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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자료

에세네파의 역사

작성자고재봉|작성시간26.06.06|조회수3 목록 댓글 0
에세네파의 역사     

에세네파 누구일까?
신약시대 예수님 공생애 기간과 가장 비슷한 시기를 기록한 역사서인 요세푸스의 ‘유대 고대사’에는 유대인의 3대 종파가 나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그리고 성경에는 언급되지 않은 에세네파가 요세푸스가 언급한 유대인 3대 학파입니다. 마카비 전쟁 이후 제사장들의 변질과 타락이 유대교 분열을 가져왔고 결국 3대 학파로 나뉘게 되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독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뇌물을 주고받으며 제사장 주요 직분을 거래하였고, 이러한 거래는 정치 세력과의 결탁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타락한 제사장 세력들과 기득권 세력들의 부패와 구별되어 살기 위해 모세 오경의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했던 바리새파가 생기게 되었고, 타락한 세상과 거리를 두어 광야로 나가 경건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금욕하며 성경을 연구했던 에세네파도 생기게 된 것입니다.

에세네파 뜻
광야의 동굴처럼 세상과 구별된 장소에 살며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성경을 깊게 탐구하던 이들을 히브리어로 경건한 자들이란 의미인 ‘하시딤’이라 불렀습니다. ‘하시딤’의 헬라어 표기가 ‘에세노이’이며, 이 단어에서 ‘에세네파’란 학파의 명칭이 유래되었습니다. 에세네파는 율법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고 구약시대 선지자들로부터 이어진 예언과 말씀을 연구하며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힘을 썼습니다. 에세네파는 이 세상의 종말을 믿었고 종말이 오기 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이 있을 것임을 믿었습니다. 에세네파는 선지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예언의 글들과 대대로 이어진 성경을 깊게 연구하며 많은 주석서와 해설서를 남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세례 요한과 에세네파
많은 성경 학자들은 에세네파의 교리와 세례 요한의 설교가 비슷한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상에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자로서 광야에서 경건하게 금욕하며 살았던 것도 에세네파와 비슷하며, 반드시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과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진정한 회개가 필요하다는 신념 역시 에세네파 교리와 비슷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절과 2절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요단강을 건너는 행위가 죽음에서 건짐을 받은 세례라고 언급된 것처럼, 세례 요한으로 인해 몸을 요단강에 담갔다가 나오게 되는 물의 세례를 받은 백성들은 이전 삶을 회개하고 단절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굴복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자 노력했습니다. 이 역시 에세네파의 교리와 상당 부분 일치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많은 성경 학자들은 세례 요한이 에세네파가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쿰란의 한 목동이 에세네파의 성경을 발견하다
사실 에세네파가 세상에 크게 주목받게 된 계기는 이스라엘 쿰란 지역의 한 목동이 동굴 속에서 우연하게 양피지 두루마리와 항아리들을 발견하게 된 이후입니다. 이 유적은 쿰란 공동체로 불렸던 에세네파의 유적이었고, 이 곳에서 사해 사본이라고 불리는 성경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발견 이전에 에세네파는 요세푸스와 몇몇 역사학자들이 기록한 역사서에서만 존재했던 학파였고 실제 유적이나 자료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에세네파가 사용했던 사해 사본의 발견과 공동체의 흔적은 세계 역사학자들과 성경학자들의 큰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적 발굴 이후 오랜 연구 결과, 쿰란 공동체는 사해 주변에 살며 공동체 생활을 했던 에세네파 중 하나였으며, 금욕주의 생활을 하였고 재산을 서로 공유했으며, 예배와 성경 공부 그리고 양육을 중요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쿰란 공동체는 성전 중심의 제사를 드리지 않았고 자신들의 제사장소에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제사와 예배를 드렸고 자손들과 제자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두었다고 합니다.

상당한 양의 사해 사본이 1946년 발견되었다. 에세네파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해사본은 히브리어 성서의 필사본을 포함하며, 기원전 300년부터 손닿지 않고 보존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 문서로 인해 에세네파는 유명해졌다.

에세네파는 제 2 신전 시기에 유대지역의 중요한 종파로, 바리사이파와 사두개파와 더불어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번영했다. 대부분의 학자는 에세네파가 사독 계열의 제사장으로부터 분리되었다고 주장한다. 에세네라는 단어의 의미에 대해 많은 이론이 있지만, <율법을 준수하는 자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에세네파는 신약성서에서 언급되지 않으나 기독교와 공통점을 공유한다.

1.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

요세푸스는 유대 역사가로 <유대전쟁사(기원후 75년)>, <유대고대사(기원후 94년)>, <요세푸스의 생애(기원후 97년)>를 저술했다. 요세푸스의 책에 따르면, 에세네파는 유대의 곳곳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필로는 에세네파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의 여러 지역에 무리를 지어 4천 명 이상 살았다고 전한다.)

요세푸스와 필로의 기록에 의하면, 에세네파는 공동 소유 생활을 했다. 대부분의 에세네파 집단은 독신주의를 지지했고, 3년간 예비 신자 기간이 끝난 후 결혼을 할 수 있었다. 3년의 예비신자가 끝난 후, 새로운 입교인은 하나님을 향한 경건, 인간을 향한 의로움, 순수한 생활의 유지, 죄악과 비도덕적 활동의 금지, 왜곡 없는 에세네파의 법 전파, 에세네파의 책을 보존한다는 맹세해야 했다. 그들은 지도자를 선발하고, 지도자의 명령에 복종했다. 감정을 자제하고, 평화의 통로로 봉사했으며, 강도에 대항할 때만 무기를 사용했다. 동물 희생을 금지하고, 맹서의 선언을 금지하고, 엄격하게 안식일을 준수하고, 아침마다 침례를 받고, 기도 후 함께 식사를 하고, 장로들의 책을 공부하고, 비밀을 지키고, 자신들의 신성한 책에 있는 천사의 이름을 깊이 마음에 두었다. 그들은 영혼불멸을 믿었다. 빗물을 저장하여 제의적 정화에 이용했으며, 회개가 세례의 선행 조건이었다. (제의적 정화는 당시 유대에서 일반적으로 실천되었다. 그 당시 회당 근처에서 제의를 위한 목욕탕이 많이 발견된다.)

2. 요셉 라이트푸드의 기록

요셉 라이트푸드에 따르면, 교부 에피파니우스(기원후 4세기)는 에세네파에 속한 나사렛 사람들과 오사니아 사람들을 기술한다.
나사렛 사람들은 모든 유대 계율을 지켰으나, 희생제를 드리지 않고 육식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육식이나 희생제를 불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선조들이 육식이나 희생제를 제정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사니아 사람들은 나사렛 사람들처럼 육식이나 희생제를 금지했다.
만약 쿰란 공동체가 에세네파와 동일하다면 그리고 쿰란 공동체가 사해문서의 저자라면, 사해문서에 따라 에세네파는 자신들을 유대인에게서 구분하였으며, 다른 유대인을 계약 파괴자라고 불렀다.

3. 예수와 에세네파의 연관성

학자들은 쿰란 문서에 나타나는 <의로운 선생>에 대해 특별하게 논쟁한다. 요나단(사독의 핏줄이 아닌 사제)은 거짓된 사람 또는 거짓 사제라고 불렸는데, 그가 한 대제사장에게서 사제직을 박탈했다. 에세네파는 그 대제사장을 <의로운 선생>이라고 부르는데, 그가 예수의 원형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둘은 모두 새 계약을 말하고, 유사한 복음을 설교하고, 구세주로 간주되었다. 둘은 모두 반대 당파에 의해 비난받고 사형 당했다. 예수가 에세네파의 일원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일단의 학자들은 예수가 최소한 에세네파에 의해 영향받았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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