역』 , op.cit., p76

204) 박수암., op.cit., p9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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