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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고찰

작성자고재봉|작성시간22.10.28|조회수217 목록 댓글 0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고찰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기독교와 로마 국법
Ⅲ. 박해의 요인들
Ⅳ. 기독교의 방어
Ⅴ. 박해의 범위
Ⅵ. 나가는 말
 
Ⅰ. 들어가는 말
      기독교가 생긴 후 약 300년간은 박해와 위험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 300년 동안에 기독교는 로마제국을 정복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 성장의 씨가 되었다. 로마 제국의 박해가 심해서 고통이 클수록 또한 열매도 많았다. 그 고통 속에서 교회는 성장했기 때문이다. 박해가 그치고 기독교가 로마 제국 내 전역에 걸쳐 견고한 터를 잡고, 왕위에는 기독교인 왕이 자리하고 교회의 위치는 안전하게 확보되었을 때는 오히려 기독교인이 안 되므로 불리하고 위험한 일이 생겨났다.


      본 장에서는 기독교가 어떻게 하여 위법의 종교가 되어 고발되었으며 박해가 일어났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교회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는 두 시기로 나눈다. 첫째 시기는 주후 64년 네로 황제 치세하의 박해로부터 주후 250년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때까지이고, 둘째 시기는 데키우스 황제로부터 콘스탄틴 대제가 박해를 종식시킬 때까지이다(주후 313년에 서부에서는 끝이 나고 동부는 323년에 끝났다). 이 장에서는 주후 64년부터 250년 사이에 일어났던 박해를 정리해 볼 것이다.1)
 
Ⅱ. 기독교와 로마 국법
      로마 제국은 막대한 판도를 가진 대제국으로 이 거대한 제국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지방의 풍속, 종족들의 법, 종교적 신앙과 백성들의 정치 제도를 인정해 주고 있었고 이것이 로마 제국의 정치의 기본적 방침이 되었다.


   1. 불법의 종교
      주전 27년부터 아구스도 황제 한 사람의 손에 의해 로마 제국은 지배되고 그의 권력의 손은 견고했으며, 한층 더 그 권력을 강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국 내에서는 황제에 대한 종교적 숭배 사상이 대두되어 제국 내 모든 종족으로부터 정치, 경제, 군사, 사회 각층 각 분야에서 권력을 행사하여 지지를 받고 있던 황제가 차츰 그들의 신이 되었고, 구별된 성소에서 경배하는 데까지 이르러 이 황제 숭배는 강력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결국 황제의 권위와 위신과 위엄을 나타내는 종교적인 의식이 행해지게 되었다.


      황제 숭배는 고대 신들의 예배와 병행했으나 거기에는 가르치고 배워야 할 교리는 없고 다만 공적, 사무적 행사 일뿐이었다. 국가는 이들 종교를 합법적 종교라고 했으며, 황제 숭배보다는 오히려 우상 종교가 그들의 매일의 영적 요구를 만족시켜 주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황제 숭배를 인정치 않는 종교는 불법적 종교로 간주 되었다. 제국 내에서 유대인들은 예외적으로 황제에게 절하도록 강요당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전체적으로 대단히 번성했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유력한 집단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으로 잘 조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일신에 대한 유대인들의 신앙에 로마 제국은 관용을 베풀었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내에서도 두드러지고 구별된 백성이었다. 고로 유대인으로 귀화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로마 제국이 유대인을 대항해서 정치적 제재나 무력으로 다스린 때는 종교적 이유가 아니라 반란이나 다른 위법 사건 때문이었다.


      기독교는 발생 후 30년 동안은 로마 정부의 유대인에 대한 정책 때문에 덕을 보았다. 처음에 기독교는 다만 유대교로 취급되어 공적 입장에서 유대인과 같은 대우를 받았다. 비록 전통적 유대인과 유대 기독교인 사이에 알력이 생겼을 때에도 로마 정부는 이것을 유대인 사이의 분쟁 정도로 보았다. 그 예를 아가야의 로마 총독 갈리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한 바울에게 유죄 판결을 요구했던 유대인들의 설득에 대한 갈리오의 답변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행18:14-16).
 
   2. 불법의 종교로 고발된 기독교
      기독교가 전파됨에 따라 이방인들이 유대교보다는 기독교에 다수로 개종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결국 로마 정부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를 알게 되었고, 유대인들의 조직력과 유력하고 부유한 것에 비하여 일반적으로 적고, 가난하고, 위력이 없는 것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황제 숭배의 반대자에 대해서는 정부로 하여금 기독교가 불법의 종교인 것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이때부터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하는 생활과 재산과 자유를 잃고 생을 모험에 걸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이 주후 64년 네로 황제가 로마에서 그리스도인에 대한 첫 번 박해를 시작했을 때의 상황이다.
 
Ⅲ. 박해의 요인들


   1. 박해의 기본적 원인: 황제 숭배 거부가 무신론자로 오해됨.
      기본적인 이유는 교회가 황제 숭배를 하지 못하도록 금한 데 있었다. 그로 인하여 미움을 받고 투옥되었고, 고도에 유배되기도 하고, 광산에 노예로 쫓겨 가기도 하고, 공중 앞에서 사자들에게 던져지고, 칼에 베임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개적인 박해가 제국 내 지역과 지방 사정에 따라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위험 가운데 있었다. 황제 숭배를 한다는 것은 다신교와 우상 숭배를 찬동한다는 뜻이 된다.


      황제 숭배에 있어서 로마인들은 옥타비안, 클라디우스, 하드리안이라 불리는 자연인 인간에게 경배하는 것이 아니었다. 신으로 나타난 황제는 로마 국가의 실제적인 구현이었다. 권력과 힘과 역사와 제국의 영광이 집약된 것이었고, 황제 숭배의 깊은 뜻은 곧 국가에 대한 경배였다. 황제는 국가의 존엄과 위엄과 위대함의 대표였고 국가 그 자체였다. 교회가 황제 숭배를 거절하는 것은 황제(국가)를 신의 위치에 두고 신으로서 경배하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에게는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사람에게나 사람이 만든 제도에 나누어 줄 수 없다는 신앙이 있었다. 어찌 됐든지 경제적 번성과 가정의 평화와 모든 변방에서의 승리 등이 공히 국가와 신(황제)으로부터 흘러들어 오는 것으로 믿는 로마 제국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황제 숭배 거절은 그들에게 증오와 보복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이 결과로 기독교인들은 로마인에게 무신론자로 고발되었다. 왜냐면 기독교인들은 인간신 황제와 잡신들을 경멸했기 때문이다. 만약 기독교회가 로마 제국의 상황에 타협했더라면 십중팔구 박해는 없었을 것이다.
 
   2. 박해의 부수적 원인들
      1) 기독교인들이 인류를 증오하는 자라는 오해: 많은 기독교인들은 군대 복무나 정부 관리직 수행을 거절해 왔고, 공적 집회나 극장에 가기를 거부했고, 심지어 자녀를 지방 학교에 보내는 것을 거절했다. 또한 세계의 종말이 왔다고 설교했고, 제국 내 다른 종교의 신들을 조롱했으므로 이교도의 증오를 샀다. 더 나아가 제국 내의 모든 재앙은 황제와 잡신들에 대한 경배를 거부한 기도교인들 때문이라고 믿는 이교도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미움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2) 종교적 집회에서 부덕한 죄를 짓는다는 오해: 사람의 고기를 먹으며 피를 마시며 음란한 행위를 하되 특별히 근친상간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독교인들은 친교나, 기도의 목적으로 종종 밤에 만났다. 비밀의 모임에서 성찬이나, 예배 가운데 거룩한 입맞춤으로 성도의 교제를 가진 것이 낭설의 이유였다.
      3) 국가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오해: 교회는 광범한 지역에서 감독들을 중심으로 조직이 점점 강화되었다. 기독교인들은 제국의 법과 교회법 사이에 어떠한 마찰이 생겼을 때는 교회법에 순종했다. 그들 자신을 “그리스도의 정병들”이라고 했다. 그 결과 로마 제국은 기독교인들의 교회조직을 통한 폭동의 위험을 느꼈던 것이다.
      4) 기독교 경전은 자가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오해: 기독교는 제국 내 고대 종교들에 비해서는 젊고, 일요일은 거룩한 날로 정해서 일하기를 거부한 것을 비난하였다. 예수의 부활을 제자들이 꾸며 낸 것이라 하였고, 예수가 신이라면 불법적 출생 방법,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된 점, 가난한 생활, 십자가의 죽음 등이 있을 수 있겠는가 했다.
 
   3. 그리스도 이름에 대한 박해
      이상과 같은 고발들의 결과로써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받았다. 그들의 행실보다는 단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름만 지니고도 박해 받을 이유가 충분했다. 벧전 4:14-16을 보면 그 사실이 명백해진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박해는 정치의 소중한 일화를 남기게 했다. 소아시아 비두니아의 총독 플리니와 트라잔(주후112년경) 황제 사이에 주고받은 유명한 편지를 보면 “그리스도인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승인 여부에 따라 형벌의 집행 여부가 결정된 사실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은 결국 황제(로마신) 숭배에 대한 거절로서 자신의 신앙에 대한 절개를 표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Ⅳ. 기독교의 방어
      박해의 시작으로부터 주후 250년 사이에 많은 변증가들이 나타났다. 변증가들은 황제 앞에서 천명하기도 하고, 유력한 개인이나 원로원 의원과 로마인에게 천명하기도 했다. 이들의 논설은 기독교의 교의를 고수함에 사용되었다. 변증가들의 논증은 다음 네 가지 중요한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 기독교를 정당하게 취급하는 정치인들에게 호소하는 내용
      - 이방 종교의 신앙을 가진 자들을 공격하는 것
      - 기독교의 신앙과 생활 방식을 표현한 것
      - 기독교를 정당화하는 신학적 개념을 기록한 것
 
   1. 정당성 호소
      저스틴 마터는 기독교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신앙심이 있는 철학자들과 정의의 수호자들과 지식의 애호가들에게 기독교의 아름다움에 귀를 기울이도록 호소하고 있다. 그는 황제 안토니우tm 피우스와 그의 아들들과 로마 원로원들과 로마 시민에게 부당하게 미움을 받는 모든 소수 민족들을 대신해서 말한다. 즉 기독교인들을 유죄로 고발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선동자들의 고의적인 비난을 듣는 것은 옳은 판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선한 재판을 당부하면서 “고의적으로 진리를 알면서도 정의를 행할 수 없으므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고 경고하기도 한다. 그는 특히 단순히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때문에 박해를 가하는 정치가들을 비난하며  “그가 범한 악한 행위 때문이 아니고 단지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때문에 징벌을 가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가!”라고 지적한다.
 
   2. 이방신에 대한 공격
      기독교의 반대자들이 미신적이고 부도덕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공격할 때 변증가들은 날카롭게 대답한다. 특히 우상 제조자들은 부도덕한 자들이며 악습에 능한 사람들임을 말한다. 저스틴 후 50년 지난 다음에 터툴리안은 그의 「변해서」에 이교도적 제사들과 제물이 바쳐지는 우상들에 관하여 조롱한다. “트로아와 그리이스 신들이 한 쌍의 검투사들처럼 싸우고 있는 것을 비너스 그녀의 아들 이니어스를 구하려다가 사람에게 상처를 입었다. 마얼즈(군신)는 거의 13개월이 넘는 투옥 생활 때문에 다 허비해 버렸다. 그래서 주피터는 부정스럽게도 자기의 누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3. 기독교인의 신앙과 생활의 실천
      주후 150년경에 쓰여진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편지」의 저자는 아버지가 말씀을 이 세상에 보낸 일에 대하여 “하나님으로, 사람으로, 사랑하기 위해 인격적인 분으로 보내셨음을 말하면서 장차 심판을 위해서 보내실 아들의 오심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역설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섬겨야 할 하나님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품에 관해서 터툴리안은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말씀을 가지고 명령하시는 한 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초월한 지혜는 이 세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하나님은 영이시니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은혜를 주시는 것은 확실하지만 불가해한 분이시다. 비록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이해하지만 우리의 사고를 초월한 분이시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위대하시다...그런데 인생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 죄악이다”고 말한다.
 
   4. 신학적 논쟁
      저스틴 마터는 기독교가 짧은 역사의 종교라고 인정받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 논거에서 그는 지적하기를 기독교가 구약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을 잊었느냐고? 그것은 모세에게, 아브라함에게, 아담에게, 그리고 창조 역사까지 소급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람이 된 말씀은 세상의 시초부터 활동했다. 제국 내의 황제나 지도자들이 그들에게 일러 준 변증서들을 읽었는지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변증가들은 중요한 목적을 제공했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지성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으며, 주님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변증서는 큰 힘이 되었다. 오늘날에도 변증서들은 다른 시기의 교회를 이해하게 하고 종교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를 식별하도록 하며 당하는 고난이 전연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Ⅴ. 박해의 범위     
   1. 박해의 정도
      박해에 관한 정부의 사무적 입장과 그 입장의 사무적 집행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많은 지방의 관리들은 이 법의 본의에 대해서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박해가 시작될 때부터 주후 250년경 데키우스 황제 때까지의 박해는 지방에 따라 달랐다. 주후 202년경 세베루스 황제는 그리스도인으로 개종하는 것을 용서했다. 그에 반하여 맥시미우스(235-238) 황제는 성직자들을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했다. 여하튼 그들의 법령은 단지 부분적으로 실행되었다. 어떤 황제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하여 중립적이었다. 또 어떤 이들은 호의를 가지기도 했다. 260-305년 사이에는 완전히 박해가 쉬었다. 251년 데키우스 황제와 257-259년 발레리안 황제 치하에서는 박해가 제국 내에서 넓게 퍼졌으나 곧 종국이 왔다. 디오클레티안 황제와 그의 후계자 치하에서는 다만 서부에서 약간 존재했으나 주후 323년까지 동부에서는 그치지 않았다. 이 박해의 마지막 시기는 최고의 박해였다. 계속적인 박해가 있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그러나 250년간 다양한 방법으로 혹독한 박해가 여러 차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2. 간접적 박해
      박해에는 계속적인 고난, 투옥, 죽음을 부과하는 드러난 박해가 있는가 하면 다른 유형의 것이 있다. 제국 내 기독교인들은 법 앞에서 다른 시민과 같이 동등하지 못했다. 기독교인들은 인류의 대적으로, 나쁜 시민으로, 불충성된 사람으로 지목받고 있었다. 또한 비호의적 태도를 참아야 했고 정의에 어긋난 불공평한 지배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일할 수 있는 특권에 대한 불공평한 차별과 사회적 지위를 공평하게 얻지 못했다.
 
Ⅵ. 나가는 말
      하나님의 나라의 현현으로서 교회는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추적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에서 합법적 종교에서 불법적 종교로 변해가는 과정은 결국 이방인들의 다수가 개종하며 교회의 규모가 성장했기 때문이며, 이러한 현상은 단지 외적인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불러지기에  합당한 신앙의 고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해의 중심된 원인에 있어서 황제 숭배는 실제적으로 그 신앙을 시험하는 시금석이었다. 무신론적이며, 비도덕적 내지는 인간 증오 그리고 비애국적이라는 오해는 제국의 상황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상황에 대한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혜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보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대한 변증가들의 변증은 기독교의 탁월성을 보여주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기독교적 변증은 이교도 내지는 이단들의 공격으로부터의 신앙을 보수하게 하였고,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고자 하는 신도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는 정치적 역학 관계에서 하나님의 신성한 권위를 의식하고, 문화 전반에 걸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이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향해 매진해야 함을 교훈 받는다. 교회는 언제나 그 책임의 중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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