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찬송가의 음악적 형태

작성자고재봉|작성시간24.01.07|조회수15 목록 댓글 0
찬송가의 음악적 형태    

찬송가의 가사는 시이다. 찬송가의 시는 교육정도가 낮은 교인들도 그 뜻을 쉽게 알 수 있는 시가 되어야 한다.


찬송가는 또한 노래요, 가곡이다. 이 노래는 예술가곡이나 다른 노래와는 다르다.
찬송가는 음악적인 지식과 교육이 전연 없는 사람들까지도 함께 부르기 위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찬송가의 시는 음악의 선율을 타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파고 든다.


만약 그 시가 음악의 선율이 감당하기 힘들만치 지나치게 무거운 가사라면, 멜로디가 이를 감당하지 못한다.
그와는 반대로 음악이 가사를 정복하고도 남을 만치 강력하고 아름다운 선율일 경우에는 가사의 내용이 아무리 시시하다
하더라도 사람들의 정서에 강력한 호소력을 갖게 된다.


찬송가는 많은 교인이 함께 부르는 노래로써 민요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람들은 민요를 부르면서 그것이 누구에 의하여 작곡 되었고, 어느때 노래인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우리에게 감흥을 주는 것이 민요이다. 많은 훌륭한 음악가들도 민요를 대단히 아름다운 노래로 인정하고 있고 자신들의 음악에 끌어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독일 가곡이나 한국 예술가곡은 음악적 교육이 잘 되어 있는 사람들에게만
좋은 노래이지만 민요는 누구나 좋아하는 노래이다.


세속적인 민요의 가사는 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경험할 수 있고, 같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을 가사로
하고 있다. 그들의 기본적인 내용은 사랑과 노동과 죽음이다. 민요는 이와같은 인간의 경험을 일반화 시킨것이다.


"찬송가사의 내용"에서 언급한 시에다 민요와 같이 가장 단순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쉽게 받아 들일 수 있는 선율을
붙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작곡자의 음악적인 영감이 토착화라는 개념에만 사로잡히게 되면 그는 영감적인 찬송가를 작곡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기능과 작곡학적인 지식을 작곡이라고 하는 노동을 통하여 하나의 찬송가를 조작해 내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이렇게 지식과 작곡기능에 의하여 조작된 찬송은 그것이 비록 토착화된 찬송이라 할지라도 교인들로부터
애창되지 못하고, 그 찬송은 작곡이 끝난 날로 부터 사장 되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찬송가는 기독교인의 민요이여야 한다.


토착화된 음악이 어떤것이냐에 대해 모든사람이 다 납득 할 수 있도록 정의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국악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한국 교회음악의 토착화는 국악화 하는 것으로 정의 하려고 한다.


"국악기로 연주 되어야 하고 창으로 연주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서양음악에 오랫동안 종사 한 사람들은 "작곡자의 마음에서 울어나오는 신앙고백적인 선율이면 되는 것이지 구태여 국악과 한국민요의 선율과 리듬을 빌려와야만 토착화가 되느냐?" 하고 반문한다.


그런데 1984년 2월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국악 작곡가와 서양음악 작곡가들에게 각기 찬송가 작곡을 의뢰 했었던 바
국악인은 서양식으로, 서양 음악인은 국악식으로 작곡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다시 말하면 국악인은 서양음악 쪽으로 돌아 서려고 하는 의식이 있었고, 서양음악 작곡가들은 국악쪽으로 돌아 갈려고
하는 의식이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본것처럼 한국 교회음악의 토착화의 과정에서 음악이 가지는 범위는
극단적으로 서양적인 것과 극단적으로 국악적인 양극 사이에 서양음악의 국악적인 경향과 국악의 서양적인 경향까지
합쳐서 다양함을 발견하였고 그중 어느것 하나가 옳다는 결론은 내릴 수가 없었다.


민요는 평범한 시민들에 의하여 불려질 수 있고 계속 불려지기만 하면 민요가 되듯이 토착화된 찬송가가 어떤 것인지는
교인들이 계속 불러 주는 것으로 결정지어질 것 같고 거기에 의해서만 토착화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찬송가는 다른말로 기독교인들이 부르는 민요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지나친 민요화는 삼가해야 할 것이다.
민요는 공동체 안의 사람들에게 가장 의미 있는 것을 노래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순자가 한나라의 정치를 알고져 할때는 그 나라 국민의 음악을 보면 알수 있다고 한것과 같이 어느 교회에서
어느 찬송가를 가장 좋아하느냐를 알게된다든가, 또는 어떤 특별한 찬송에 물들어 있느냐를 알게 되면 그 교회와 그 교회
목사가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추리해 낼 수 있다.


이와같이 추리해서 얻어진 결론은 추측이 아니라 정확한 판단이다.
그러므로 찬송가 작곡가의 책임은 교인들을 선도할 수 있도록 찬송가를 작곡 하여야만 한다는 점이다.
즉 자기가 작곡하는 음악 뿐만 아니라 찬송가사의 선택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할 책임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는 민요의 기준에 도달한 찬송가가 있다.
부흥회에서 자주 부르는 복음찬송가 중의 몇개는 세속 민요와 같이 되고 말아서 그 찬송가사가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불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교인들은 스스로 무슨 노래를 부르는지 알기도 원치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찬송가를 부를때 일반적으로 가사에 관심을 갖지 않고 가사보다는 선율에 만족감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사랑하심은 "은 10여년전만 해도 주일학교에서 너무 많이 불려져 민요화 되었고, 그러므로 이 찬송은 완전히
손상을 입은 찬송가가 되었다. (특별히 "예배당에 갔더니..." contrafactum) 그러므로 찬송가의 지나친 민요화는 작곡자
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삼가 해야 한다고 본다.


찬송가의 지나친 민요화라든지 극단적인 국악화는 교인들에 의하여 환영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음악이나 유교음악을 예배에서 쓸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그와같은 음악을 사용했을때 교인들이 어떤 기분에 젖게
되느냐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음악을 통해서 기독교 보다도 불교나 유교를 더 생각하게 된다고 하면 그러한 토착화는
교회의 비판으로 부터 살아 남을 가능성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토착화는 이루워 지지 않을 것이다.


교회음악 역사를 보면 이와같은 예를 찾아 볼수 있다. 즉 유대교와 초대 기독교에서 예배중 기악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
했는데 그 이유는 각 악기가 사용되어온 용도에 따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이 있는 데 어떤 악기는 전통적으로
이교도들이 사용했기 때문에 그것이 기독교 예배에서 사용되어지면 이교도가 갖는 예배의 의미를 교인들에게 부각
시켜준다 하여 악기 사용을 반대해 왔었다. 오늘날 우리가 섹스폰의 음색을 들을때 캬바레의 춤이나 술집을 연상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악기를 예배에서 사용하는 것을 꺼린다.


기독교에서 목탁을 가지고 예배를 볼 수 없는 것도 이와같은 이치이다.


이와는 반대로 세속적인 사랑의 음악을 그대로 가사만 종교가사로 바꾸어 교회음악으로 만든 경우도 많이 있다.
독일 chorale 찬송이 거의 다 그런 것들이다. 그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 시대에는 contrafactum 이라고 해서 이미
있는 노래에 새로운 가사를 써 넣어 부르는 습관이 유행했었기 때문이다. 옛날 우리 찬송가에 "내 모든 죄 나를 얽어
맺으나", "하늘 가는 밝은 길",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등은 모두 contrafactum 으로 되어진 찬송가이다.


이와같이 교회음악 토착화의 생존 여부는 그것을 수용할 기독교 문화와의 상관 관계에서 결정 지어 진다고 본다.
이와같은 맥락에서 예배가 토착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토착화된 음악은 오히려 어색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주변이 토착화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음악만이 토착화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음악의 토착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예배의 토착화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