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 우리가 여기서 예배에 대하여 논하는 것은 예배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일부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바르게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예배란 신과 같은 초월적 존재 앞에 경배하는 의식, 혹은 그런 의식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를 갖추어 절하다’는 뜻입니다. 첫째, 구약성경에 언급된 ‘샤하’라는 말은 ‘머리를 숙여 경배하는 것’, ‘자신을 엎드리다’, ‘절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24:26의 ‘머리를 숙여 여호와께 경배하는 종의 행위’나, 출애굽기 34:8에서 보는 ‘땅에 엎드리어 경배하는 모세의 행위’가 그것입니다. 둘째, ‘일하다’, ‘봉사하다’, ‘섬기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것을 나타냅니다. 셋째, 신약성경에서는 ‘섬김’(threskeia), ‘희생’(thysia) 등과 같은 전통적 제의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영어 ‘워십’(worship)도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뜻에서 파생된 말로 가치를 돌리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존경과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는 하나님이 그 가치에 합당한 분이심을 고백하며 선포하는 행위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배란 은혜의 계약에 기초를 두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창조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구원 받은 백성들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거룩한 행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사람 곧 하나님과 예배자의 교제(Communication) 혹은 만남(meeting)”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또 이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Worth)를 돌리는 것, 쉽게 말하면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시29:2)이라고 말합니다. 예배(禮拜)의 한자말의 뜻도 ‘자신을 굽혀 예(敬意)를 표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교회의 공동체가 모여 경배를 드리는 예식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아마 예배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을 받은 자녀로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고 경배드릴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말씀과 성례전(세례와 주의 만찬)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영광과 감사가 있고,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특별한 계시로 현존하시고, 그로 인하여 백성들은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하심과, 주신 복에 대하여 믿음으로 응답하고 봉사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갈 수는 없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성취로 말미암아 비로소 하나님의 성호를 부를 수 있으며 경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예배를 인간의 편의대로 드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 그 의식과 내용, 그리고 메시지가 성경을 바탕으로 해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셔서 시간과 공간 속에 임재하시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령과 함께 사역함으로써(요14:23, 26, 행10:38) 지상의 교회가 신령한 하늘의 공동체를 따르고(계5:9~12), 이 공동체가 함께 모여 말씀, 신앙고백, 세례, 성찬, 기도, 교제를 나눌 때 개인과 공동체의 행위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브룬너에 따르면, 예배는 종말론적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성취해 가시는 인간 구원의 마지막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성령에서, 지상의 교회로 지어진 예수님의 몸에서 이루어집니다. 세례를 통해 구별된 자들의 메시아적 종말 공동체는 예배를 위해 모인 것입니다. 교회 예배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완전한 과거 사건을 표현합니다. 동시에 미래적 사건을 생생하게 나타내 보여줍니다. 예배 본질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며, 이 사건은 말씀과 성례전에서 성령의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예배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약속과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성취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예수 안에서 공동체로 모임이 교회의 예배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한 조물주가 아니라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주신 사랑의 하나님이시요, 거룩하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이런 분한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최고의 공경과 섬김의 모습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2). 이것은 교회가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를 보여주신 말씀입니다. 예배자의 자세는 우선 믿음이 있어야 하고,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신앙고백을 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존재임을 깨닫고, 주님 앞에 찬양과 기도 말씀을 통해 감사드리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1:16)는 말씀처럼 온 정성을 모아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대속의 은총 앞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주일마다 해야 하는 율법적이고 형식적인 의식이나 모임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자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이 받아주시는 예배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가장 경건한 자세로,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진정과 진리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려야 하는 산제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의 확신을 갖고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에 임해야 합니다. 이것이 “찬미의 제사”(히13:15)입니다. 찬미의 제사는 용서받은 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만이 드리는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신6:5)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게 해야 합니다. 또 예배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왕권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존경과 경배를 드리는 거룩한 행위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삼가 두렵고 공경하는 마음의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모세가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신발을 벗도록 하셨습니다(출3:5). 기쁘게 감사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화해와 격려와 용서하는 마음으로, 온유와 겸손하고 순수함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흔히 예배는 부르심에의 응답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배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에 이 부름에 대한 응답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과 교제를 원하시며, 그들을 하나님과 함께 하심으로써 자녀들을 회복시키고자 원하십니다. 친구가 또는 가족 중 누가 예수 믿으라고 해서 마지못해 나왔다거나, 오늘도 내가 내 발로 걸어서 예배에 참석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내 생각에 따라 또는 친구 권유로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셔서’, 또는 ‘하나님이 그 친구를 통해 나를 인도하셨다’, 또는 ‘내 발로 교회에 왔지만 주님이 성령으로 인도해 주셨다’는 것이 신앙인의 올바른 고백입니다. 그래야 예배에 감사와 기쁨이 있고, 예배 후의 신앙생활이 즐겁고,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점은 예배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여 예배를 소홀히 하는 느낌이 듭니다. 한국교인들은 열심히 교회에 나가 설교도 잘 듣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신앙과 겸손’에서 예배에 대하여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배 참석 시간은 늦지는 않는지, 끝나기도 전에 나오는 일은 없는지, 검소하고 깨끗하고 단정한 복장은 하고 있는지. 용모는 단정한지, 성경책과 찬송가책은 다 가지고 왔는지, 하나님 말씀은 바르게 경청하고 있는지, 잡담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찬양은 경건하게 부르고 있는지,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지, 껌 씹는 일, 거울 보는 일, 조는 일 등은 없는지, 관객의 입장에서 설교나 듣고 오는 일은 없는지 등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설교 직전에 들어오거나, 아니면 설교가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나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설교나 들으러 오는 것은 진정한 예배자로서의 자세가 아닙니다. 요즈음 기독교는 교회 봉사를 하기 위해서, 헌금을 내기 위해서, 설교를 듣기 위해서,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 교회에 간다고 하는데, 이것은 예배에 임하는 자세로서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서서 감사와 찬송과 경배를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내 이야기를 하나님께 아뢰고, 용서를 빌고, 앞으로의 일을 다짐을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시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형식보다는 내적 아름다음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자의 자세는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학적 이해, 성령의 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사람은 삶이 달라지고, 예배의 행위가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바르게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적 삶도 감수할 수 있습니다. 겸손과 헌신, 봉사, 섬김 감사의 자세, 찬양의 자세를 갖게 됩니다. 하나님은 경외해야 할 분이시지 내 멋대로 대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할 지니라”(요4:24)고 했습니다. ‘진정과 신령’이란 바로 우리의 온 마음과 전성을 다해 진리로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영적 예배입니다. 얼마나 경건하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잘 볼 수가 있습니다(창4:3-5). 아벨의 제사는 받아 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은 것입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형 가인은 농부인 관계로 농산물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제사를 드렸고, 아우 아벨은 목동인 관계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는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거절하셨습니다. 아벨에게만 축복해 주시고, 가인에게서는 눈을 돌리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그들 사이에는 삶의 차이가 있었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은 평소 가인의 삶의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본문이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은, 가인이 어떤 면에서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7절). 가인은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아벨과 가인에게는 믿음에 차이가 있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고, 가인은 믿음으로 드리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을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벨이 가인보다 나은 것은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아벨이 바치는 제물은 그의 믿음을 표시하는 증거였고, 그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라는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아벨과 가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생활해야 하며,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를 다소나마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모세 이후에 와서는 레위기에서 보여주듯이 하나님께서는 이방 종교의 비윤리적 미신적 형태를 벗어나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는 새로운 제사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솔로몬 후기에는 그 내면을 중시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며 바르게 행함을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가서 6장 8절에서 보는 것처럼, “사람이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또 예수 때에도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바로의 노예에서 해방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날 도처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눅1:8∼10, 요11:55). 그리고 예수 부활 승천하신 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초기 기독교인들의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유월절 양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조심해야 것은 경건한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하니까 지나친 경건주의로 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건주의는 자기만이 거룩하고 자기만이 축복받는다고 생각하기 쉬운 것으로 오히려 경건성을 해치는 바리새인적인 예배가 되기 쉽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는 적극적인 참여에 그 의의가 있습니다. 목사는 연기를 하고 나는 방관의 자세로 구경하다가 오는 일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목사는 다만 그 예배를 인도할 뿐입니다. 또 인간은 각각 서로 다른 존재이지만, 한 하나님을 모시고 한 가족으로서 드리는 예배이기 때문에 다 같이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해야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배의식의 가족적 개념이요, 하나님 앞에서 벌이는 축제의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예배는 지도자 혼자만의 행위가 아니라 모든 회중이 참여하여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신구약의 모든 예배 사건의 중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예배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 앞에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 주시고, 일주일 동안 인도해주시며 보살펴주신 데 대한 감사와, 또 다가오는 미래에 대하여 부탁드리며, 겸손과, 헌신, 봉사, 섬김과, 감사로 찬양을 드릴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주일날 교회에서 드리는 공예배만이 예배가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 자체가 모두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공예배와 일상의 예배를 분리하는 이분법적 신앙을 보이고 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알아야 할 것은 예배는 삶과는 분리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예배라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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