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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 윌리엄 마튼 베어드(W. M. Baird, 배위량)

작성자고재봉|작성시간26.06.19|조회수2 목록 댓글 0

선교사 윌리엄 마튼 베어드(W. M. Baird, 배위량)

선교사 윌리엄 마튼 베어드(W. M. Baird, 1862.6.16.-1931.11.29.

 

윌리엄 마튼 베어드(W. M. Baird, 1862-1931, 배위량) 선교사는 1862년 6월 16일 미국 인디애나 주 클라크 카운티(Clark Coumty)에서 출생했다. 그는  하노버 대학 (Hanover College)과 맥코믹 신학교 (McCormick Seminary)에서 수학한 베어드는 학생자원운동의 영향으로 선교사역을 결심하게 된다. 선교사로서의 자신의 부르심을 잊지 않은 것이다. 그는 본래 중국 선교사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선교부가 조선 남부지방 개척을 요청하자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1888년 멕코믹 신학교를 졸업한 베어드는 미조리 주 오스세올라 (Osceola)의 장로교회에 임시목회자로 가서 일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일하던 중 해외선교사로 가는 것을 포기한다면 공식적으로 담임목사로 청빙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베어드는 이를 거절하고, 콜로라도 주 델 노르테에 있는 더 작은 교회로 옮겨 갔다. 이곳에서 목회하면서 국내전도부 (Home Mission Board)가 운영하는 멕시코인들과 스페인계 젊은이들을 위한 작은 기독교학교인 델 노르테 학교 (Del Norte College)의 교장직을 겸하게 되었다. 비록 짧은 기간이라 할지라도 소수 민족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 경험이 후일 숭실학교 설립과 교육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상규, “호주에서 온 제2진 선교사들”, 『부산의 첫 선교사들』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7), 269-70.]  그는 조부 존 베어드가 1810년 미국 필라델피아로 도미하여 테네시주, 오하이오주, 켄터키 주를 전전하다가 인디애나주 클라크 군에 정착한다. 베어드의 아버지 존 마튼 베어드는 정착한 클라크군에서 가업으로 방직업에 종사한다. 배위량 선교사는 어렸을 때 어머니 낸시 패리스 베어드에게 종교적 영향을 받으며 성장한다. 어머니 낸시는 아들 윌리암에게 엄격한 개혁 교회 전통으로 양육하며 교육한다. 배위량 선교사의 부모는 모두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베어드는 가족들과 함께 종교적 신념으로 노예제를 반대한다. 그로 말미암아 인디애나 주로 이주한다. 여기서 형 존 베어드가 마련하는 학비로 대학과 신학교 공부하게 된다. 베어드 선교사는 은혜로 공부를 하게 되고 언더우드의 선교사 지원과 후원으로 한국의 선교사로 오게 된다. 선교활동을 위해 애니 애덤스와 결혼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1891년에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일제시대의 상황에서 평양에서 선교하면서 기독교 교육과 신학 교육을 펼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된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7년 평양에서 선교 활동을 시작했다그는 1897년 10월 평양 자신의 사랑방에서 13명의 학생들을 데리고 학당을 열었다그는 노동을 천시하던 당시 조선사회의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학교 안에 자조사업부를 두어 스스로 작업을 하고 그 수입으로 학자금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학생들을 지도했다자립정신을 고취하는 것을 교육 제일의 목표로 삼은 것이다. 3년 후 이 학당은 숭실중학으로 성장하였고, 1906년에는 합성숭실대학으로 발전하였다합성숭실대학(1906년)이라는 이름은 미국 북장로교와 북감리교 선교부가 공동 운영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붙인 이름이며이후 미국 남장로교캐나다장로회호주장로회 등 당시 한국에서 선교하던 교단이 연합하여 운영했다또 합성숭실대학은 대한제국 시절 공식 인가된 최초의 대학과정 학교였다숭실대학은 1938년 일제에 의해 폐교될 때까지 한국 최고의 교육기관으로서 수많은 지도자를 배출했으며, 105인사건, 3.1운동과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의 요람이었다. 이때 대학이 위치한 장소가 어디로 결정하느냐 하는 문제로 대논쟁이 일어난다. 평양과 서울 둘 중 하나를 놓고 논쟁하게 되었는데 감리회 선교부에서는 대학의 위치를 서울로 한다는 의결이 나오면서 논쟁이 심화되었다. 장로회(북, 남, 호주장로회)들은 모두 반대하였고 표결에도 평양으로 결정하였지만, 합동 위원회와 미국 선교본부는 서울로 결정하였다. 평양 숭실은 폐교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한국 선교부에 다시 호소한 끝에 평양 숭실대학을 존치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대학의 설립을 허락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감리회는 평양 숭실 경영에 손을 떼고 언더우드와 함께 서울에 위치한 연희대학을 설립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배위량 선교사는 평양 숭실대학의 기초를 놓은 사역을 하게 된다. 배위량 선교사는 선교 구역을 1896년 경상도 지역을 받음으로써 경상도 지역을 순회하며 선교하다가 대구 선교 지부를 개척했고 이후에 서울에 잠시 거쳐 1897년 평양으로 자리를 옮겨 숭실 학당을 세우고 교육 사업에 헌신하게 된다. 배위량 선교사는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에 수많은 교회를 세웠다. 1891년 배위량 선교사는 부산진에 한옥을 짓고 그해 11월에 공관에 일하던 미국인 가족들과 자기 집에서 일하던 몇 사람과 더불어 예배를 드림으로 경남 지역 최초의 장로교회인 부산진 교회(1891년)를 시작하였다 1892년 시작한 부산 최초의 개신교회인 초량교회(1892년)는 베어드 선교사가 시작한 사랑방예배(영선현교회)에서 시작되었다그러나 각 교단별 선교지역 분할 결과 부산을 비롯한 경남 지역을 호주장로교가 담당하게 됨에 따라 베어드 부부는 1896년부터 대구에서 선교활동을 펼쳤다베어드 선교사는 대구에서 활동한 최초의 선교사인 셈이다대구제일교회(1896년)도 베어드 선교사로부터 시작되었다. 그후 1892년 4월 15일경 영주 동교회(1892년)를 개척하였다. 배위량 선교사가 내륙 지방을 여행하는 동안 양산 물금교회와 청도 유천교회, 청도 화양교회, 영천 조곡교회 등 초기 선교 교회를 세우게 된다. 이렇듯 복음의 불을 들고 성령의 역사로 전도하면서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배위량은 한국 복음화의 아브라함의 선구자처럼 부산에서 평양까지 한반도 전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위업을 달성하고 있었다. 1931년 숭실전문학교와 숭실중학교 개교식에 참여한 지 한달 후에 장티푸스에 걸려 별세했다. 베어드는 장티푸스에 걸려 평양 숭실학교에 묻히기까지 40년간 한국교회를 섬겼다. 그의 아들 리처드 베어드 (Richard H. Baird)은 아버지를 이렇게 평가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베어드 박사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이 그 손을 드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었고, 오늘날에도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항상 각 개인과 교회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었다. 그가 한국으로 가게 된 것도 바로 이런 믿음 때문이었다. 이런 믿음으로 인해 아버지는 당연히 선교활동으로 네비우스 방법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해 북쪽에서 커다란 비약적인 발전의 중심에 계실 수 있었고, 그런 발전은 … 그분의 특징적인 자질들을 발휘토록 했다. 이 믿음으로 인해 한국인들을 신뢰할 수 있었고, 처음부터 그들을 책임 있는 영역에 둘 수 있었다. 아버지는 한국인에 대한 어떤 환상도 없었고, 어느 정도 설득력 있게 그들의 약점들을 열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약점은 인간 본성에 타고난 것들이고,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역사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런 믿음 때문에 아버지는 무너지지 않고 온갖 실패와 좌절을 이겨내실 수 있었다.” [Richard Baird, William M. Baird: A Profile by Richard H. Baird, 김인수 역, 『배위량 박사의 한국선교』 (서울: 쿰란출판사, 2004), 302.]  베어드 선교사는 아내가 소천한 1916년 숭실대학 학장을 사임했으며, 그 이후에는 문서선교와 저술활동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 그는 1911년 구성된 구약개역자회에 개역위원으로 선임되어 구약성경을 한글로 번역 (개역)하는 일에도 힘썼다. 베어드 선교사는 1918년 로즈 페트롤프 (R. M. Pettrolf) 선교사와 재혼했으며, 1931년 평양에서 별세했다. 그의 무덤은 앞서 소천한 아내 애니 베어드 묘 (평양 장산묘지) 옆에 마련되었다. 양화진에는 베어드 선교사 부부의 무덤을 평양에 두고 온 것을 안타까워한 그의 후손과 제자들이 1959년에 세운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에는 “More than conquerors thru Him that loved us.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는 성경 말씀 (로마서 8:37)이 기록되어 있다. 언론소개 : 숭실의 설립자 윌리엄 베어드–  한국교회사에서 언더우드와 마포삼열에 비견할 만한 인물. 19세기말 조선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조선인의 문명개화와 복음화를 위해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헌신하였다. 서울에서는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배재학당’과 ‘경신학당’을 세웠고, 평양에서는 베어드가 ‘숭실학당’과 ‘숭실대학’을 세웠다. 서울이건, 평양이건 이들 교육기관들은 한국 근대교육의 모델이었으며, ‘숭실대학’은 일제강점기 조선선교부 교육시스템의 완결이었다. 숭실 설립자 베어드는 1891년 내한하여 193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년간 한국선교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의 사역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첫째(1891-1896)는 부산과 대구에 선교지부를 설립하고, 한반도 남쪽의 선교를 담당한 시기이다. 둘째(1897-1915)는 조선선교부의 교육정책인 “우리의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평양에 숭실학당(1897)과 숭실대학(1906)을 세운 시기이다. 이 시기 그는 숭실에서 ‘토착적 기독교교육론’에 입각한 교회와 사회 지도자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셋째(1916-1931)는 1916년 ‘대학문제’로 숭실 교장직에서 물러난 후, 1931년 사망할 때까지이다. 그는 이시기 주일학교 공과교재 번역 및 출판, 성경번역, 기독교 문서번역 등 문서선교사역에 전념하였다. 베어드는 한국선교초기 복음전도, 기독교교육, 문서선교에 있어서 탁월한 개척자였다. 특히 기독교교육 분야에서는 그만큼 탁월한 업적과 지대한 공헌을 한 선교사도 드물었다. 그러기에 미국 선교본부 총무 엘린우드는 베어드를 “언더우드와 마포삼열에 비견할 만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김명배 교수, 베어드학부대학, 2017.9.3.)  (평가)  (출처- 윌리엄 마튼 베어드 - 나무위키)

 

베어드는 상대적으로 독립운동보다 기독교 교육 선교에 집중한 선교사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독립운동과 무관한 선교사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북 지역 민족 운동의 핵심이었던 평양 숭실학교에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된 것을 보면, 베어드 선교사는 평양 숭실학교를 통해 독립운동의 기반이 형성되도록 기여한 인물이 틀림없다. 이러한 배경에는 베어드 선교사가 강조한 조선어 교육에 있다. 베어드 선교사는 자신이 고안한 <Our Educational Policy>를 통해 조선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을 강조했다. 그가 세운 숭실학교에서도 조선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을 시행했다. 이러한 베어드의 교육 기조가 숭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 자주독립 사상을 향유할 수 있는 환경으로 이어졌다. 이는 일제 강점기 동안 숭실 학생들이 항일 민족 운동에 많이 참여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베어드 선교사는 또한 머펫, 스왈렌, 매큔, 언더우드 선교사 등과 더불어 105인 사건에도 연루되는 등 일제 당국이 민족 운동의 배후라고 연관지을 만큼 주시했던 선교사들 중 하나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처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조선인을 위해 근대화 교육을 보급한 인물이자 독립운동가 배출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숭실대학교> 1897년10월 배위량 선교사 설립

 

숭실대학교  (출처- 숭실대학교 - 숭실대학교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숭실대학교가 고등교육의 불모지나 진배없는 이 땅에 ‘진리와 봉사’ 를 이념으로 내걸고, 고등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2024년 10월 10일을 기하여 127주년이 됐다. 숭실대학교는 그 긴세월을 지내오는 동안 시대가 요구하는 고유한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 하면서 ‘진리와 봉사’의 사명을 다해왔다. 민족 최초의 대학 숭실이 창설되던 당시 우리나라는 구한말 대한제국의 시대로써 봉건적인 색채와 전근대적인 사유의 틀을 말끔히 벗어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 같은 상황에 처하여 이에 숭실대학교는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봉건적인 구습으로부터 벗어나게하여 나라를 근대화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것을 학교의 고유한 사명으로 삼게 되었다. 숭실대학교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하여 전도활동을 벌이고, 음악, 체육 및 문예활동에 참가하여 국민계도에 앞장 선 것은 그 같은 시대적 상황에 대응한 활동이었다. 1910년 일제의 강앞에 굴복하여 국권을 일본에 빼앗긴 이후 식민지 지배 하의 숭실대학교는 국권의 회복 즉, 나라의 독립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05인 사건을 위시하여 1910년대 국내 최대비밀결사체인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고, 3.1독립운동, 광주학생 운동에 참여하여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1938년에는 그 극단적인 행동의 표현으로써 폐교라는 단장의 아픔을 스스로 결단하기에 이르렀다. 1945년 해방에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숭실대학교는 계몽활동이나 독립투쟁에서 보여준 과거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 것은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실력있는 인재의 양성이다. 그 같은 과업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 학교는 이사들과 동문들 그리고 교직원과 학생이 혼연 일체가 되어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중이다.숭실대학교가 오늘의 모습으로 성장하기까지 폐교와 같은 극단적인 사태를 포함하여 몇 개의 중대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숭실대학교 연혁  (출처- 연혁 - 숭실대학교)

1897. 10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배위량(W.M.Baird)박사가 자기 사저 일부를 사용하여 학교를 시작하고 교장에 취임하다.

1900 숭실학당에서 5년제 정규 중등과정 교육을 시작하다.

1901.10 평양부 신양리로 교사를 이전하고 교명을 숭실학당이라 하다.

1905 감리교 선교부가 숭실운영에 합류하여 합성숭실대학(Union Christin College)으로의 발전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1906.10 숭실학교에 대학부를 설치하여 중학부는 숭실중학, 대학부는 숭실대학이라 하다. 한국 최초의 대학으로 출범하다.

1908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사립학교령에 의거하여 사립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다.

1912.03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에서 본 대학 운영에 참가하다.

1912.11 조선총독부로부터 사립학교규칙에 의거하여 ‘숭실대학’으로 정식 인가를 받다. 이 해 105인 사건으로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옥고를 치르다.

1915.04  나도래(R.O.Reiner)선생이 교장에 취임하다.

1918.04  마포삼열(S.A.Moffett)박사가 교장에 취임하다.

1919.03  전교생이 3.1운동에 참가, 주동역할을 하여 많은 교수와 학생들이 옥고를 치르다.

1925.03  일제의 식민지 교육제도의 강요로 대학을 전문학교로 개편, 문과(문리과)를 설치하다.

1928.09  윤산온(G.S.Mccune)박사가 교장에 취임하다.

1931.03  농과를 설치하다.

1936.03  모의리(E.M.Mowry)박사가 교장에 취임하다.

1938.03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여 폐교를 당하다

1954.04  문교부로부터 숭실대학 설립인가를 얻어 폐교한지 16년만에 서울에 재건하여 본 대학의 전통을 계승하다. 영어영문학과, 철학과, 사학과,법학과, 경제학과를 설치하다.

1954.05  학장에 한경직 박사, 재단이사장에 배민수 박사가 취임하고 영락교회 일부건물을 교사로 사용하다

 

<평양 숭실학당, 합성숭실대학(1897년)>  (출처-평양숭실 - 숭실대학교).

 

그외 자료들

https://bss2079.tistory.com/15854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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