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스모니안 통치하의(AD142-63) 유대인
'하스몬'이란 가문의 이름은 요세프스에 의하면 Mattathias의 증조부, ?σμωναιο? 에서 유래 된다.14) 그러나 실제적으로 그 인물에 대하여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마타디아스의 출생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이름의 출처는 아마도 지방과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Heshmon 혹은 Hashmonah와 연관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 이름의 뜻은 여러 가지로 해석하고 있는데 "fruitfulness," temperer of steel," "wealthy." 등으로 해석한다. Hasmonean이라는 이름은 마카비서에는 직접 나타나지 않고, 요세프스의 글에 "Hasmoneus의 아들들," "Hasmoneans," "Hasmonean family,"등으로 나타나고 있다.15) 한가지 더 주목이 되는 것은 Mishnah에 Judas Maccabeus와 그의 형제들을 "Hasmoneans"라했고,16) 후기 유대 문헌에 이와 비슷한 말이 한두 군데 나타나고 있다.
이 하스몬 왕조는 마카비 왕조의 직계로서 마카비 왕가의 마지막 통치자인 시몬의 다섯 아들 중 한 아들 요한 힐카누스 이후 70 여년 간(134-63 B.C.) 유대인들의 독립을 지켜온 왕조이다.17)
1. 요한 힐카누스(134-104 B.C.)
푸톨레미 (시몬의 사위)가 시몬의 후예를 멸절시키고 자기가 왕위에 오를 계책을 세웠으나 다행히 시몬의 한 아들 요한 힐카누스 (John Hyrcanus)는 도피하였다가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아버지가 담당했던 대제사장의 직임을 받았다.
힐카누스는 마카비 가문에 큰 후원을 한 하시딤에 대한 내력을 잘 몰랐기 때문에 하시딤을 푸대접하였다.18) 하시딤에 대한 힐카누스의 적대적인 태도는 국내적인 긴장을 초래하였다.
이때부터 유대교에는 세종파, 즉 하시딤에서 유래된 바리세파와 사두개파, 그리고 엣세네파가 시작된다.19)
그는 자기가 발행한 주화에 자기의 이름을 새겨넣은 최초의 유대군주가 되었다 요세프스는 는 힐카누스가 "31년간 최선의 방법으로 왕국을 통치하였다"고 했다.20) 그의 통치는 유다를 번영케 했으며, 탁월한 통치자로 꼽힌다. 그의 통치 기간 잠깐 동안 유대는 속국이 되었었으나, 주전 129년에 다시 독립을 쟁취했으며, 로마 원로원의 인준을 받았다. 그 후 힐카누스는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하여 남쪽에 있는 이두메를 점령하고 그 주민들로 하여금 할례를 행하게 했으며, 북쪽으로는 사마리아 지경을 점령하여 그리심 산에 있는 신전을21) 파괴해버렸다.22)
힐카누스의 이러한 행위는 그가 종교적 이상주의 자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정통파인 하시딤과 마카비 가문을 이어온 하스몬 왕가 사이에는 적대감정이 자라고 있었다. 그 이유는 전술한 바와 같이 전대의 하시딤의 공을 잘 모르는 바도 이유가 있었지만, 그 왕가가 제사장직을 물려 받았는데도, 점점 더 세속화되어 비 종교화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힐카누스는 처음에 바리새 파와 친분이 두터웠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그의 정책에 의견을 달리하기는 했어도 그의 사생활에는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독실한 하시딤(보수파)의 일원이라는 배경으로 인하여 가장 엄격한 서기관들의 감정을 상하지 않고 효과적으로 정치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힐카누스의 대 제사장직을 내놓으라는 소리가 높아가자 바리새 파와 관계를 끊고 사두개파와 손을 잡았다.
와스털리에 의하면, 바리세인들이 하스몬 왕국에 대항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다윗의 후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으로 자칭했으며, 힐카누스 마저도 이 왕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3)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자녀들은 왕궁에서 성장하여 자신들을 귀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히브리 사상보다는 헬라사상으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바리새 인들을 경멸하였다고 한다. 그는 주전 106년에 죽고 그의 아들 알리스토불루스가 그의 사전 104 B.C.에 대를 이었다.
2. 알리스토 불루스 (104-103)24)
힐카누스의 죽음으로 왕가에는 왕위 계승권으로 투쟁이 벌어졌다.
힐카누스의의 장자인 Aristobulus는25) 자기의 죽음을 예측했던지 그의 왕위 계승권을 그의 아내인 Salome26) 에게 위임하고, 자신은 대제사장권과 왕권을 인수하였다. 그는 왕좌에 앉아 그의 어머니를 투옥하고 굶어 죽게 하였고, 그의 형제 Antigonus 를 왕궁에서 살해하였고, 다른 형제 Alexander Jannaes를 투옥하였다. 그는 짧은 통치 기간에 힐카누스의 영토확장에 전념하여 국경을 북쪽으로 레바논 산 주변에 있는 지경까지 밀어 부쳤다. 그러나 그는 친헬라파로서 사두개파를 후원했으며, 헬라문화를 장려했다. 반면에 마카비 일가의 이상을 허무하게 한 왕이었다. 그리하여 바리새파의 적대감정을 더욱 악화되어 그의 후계자 알렉산더 얀네스 떼에 그 적대감정은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다.
그는 과음, 질병, 반란에 대한 공포증으로 겨우 통치 일년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동생 알렉산더 얀네스가 왕권을 장악하였다.
3. 알렉산더 얀네스(Alexander Jannaeus, 103-76)
알리스토불루스가 죽은 후 왕위 계승권을 받은 그의 아내 알렉산드라(Salome)는 감옥에 있던 그녀의 시동생 Jannaeus를 해금하고, 그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다. 얼마후 그녀는 Jannaeus와 결혼하고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바리새인들의 분노를 크게 촉발시켰다. 왜냐하면, 그러한 일은 대제사장으로서는 해서 안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종교적 직무를 등한시 하는 반면, 전쟁을 통한 국토확장에만 전념했었다. 그는 전쟁에서 항상 승리한 것은 아니였지만, 팔레스틴 해안을 따라 국경을 확장하여 애굽의 구경까지 이르고 요단강 건너편 지방까지 차지하였다. 유다국의 판도는 다윗과 솔로몬의 영광의 시대와 필적할 만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제사장직을 세속화하고 헬라의 생활방식에 심취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커가기 시작했다.
그는 어느 장막절에 제주(祭酒)를 제단에다 붓지 않고 자기 발에 부음으로써 제의를 의도적으로 모욕한 사건이 있었다. 이에 분노한 백성들은 제사에 쓸려고 가지고 왔던 불수감(佛手柑 Citron)27)이란 나무를 그에게 던지면서 욕을 했다. 이에 화가 난 얀네우스는 군대에게 질서를 회복하라고 명하여 무방비 상태에 있던 수백명의 백성들이 성전뜰에서 학살 당했다.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 드이어 내전이 발발하여 6년간이나 지속되었다.
바리새인들은 시리아 왕에게 원조를 요청하였다. 전쟁 때문에 이상한 동맹이 맫쳐진 셈이다.
하시딤 자손들은 마카비 자손들을 대적하기 위해서 안티오쿠스 에피하네스의 자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리아 군이 도착했을 때, 사두개파는 바리새인의 도움을 청하여 얀네스를 산으로 피신 시키는 한편, 바리세파는, 신중히 생각한 끝에, 수리아 군의 승리의 대가로 유다를 요구할 것을 두려워하여, 얀네스와 그의 사두개파 동조자들이 충분한 처벌을 받았다고 생각한 나머지 수천명의 바리새인들이 수리아 군대를 버리고 얀네스에게로 나았다. 그리하여 수리아 군은 이 재연합한 세력에 파하고 말았다.
이때에 얀네스는 바리새 파에 실제적으로는 패했다는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봉기의 주도적 역할을 한 바리새파 사람들을 색출하여 본보기로 약 6000명을 학살했다. 또 다른 이스라엘 민중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그는 자기의 추종자, 사두개파와 첩들을 위해 베푼 향연 도중에 주모자들 가운데 800명을 십자가에 달아 처형하여 반란을 진압시키려 했으며, 이때 십자가에 죽어가는 반란군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의 첩들과 그들의 소생들까지 학살한 잔인한 왕이 되었다. 백성들은 그의 통치에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후 그이 나머지 통치기간에 바리 세파와 정통파(하시딤)는 잠잠하였으나 내적으로 그 세력은 더욱 자라고 있었다. 이 때 이후 바리세파와 사두개파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균열이 생긴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얀네스는 그의 말년에 왕궁에 큰 위험이 닥치고 있는 것을 느끼고 그의 아네 알렉산드라를 시켜 사도개인 고문들을 해고시키고 바리세파에게 보다 큰 권세를 줌으로써 그들과 화해하여 국정을 시행하도록 지시했다고 전해진다.
얀네스는 49세에 사망하고, 그이 아네, Alexandra(살로매)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 때 그녀의 나이는 거의 70세 였다.
4. 알렉산드라(Salome Alexandra)(76-67 B.C.)
살로매 알렉산드라는 자기의 남편 얀네스의 유언을 따라 바리세파와 친하게 되었다. 반면에 사두개 고문들을 해고시키고 바리세파의 도움을 받아 통치하게 된 여왕이 되었다.
그녀는 여자였기 때문에 대제사장 직을 맡을 수 없으므로, 그녀의 장남인 힐카누스 2세에게 대제사장직을 맡겼고, 힐카누스의 동생 알리스토불루스는 군사령관직을 맡겼다.
알렉산드라의 남동생 시몬 벤 샤타흐(Simeon ben Shatah)가 바리세인의 지도자였던 까닭에 그녀는 사두개파와 바리세파의 화해를 원했던 것 같다.
그녀는 시몬의 통치 중에 누렸던 번영을 회복하였으며, 남동생인 Sion ben Shatach 와 애굽계 유대교학자인 Tabbai를 그녀의 정책 고문관으로 기용하였다.
알렉산드라는 벤 샤타흐의 충고에 의하여 이스라엘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a. 추방된 바리새 인들의 귀국을 환영하며 투옥중인 자들을 석방
하고 국내에 있는 바리세인들을 요직에 임명하였다.
b. 무관심하였던 유대교의 예식을 회복하였다.
c. 모든 유대인들은 성전 유지를 위해서 인두세(Polltax)를 부담
케하고, 이방인 개종자와 자유민들에게 조세부담이 부과되었다.
이것은 부유한 사두개인들로부터 정권 유지를 인수받아, 관리를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d. 모든 유대인 자녀들에게 히브리 성서의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유다의 수많은 촌락, 읍, 도시들이 히브리어를 일고
쓸 수 있는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알렉산드라의 통치기간동안 산헤드린 공의회의28) 위치가 향상되었다. 그녀는 9년간 많은 성공적인 치세를 수행하는 가운데 신하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 바리세인이 득세하자, 사두개 파는 소외를 당했고, 설상가상으로 바리세파는 알렉산더 얀네우스가 그들의 지도자를 대량 학살한데 대한 보복을 단행할 조짐이 보였다.
사두개파는 얀네우스와 살로매 알렉산드라의 둘째 아들, 알리스토불루스를 알렉산드라의 후계자로 지지하고 나섰다. 그는 군인이였기 때문에 세계적인 강대국을 꿈꾸는 사두개파에게 인기가 있었고, 장자이며 합법적인 상속자인 힐카누스는 바리세파의 지지를 받고 있고 있었다.
5. 힐카누스 2세(67 B.C.)
알레산드라가 죽자 그의 장남이자 대제사장직을 맡았던 힐카누스는 힐카누스 2세라는 칭호로 왕권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의 동생 알리스토불루스 2세가 즉각 사두개인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여리고 근처의 전투에서 전쟁에 열심도 없었고 전쟁을 치를 능력도 없었던 힐카누스 2세와 바리세인들은 패하고, 힐카누스는 사실은 자기가 결코 왕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었다고 선포한 후 모든 명예를 알리스토불루스에게 이양되여 알리스토불루스는 알리스토불루스 2세라는 칭호로 왕과 대제사장이 되었다.
힐카누스와 알리스토불루스는 영원한 우정을 맹서하고 알리스토불루스의 장남 알렉산더와 힐카누스의 외딸 알렉산드라를 결혼시켰다.29) 그러나 그 형제들 사이의 평화는 오래 가지 못했고, 힐카누스는 나바테아 아랍(Nabatean Arabs)의 왕 아레타스 2세(Aretas)에게 피신하였다.
6. 알리스토불루스 2세(67-63 B.C.)
이두매(두로)의 총독이였던 Antipater가30) 한편으로는 알리스토불루스 2세의 공격을 두려워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힐카누스의 처지를 이용하여 유다에서 자기의 정치적 꿈을 실현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여, 망명 중에 있는 힐카누스 2세에게 그의 협정을 파기하고 왕위 재쟁탈을 종용하였다. 이 때에 나바티안의 왕(Nabatean King) Aretas 2세의 도움을 받아 안티파터와 힐카누스 2세는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알리스토불루스 2세를 제압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그가 예루살렘에 갇히자 양측은 장기 포위전에 들어갔다. 이것이 주전 63년 유다가 로마에 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로마의 개입을 불러 일으킨 동기가 되었다.
7. 로마의 개입과 유다의 멸망
이 형제간의 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두 형제는 서로 로마에 호소하였다. 이것이 로마가 유다땅에 발을 드려놓고 정치적인 행사를 하게 한 동기가 되었다.
마치 동방에 로마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동방에 와있던 폼페이(Pompey)는 그 형제들 사이의 분쟁과 그들의 원조요청은 로마로 하여금 합법적인 개입의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폼페이는 그의 장군 스카우루스(Scaurus)를 남부로 파송하여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 양편에서는 장군에게 뇌물을 선사하였는데, 알리스토불루스가 더 많은 뇌물을 제공하여 스카우루스는 알리스토불루스 편을 지지했다. 그는 아라비아의 아레타스에게 유대의 철수를 명하였고, 그 결과 알리스토불루스 2세는 63년까지 5년간 그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자 주전 63년 폼페이는 양측을 로마로 소환하여 이 분쟁을 종식시키려 했다. 폼페이는 힐카누스 2세를 지지하고 나섰으나, 알리수토불루스는 이에 승복하지 않고 알렉산드리움(Alexandrium)으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계속 폼페이와 협상을 벌렸으나, 폼페이의 의지는 확고부동하였고, 드디어 이 요새로부터 추방되었다. 그는 예루살렘으로 도피하였으나 곧 폼페이에게 체포되었다.
그후 알리스토불루스는 많은 뇌물과 성읍을 바치겠다는 조건으로 폼페이와 협상을 벌렸으나, 폼페이는 그의 음모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을 점령할 결심을 했다.
폼페이는 바비누스(Babinus) 장군을 예루살렘으로 파송하였는데, 성문은 굳게 닫혀 석달동안 포위 공격에 들어갔다. 이 때에 전쟁은 예루살렘의 안과 밖에서 수행되었다. 힐카누스의 추종자들은 항복을 원했고, 알리스토불루스의 추종자들은 끝까지 항전하였다. 그러자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는데, 그 때에 12000명의 유대인들이 전사했다. 폼페이는 예루살렘을 불태우고 성전의 지성소까지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성전은 훼파하지 않았고, 막대한 금과 보화도 탈취하지 않았다.
힐카누스 2세는 다시 대제사장과 통수권자가 되었으며, 알리스토불루스의 반란의 지휘자들을 모두 사형에 처했다.
이때이후부터 유대 민족은 유대 지방에서만 살도록 제한되었고, 마카비시대에 점령되었던 모든 나라들은 유대로부터 독립되었다. 요한 힐카누스에 의하여 파괴되었던 사마리아 성도 재건이 되어 세바스테(Sebaste)란 지명을 받았다. 안티파터(헤롯 대왕의 아버지)는 유대의 총독이 되어 주전 43년 암살당할 때까지 유대를 통치하였다.
한편 알리스토불루스 2세와 그의 추종자들은 폼페이의 승리의 대열에 끼어 수치스럽게 로마로 이송되었다.
이로써 그래도 지난날엔 여러 차례 로마의 우호와 보호를 얻으려고 협상을 제창했던 유대인들이 1948년에 유엔의 합의로 독립될 때까지 독립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에 처해지고 말았다.
============= 주
14) Antiq. XVI.vii,1
15) Antiq. XX.viii.11;xx.10.
16) Middoth 1:6.
17) D.S. 러셀, 임태수 올김, 신구약 중간시대 (서울:컨콜디아사, 1982), p. 33.
18) 하시딤은 종교의 자유를 유지하고 헬레니즘을 격퇴시키기를 바라는 보수분자들을 대표한다.
19) 헬라주의 파의 이상은 사두개파에서 영속되었고, 하시딤의 이상은 바리세파에서 영속하였다. 힐카누스는 죽기전에 바리세파를 배척하고 스스로 사두개인이라고 자처하였다.
20) Jewish Antig. Viii, X, 7.
21) 이 성전은 4세기 경에 건립되었다.
22) D.S. 러셀, 상게서, p. 34.
23) D.S. 러셀, 상게서, P. 34.
24) 그의 히브리 명은 유다(Judah)이다. 그는 히브리 명보다 헬라명을 더 좋아했다.
25) 그의 헬라명이다. 본명은 Juadh이다.
26) 헬라명은 Alexandra.
27) 레몬 비슷한 나무
28) 유대인 최고의 재판소이다. 로마 통치아래 종교단체나 민족으로서의 유대국민에게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주었다. 이 공회를 유대인들은 "대심판소"라했으며, 희랍말로 "쉬네도리온"을 아람말로 "산헤드린"이라고 했다 (막 15:1). 이것은 바사 시대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창설 당초에는 원로원 (행 5:21)이라 부르던 것이 헤롯때부터 산헤드린이라 부른 듯 하다(성서사전 유형 편. p. 68).
29) 친 사촌 남매간에 결혼을 시킨 것이다.
30) 헤롯 대왕의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