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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삶과 신앙의 ‘규범’(Rule)이 있는가?

작성자고재봉|작성시간26.06.23|조회수3 목록 댓글 0
우리에게는 삶과 신앙의 ‘규범’(Rule)이 있는가?      

근세로부터 서양철학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종교적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범신론’(Pantheism)이다. 그리고 그 범신론은 필연적으로 유물론(Materialism)을 지향하도록 이끄는데, 왜냐하면 모든 신적인 기원 혹은 관념적인 것들이 결국에는 자연만물들 가운데서 산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유물론을 대표할만한 철학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흐(Ludwig Feuerbach, 1804-1872)는 “철학자는 자연을 애인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실 포이에르바흐가 자연을 애인으로 삼는 철학자에 관해 언급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사상체계를 원숙하게 다듬은 거의 대부분의 작업들을 이룬 브루베르크(Bruckberg)의 신혼생활을 바탕으로 한다. 1837년 브루베르크의 도자기 공장주의 무남독녀였던 뢰브(Berth Löw)와의 결혼으로 형성된 여유로운 전원도시의 자연환경은, 그야말로 자연이 제공할 수 있는 모든 사유의 열매들을 포이에르바흐에게 실제로 제공했었다.

그런데 개신교회의 목사가 되고자 했었던 포이에르바흐에게 브루베르크의 자연환경이 제공해 준 사색의 결과물들은 안타깝게도 종교적으로는 범신론이요, 철학사상으로는 유뮬론이었다. 그러한 그의 철학에 있어서 모든 사상과 관념들은 곧 물질의 산물이며, 특별히 신학과 철학 모두가 인간이라는 유물론적인 존재 가운데서 산출되는 일종의 관념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르기를 “신학의 본질은 인간론에 있다”고 했다. 즉 “종교는 무한한 것에 대한 의식으로서, 종교는 인간이 자기의 본질, 곧 유한한 본질이 아니라 무한한 본질에 대해 갖고 있는 자의식에 불과하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포이에르바흐의 삶의 정황(Sitz im Leben) 가운데서, 우리들(개혁된 신앙을 추구하는 신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의 성경에 관련된 고백 가운데 1항에서 언급하는바 “자연의 빛과 창조와 섭리의 역사들이 사람으로 변명할 수 없을 만큼 명백히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능력을 나타낼지라도, 그것들은 구원에 필연적인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지식을 주기에 충분하지 못하다.”는 문구의 의미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 평생에 잊을 수 없을 만큼 귀한 사색들을 제공한 브루베르크의 자연환경이 포이에르바흐를 통해 산출할 수 있었던 것은, “구원에 필연적인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지식을 주기에 충분하지 못”한 범신론과 유물론이 전부였던 것이다.

이후의 역사 가운데서 한 동안 사상적인 패권을 주도했었던 유물론은 범신론의 기반 가운데서 근세철학을 계몽하는 역할을 주도적으로 수행했으며, 기독교 신학이 없이도 얼마든지 교양과 문화를 논할 수 있게 했다. 바로 그 점에 있어서 현대의 모든 철학은 자연철학이며, 그러한 자연철학은 그 어떠한 관념을 다룬다할지라도 결국에는 자연만물들 가운데서의 사고에 기반을 두는, 일종의 유물론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의 우리의 신학 혹은 신앙은 그러한 유물론의 흐름과 충분히 절연(Insulation)되어 있는가 하면,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고 이미 우리의 신학과 신앙에도 유물론의 맥락이 스며들어 흐르고 있는 실정이다. 즉 우리의 신학 대부분이 눈으로 볼 수 없는 분이신 하나님에 관한 것, 곧 신론(the doctrine of God)을 중심으로 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눈에 보이는 인간론에 중심을 내주고 있는 점에서 일종의 유물론적 바탕으로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현대신학에서는 신학 혹은 종교의 본질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생하고 발전해왔는지, 그리고 어떤 교리가 어떠한 동기에서 도출된 것인가를 인간의 시각에서 파악하고자 한다. 심지어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조차도, 정작 중요한 것은 어떤 뜻으로 하나님께서 계시하셨는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의미로 받아들여졌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로 다가오는가? 하는 것들이다.

또한 그러한 현대신학의 맥락에 닿아 있는 우리의 신앙에서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에 그에 대해서, 항상 정답이 아니라 가능한 선택지(choice alternatives)를 찾을 뿐이다. 예컨대 작금의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전혀 예측하지 못한 가운데서 제기된 온라인(on line) 예배나 성찬예식 문제의 경우에도 정확한 답을 찾아서 제시하기보다는 차선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방안들로서 대처하고 있을 뿐이며, 그러한 대안의 이유들이야말로 형편과 여건을 고려하는 바탕에서 이해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온라인 성찬과 관련한 논의들을 살펴보면, 그것이 가능한 대안일 수 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거나 충분한 논의를 통해 공론화하여 적용할 문제라는 선에서 답을 내리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러한 태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유물론적 논리와 사고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러한 답변은 인간의 논의 혹은 사회와 문화라고 하는 것에서 대안을 산출하는 방식, 즉 넓은 범주에서의 유물론의 영역에 속한 인간론의 차원에서 답을 얻는 방식인 것이다. 이처럼 유물론이라는 것은 공산주의적 유물사관과 같은 극단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론에 근거해 산출되는 방식으로 미묘하게 우리 의식과 태도에 스며들어 있다.

반면에 신론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과 태도로서 온라인 성찬의 문제에 대해 논의한다고 한다면, 그 답은 여러 선택지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의 선택지이자 계시인 ‘성경’에서 답을 찾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reason)이나 지성(intellect)을 포함하는 자연계(the natural world)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대안이나 답이라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1항이 규정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주기에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의 2항에서 규정하는 바와 같이,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되도록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성경만이 필연적으로 우리가 답을 얻을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온라인 성찬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유일하게 택할 수 있는 선택지인 성경 가운데서 우리들은 어떠한 답변을 찾을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성찬을 시행했던 실례를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면, 그것에 바탕을 두고서 오늘날 개인의 가정에서 행하는 온라인 성찬에 관한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일찍이 사무엘 밀러가 그의 책 『장로회 제도』(Presbyterianism)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개인적 성찬(private communion)을 행하는 것을 본 적이 없으며, 결코 보증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고전 11:20절 이하의 말씀을 따라 함께 모인 회중 가운데서 성찬을 시행할지언정, 그 어떠한 이유로 가정에서 온라인 망(on line network)을 활용하여 성찬을 시행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 시대의 신앙과 삶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문제들과 그 문제들에 요구되는 여러 질문들에 대해, 우리의 신앙은 과연 어떠한 규범(Rule)을 지니고 있는가? 만일에 규범은 없고 다만 삶의 정황에 따른 수많은 선택지들이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끊임없이 터치고 나오는 코로나(COVID 19) 사태와 같은 것들을 감당하느라 늘 요동하는 불안 가운데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평안 가운데 요동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으로 있기를 원한다면, 지금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성경만이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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