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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교회의 분리

작성자뉴부산|작성시간23.04.21|조회수162 목록 댓글 0
동서교회의 분리          

오늘날 우리는 서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쪽의 희랍 정교회가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다. 이 두 개의 교회는 왜 분리하게 되었는가? 알려면 이것은 로마제국의 역사를 이해하게 될 때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여기서는 그 과정을 살피기 위해 제국의 역사와 교회와의 관계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로마제국의 쇠퇴


로마 황제 콘스탄틴이 A.D. 330년에 그의 수도를 이탈리아 로마에서 그리스의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던 얘기는 이미 언급하였다. 그런데 여기 황제의 천도 후에로마는 정치적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그 이후로 동로마에 가 있는 황제들은 전에 수도였던 서로마에 대한 정치력을 발휘하기가 매우 제한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결국에는 동서 로마제국이 395년에 분리하게 된다.


그런데 서로마제국은 계속 야만족들에게 침략을 당한다. 410년에 비시고트족(Visigoths)은 발칸반도 일대를 휩쓴 후에 로마를 점령하였다. 415년에는 스페인까지 침공하여 8세기까지 통치하였다. 그동안 로마에는 모두 34명의 왕이 있었는데 그중에 15명만이 자연사를 했거나 전사당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암살되거나 또는 퇴위를 당하였다.
또 455년에는 반달족이 로마시를 약탈하였다.


이때 로마의 참상은 고트족의 침략 때보다 더욱 혹심하였다. 이 같은 야만족의 침략은 이탈리아에 무정부 상태를 초래하였다. 비록 명목상으로는 서로마제국의 왕들이 있기는 하였으나 왕은 그 기능을 전혀 발휘할 수가 없게 되었다.


476년에는 게르만족의 헤루리(Heruli)인 장군 '오다에케르'(Odoacer)가 서로마의 최후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iulus)를 폐위시키고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의 황제인 '제노'(Zeno)에게 통보를 하였다. 이로써 로마제국은 476년에 게르만족에 의해서 역사의 장을 닫게 된다.


이 이후로 서로마교회의 감독들 여러 명이 순교를 당한다. 그러나 동로마의 비잔틴 제국에서도 서로마의 멸망을 바라만 보고 그냥 지낼 수 없었다. 그래서 동로마의 유스티니안 황제는 '베리사리우스'(Belisarius) 장군을 서로마에 보내어 이탈리아를 평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20년간에 걸친 전쟁으로 오스트로고토(Orstrogoths)족을 멸망시켰다.


그러자 568년에 롬바르드족이 다시 이탈리아를 침략해 왔다. 그런데 이때에는 동로마의 비잔틴 제국도 세력이 약화되어서 서로마를 도울 수가 없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서로마제국은 5세기부터 8세기까지 계속하여 침략자들의 침공으로 혼란이 거듭되게 되었다. 여기서 소위 교황청 사람들은 자기들 도움을 동로마가 아닌 북쪽의 프랑크족 (이들이 프랑스라는 이름이 연유된다)들과 동맹 관계로 발전되게 된다.


이 같은 로마제국의 쇠퇴는 교회에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하나는 수도원 주의의 강한 등장이고, 다른 하나는 교황청의 교황 제도의 등장이다.


2. 교황청의 부상


교황권 제도의 발전 과정은 앞서 제13장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교황(Pope)이란 말의 원뜻은 '아버지'(father)를 의미하는 것으로 초기 교부들이나 감독들이 교황이라고 불러졌었다. 예컨대 칼타고의 키프리안을 교황이라고 했고, 또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도 교황이라고 했다.


결국 서방교회에서는 단지 로마 감독만을 교황이라고 부르도록 국한시켰으나 동방교회에서는 후대까지 계속 사용하였었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 감독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으로 군림하게 되었는가 그것이 문제이다.


로마 감독만을 교황이라는 호칭을 쓰려고 시도한 사람은 레오 1세였다. 레오 1세는 그가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그 같은 일을 진척시켜 나가는 데 크게 힘입은 것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으나 이탈리아 로마는 천도 된 후 계속 야만족들에게 시달림을 당하였다.


452년 흉노족인 '아틸라'(Attila)가 쳐들어왔을 때 그와의 담판으로 침략 위기에서 모면하였다. 또 455년 반달족이 침략했을 때 레오는 젠세력이라는 적의 지도자와의 협상으로 로마의 방화를 저지하였다.


이 당시 로마의 관리들이 있기는 했으나 그들의 기능은 거의 마비 상태였고, 교회 감독이 국가문제에 크게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 같은 정치적 상황에 힘입은 레오는 로마교회가 예수님의 후계자인 베드로에 의해 세워졌으며, 로마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모든 교회의 뿌리이므로 감독을 '우주의 아버지'인 교황이라고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 후에 다시 베네딕트 1세(579, Benedict I)는 롬바르드족 침략 때 사망하였고, 그 뒤를 계승한 펠라기우스 2세(Pelagius II)는 적군들에게 뇌물을 주어 도시를 구하였다. 펠라기우스 2세는 롬바르드족에 의해 짓밟힌 로마시 재건을 위해 도시 위생시설을 개선하고, 전염병으로 죽은 시체들을 매장하고 굶주린 주민들에게 양식을 배급하는 데 노력하다가 결국 자신도 전염병으로 죽게 된다.


그 후 그레고리가 등장하여 교회의 감독만 아닌 로마시의 모든 행정을 도맡아 처리한다. 이 그레고리가 로마 시민들의 절대적 신임을 활용하여 로마 감독은 서방교회 전체의 통치자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스페인과 잉글랜드를 자기 영향권 안에 두었다.


서로마교회는 비잔틴 제국인 동로마보다는 북방의 프랑코 왕국과 동맹 관계를 맺고 도움을 얻으려고 한다. 그래서 교황과 프랑코 왕국과는 밀접해진다. 이 같은 때 '자카리아스’ 교황이 프랑코의 '칠디릭' 3세가 바보이기 때문에 그를 폐위시키고 그 대신 페핀을 왕위에 앉히는 데 공헌한다.


그 후 자카리아스 교황이 죽고(752년) 후계자인 스테픈 2세(Stephen II)는 페핀 왕에게 교황청이 수고한 대가를 받아 낸다. 페핀 왕은 자기를 왕으로 앉혀준 교황청에다 롬바르드족으로부터 탈환한 수 개의 도시들을 교황에게 양도한다. 이때부터 교황들은 막대한 영토를 소유하는 통치자가 되게 된다.


이 무렵 8세기에 콘스탄틴의 기증(Donation of Constantine)이라는 위조 작품이 나온다. 그 내용은 콘스탄틴이 A.D. 330년에 천도 시에 자기가 사용하고 있던 '라테라노 궁'(Laterano)과 로마의 토지와 이탈리아 전 지역을 기증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콘스탄틴이 324년에 실베스터(Sylvester)에게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라테라노 궁은 원래 로마 원로원의 의관이었던 라테라노 가의 소유였다. 그런데 네로 황제는 그를 모반죄로 몰아 죽여버리고 그 저택을 소유하였다. 그 후 황제들의 소유로 전승해오다가 330년 이후부터는 교황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이 라테라노 궁은 천여 년 동안 증축을 거듭하며 역대의 교황들이 주재하였다.


그러다가 1377년에서부터 지금까지 바티칸 궁에서 교황들이 거하고 있다. 하여간 콘스탄틴이 기증했다는 사실부터 황제가 많은 영토를 하사했다는 주장은 그 당시가 아닌 8세기 때 프랑코 왕 '페핀'이 땅을 주는 무렵부터 생겨진 거짓 문서이다. 이것은 감독의 독립과 특권을 한층 드높이려는 조작에 의한 위조 작품이다.


그리고 교황청이 결정적으로 부상하게 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A.D. 800년 성탄절에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누'라고 불리운 프랑코 족 찰스에게 그 머리 위에 관을 씌우며 그를 서방제국의 황제라고 임명하였다. 이것은 교황이 황제를 임명하는 최초의 역사였다. 이로부터 교황은 세속 황제들을 자기 권한에 두려는 교황권 지상주의가 시작된다.


그뿐만 아니라 로마교회는 그레고리 3세(731-741, Gregory III) 때에 이르기까지는 교황이 선출되면 반드시 동로마 콘스탄티노플 황제의 재가를 받아야만 했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이 800년에 프랑코 왕 '사률마누'를 왕으로 임명하면서부터 동로마와 관계가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교황청은 이제 프랑코 왕국과 동맹 관계가 되었다는 것을 정치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이렇게 교황청의 부상은 모든 것이 정치적인 상황과 연관된 시대적 산물이었다.


3. 동서교회의 분리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회(Roman Catholic Church)와 희랍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로 분리된 것은 위에서 설명한 대로 두 개의 로마제국이 분리된 것이 큰 원인이었다. 이제 동서교회의 분리과정을 살펴보자.


(1) 정치적으로 멀리 395년에 동서 로마제국이 분리되어 힘을 잃다가 드디어 476년에 서로마제국의 멸망으로 동서 간의 관련성이 희박하게 되었다.
(2) 또 AD800년에 교황이 프랑코 왕에게 왕관을 수여함으로 교황청과 동로마제국과는 정치적으로 무관함을 선언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제국 간의 전쟁으로 인종들의 이동이 심해 인간성의 차이들에서 오는 정치적, 문화적 차이가 한 요인이 되었다. 즉, 헬라어를 사용하는 동방교회는 철학적이어서 계속하여 많은 논쟁이 쉴 사이 없이 벌어졌다.
그에 반해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방교회는 실제적이어서 실제 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니케아신조 중에 '성령이 아들로부터 나왔다'는 산출적 로고스 조항 때문에 동서교회가 계속 불만을 갖고 있었다.
(4)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 교황과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와의 교권 쟁탈싸움 때문이었다.


문제의 시작은 콘스탄티노플교회에서 비롯된다. 콘스탄티노플의 대 감독장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있었다. 그는 동로마 황제 미가엘 3세의 외숙인 '바르다즈'(Bardas)의 불륜함을 들어 교회 성찬식 참예를 금지시켰다. 이에 황제는 진노하여 이그나티우스를 반역자로 몰아 투옥시켰다. 그리고 '포티우스'(Photius)라는 호위 병장을 대감독으로 앉혔다.


그러자 모든 국민들은 이그나티우스의 파면에 불만을 품었고, 이에 대해 황제에 대한 격심한 반대가 일어났다. 미가엘 3세 황제는 드디어 861년에 콘스탄티노플에 지방대회를 열고 이 사건을 토의하기로 했다. 그리고 로마 교황 니콜라 1세도 이 회의에 가담하여 이그나티우스를 면직하고 포티우스를 인정하게 된다.


이그나티우스는 자기의 억울함은 콘스탄티노플에서의 회의가 아닌 서쪽 로마 대회에서 재심할 것을 로마 교황에게 신청한다. 이에 교황 니콜레 1세는 다시 로마에서 지방대회를 소집하여 이그나티우스가 옳고 그만이 대감독이며, 포티우스가 감독으로 있는 상태에서 그를 파면하도록 가결했고, 만일 불응시에는 출교하기로 결정했다.


포티우스는 다시 콘스탄티노플의 지방대회를 소집하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은 대등한 교회임으로 로마교회의 결의를 수용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포티우스는 두 번에 걸쳐 대감독이 된다 (850-867, 878-886).


그는 재임 중 동방교회가 서방교회와의 독립을 강력하게 추진한다. 그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의 대감독들과 함께 로마 교황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교황의 비리와 신학적 잘못들을 지적하여 교황의 면직과 출교를 선언하였다.


그러자 로마 교황은 동방 헬라 교회의 비난을 무효라는 답서를 발송하였다. 이와 같이 동,서방 교회의 반목은 여러 해를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11세기에 와서 투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즉, 콘스탄티노플의 대 감독장인 미카엘 세루라리우스(1043-1058, Michael Cerularius)가 콘스탄티노플 안에 있는 교회들중에서 서 로마식을 따르는 라틴풍의 예배를 드리는 교회를 폐쇄하고 수도사들을 축출하였다. 여기에 불가리아 대감독도 호응하여 이탈리아 교회들의 오류를 지적하고 라틴교회의 부정을 폭로하였다.


로마교회 교황 레오 9세는 이를 반박하였고, '홈벌트'(Humbert)를 단장으로 하는 사태수습 사절단을 콘스탄틴노플로 보낸다. 로마 교황을 대표한 훔벌트는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 세루라리우스와 모든 중재 노력이 실패하자 1054년 7월 16일 동방교회의 대표적 교회인 소피아 교회의 상제단 위에 교황의 이름으로 파문장을 던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세루라리우스 역시 로마 교황에게 파문장을 보냄으로 응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동서교회는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오늘까지 분열의 상태에서 서로 제 갈 길을 가고 있다.


그 후 1274년 리용에서 1439년 플로렌스에서 동서교회가 다시 합치려 했으나 효과를 얻지 못하였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터키에게 함락된 후부터는 양교회는 아무 노력도 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이렇게 하여 동방의 희랍정교회와 서로마 가톨릭교회는 결국 서로가 자기 권위를 세우고 상대방을 지배하려는 인간 욕구의 결과로 생겨진 유산물이 되고 말았다.


신약교회 성도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섬기고 봉사하려고 하였다. 지도자들 베드로나 요한이나 바울에게서는 전혀 이 같은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을 섬기기보다는 남을 지배하려는 욕구가 온갖 종교적 술어로 가리워진 채 오늘까지 그 모습이 진행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소위 교회 정치가들의 이 같은 작태를 그대로 모방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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