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접시꽃

아버지의 노래(수정본)/김영복

작성자접시꽃|작성시간26.06.06|조회수27 목록 댓글 3

아버지의 노래(수정본)/김영복

나는 가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 노래를 듣는 날이 있다.
슬프지도, 외롭지도 않은데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오래된 기억처럼 이 노래가 떠오른다.
' 비내리는 고모령'
이 노래는 내게 그냥 노래가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이고, 끝내 돌아오지 못한 시간의 흔적이다.

내 나이 예순을 넘겼을 무렵이었다.
일본에 사시는 이모님이 서울에 오셨다.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버지 이야기가 나왔다. 이모님이 문득 말씀하셨다.
“영복아, 너의 아버지는 처가에 오시면 늘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어.”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무슨 노래였는데요?”
“'비 내리는 고모령'을 참 구슬프게 잘 불렀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를 한 사람의 청년으로 떠올렸다.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혼자 노래를 부르던 사람. 말하지 못한 마음을 노래에 담던 사람.
그가 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1951년, 스물한 살에 동갑인 어머니와 결혼하셨다.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러나 결혼한지 여섯달 뒤 입영 영장이 나왔으니까 새 신랑은 곧 군인이 되었다.

그리고 1952년 10월, 내가 태어났다. 그때 아버지는 전선 어딘가에 계셨다. 나는 아버지가 부재 중에 세상에 왔다.
1952년 10월 중하순.
아버지는 잠깐 휴가를 나오셨다. 나는 태어난 지 열이틀 된 아기였다. 그날 아버지는 나를 안아 보셨다고 한다. 작은 아이를 오랫 동안 바라보셨다고. 나는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 장면은 상상으로 남아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아버지는 전선으로 돌아가셨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1953년 8월.
강원도의 어느 고지에서 보초를 서던 아버지  초소에 수류탄이 떨어졌다.
스물세 살.
아버지는 그렇게 산화하셨다.
그 이후 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아버지의 시간은 거기서 끝났다. 남은 건 설명되지 않는 빈자리 하나였다.
나는 한 사람을 기억하며 살아온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빈자리를 오래 기억하며 살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람은 사라져도 완전히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언젠가 막내딸 차를 타고 국립현충원 앞을 지나게 되었다. 나는 말없이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때 딸이 조용히 '비 내리는 고모령'을 틀어 주었다. 나는 묻지 않았다. 그냥 듣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이어지는 것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국립현충원 현충탑 안에는 시신을 찾지 못한  많은 분들이 잠들어 있다. 이름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육신이 없이,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다.
벽을 가득 채운 위패들.
이건 기록이라기보다 오래된 침묵이다. 그 침묵 앞에 서면 늘 같은 생각이 든다.
이 나라가 지금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은, 많은 젊은 이들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쳤다는 것을. 그들의 피 값으로 산 나라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다.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아버지를 본다.
스물세 살의 얼굴로,
아직 끝나지 않은 노래를 내 마음속에 남긴 채.

나는 가끔 생각한다.
아버지도 지금 어딘가에서 이 노래를 부르고 계실지도 모른다고.
비가 내리는 고모령의 낮은 언덕 어딘가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젊은 목소리로.

그래서 나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한 사람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 본다.

아버지.
상병 김문선.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아이리스 | 작성시간 26.06.06 참 슬픕니다. 오늘이 마침 현충일인데 이런 자세한 사연을 들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흐릅니다.
    할머니 밑에서 사랑 받고 부족함 없이 사셨다는 것은 알지만 '비내리는 고모령' 그 노래가 얼마나 절절하시겠습니까?
    제가 겪은 일처럼 가슴에 다가옵니다. 그래도 반듯하게 아주 바른 삶을 잘 살으셨습니다..
    19일에 반갑게 만나기로 하고요. 편안한 날들 보내세요~ 감동적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접시꽃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7 댓글 감사합니다. 조심히 올라오세요.19일에 뵈어요~♡
  • 작성자유향순 | 작성시간 26.06.14 선생님의 지난 인생사를 글로 마주합니다.
    할머니와 함께한 어린 날의 아리고 슬픈 기억들도 고스란히 소환되는 글입니다.
    '비내리는 고모령'은 저희 아버지께서도 좋아하신 노래라 선생님의 아버지를 기억하는 감정에
    절대적으로 큰 공감을 하게 됩니다.
    현충원이 가까워 더욱 생각나실 것 같습니다.
    마음 따뜻한 날들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