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역사속 감동의 이야기들(1)
(01) 전염병을 통한 복음의 전염
(02) 콜레라 퇴치 덕에 세워진 새문안교회
(03) 지게꾼 전도자 신화순
(04) 감옥에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
(05) 임자없는 얼굴에서 목사님 사모님으로
(06) 비금도 딸만 여섯인 우씨 가정의 축복이야기
(07) 양반전도 이끌어낸 강도사건
(08) 술집에서 시작한 교회이야기
(09) 서양선교사들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야기
(10) 벼슬 대신 복음을 산 부자이야기
(11) 벌 받는 것 대신에 마음의 평화를
(12) 이상재와 ‘위대한 왕의 사자’ 체험
(13) 고아였던 김규식선생
(14) 윤치호선생의 개종과 재헌신
(15) 맹인 전도자 백사겸 선생이야기
(16) 주기철목사님 영문 밖의 길
(17) 나막신 장수가 교회 개척하다
(18) 순천선교와 구씨 할머니이야기
(19) 배 위에서 열린 강화도 첫 세례식
(20) 한국 최초의 순교자 토머스
(21) 말씀으로 가득 채워진 평양 널다리교회
(22) 잊으면 안되는 아펜젤러선교사의 희생정신
(23) 한국여자들의 가장 기쁜 날
(24) 성령으로 몰아낸 술 마귀 이야기
(25) 선교사들이 금연을 강조한 이유
(26) 절망 가운데 하나님 만난 서상륜
(27) 서상륜의 권서활동 이야기
(28) 로스 선교사의 한글선생 구하기
(29) 백홍준과 의주의 신앙공동체
(30) 최초의 한글성경 번역자 이응찬
(31) 말씀의 누룩 된‘만주 한인촌’
(32) 소래교회가 세워지기까지
(33) 서경조와 소래교회의 시작
(34) 소래교회의 과부 할머니
(35)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
(36) 전주 예수병원 창립자 잉골드
(37) 전주 최초의 한인 여선교사
(38) 여수 애양원의 기원
(39) 서양세력을 빌린 독립운동
(40) 젊은 양반 선교를 위해 설립된 YMCA
(41) 두번 죽은 사람 이성주목사
(42) 초기 한국교회의 운영이야기
(43) 세례받기 전 학습교인과 주일성수
(01)
전염병을 통한 복음의 전염
수천년 동안 외부 세계에 문을 닫아놓고 살아왔던 조선 사람들은 서양의학을 통해 서구 문화에 마음을 열었다. 조선사회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콜레라였다. 한번 콜레라에 걸리면 치사율이 높기 때문에 ‘아이들의 병이 완전히 낫기까지는 가족 수로 셈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였다. 노비나 자기 집이 없는 사람들이 이 병에 걸리면 즉시 문밖으로 쫓겨났다. 이렇게 쫓겨난 무리들은 도시 안팎에서 집단으로 모여 살았다.
1886년 여름에 발생한 콜레라는 일본에서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올라왔다. 앨런 박사는 이 콜레라의 진행과정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앨런은 사람들에게 오물을 치우고 음식을 날것으로 먹지 말라고 권했지만 사람들은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조선 사람들이 콜레라에 대처하는 방법은 매우 미신적이었다. 사람들은 상당한 돈을 들여 여러 작은 사당을 짓고 거기에서 ‘콜레라 신’에게 치료를 간구했다. 궁궐 뜰에서는 대부대가 ‘콜레라 귀신’을 쫓기 위해 계속 총을 쏘아대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 살고 있던 외국인들은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당시 갓 개원한 제중원은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고 소독약을 뿌리는 등 콜레라를 막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1886년 여름에 발생한 콜레라의 피해는 심각했다. 시체가 골목 여기 저기에 널려 있었다. 콜레라에 걸리면 대부분 쓰러져 1시간 안에 죽어갔다. 앨런의 보고에 따르면 그해 여름에 죽은 사람은 총 7092명이었는데 일반 사망자를 제외하면 콜레라로 죽은 사람은 6152명에 달했다. 당시 서울 성안에 사는 사람이 15만명이었기 때문에 그해 여름에 콜레라로 죽은 사람은 1000명당 50명꼴이었다.
사실 콜레라는 백신을 제대로 맞기만 하면 예방할 수 있다. 서울에 사는 서양인들은 백신을 맞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환자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 이것은 한국인들에게 신비스럽게 보였고 서양문물과 기독교에 대해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초기 기독교는 전염병을 통해서도 복음을 일반인들에게 ‘전염’시켰던 것이다.
(02)
콜레라 퇴치 덕에 세워진 새문안교회
한국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는 원래 언더우드의 사랑방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교회가 비좁게 되었다. 1895년 새문안교회는 새로운 건물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새문안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만 기도했다.
그해 여름 서울에는 무시무시한 전염병인 콜레라가 돌았다. 1886년에 창궐했던 콜레라를 치료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선교사들은 다시 한마음이 되어서 콜레라 퇴치에 나섰다. 언더우드도 그의 부인과 함께 이 일에 적극적이었다. 언더우드는 형의 도움으로 서대문 밖에 콜레라 환자 보호소를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이 보호소를 중심으로 콜레라 퇴치 운동을 벌였다.
콜레라 퇴치 운동을 벌이는데 필요한 것은 훈련된 봉사단이었다. 당시 서양 선교사들은 각각 자기의 맡은 위치에서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언더우드는 조선인들로 구성된 자원봉사단을 만들었고 여기에는 언더우드가 섬기던 새문안교회 신자들이 많이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의 노력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독교병원으로 가면 죽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정부에서는 ‘예수병원에 가면 살 수 있는데 왜 죽으려고 하는가’라는 벽보를 사방에 붙여놓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콜레라는 수그러들었다. 정부에서는 언더우드에게 미국 공사를 통해 감사의 뜻을 전했고 선교사들에게는 감사의 선물과 약값을 지불하였다. 그리고 선교사와 함께 봉사했던 조선인들에게도 상당한 보수를 지불하였다.
조선인 신자들은 뜻하지 않은 거금을 만지게 되었다. 새문안교회 신자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런 귀한 돈은 귀한 일에 쓰여야 한다며 그 돈을 교회건축을 위해 바쳤다. 새문안교회 신자들은 매우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그 돈을 자신들을 위해 쓴다는 것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음에 대해서 감격하였다. 새문안교회는 그래서 가장 좋은 기와와 재료를 사용해서 조선 최고의 한식 건물을 세우게 되었다.
(03)
지게꾼 전도자 신화순
한국인의 전염병 치료에서 보여준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은 조선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전염병이 창궐한 어느 날 아침 일찍 언더우드가 병원으로 가고 있는 것을 본 품팔이꾼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런 시간에 저렇게 급히 길을 가는 저 외국 사람이 누구요?” 그러자 옆에 있는 사람이 “그것도 모르오? 우리를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밤낮으로 병자를 돌보면서 일하는 예수쟁이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조선 사람을 사랑하는 예수쟁이’가 언더우드의 별명이었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1895년 여름에 창궐했던 장티푸스를 선교사들이 헌신적으로 치료하는 것을 지켜본 조선인 가운데 신화순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선교사와 기독인들이 조선인들에게 하는 일들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인이 되었고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서울시내에서 약 16㎞ 떨어진 경기도 행주로 내려갔다. 거기서 그는 품팔이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사람들이 하나둘 믿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은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자신의 집을 내놓았다. 거기서 아이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스스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소문이 언더우드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문답을 거쳐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100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언더우드는 이들의 신앙을 격려하고 세례를 주기 위하여 행주를 방문했다. 언더우드가 행주에 도착하였을 때 마을 입구에서 2∼3㎞ 떨어진 곳까지 아이들이 마중 나와서 찬송을 부르면 언더우드 일행을 영접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에 대해서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곳에서 이런 광경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언더우드는 그 마을이 복음으로 변화된 것을 목격했다. 주막 주인은 굶을 각오를 하고 술을 모두 길에 버려서 가족이 굶어 죽을 지경이었다. 또 점쟁이는 자기의 생계수단이었던 점치는 일을 그만 두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던 모든 우상을 치워버렸다. 복음이 그 마을을 변화시킨 것이다.
(04)
감옥에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기독교 장로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기독교에 입문하게 되었는지,어떤 신앙 체험을 가지고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승만은 세종대왕의 형님인 양녕대군의 16대손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과거를 준비했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그러다가 갑오경장(1894)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그는 신학문을 배우기로 작정하고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에 들어가서 2년 남짓 영어와 서구 민주주의를 배웠다. 그후 그는 독립협회에 가담해서 과격한 개혁운동을 벌였다. 결국 그는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1899년 한성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한성감옥에서였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다니면서 기독교를 접했다. 하지만 그는 별 감동을 받지 않았다. 이승만은 선교사들이 한국을 유인해서 미국의 식민지로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감옥에서 선교사들이 넣어준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죄수 한 사람은 간수들이 오는지 살피기 위해 파수를 섰고 또 한 사람은 성경 책장을 넘겨주었다. 내 몸과 손에는 형틀과 수갑이 채워져 있어서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나의 마음속에 드리운 그 안위와 평안과 기쁨은 형용할 수 없었다. 나는 그 감옥에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알 수 없다.”
감옥에서 이런 신앙체험을 한 후 그가 그때까지 선교사들에 대해서 가졌던 증오와 불신감이 사라졌다.
감옥에서 예수를 믿은 이승만은 이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이때 그의 전도를 받아 신자가 된 사람은 40여명이나 되었는데 이상재 김정식 같은 상류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양반계층 가운데서 이렇게 집단적으로 신자가 된 것은 한국 개신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곳에서 기도했고 예배를 드렸으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이승만과 그의 친구들은 그 지긋지긋한 한성감옥을 ‘복당’(福堂)이라고 불렀다. 그때 만난 예수님이 이승만을 이 나라의 지도자로 만드셨다.
(05)
임자없는 얼굴에서 목사님 사모님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은 조선땅에서 가장 불쌍한 여인들에게 가장 큰 행복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로 제주선교의 개척자 이기풍 목사의 부인을 들 수 있다. 그녀에게는 원래 이름이 없었다. 단지 둘째딸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가운데 애기’라고 불렀다. 가운데 애기가 열다섯 살쯤 되었을 때 그의 부모는 약 50㎞ 떨어진 부자 양씨에게 상당한 돈을 받고 시집을 보냈다.
어느 날 시어버지가 장에 갔다가 서양인을 만나 예수교에 대한 책을 사왔다. 그리고 집에 와서 열심히 읽고 신자가 되었다. 양씨의 집에서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가운데 애기뿐이었다.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는 새로운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 가운데 애기의 신앙은 점점 깊어 갔다.
가운데 애기가 22세가 되었을 때 역병이 창궐,시아버지와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이제 가운데 애기는 임자 없는 물건이 되었다. 조선에서 과부보다 더 가련한 것은 없다. 시숙은 그녀를 부잣집 첩으로 팔아버릴 계획을 세웠다. 이것을 안 그녀는 집을 나와 선교사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그러나 이 가련한 여인은 붙잡히고 말았다. 결국 부잣집에 잡혀갔다. 그녀는 부자에게 자신은 죽어도 첩으로는 살 수 없으며 귀신숭배에도 참여할 수 없다고 못 밖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자가 갑자기 병에 걸렸다. 사람들은 굿을 하며 그녀에게 참여를 강요했으나 단호히 거절하며 “옛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괴롭히는 애굽의 군대를 홍해에 일시에 장사지냈다.”고 말했다. 얼마 후 그 부자의 병이 다시 도졌다. 굿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운데 애기는 시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를 내보내시지 않으면 그 병이 악화될 것입니다. 제가 애굽의 장자에 대해서 드린 말씀을 생각해보세요.” 그날 자정쯤 시어머니는 그녀를 찾아 왔다. 그리고 “나는 네가 믿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귀신보다 더 세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면서 평안히 가라고 말했다. 그후 이 신앙의 여인은 이길함 선교사에게 성경을 배우고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인 이기풍과 결혼해 제주도에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이 되었다.
(06)
비금도 딸만 여섯인 우씨 가정의 축복이야기
목포 서쪽에 비금도라는 섬이 있다. 이 섬에는 우씨 성을 가진 사람이 불행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에게는 딸만 여섯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에게 이런 우씨의 불행은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아들이 없는 집은 근본적으로 불행한 집이었다.
우씨의 가정에 복음이 들어왔다. 그것이 그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 우씨는 하나님이 딸들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딸들을 최선을 다해서 키워야겠다고 생각하고 소(小)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어느 날 우씨는 닭 한 마리와 달걀 한 줄을 들고 두 딸,소녀(小女)과 소력(小力)을 데리고 학교에서 공부하게 해달라고 선교사를 찾아갔다. 2학년이 되었을 때 발진티푸스가 섬을 휩쓸었고 결국 소녀는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소녀가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 나라에 갔다”고 말했다. 소녀 대신 동생 소진(小眞),그 다음에는 소애(小愛)가 등록하였다.
소력은 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에서 멀지 않은 동네에 사는 평범한 농부와 결혼하였다. 이들은 교육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소력은 시집어른들을 설득하여 조카를 학교에 입학시키고 조카의 교육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또한 그녀는 남편에게 글을 가르쳐주었다. 큰시누이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남편 최씨는 사람을 학교에 보내어 소력과 같은 교양 있는 여인을 구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자신은 소력과 같은 청결한 여인과 함께 살고 싶다는 것이다.
얼마 후 비금도에 이상한 전염병이 들었다. 사람들은 귀신들에게 제사를 드린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우씨 집에도 같이 제사를 드리자고 권하였다. 우씨의 아내와 딸들도 전염병에 걸렸다. 하지만 우씨는 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것은 귀신이 자신의 가정을 지배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었다. 우씨는 단호히 자신의 집은 어린 양 예수의 보혈이 지배하는 가정임을 선언하였다. 비금도의 많은 사람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우씨 가정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 사람들은 우씨가 믿는 하나님이 자신들이 믿는 신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다.
(07)
양반전도 이끌어낸 강도사건
미국 남장로교 의료선교사 포사이스는 1904년 9월 전주에 도착하여 수많은 병자를 치료하였다. 당시 전주에서는 전킨 선교사가 선교하고 있었는데 지체 높은 양반인 이씨가 전킨 선교사를 방문하여 복음을 듣고 있었다. 그때 심부름꾼이 달려와서 양반 이씨의 동생이 강도에게 심한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포사이스 선교사에게 32㎞나 떨어진 곳에 가서 치료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었다.
포사이스 선교사는 의료기구를 챙겨서 조랑말을 타고 가서 환자를 치료해주었다. 하지만 밤이 너무 깊어서 전주로 돌아올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포사이스 선교사는 이씨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다음날은 주일이었는데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또 하루를 이씨의 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월요일 새벽 4시쯤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복면을 한 강도 7명이 들이닥쳐서 포사이스 선교사를 칼로 찌르고 베어서 머리와 목에 큰 상처를 냈다. 포사이스 선교사가 죽었다고 생각한 강도들은 도망쳤다.
심한 부상을 입은 포사이스 선교사는 응급처치를 한 뒤 곧바로 군산에서 일하는 다니엘 의사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경과가 좋지 못하여 1906년 봄 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귀국하는 배안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비록 우리의 노력이 불완전하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그리고 주님을 위하여 겸손이 드리는 사랑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포사이스 선교사의 말대로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전주에서는 “유명하고 부유한 이씨 가문의 가장이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마를 타고 나타났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것은 양반이 교회에 나오는 것은 더 이상 체면을 손상시키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양반의 도시 전주에서 양반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까지 이 지역 교회의 남자석은 상인이나 농부,그리고 막노동꾼뿐이었다. 이 사건 이후부터 인식이 달라지고 교회들은 유례 없는 부흥을 경험했다. 1906년 전주 서문교회가 완공되었으며 1909년에는 전주 제2 교회인 남문교회가 창립되었다.
(08)
술집에서 시작한 교회이야기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9년 봄 신혼여행으로 평북 의주를 방문하였다. 언더우드는 의주에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며 사람들의 신앙을 격려했다. 그리고 한동안 이곳을 방문하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후 언더우드에게 들려오는 기쁜 소식이 있었다. 의주에서 30여㎞ 떨어진 한 시골 여인이 의주에 들러 언더우드에게 전도를 받은 사람을 만났다. 이 여인은 이 사람으로부터 기독교의 복음을 듣게 되었다. 그가 들은 복음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된다. 둘째,신자는 죄를 버리고 착하고 순수하며 진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셋째,7일 중의 하루는 거룩하게 보내야 되고 ‘예수의 피밖에 없네’라는 찬송을 불러야 한다.
이 여인은 선천 남쪽에 있는 자기 마을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자기가 들은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또 한 사람의 여인이 여기에 참여했다. 이 두 여인은 힘을 합해서 동네의 영향력 있는 두 남자에게 전도했다. 그 중 한 남자는 유명한 싸움꾼이었다. 이 네 사람은 자신들이 이해한 기독교의 세 가지 원칙을 지키며 살아갔다.
어느 날 권서 한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들을 만났다. 이들은 술집에서 모임을 갖고 있었다. 사실 이 마을의 첫번째 신자는 술집주인이었다. 이들은 권서로부터 예수 믿는 사람이 술을 파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을 들었다. 술집주인 신자는 즉시 자기 집에 있는 모든 술을 하수구에 버려버렸다. 이들은 권서로부터 복음을 자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들의 모임은 그후에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몇 년이 지난 후 이 교회는 700명의 신자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첫 남자 신자 가운데 한 명은 전문적인 싸움꾼은 목사가 되었고 다른 한 명은 그 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1891년 게일 선교사는 의주를 방문하게 되었다. 게일은 의주와 그 부근의 신앙공동체가 든든하게 성장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언더우드에게 “나는 귀하가 의주와 그 근방에서 행하신 일의 결과를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놀랍게 깨어나고 있습니다”고 편지를 보냈다.
(09)
서양선교사들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야기
전혀 다른 두 문화가 만나게 되면 수많은 오해가 생긴다. 이의 대표적인 사례를 1886년 6월에 일어난 어린이 유괴 소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동의 내용은 외국인들이 사악한 조선인들에게 돈을 줘 어린이들을 유괴,의학에 사용하려고 눈과 심장을 떼어내며 심지어는 남색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또 조선에서 우유를 구할 수 없는 서양사람들이 여자의 젖가슴을 도려낸다고도 하였다. 프랑스 공사관에 근무하는 오봉엽이라는 자가 외국인들이 아이들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을 보았다고 소문을 퍼뜨리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사람들은 서양 선교사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운영하는 보육원과 병원은 주목의 대상이었다. 특별히 서양병원은 음모의 소굴로 지목되었고 여기에서는 아이들의 심장과 눈이 요리상에 올려진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대개 이런 소문은 폭동으로 이어진다. 서울의 군중은 성이 나 있었다. 자기 아이를 데리고 나들이를 나왔던 사람이 아기를 훔쳐가는 것으로 오인 받아 큰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심지어 왕의 측근 관리가 이런 오해를 풀어주려고 개입했다가 자신의 종과 측근들이 보는 앞에서 거의 죽을 뻔하였다. 사람들은 몰려다니며 외국인들을 위협하고 그들의 집과 학교,병원을 공격하였다. 기독교학교에 다니던 학생들은 등교를 거부하였다. 서양병원에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가마꾼들은 외국인 태우기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사건은 외교적 문제가 되었다. 먼저 일본 공사관이 일본인들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다른 외국인의 소행이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미국?프랑스?러시아공사관은 조선정부에 자국민 보호를 요청하였고 순찰을 강화하였다. 또한 제물포에 주둔해 있던 외국군대가 서울에 진입하여 무력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정부와 공사관은 만일 이런 허위사실을 유포한 사람들이 발견되면 사형에 처할 것이라는 공고를 붙였다. 그리고 집단 시위를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태는 진정되었다. 하지만 이 일로 선교사들은 큰 곤욕을 치렀다.
(10)
벼슬 대신 복음을 산 부자이야기
황해도 은율에 한 부자가 살고 있었다. 1896년 초가을에 그 부자는 벼슬을 사려고 큰 돈을 마련해 서울에 올라왔다. 그런데 그가 서울에서 본 것은 선교사들이 주최한 거대한 국왕탄신 축하예배였다. 호기심에 예배장소에 들른 그는 기독교 복음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처음 그곳에서 복음을 들었으나 기독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기독교 서적을 구해서 열심히 읽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결론은 기독교가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열성적인 신자가 되었다.
부자는 벼슬을 사는 대신 기독교 서적을 몽땅 사서 힘센 당나귀에 싣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쉴 틈도 없이 자신이 들은 신기한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사람들에게 책을 팔았다. 얼마 되지 않아서 기독교 서적은 널리 유포되었고 믿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불어나서 상당한 숫자가 되었다. 얼마만큼 세월이 흐른 뒤 부자는 서울의 언더우드에게 편지를 보냈다. 가능한 한 빨리 와서 사람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1900년 9월 이곳을 방문했다. 언더우드의 설교가 끝난 다음에 이 지역의 어른 한 사람이 일어나서 “우리가 들은 것은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이것을 믿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문제는 그 부자에게 부인이 둘이 있는 것이었다. 언더우드는 첩이 있는 사람에게는 세례를 베풀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부자는 둘째부인에게 충분하게 살 수 있는 땅과 집을 마련해주고 헤어지기로 했다. 그후 그 부자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언더우드는 이미 그곳에서 복음이 살아서 역사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복음이 들어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 사람들은 첩과 악습,우상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도 놀라운 헌신으로 봉사하였다. 심지어 이들은 선교사들이 쉴 수 있는 거처까지 마련해주었다.
(11)
벌 받는 것 대신에 마음의 평화를
동학운동이 실패로 끝나갈 때 여기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교회에 피난해 왔다. 당시 교회는 서양 사람의 건물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정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장소라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신교는 가능한 대로 조선 정부의 법을 지키면서 선교를 하려고 했다.
동학교도들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을 치다가 예수를 믿겠다고 황해도 소래교회를 찾아왔다. 그들에게 교회 지도자들은 예수를 믿으려면 살인죄를 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고였으나 그 중 한 사람은 그 충고를 받아들였고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감옥에서 그는 찬송을 부르며 평안을 유지하여 간수들을 놀라게 했다. 감옥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전도할 수 있었다. 얼마 후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난을 가고 친일파들이 숙청되자 그는 자연히 사면되었다.
그는 그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 소래교회를 열심히 섬겼다. 아무리 날씨가 험해도 16㎞를 걸어서 매주 교회에 출석하였다. 심지어 일 때문에 30㎞ 밖에 있을 때에는 미리 토요일 밤에 와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주일을 온전히 지킨 다음 밤늦게 높은 산을 넘어서 다시 자기집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1895년 늦가을 언더우드는 소래교회를 방문해서 그와 세례문답을 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해본 적이 있습니까?”라는 언더우드의 질문에 “나는 언제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 있는 죄인인 나를 예수께서는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는 제게 벌 대신에 마음의 평화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를 믿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다른 동학교도도 한 사람을 죽였는데 황해도 해주의 가톨릭교회로 피하여 보호를 받았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외세를 등에 업고 조선정부를 무시하며 불법자들을 옹호하고 백성들을 함부로 다루어 원성이 자자했다. 천주교는 종교단체의 한계를 넘어서서 권력집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여기에 비해서 개신교는 가능한 대로 법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개신교 신자들은 자신에게 지워진 무거운 짐을 담당하면서 주님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12)
이상재와 ‘위대한 왕의 사자’ 체험
월남 이상재 선생은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걸쳐 한국 개신교가 배출한 가장 대중적인 민족인사였다. 그는 일찍이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견학했으며 1887년에는 초대 미국공사관 서기관으로 미국문화를 직접 목격했다. 그후 한국에 돌아와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독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물론 이상재 선생도 발전한 서구문명의 배후에는 기독교가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성경에 나와 있는 오병이어나 부활 같은 기적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만들었을 때 그는 독립협회를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이끌어가려고 생각했다. 여기에 이상재는 반대했다.
이상재는 1902년 6월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친러내각에 의해서 조작된 역모사건에 휘말려서 한성 감옥에 투옥되었다. 당시의 감옥의 상황은 비참하였다. 같은 해 8월에 괴질이 돌아서 하루에 6∼7명씩 죽어나갔다. 당시 감옥에는 선교사들이 돌아가면서 전도를 하고 있었으며 감옥에는 이미 신자가 된 이승만 등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상재가 갈등을 끝내고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것은 1903년 어느 날 체험한 신비스러운 경험 때문이었다. YMCA의 브로크만은 이렇게 전한다. “이상재는 당시 자신의 생애에 아주 낯선 체험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대한 왕의 사자’가 자신에게 말하기를 “나는 몇 년 전 당신이 워싱턴에 갔을 때 성경을 주어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지만 그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것이 첫번째 죄이다. 또 나는 그대가 독립협회에 있을 때에도 기회를 주었지만 당신은 반항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믿는 것 까지도 방해를 하였다. 이런 식으로 당신은 민족이 앞으로 나아갈 길을 막았으니 이것이 더욱 큰 죄이다. 나는 그대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감옥에 두었는데 이것은 내가 그대에게 신앙을 갖게 하는 새로운 기회를 준 것이다. 만일 그대가 지금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 죄는 이전보다 더욱 큰 것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그 이후로 이상재는 주님을 믿게 되었고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3)
고아였던 김규식선생
한국 최초의 복음선교사 언더우드가 맨 처음 한 일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도착한지 1년이 지난 1886년 봄. 그는 자기집 옆의 집을 하나 얻어서 고아학교를 시작하였다. 언더우드는 오갈데 없는 고아들을 모아 보살피면서 새로운 세계를 가르쳐 주었다. 이 학교가 발전하여 오늘날 경신학교가 된 것이다.
언더우드가 고아학교에서 보살피고 가르친 사람 가운데는 유명한 독립운동가이며 광복후 김구 선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던 김규식 박사가 있다. 원래 변갑이라고 불렸던 김규식 박사는 오갈데 없는 고아였다. 김규식 박사의 아버지는 양반으로 관직에 있었는데 역적으로 몰려 귀양을 가고 그의 어머니는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작은아버지들은 생활이 궁핍해서 김규식 박사를 돌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언더우드가 세운 고아학교에 김규식을 데려왔던 것이다.
하지만 네 살짜리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이 아이는 친척들에게 보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아이가 몹시 아픈데도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분유와 약을 들고서 아이를 찾아갔다. 찾아가보니 아이는 너무 굶주려서 먹을 것을 달라고 울부짖으며 벽지를 뜯어내 삼키려고까지 하였다. 언더우드는 이 아이를 집으로 데려 왔다. 다른 선교사와 의사들은 반대했다. 이 아이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모든 책임을 언더우드가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아이를 데려왔고 극진히 간호했다. 결국 그 아이는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어린 김규식은 빠른 속도로 영어를 배웠다. 언더우드는 김규식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김규식은 1903년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는 프린스턴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05년 나라가 어려울 때 그는 귀국하여 언더우드와 함께 민족과 복음을 위하여 일했다. 그후 1913년 김규식은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싸웠다. 광복 후에는 김구 선생과 남북협상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정계를 은퇴하였다. 1950년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가 만포진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14)
윤치호선생의 개종과 재헌신
초기 한국 감리교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평신도는 윤치호일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주한 미국공사관의 통역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기독교를 접할 기회를 가졌지만 신앙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중 개화파가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3일천하로 실패하자 윤치호는 상하이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상하이에서 윤치호는 미국 남감리교가 운영하는 중서서원에서 공부하게 되었는데 이때 개화파의 거두 김옥균이 살해됐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실망한 그는 주색잡기에 빠져 방탕했으나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에게 기독교 신앙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 무렵 중서학원의 본넬 선교사가 세례 받을 것을 권면하였다. 마침내 그는 1887년 4월3일 세례를 받았다. 다음은 그때 작성한 간증문의 일부이다.
“저는 상하이에 오기 전에는 상제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저는 성교(聖敎)를 알게 된 후에도 계속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1886년초부터 그해 말에 이르러 저는 지금껏 제가 추구하던 것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많은 악한 행실들을 떨쳐 버리려고 애를 썼고 꿀처럼 좋아했던 몇 가지 대표적인 죄를 없이 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습니다…저는 세례를 받고자 합니다. 저는 상제님이 사랑이심과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믿습니다.”
윤치호는 미국에 유학하여 5년 동안 신학을 공부한 뒤 조국에 돌아와서 조정에서 여러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1896년 윤치호는 민영환을 따라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파리에서 몇 개월 동안 머무른 적이 있었다. 당시 세계 문화의 첨단에 서 있던 파리에서 그는 ‘눈부시고 황홀한 유혹’에 빠지게 되었고 이것이 그를 정신적으로 번민하게 만들었다.
얼마 후 그는 자신의 신앙을 다시 되찾게 되었고 더욱 철저하게 복음적인 삶을 살기로 결단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결단을 구체화하는 증거로 선교사와 스승에게 장문의 고해성사와 같은 편지를 보내고 용서를 구했다. 이렇게 해서 윤치호는 신앙의 재헌신을 이룩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한국 감리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15)
맹인 전도자 백사겸 선생이야기
한국 교회의 역사에서 백사겸은 매우 특별한 전도자였다. 1860년 평남 평원군에서 출생한 백사겸은 어려서 안질을 앓고 실명한 뒤 15세부터 점술을 배워 23년 동안 평양과 서울을 오가면서 유명한 복술가로 이름을 날렸다. 물론 상당한 재산도 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복술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하다가 도참신앙을 접하여 태을보신경(太乙補信經)을 외우며 산신령에게 100일 기도를 하였다. 그가 기도를 마치던 날 남감리교 매서인 김제옥이 찾아와서 인가귀도라는 80쪽짜리 전도지를 백사겸에게 주었다. 이것은 백사겸에게 ‘독한 벌레’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것을 궤속에 감추어놓았다.
며칠 후 백사겸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하늘나라에 갔는데 좌우에 한 사람씩 다가왔다. 우편에 있는 사람이 은산통(銀算筒)을 쥐어주면서 “나는 예수이다. 내가 주는 산통은 의의 산통이니 받아 가지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좌편에 있는 사람도 산통을 주었는데 그것은 빈 산통이었다. 백사겸은 꿈을 해석하려고 하였으나 해석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장인이 백사겸의 집을 방문하였다. 백사겸의 고민과 이상한 전도책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백사겸의 장인은 전도책자를 가져 오게 한 뒤 더듬거리며 읽기 시작하였다. 이 소책자에는 우주에는 천지만물을 만드신 상제가 계시고 그를 섬기는 것이 인간의 근본 도리이며 따라서 우상이나 귀신을 섬기는 것은 상제께 대한 큰 죄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장인이 전도지를 읽는 것을 들으며 백사겸의 마음에는 빛이 임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이 잘못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꿈에 만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1897년 4월14일 온 가족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세례를 받은 그의 삶은 달라졌다. 그후 그는 강도를 만나서 전 재산을 잃게 되었지만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이 주신 ‘은산통’을 가지고 참 하나님을 전파하였다. 이 소문이 널리 퍼져 백사겸은 1899년부터 남감리교 리드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서울 고양 개성 철원 등을 포함한 경기 북부지역을 순회하며 이 지역 복음화에 큰 공헌을 하였다.
(16)
주기철목사님 영문 밖의 길
신사참배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을 때 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서 강요한 거짓 종교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계가 강력하게 신사참배에 반대하지 못했다. 불교 천주교는 제대로 신사참배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다. 기독교계에서도 신사참배를 용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의 한 분이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였다. 주 목사는 신사참배에 반대한다고 네 차례나 검거되었다. 그러나 그는 박해 가운데서도 결코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주 목사가 1차 검거에서 석방되어 나왔을 때 그는 산정현교회 신자들에게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는 말했다. “첫째,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둘째,지루한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셋째,노모와 처자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넷째,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옵소서. 다섯째,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이 설교를 들은 산정현교회의 2000여 신자들은 모두 울 수밖에 없었다.
주 목사는 1940년 6월 네번째로 투옥되어서 1944년 4월21일에 순교했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그는 유서를 써서 집에 보냈다. “여드레 후에는 아무래도 죽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몸이 부어올랐습니다. 생명보험을 든 200원을 영진이 장가 비용으로 사용하고 남은 돈으로는 막내 광조를 공부시키시오. 어머님을 잘 봉양하십시오. 어머님께는 죄송합니다.” 이 유서를 받아든 오정모 사모는 “목사님이 아직까지 가정에 무슨 미련이 남아서 이런 것을 보낸 것이냐?”고 말했다. 이런 믿음의 아내가 있기 때문에 순교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 목사가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신앙 때문이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믿음이 그로 하여금 순교할 수 있는 힘을 준 것이다. 이것은 주 목사가 작사했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영문 밖의 길’이라는 찬송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찬송 3절은 이렇게 되어 있다. “눈물 없이 못가는 길,피 없이 못 가는 길,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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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막신 장수가 교회 개척하다
전라도 지역 선교를 책임지고 있던 미국 남장로교선교회는 1896년 전남 선교의 거점으로 나주를 선택,선교부를 세우려고 계획하였다. 하지만 이곳 주민들이 너무 적대적이어서 그 계획을 포기했다. 그러는 동안 1897년 10월1일 목포가 개항장이 되어 외국인들이 합법적으로 살 수 있었다. 이것을 계기로 남장로교 선교회는 목포를 전남지역 선교 중심지로 삼았다.
목포에는 ‘개척교인 김씨’라고 불린 남자 신자가 있었다. 그는 교육을 많이 받지 못했고 직업은 나막신을 만드는 것이었다. 비가 오는 어느 날 김씨는 시장에서 나막신을 팔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시장에는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전하고 있었다. 매서인 최경화가 성경 소책자를 팔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씨는 하나님이 자기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다는 매서인의 말에 크게 감동하였다. 그래서 김씨는 목포의 배교동교회에 다니기 시작했고 복음을 받아들였다.
김씨는 장사를 하기 위해서 나무 값이 싼 완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작은방을 얻어 나막신을 만들어 팔았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들은 복음을 전했다. 김씨의 이야기를 들은 선교사들은 완도에 가서 그가 뿌려 놓은 복음의 열매를 거두었다. 그곳 사람들이 모여서 튼튼한 교회가 되었고 오래되지 않아 장로를 세운 조직교회가 되었다.
그후 김씨는 다시 해남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도 완도에서와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김씨는 이 지역에서 교회 개척자로 알려졌다. 이렇게 해서 전남 도서지방의 선교는 이름 없는 김씨의 전도로 시작되었다.
김씨와 같은 초기 신앙인들이 복음을 전하던 주장소는 사랑방이었다. 전통적으로 사랑방은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였다. 초기 전도자들은 이곳을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시작된 복음의 소문은 곧 바로 마을 전체로 퍼지게 된다. 사랑방과 더불어서 중요한 것은 장날이다. 보통 5일마다 열리는 장날은 지역 상업의 중심이었다. 5일장은 한국인들의 삶의 중심이다. 초기 전도자들은 이 장날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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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선교와 구씨 할머니이야기
전라도 순천지역의 선교 역사에 구씨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구씨 할머니는 원래 명성황후의 시녀로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명성황후가 구씨에게 전남에 있는 왕실 소유의 땅을 하사하였고 그의 아들에게는 소작료를 징수하는 책임을 맡겼다.
전라도에 내려와서 살던 어느날 구씨 할머니는 시골길을 지나가다가 “평화,평화,놀라운 평화,하나님 사랑의 선물일세”라는 찬송 소리를 듣게 되었다. 평화는 그가 구했으나 얻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친구의 안내로 예배당을 찾아갔다.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주 보혈 흘려주시고 또 나를 오라 하시니 주께로 거저 갑니다”는 찬송을 부르고 있었다. 구씨 할머니는 이 찬송 가사가 너무 좋았다. 불교는 공덕을 쌓아야 극락에 간다고 가르쳤다. 구씨는 극락에 갈 수 있는 공덕을 쌓고자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배당에서는 “주 보혈 흘려주시고 주께로 거저 갑니다”고 찬송하는 것이었다. 구씨 할머니는 이것은 자신이 찾던 종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온갖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구씨 할머니는 집에 돌아와서 아들에게 “예수를 믿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술주정뱅이인 아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싫었지만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미로 교회에 나갔다. 구씨는 아들과 더불어 온 가족이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 후 구씨 할머니는 추운 겨울에 순천에서 광주까지 걸어서 10일 동안 진행되는 대사경회에 참석,기독교의 진리를 배웠다. 사경회에 참석할 때마다 구씨 할머니는 선교사들에게 순천에 와서 자기 마을의 부녀자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구씨 할머니는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그녀는 백발의 노인이었으나 시골마을을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평화를 주신 예수님을 전하였다. 1912년 순천에 남장로교선교부가 설치돼 본격적인 선교가 시작되자 가장 기뻐했던 사람은 바로 구씨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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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위에서 열린 강화도 첫 세례식
강화도는 전국적으로 볼 때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매우 높은 곳으로 알려졌다. 강화도의 기독교는 이승환이라는 인천 내리교회 신자로부터 시작되었다. 내리교회는 비신자들에게 선교하기 위하여 계를 조직하였는데 그 계원 가운데 한 사람이 강화도 서사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술집을 하고 있던 이승환이었다. 복음을 접한 이승환은 세례를 받고 싶었으나 자신의 직업 때문에 결단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이승환은 부정한 직업인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인 강화도 서사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게 됐다. 그는 고향에서 자신의 노모에게 성경 말씀을 들려주었다. 아들의 이야기를 들은 노모는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세례를 받고자 하였다. 그래서 이승환은 사람을 보내 당시 인천에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 사역을 하고 있던 존스에게 세상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서 세례를 베풀어 주도록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승환 자신은 아직 세례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1893년 어느 날 존스는 배를 타고 강화 서사에 도착했다. 강화 사람들은 여러 차례 서양 군대와 싸웠기 때문에 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존스는 자신의 조사로부터 만일 그가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다면 양반 김상임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이 세례 받은 사람의 집을 불태워버릴 것이라고 협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존스는 이승환에게 노모를 업고 배로 오라고 전갈을 보냈다. 밤이 되자 이승환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개펄을 건너 배에 올라 달빛 아래서 세례를 받았다. 이것이 강화도 최초의 세례였다.
존스 선교사는 이승환의 집을 중심으로 강화도 선교를 확대해나갔고 이것이 오늘날 강화도의 모교회라고 불리는 교산교회가 되었다. 또한 처음에 존스가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반대했던 김상임은 존스의 격조 있는 행동에 감명돼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전도자가 되어 강화도 선교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20)
한국 최초의 순교자 토머스
한국 개신교 최초의 순교자인 R J 토머스는 런던대학의 뉴칼리지를 졸업하고 캐롤라인 고트프리와 결혼한 뒤 곧바로 런던선교회 선교사로 1863년 7월21일 중국으로 떠났다. 같은 해 12월초에 상하이에 도착한 토머스의 중국선교는 계속 순탄치 않았다. 아내는 중국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고 또 중국선교 책임자 무어헤드와 갈등 때문에 선교사직을 사직하였다. 언어에 천재적인 재질을 갖고 있던 그는 세관 통역관으로 취직하였다. 이런 그에게 조선선교의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산둥성 지푸에서 조선선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의 윌리엄슨의 도움으로 조선에 1차 선교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1865년 9월13일 조선 서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2개월반에 걸쳐서 황해도 창린도에 머무르며 한글을 배우면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 한문성경을 배포하였다.
풍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중국에 돌아온 토머스의 마음은 조선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점점 뜨거워져 가고 있었다. 마침 1866년 8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으로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통역관으로 동승하게 되었다.
셔먼호는 황해를 거쳐 대동강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이 소식이 평양감사 박규수에게 들어가게 되었다. 셔먼호는 통상을 원한다고 밝혔으나 평양감사는 청국의 허락 없이는 외교통상이 불가능하다고 통고하였다. 그럼에도 셔먼호는 마침 우기여서 대동강을 따라 계속 평양으로 올라갔다. 평양감사는 조사차 괸헌을 보냈는데 셔먼호는 이들을 가둬버렸다.
그러다가 셔먼호가 썰물 때문에 양각도에 좌초해버리자 조선군이 불 붙은 나뭇단을 떠내려 보내서 셔먼호를 불태웠다. 배에 있던 사람들은 육지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지막에 나온 인물이 바로 토머스였다. 그는 성경을 가지고 뭍으로 나와 자기를 죽이려는 군인 박춘권에게 무릎을 꿇고 성경을 건네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박춘권은 그것을 받지 않고 칼로 그를 처형하고 말았다. 토머스는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지 2년6개월만에 토머스는 이 땅 최초의 순교자라는 영예를 얻고 하늘나라로 갔다.
(21)
말씀으로 가득 채워진 평양 널다리교회
평양은 한국 개신교 최초로 토머스 선교사가 순교의 피를 흘린 곳이다. 이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토머스가 순교한지 수십년이 지난 19세기말 미국 선교사들이 평양에서 선교를 시작할 때도 결코 평양은 쉬운 지역은 아니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기생과 환락의 도시 평양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선교지로 평가를 받았다. 한번 복음이 평양에 전해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이곳에 순교의 피가 열매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토머스를 죽였던 박춘권은 그후 그가 준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어 영주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그 조카 이영태는 박춘권이 준 성경을 읽고 주님을 영접,평양 숭실대학에서 공부하고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의 조사가 되어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성경의 3분의 2를 번역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박춘권에 앞서 대동강변에서 토머스로부터 한문성경을 받은 사람이 있는데 그는 최치량이다. 그는 토머스로부터 성경 세 권을 받았는데 그것이 금서라는 사실을 알고 평양의 영문주사 박영식에게 건네주었다. 박영식은 한문성경을 보고 종이의 질이 매우 좋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도배지로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성경으로 자기집 벽은 물론 방바닥과 천장까지 완벽하게 도배하였다. 아마도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이루어진 말씀의 집일 것이다. 그후 그는 벽에 도배된 성경말씀을 읽고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을 받았고 그의 집에 자주 놀러왔던 최치량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
무엇보다도 흥미있는 사실은 바로 이 집이 뒤에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교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널다리교회가 후에 장대현교회가 되었고 여기에서 1907년 1월 한국 교회 사상 가장 빛나는 사건인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이다. 당시 장대현교회에서는 지역의 모든 교회가 모여서 사경회를 열고 있었고 그 자리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후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며 기독교 중심지가 되었다. 토머스의 순교가 열매를 맺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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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으면 안되는 아펜젤러선교사의 희생정신
아펜젤러는 언더우드와 함께 한국에 최초로 온 복음 선교사였다. 하지만 그는 1902년 6월11일 목포에서 열린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선박 충돌사고로 군산 앞바다에서 익사했다. 아펜젤러는 6월1일 주일에 한국을 방문한 감리교 무어 감독을 안내하여 자신의 담당 구역인 경기도 시흥군 소래면 무지리의 한 교회를 찾아가고 있었다. 이들이 가는 곳에는 일본인들이 주관하는 경부선 철도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이들은 빨리 가려고 철로를 따라서 갔다. 당시 일본인들은 러시아의 첩자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사를 하던 일본인이 무어 감독과 아펜젤러 일행을 러시아 사람으로 오해하고 그들이 철로를 따라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이런 과정에서 큰 충돌이 빚어졌다. 나중에 일본인은 그들이 러시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사과했지만 결국 그 사건은 영사재판으로 이어졌고 아펜젤러는 증언을 해야 했다.
아펜젤러는 원래 6월 첫째 주에 목포에 도착하기로 돼 있었지만 불의의 사태 때문에 예정보다 늦게 오사카 선박회사 소속 쿠마가와호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당시 이 배에는 미국인 탄광기술자 볼비도 있었으며 아펜젤러는 경신여학교 교장 도티의 부탁으로 목포가 고향인 어린 학생과 함께 타고 있었다.
제물포를 출발한 배는 밤 10시쯤 군산 앞바다를 지나가고 있었는데 악천후로 같은 선박회사 소속 키소가와호와 충돌했다. 아펜젤러는 볼비와 대화를 마치고 막 자기 선실로 돌아와 책을 읽고 있었다. 바로 그때 충돌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배는 침몰하고 있었고 볼비는 겨우 구명보트를 잡을 수 있었다. 이런 기회가 아펜젤러에게도 주어질 수 있었지만 아펜젤러는 구조되지 못했다. 볼비는 아마 그가 책임 지고 있었던 정신여학교 어린 학생을 구하려다가 구조 기회를 놓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펜젤러는 조선 어린 학생의 생명을 구하려다가 자신의 목숨을 잃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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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여자들의 가장 기쁜 날
대부분 조선 여자 아이들은 축복 받으며 태어나지 않는다. 여자를 낳았다는 사실 자체가 슬픈 일이다. 이런 조선의 여인들이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런데 기독교는 조선의 여인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목사는 세례를 줄 때 이름을 부르면서 물을 뿌려 예식을 한다. 목사는 세례를 받으러 온 이름 없는 여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이름은 대부분 성서에 나와 있는 이름이었다.
이것은 강 도르가의 간증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여인이 50이 넘은 1898년 어느 날 예수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는 열심히 교회를 나가며 성경공부를 하였다. 그리고 1899년 감리교 선교사 노블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이날은 그녀에게 매우 기쁜 날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더욱 기쁘게 만든 것은 여인으로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었다. 강 도르가는 자신의 간증을 이어간다.
“예수 그리스도가 한국 땅에서 전파되기 시작한 날이 바로 여성들이 수천년 동안의 굴레에서 해방된 날이다. 전통을 따라서 8살 이후로 나의 어릴 적 이름을 사용해본 적이 없었다. 8살 이후 줄곧 이름을 가져본 일이 없다. 생각해보라. 근 50년 동안 이름 없이 지낸다는 것을…. 그런데 나는 나의 세례식날 도르가라는 새 이름을 선물로 받았다. 이 당시 북한에서는 여인들이 여전히 흰 천으로 머리를 두르고 다녔다. 여인들이 세례를 받던 그날,제단 아래 엄숙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을 때 어느 누구도 우리의 흰 수건을 벗겨 내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세례식이 시작되자 노블 박사님이 한 손에 세례 잔을 받들고,다른 한 손으로 머리에 세례를 베풂으로써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었다. 그 옆에는 노블 박사 사모님이 따라오시면서 한 손으로는 머리의 흰 수건을 벗기시고,다른 한 손으로는 새 이름이 적혀 있는 카드를 내밀어주시곤 하였다. 우리가 느낀 그 기쁨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강 도르가는 이날을 자신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이라고 적고 있다. 이날 그는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이름을 갖고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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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으로 몰아낸 술 마귀 이야기
음주는 조선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사실 조선의 음주상황이 다른 나 라 보다 심각한 것은 아니었다. 성공회선교사로 한국에 나와서 활동했던 의사 랜디스는 서울에서 도쿄나 베이징보다 술 취한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고 말했다.그는 ‘술 취한 사람에게는 길거리가 좁다’는 일반적인 표현이 한국에서는 ‘술 취한 사람에게는 하늘과 땅이 동전처럼 보인다’는 말로 대치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한국에서 음주벽은 도박과 결합되어 있다고 지적했다.선교사들은 처음부터 금주운동을 철저하게 전개하였다.이것은 초기 한국교회의 선교사들이 19세기 미국의 대각성운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19세기 미국 대각성운동은 절제운동으로 이어졌고,절제운동의 핵심에는 금주운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선교사들은 음주를 참된 그리스도인이 지켜야할 의무로 강조하였다.초기 선교사들은 술을 먹는 것을 금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술을 생산하고,판매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선교사들은 금주운동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금주가를 만들어서 부르게 하는 것이었다.감리교 선교사 노블 부인이 지은 금주가의 일부를 요즘 말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술은 어린 영혼을 죽게 하니,먹는 자 결단날 줄 아나니/ 만지지 마라.만지지 마라.잔을 만지지 마라/그 속에 있는 줄 몰라,죽음 주는 잔을 삼가고/소경 같이 구렁에 빠진다.맛보지도 말아라./방울만큼도 마시지 말고,사랑하는 자의 권면도 듣고/만지지 말고,마시지 말라.잔을 마시지 말라./네 집을 위하여 먹지 말고,하나님과 나라를 위하여/친구 위하여 그만 두어라.잔을 마시지 마라.’
부흥회는 술을 끊는 좋은 계기가 되곤 하였다.1907년 부흥기간 동안에 감리교신자들 가운데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그는 교회에 나왔으나 술만 먹으면 부인과 아이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하였다.그러던 중,부흥회 기간 중에 큰 은혜를 받았다.그는 술을 끊고,온전하게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자 소위 ‘술 마귀’는 도망가게 된 것이다.우리는 한국교회사에서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던 술 문제가 성령을 받음으로 해결된 사례를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